187화 결전(決戰)
1894년 10월 17일 새벽녘.
청군은 다음 날로 예정된 퇴각을 준비 중이었다. 병사들은 죽지 않고 돌아간다는 사실 자체에 기뻐하는 듯 방비가 느슨하기 짝이 없었다. 척후조차 제대로 세워 놓지 않았다.
여전히 수적 우세에 있다고 믿었던 청군은, 평양의 조선군이 성 밖으로 나와 공세를 감행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완전한 오산이었다.
콰앙!
포성을 신호로, 평양의 서문인 칠성문이 활짝 열렸다.
"기병대, 돌격!"
"이랴아앗!"
선봉에는 근위기병대가 섰다. 상대적으로 기병 전력이 취약한 조선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기병대라고 평가받는 부대였다. 조선의 작은 조랑말이 아닌, 함경도로 들여와 혈통을 개량한 얀코프스키의 군마에 올라탔다.
러시아에서 기병 전술을 익힌 근위기병대장 김정우(金鼎禹) 부령을 필두로, 기병대 2000명이 청군 진영을 향해 쇄도했다.
"죽어라!"
칼을 빼든 기병대가 일제히 청군 전방에 돌진하여 들이받았다.
"바, 반격하라!"
갑작스러운 기습을 당한 청군은 우왕좌왕했다.
본래 기병대라 하면 유목민족으로 시작해 천하를 제패한 만주 팔기군의 장기라 하겠으나 이 시점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적은 소수에 불과하다!"
청군은 부랴부랴 방어에 나섰지만, 조선군의 공격은 기병이 전부가 아니었다.
"전군, 공격하라!"
"와아아아!"
현무문, 칠성문, 보통문, 대동문, 정양문, 경창문, 선요문, 다경문에서 조선군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각 보루를 지키던 병사들도 공세로 전환했다.
근위여단, 친위여단, 4연대, 11연대, 12연대가 모두 공격에 나선 것이다.
삼만이나 되는 병력이 갑자기 쏟아져 공세를 벌이니, 청군의 각 군영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청군 군영은 제대로 된 야전 축성을 하지 않았다. 참호도 파지 않았고, 지점마다 포대를 설치한 게 전부였다. 그나마도 퇴각을 준비하느라 해체되기 일쑤였다.
"정신 차려라! 포대는 대체 뭘 하고 있나? 사수, 빨리 기관총 장전해!"
그나마 빨리 대응에 나선 건, 후위를 맡을 예정이었던 좌보귀의 봉천군이었다.
"방포!"
쾅! 콰앙!
타다다다다다당!
청군에게도 크루프 야포와 개틀링 기관총이 있었다. 공수(攻守)가 역전되자, 이들 무기의 효과도 발휘되었다.
"으으윽!"
"사, 살려줘!"
"구, 군의관!"
"물러서지 마라! 계속 공격해!"
"부대, 착검 돌격!"
"포병대에 지원 사격 요청하라!"
청군의 반격에 조선군의 전열이 일시 흐트러졌으나, 물러서지 않고 공세를 지속했다.
조선군도 근대적 야전, 대규모 공세에 나서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휘관들은 이론은 잘 알았지만 실전 경험이 부족했고, 전투에 대비해 훈련을 받은 병사들도 실제 야전에 나서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다 보니 계획과 달리 시행착오가 계속 발생했고, 부대 간의 유기적인 연결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젠장, 뭘 하고 있는 거냐!"
"전령! 11연대는 뭐 하고 있나! 빨리 전령 보내!"
고지대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조선군 지휘부는 분통을 터뜨렸다. 공세에 나선 부대 간의 손발이 맞지 않는 게 분명해 보였다.
조선군에게 진실로 다행인 점은 청군의 방어 태세가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었다.
두꺼운 성벽과 참호로 방어막을 세운 조선군과 달리, 맨땅에서 방어하고 있는 청군을 돌파하는 건 훨씬 쉬운 일이었다. 청군에게 부대 간의 유기적인 움직임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었다.
"포대부터 먼저 제압해! 그게 우리 기병대의 책무다!"
근위기병대는 적진을 누비며 적의 포대를 향해 돌진했다. 선봉에 선 기병대의 희생이 적지 않았으나 전과도 혁혁했다.
스겅!
포대에 달려든 기병이 기관총 사수의 목을 베자 불을 뿜던 기관총이 멈추었다.
"으아아아!"
사수의 목이 떨어지며 피를 내뿜자, 옆에 있던 부사수는 싸우는 대신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도망을 쳤다.
"이놈들아, 도망치지 마라! 아군은 적보다 머릿수가 훨씬 많다! 제대로 싸우면 이길 수 있단 말이다!"
처음 공세에 나선 조선군의 손발이 맞지 않아 우왕좌왕한다면, 방어하는 청군은 지리멸렬이었다.
평양성 공세에 나섰다가 큰 피해를 보아 사기가 떨어진 데다, 퇴각을 앞두고 있던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기습까지 당했으니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는 병사들이 일쑤였다.
