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191화 (190/812)

191화 북벌(北伐)

이홍장의 밀사로 찾아온 이는, 전 외무협판 묄렌도르프였다.

이홍장이 조선의 외교 고문으로 추천하여 열성적으로 일했던 묄렌도르프는, 결국 청나라의 미움을 사 소환되었다. 소환된 이후에는 이홍장 휘하의 해관 세무사로 재직하면서 만주어와 동양학을 연구하며 사실상 야인으로 지냈다.

묄렌도르프는 조선으로 돌아갈 날만 고대했고, 이홍장도 조선과 묄렌도르프의 좋은 관계를 알고 있기에 협상 중재자로 파견한 것이었다.

더 반가운 일은, 묄렌도르프가 이선 납치 미수 사건 때 청나라에 억류되었던 김옥균을 대동하고 왔다는 점이었다.

"고균!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외다."

이선과 정부 각료들은 김옥균의 귀환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홍장이 잘 대접해 줘서 청국 유람 잘하고 왔습니다. 가만히 있으려니 좀이 쑤셔 미치는 줄 알았지만."

김옥균은 한동안 청나라의 '역적'으로 규정되어 북경과 천진에서 유폐되어 있었다. 전쟁 소식이 간간이 전해지면서 김옥균은 고국으로 돌아가서 승리에 기여하고 싶다는 일념뿐이었다.

"청국이 고균을 석방했다는 건……."

"일종의 성의 표시라고 봐야겠지요. 협상을 주선해 달라는."

"홍 공과 다른 억류자들은?"

웃고 있던 김옥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금석과 다른 이들은 유폐에서 풀려나지 않았습니다. 협상 여부를 보고 판단하겠다는 의도 같습니다."

석방되기 전, 유폐되어 있던 김옥균은 이홍장의 부름을 받았다.

"그대는 조선국의 외무대신이오. 또한, 개화당이라는 반청 자주 성향의 정파를 이끌며, 완화군의 오른팔이라고도 할 수 있지."

"그래서 우리를 여태 억류해 두고 있는 거 아닙니까?"

김옥균이 냉소적으로 답하니 이홍장은 허허 웃었다.

"전쟁 상황에 관해서는 좀 아는 바가 있소?"

"정보가 차단되어 있으니 어떻게 압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대략적인 상황은 알고 있었다. 유폐되어 있다지만 청의 관보는 전해졌다. 물론 관보는 청의 승리를 부풀리고 패배는 줄였지만, 행간을 읽고 전황을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리다. 대청은 육지와 바다에서 모두 밀리고 있소. 조선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잘 싸우더군."

이홍장의 순순한 인정에, 김옥균은 희색이 돌았다.

"애초에 조선과 전쟁을 벌이게 된 건, 처음부터 내 본의가 아니었소. 그대들도 알다시피, 나는 완화군과 관계가 좋았지. 애초에 임오년에 대원군과 완화군이 집정할 수 있었던 것도……."

이홍장의 말을 김옥균이 끊었다.

"그런 분이 왜 완화군을 납치하려 했단 말입니까? 그 폭거 때문에 전쟁까지 일이 커진 거 아닙니까?"

"제후국인 조선이 너무 뻣뻣하니까! 북경에선 완화군을 반청 세력의 우두머리로 지목하고, 조선을 정벌하길 원했소. 전쟁을 피하고 북경을 만족시키려면, 완화군을 중국으로 데려오는 수밖에 없었소. 절대 그를 해칠 의사는 없었고, 전쟁까지 일이 악화할 생각은 더 없었지."

"이게 문제란 말입니다. 아무리 조선이 개화의 노력을 해도 청국이 케케묵은 논리로 속국 취급하니, 결국 전쟁까지 오게 될 수밖에요."

이홍장은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애초에 논쟁하려고 부른 것도 아니었다.

"일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걸 후회하오.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이니 그대들과 대책을 논해 보고 싶소."

"말씀하시지요."

"김 공, 그대는 반청 친일 성향으로 중국에 알려져 있소. 그래서 북경에서는 그대를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지."

"나는 반청이나 친일이 아니라 오직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원할 뿐입니다. 청국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방해하니 반대하는 것이고, 일본이 손을 내밀었으니 손을 잡자는 것이지요. 적의 적은 아군인 법 아닙니까? 내겐 오직 조선의 이익만이 중요합니다."

김옥균이 솔직히 자신의 정치관을 밝히자 이홍장도 속내를 밝혔다.

"좋소. 그대의 진의를 믿고 싶소. 작금 일본은 중국 본토까지 노리고 있소. 피는 대청과 조선이 흘리고, 이득은 일본이 볼 상황이오. 동맹을 맺었다지만, 일본이 어부지리를 누리는 건 조선도 원치 않을 터인데."

김옥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홍장이 먼저 협상 의사를 밝혔다.

