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194화 (193/812)

194화 문야(文野)의 전쟁

여순의 '패잔병 소탕'은 함락 이후로도 12월 초까지 며칠간 지속하였다.

"청국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더러운 야만인들, 살려 둘 가치가 없다!"

일본은 개전 초기부터 '문야(文野)의 전쟁', 즉 문명과 야만의 전쟁으로 규정했다. '더럽고 미개한 지나인(支那人)'에 대한 멸시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무참하게 죽은 전우들의 복수를 한다는 그럴싸한 명분까지 생기니 일본군의 폭주는 계속되었다.

"请您一定要救救我(제발 살려주십시오)!"

한번 피 맛을 본 일본군은 멈추지 않았다. 병사와 민간인은 구분되지 않았다. 심지어 노약자, 여성, 아이까지 학살당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제발 살려 달라고 자비를 구걸해도 소용없었다. 시체 수천 구가 여순 시내에 나뒹굴었다.

일본군 지휘부는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병사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피해자인 중국인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니라, 이 사건을 보도할 서양인 종군기자들의 눈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여순에는 여러 나라의 종군기자들이 있었고,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에서 파견한 관전무관(觀戰武官)들도 있었다. 이들의 눈을 모두 가릴 순 없었다.

그동안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라고 홍보해 왔던 일본은 서양인 종군기자들을 대거 대동하고 전쟁에 임했다. 그동안 일본군에게 찬사를 보내던 종군기자들이었지만, 학살은 도저히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미국의 '신문왕' 조지프 퓰리처가 경영하는 《뉴욕 월드(The New York World)》의 특파원, 제임스 크릴먼(James Creelman)은 일본군의 행태에 관해 가장 비판적이었다.

젊은 기자 크릴먼은 일본의 선전포고문에서 주장한 '정의와 문명의 전쟁'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여, 일본의 문명화를 찬미하고 일본군의 용감함과 국제법 준수에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여순 학살을 체험하고, 일본에 대한 그의 시각은 완전히 변했다.

"정말로 충격적입니다. 일본의 문명화는 외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본질은 야만입니다."

크릴먼은 변명으로만 일관하는 일본군 장교들에게 항의할 생각을 접었다. 대신 전 세계 여론에 호소할 생각이었다. 여순을 떠나기 전, 종군 과정에서 친분을 맺은 조선군 장교에게 의견을 물었다.

"동맹군으로서, 대위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질문을 받은 이회영은 한숨을 쉬었다.

"일본군의 행위는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그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동맹국 일본에 대한 신뢰, '문명과 야만'에 대한 믿음은 완전히 깨져버렸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회영이 할 수 있었던 건, 개인적으로 몇 명의 아이들을 보호해서 지옥으로부터 탈출시킨 것뿐이었다. 그는 군인이라는 신분에 무력감을 느꼈다.

일본군 지휘부는 사건의 은폐와 변명을 시도했고, 조선군 장교단에게도 침묵을 요구했다. 정의감 넘치는 청년 장교 이회영은 일본군의 행위에 분노가 치솟았지만, 장교 신분으로 동맹군과의 관계를 깨고 일본을 비판할 수는 없었다.

크릴먼도 이회영의 심정을 눈치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하는 말은 절대로 보도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개인적인 의견이 궁금할 뿐입니다. 나는 이제 일본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싸운다는 프로파간다도 못 믿겠습니다. 일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고 있을 뿐입니다."

이회영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조선의 자주독립은 오로지 조선이 쟁취할 뿐입니다."

"조선군도 청국에 대한 증오가 강합니까? 오랜 세월 청국의 지배를 받았고, 조선을 침략하기까지 했으니."

"설령 청국을 증오하더라도, 전쟁은 공명정대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조선군은 포로와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절대 저지르지 않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조선으로 돌아가면, 일본의 학살 행위를 본국에 알리겠습니까?"

"나는 파견 무관이고, 내가 보고 경험한 바를 상부에 보고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회영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기자는 청년 장교의 눈빛으로부터 정의감을 읽었다. 크릴먼은 이회영에게 악수를 청했다.