"봉천 총병 좌보귀가 너희들과 함께한다! 황은에 보답하자! 물러서지 마라!"
좌보귀는 군의 붕괴를 막기 위해 직접 말에 올라타 전방에서 싸웠다.
좌보귀의 분투에 봉천군 병사들을 정신을 차리고 전투에 나섰다.
"저자가 적장임에 틀림없다."
4연대 특무부대를 이끌고 있던 홍범도 정위가 좌보귀를 포착했다. 청군 장수들은 눈에 띌 정도로 화려한 갑옷을 입었고, 이는 저격의 좋은 표적이었다.
아직 저격수란 개념은 확립되지 않았다. 남북전쟁을 경험한 미국과 보불전쟁을 경험한 독일 정도가 저격병을 운용했다. 귀족 출신이 군부의 주류를 차지하는 유럽에서는 저격수는 비신사적인 공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선은 포수가 군대의 주력을 맡던 오랜 전통이 있었고, 병자호란 때 청군을 이끌던 황족을 사살한 사례도 있었다. 포수는 근래 들어서도 병인양요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특히 평안도와 함경도의 포수들이 큰 역할을 했다.
독일은 산악지대의 사냥꾼(Jäger)들로 저격병을 운용한 경험이 있었다. 독일 군사고문단은 조선군 포수의 실력을 보고, 포수 출신들로 저격병을 운용하도록 권했다.
평양의 4연대는 포수 출신 저격병으로 특무부대를 구성하여 적장을 잡도록 했다.
바로 그 부대를 이끄는 이가 홍범도였다. 홍범도는 저격용 모신나강을 들어 적장을 겨냥했다.
탕!
총알은 정확히 좌보귀의 이마에 적중했다.
털썩!
좌보귀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말에서 떨어져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초, 총병!"
"총병께서 전사했다!"
"도, 도망쳐라!"
몸소 전선에서 군을 지휘하던 좌보귀가 전사하자 봉천군의 대열이 급격히 무너졌다. 사령관을 대신해 군의 지휘권을 이양받은 장교들도 군을 지휘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여 뿔뿔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전투가 정점에 오를 무렵.
청군 서쪽 후방에 새로운 부대가 출연했다.
"진위 1여단! 대군주 폐하의 명을 받들어, 침략자를 무찌르자!"
"와아아아!"
"대조선국 만세!"
대동강을 건너 강서 방향으로 우회했던 1여단 병력 7000명이 일제히 전장을 향해 쇄도했다.
"죽기 전에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전투에 참여할 수 있다니, 실로 영광일세."
2사단장 한성근 부장은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 그의 출정을 참모들이 만류했지만, 한성근은 단호했다.
"2사단 산하 병력들이 모두 출전했는데 사단장인 내가 어찌 후방에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한성근은 군부 내 최고 원로였다.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분투했던 초관 한성근, 바로 그 사람이었다.
대원군파 무관을 대표해 군제개혁 이후에도 계속 군직에 남았던 한성근은 군무협판과 원수부 검사국장에 이르렀다.
한성근은 전쟁이 발발하자 새로 편제된 2사단장에 보임했다. 사단의 실무는 미국 육사에서 유학한 참모장 서재창(徐載昌) 정령이 맡았지만, 존경받는 원로 무인인 한성근은 후방에 앉아있을 생각이 없었다.
"승리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다면, 이 노장은 지금 당장 죽어도 상관없네."
"서, 서쪽 후방에 적군이 출현!"
"뭣이? 얼마나 되나?"
"5천에서 1만 정도로 보입니다!"
청군의 각 군영은 하나씩 무너지고 있었지만, 청군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회군은 잘 버티고 있었다.
문제는 회군 사령관 섭지초였다. 위여귀의 성자군이 제일 먼저 도망을 치고, 좌보귀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이미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좌보귀가 전사해 봉천군이 무너지고 있고, 위여귀와 성자군은 벌써 도망치고 있다. 그런데 배후에는 새로운 적군까지 등장했단 말인가? 제때 퇴각하지 못하면 회군까지 전멸을 면치 못할 거다."
여전히 청군의 수적 우위는 유지되고 있었음에도, 섭지초는 싸울 의지를 포기하고 퇴각 깃발을 올렸다.
"전군, 퇴각하라!"
"장군! 갑자기 퇴각 명령을 내리면 교전 중인 다른 군영은 어찌하란 말입니까?"
"각자 알아서 잘 퇴각하라고 하라! 내게는 회군을 온전히 보전하는 게 가장 급선무다."
섭지초는 지금껏 조정과 이홍장에게 거짓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압록강을 넘어 평양에 이르기까지 연전연승하여 적이 평양성에 틀어박혔다고 보고했던 것이다. 전쟁에서 불리해서 원군을 요청한 게 아니라, 평양에서 완승을 거두기 위해 지원군이 필요하다고 요청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패배하는 것도 모자라 이홍장의 기반인 회군 병력까지 잃는다면, 목이 두 개여도 부족할 거라는 계산이 선 것이다. 그렇다면 회군이라도 건져서 도망쳐야 했다.