"그대를 석방하겠소. 목인덕(묄렌도르프)과 함께 조선으로 가서 완화군과 조선 조정을 설득해 주었으면 하오. 대청과 조선만의 단독 휴전을 제안하오."

"조선이 유리한 상황이라면 굳이 왜 휴전을 해야 합니까?"

"말했다시피, 일본 좋은 일을 시켜줄 필요는 없으니까. 조선이 휴전에 응한다면, 정전에 필요한 조건을 제시하겠소."

김옥균은 잠자코 들었다. 일단은 석방되는 게 우선이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전해드리지요."

"좋은 답을 기대하겠소."

"나 말고 다른 억류자들도 석방되는 것이겠지요?"

청나라에 억류된 이는 김옥균과 홍영식 외에도, 호위대원과 해군 장교 몇 사람이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가 없소. 다른 이들은 휴전되면 석방될 수 있을 것이오."

"어찌 동지들을 저버리고 나만 돌아가란 말입니까? 무슨 낯으로?"

김옥균의 반발에도, 이홍장은 고개를 저었다.

"김 공을 석방하는 것도 북경의 반대가 큰데, 다른 이들을 모조리 석방했다가 휴전이 되지 않는다면 내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할 거요. 휴전만 성사된다면 모두 풀려날 수 있을 거요. 그러니 노력해 주시오."

김옥균은 결국 단독 석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김옥균은 귀국 전, 홍영식을 만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김옥균으로부터 사정을 전해 들은 홍영식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중요한 건 내 목숨이 아니라, 조선의 국익이오. 나와 억류자들 처지는 신경 쓰지 말고, 오직 조선의 국익만을 고려해달라고 완화군 대감과 정부에 전해 주시오."

"그래도 되겠소? 금석의 처지가 곤란해질 터인데."

"고균과 내 처지가 바뀌었다고 해도, 똑같은 말을 했을 것 아니오?"

김옥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는 갑신년 이래 조선을 위해 목숨을 걸기로 했으니까."

"과연 그렇소. 그러니 고균은 개의치 말고, 조선으로 돌아가 국익을 위해 일해주길 바라오."

"조선은 금석의 충성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오. 조선이 승리하여 무사히 석방될 수 있는 그 날까지 건강하길 바라오."

김옥균과 홍영식은 비장한 표정으로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김옥균으로부터 상황을 전해 들은 이선은 한숨을 쉬었다. 반대로 이선에게 확실한 전황을 전해 들은 김옥균은 단호하게 말했다.

"전황이 그렇다면 휴전에 응할 이유가 없습니다."

"휴전 조건이 뭐랍디까?"

"묄렌도르프가 정식으로 이홍장의 제안을 전하겠지만, 크게 세 가지입니다. 조선의 자주독립 인정, 배상금 지급, 간도 지역 영토 재조정."

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시점에서 청국이 내밀 수 있는 최대한의 조건이겠군. 일단 정식 제안을 기다려 봅시다."

이윽고, 묄렌도르프는 이홍장의 제안을 전했다. 김옥균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중당은 양국의 관계가 악화한 걸 안타깝게 생각하고, 불행한 전쟁을 끝내기 위해 휴전을 제안하였습니다."

"일단 들어나 보지요. 실질적인 논의가 있어야 할 겁니다. 휴전에 따른 조건은?"

"첫째, 조선의 자주독립을 인정한다. 향후 조선은 중립국으로 남는다. 둘째, 청군의 평안도 진격에 따른 피해를 보상한다. 셋째,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 백성들에 대한 통치권을 조선에 이용한다."

"그 대가로 조선과 단독 휴전을?"

"그렇습니다. 조선은 청군 포로를 석방하고, 전쟁을 멈추는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니, 각의에서 논의하도록 하지요."

이선이 제안서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묄렌도르프가 낮은 어조로 말했다.

"북경과 천진의 불화가 심합니다. 조선이 휴전에 응하더라도, 천진이 제안한 조건은 북경에서 무시하려고 들 겁니다."

북경 조정과 이홍장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음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내게 전해 줘도 되겠습니까?"

"비록 타의로 조선을 떠나긴 했지만, 여전히 저는 조선의 친구입니다."

이선은 빙긋 웃었다.

"고맙습니다. 조선도 목 협판의 우의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선은 휴전에 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김옥균이나 묄렌도르프의 조언대로, 궁색한 처지를 벗어나기 위한 일시적인 양보일 가능성이 컸다.

더욱이 조일 공수 동맹의 비밀 문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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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일본은, 청국과의 단독 휴전에 응하지 아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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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아무리 못 믿을 대상이라고 해도, 동맹에 적시된 구절까지 어길 순 없지. 지금은 공세를 이어나가, 청국의 항복을 받아내는 게 우선이다.'

승세를 잡은 조선 정부와 군부도 휴전은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

"준비가 완료하는 대로, 압록강을 넘어 북진을 개시한다. 11월 중에 만주로 진격한다."

조선군 대부분이 평안북도로 모여들고 있었다. 평양 이북으로는 철도가 없고, 미처 도망가지 못한 청군 잔당을 무찌르며 북진을 했기에 시간이 소요되었다.

북진 계획은 계속 지연되었다. 나선정벌 이래 250년 만에 이뤄진 해외 원정과 동계 전투에 대비해 보급과 각종 준비를 철저히 하기 위함도 있지만, 전략적인 이유도 있었다.

황해 해전으로 제해권을 잡은 일본군은 요동 반도에 상륙을 개시했다.

10월 30일, 일본군 제 1군에 속한 1사단, 3사단, 5사단이 요동 반도 동쪽 화원구에 순차적으로 상륙했다. 제해권을 장악하여 상륙은 거의 저항에 부딪히지 않은 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전투를 고대해왔던 5만의 병력이 요동에 상륙하자 일본군의 진격에는 거침이 없었다.

우려하던 대로 일본군이 요동에 진입하니 청군은 완전히 비상이 걸렸다. 만주군을 지휘하는 송경은 압록강으로 보내려던 군대를 요동으로 보냈다. 상대적으로 압록강 대안의 방비는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이 최대한 청군을 많이 끌어내는 동안, 우리는 공세를 준비하고 있읍시다. 압록강이 결빙되는 시기가 언젭니까?"

"11월 하순이면 완전히 얼어붙을 겁니다."

"좋습니다. 도하의 어려움을 감내할 필요 없이, 압록강이 결빙된 이후에 공세를 개시합시다."

그동안 압록강은 만주와 조선을 가르는 국경이자 천연장벽 역할을 해 왔다.

병자호란을 비롯하여 북방에서 오는 외침이 대부분 겨울에 발생한 이유는, 압록강이 얼어붙기를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반대로, 남쪽에서 북진하는 상황이었다. 이 경우에도 굳이 강폭이 넓은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도하하는 어려운 작전을 쓸 필요가 없었다.

일본군이 요동에 가하는 공세가 강할수록 청군의 압록강 방비는 더욱 취약해질 터였다.

조선의 여론도, 그 어느 때보다 북벌을 원했다.

"압록강을 넘어 북진하자!"

"병자년 삼전도의 치욕을 씻자!"

"북벌을 완수하여 효종 대왕과 소현세자의 원수를 갚자!"

북벌에 대한 전통적인 구호에 이어, 민족주의적 구호도 튀어 나왔다.

"북진하여 간도의 우리 동포들을 구출하자!"

"만주는 실로 우리 민족의 고토다. 고토를 수복할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를 되찾자!"

평양 전투 승리 이후 북벌은 조선의 대명제가 되었다. 근대화가 이루어진 도시를 중심으로 민족주의가 발흥되는 건 물론이고, 농촌에까지 열기가 확산하였다.

갑신경장 이후 '오랑캐의 조정'이라고 근대화를 경멸해 마지않았던 향촌 유림들조차도 북벌이라는 대의에는 공감했다.

"비록 작금의 조정이 서양의 습속에 물들었다고는 하나, 우리 유자가 언제까지 산야에만 묻혀있을 것인가? 만주 오랑캐의 침입에 맞서, 마땅히 우리도 맞서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효종 대왕의 명을 받은 우암 선생(송시열)께서 추구하신 바와 같이, 복수설치(復讎雪恥)와 존주대의(尊周大義)는 우리 유자의 마땅한 도리다."

"숭정 갑신년(1644년) 이래, 중화는 만주 오랑캐에 의해 더럽혀졌다. 조선은 중화의 정통을 계승한 나라로, 만주 오랑캐를 무찌르고 중화를 회복시킬 의무가 있다."

"이 땅의 선비들이여, 우리 모두 함께 나아가 싸우자!"

근대화의 가장 극렬한 비판자였던 산림의 우두머리, 최익현과 유인석(柳麟錫)이 만청 타도와 북벌을 부르짖으며 의병에 합류할 것을 선언했다.

북벌과 복수설치, 존주대의와 중화회복은 그들이 신앙처럼 여기는 일이었으므로 더는 침묵만 할 수 없었다.

"의암(毅菴, 유인석) 선생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마땅히 따라야지."

각지에서 선비들이 자발적으로 의용군에 입대하기 시작했다. 지금껏 병역을 극력 기피하려고 했던 이들로선 놀라운 변화였다.

"유림의 의병이 실질적인 군사적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이들의 지지는 조정 입장에서도 환영이오!"

총리대신 김홍집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 자신도 유학자 출신이지만 유림으로부터 과도한 비난을 받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유림의 지지를 얻은 일이었다.

조정에 가장 비판적인 유림조차 북벌에 동조하며 함께 전쟁의 대열에 서니 전국민적인 단결로 표상할 수 있었다.

효종 사후 240년, 북벌의 시기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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