"퇴각, 퇴각하라!"
"사령관이 이미 도망쳤다! 모두 퇴각하라!"
"장군들도 도망치는데 내가 여기서 왜 싸우고 있나?"
"그래, 죽어줄 의리는 없지. 어서 도망치세!"
지휘관이 도망치는데, 병사들이라고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회군, 성자군, 의자군, 봉천군, 단련군 할 것 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니 제대로 퇴각 될 리가 없었다. 전열은 붕괴하고, 무거운 무기는 내던지고, 마구잡이로 북쪽을 향해 도망쳤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평양 북쪽, 감북산 일대에서 새로운 적이 출현하였다.
"저, 전방에 적이다!"
"5여단 장병 제군! 기나긴 행군의 끝이 왔다. 마침내 평양에 도달했다!"
"와아아아!"
함경도를 출발해 평양을 향해 행군한 진위 5여단이 마침내 전장에 이른 것이었다.
이틀 전, 1사단으로부터 17일까지 평양에 도착하라고 채근을 받은 5여단장 권동수 정령은, 후속 부대의 낙오를 각오하고 강행군에 돌입했다.
중포(重砲)의 유기와 병사의 낙오가 발생했지만, 5여단 핵심병력은 시간에 맞춰 평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적이 보인다! 전군, 공격하라!"
"되놈들에게 그동안 고생했던 한을 풀자!"
5여단은 고된 행군에 지쳐 있었지만,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로 공세에 가담했다.
이들은 가장 늦게 전선에 도착했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많은 적을 제압할 수 있었다.
전의를 상실하고 무기조차 내버린 채 북쪽으로 퇴각하던 청군을 맞이한 게 5여단이었다. 청군 처지에서는 저승사자를 만나게 된 셈이었다.
"저놈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조선군 지휘부는 청군이 급격히 무너지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전황에 변화가 있는 듯합니다."
전령이 이른 다음에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진위 1여단이 적의 배후에서 출현, 서쪽에서 공세를 개시했습니다!"
"드디어 왔구나! 한 장군께서 제때 와줬군!"
"5여단도 감북산에 도착! 퇴각하는 적의 후방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1사단장 윤웅렬이 기뻐하며 외쳤다.
"좋아, 전군에 총공격을 명령한다! 청군이 도망치게 내버려 두지 마라!"
청군의 전의가 바닥에 떨어져 전열이 붕괴하자 이와 반대로 조선군의 사기는 크게 치솟았다.
"경기도 1여단이 원군으로 도착했다네!"
"아하, 그래서 저놈들이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는 거로군?"
"함경도 5여단도 북쪽에 왔다던데?"
"옳아, 그렇군! 오랑캐 놈들은 이제 독 안에 든 쥐다!"
"사령부 명령이다! 총공격, 총공격하라!"
"와아아아!"
조선군은 전열이 붕괴하여 도망치는 청군을 뒤쫓으며 마음껏 짓밟았다.
"降服, 降服!"
청군 병사들은 무기를 내던지고, 옷을 벗어 백기를 만드는 자들이 속출했다.
"뭐라는 거야?"
"항복한다니 죽이지 말라는 것 같은데요?"
"항복하는 놈들을 죽일 이유가 없지. 포로로 잡아라!"
조선군이 항복을 접수하자, 청군 병사들은 기뻐하며 외쳤다.
"谢谢! 谢谢!"
조금 전까지 서로 죽여야 했던 적이 살갑게 구니 조선 병사들은 어이가 없었다. 그만큼 청군에게는 싸울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평양 전투는 10월 17일 내내 지속하였다. 밤이 되어 비가 내리자, 전투는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청군의 전열은 붕괴했지만, 상당수는 살아남아 의주대로를 따라 퇴각했다.
조선군도 무리한 추격은 포기했다. 궁지에 몰린 청군이 거센 저항을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전투는 이번 한 번만이 아니었다.
"추격은 내일 지속한다. 어차피 의주 가도에는 6연대와 의용군이 있다. 적은 쉽게 도망도 못 칠 거다."
"전군, 기뻐하라! 우리 군의 위대한 승리다!"
"이로써 병자년의 치욕을 갚았다!"
"와아아아아!"
"대조선국 만세! 대군주 폐하 만세!"
예상을 뛰어넘는 승리에, 조선군 장병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전투 직후라 아직 정확한 수치는 집계 못 했지만, 청군의 피해는 다대(多大)했다.
벌판에 버려진 수많은 시신과 줄줄이 포로로 잡혀오는 청군의 숫자를 보건대, 피해가 크다는 건 육안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청군의 다섯 군영은 모두 붕괴했고, 그나마 회군만이 병력을 유지한 채 퇴각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조선군의 피해는 미미했다. 초반부의 격전을 제외하면, 청군은 제대로 싸울 전의조차 없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조선군의 완벽한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