"전쟁을 수행하는 장교가 모두 귀관과 같다면, 결코 이런 참사는 없었겠지요. 전쟁이 결코 정의로울 수 없다는 건 이번에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만, 최소한 조선의 자주독립이라는 대의는 꼭 지켜지길 바랍니다."

"서양에는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이 있는 거로 압니다. 동양에서도 늘 이와 같은 정신을 존중해왔습니다. 비록 전쟁으로 인해 그 정신이 무너지고 있지만……. 선생께서 진실이 거짓보다 강하다는 걸,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걸 알려주십시오."

"꼭 그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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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대는 포트 아서(여순)에 들어가 냉혹하게도 거의 모든 시민을 학살했다. 무방비로 무기조차 갖지 않은 주민이 집마다 학살당했다. …… 여기서 일본인은 야만으로 되돌아갔다. 잔학행위를 정당화하는 사정이 있었다는 변명은 모두 거짓말이다. 문명사회는 그 상세한 이야기를 알고는 전율할 것이 틀림없다. 외국 종군기자들은 참상을 눈뜨고 볼 수가 없어, 모두 군과 작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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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월드》의 보도를 시작으로, 일본을 질타하는 비판이 쏟아졌다. 일본의 전쟁 명분은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서양의 눈치를 보고 있던 일본 정부는 급히 여론전에 들어갔다.

여순이 함락된 다음 날, 압록강 전선에서는 조선군이 봉황성에 입성했다. 고구려의 옛 오골성(烏骨城)으로 추정되는 봉황성은, 고지대에 있어 방어하기에 유리했다.

특히 봉황성 남쪽 책문(柵門)은 조선 관리들이 청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신고하던 국경 세관과 같은 곳으로, 조청 간 무역 중심지이기도 했다. 근래 이르러 책문 무역은 쇠퇴했지만, 조선인에게는 전통적으로 국경처럼 여기던 곳이었다.

조선군은 봉황성에서 격전을 예상했지만, 청군은 전투를 포기하고 퇴각했다.

"성내에 청군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 비어 있단 말인가?"

"예, 성내를 완전히 불태우고 퇴각했습니다."

"뭣이? 성을 불태웠다고?"

청군은 구련성을 빼앗기면서 대규모 물자를 조선군에게 노획시켰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가져갈 수 있는 물자는 모두 가져가고, 들고 갈 수 없는 건 성채로 모두 태워버렸다.

불타버린 봉황성에 입성한 조선군은 난처함을 느꼈다. 조선군은 일단 봉황성 일대에 주둔하면서 향후 전략을 논의했다.

"여순에서 온 보고입니다. 일본군이 여순을 함락시켰다고 합니다."

"오, 그래요? 벌써 여순을 함락시켰다고?"

"여순은 강력한 요새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공격하자마자 함락이라니."

"과연 일본군은 대단하군."

학살 소식은 아직 보고되지 않았으므로, 조선군 지휘부는 일본군에게 찬사를 보냈다. 일본군 파견 무관을 불러 승전을 축하하고 격려했다.

"여순이 함락됐으니, 일본군은 계획대로 요하 방향으로 진격해서 해성과 영구를 공격할 겁니다."

"요하가 뚫리면 요동 전역이 넘어가고, 북경까지 위태롭지. 청군은 더욱 당황할 터. 심양(봉천)의 방비는 허술해지겠군."

"본래 우리 군의 작전 목표는 심양이었으니, 북진을 이어나가지요."

"옳습니다. 심양을 점령하여, 열성조의 원수를 갚고 북벌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보급이 문제입니다. 청군이 봉황성을 불태운 것처럼, 청야 작전으로 나오면 곤란합니다. 군량과 탄약, 각종 물자를 조선에서부터 보급해야 하는데, 이래서야 보급선이 너무 길어집니다. 더군다나 청국의 도로 사정이……."

보급에 대한 현실적인 지적에 장교들의 표정이 모두 어두워졌다.

조선 국내에서 전투를 수행할 때는, 평양까지는 철도가 놓여져 있어 원활하게 보급을 할 수 있었다. 의주까지도 대로를 따라 수월한 보급을 했다.

하지만 전쟁이 청국 영토로 접어들자 보급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했다. 봉천 이남, 압록강 이북의 지역은 오랫동안 청국이 금령으로 지정하여 한족의 이주를 막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무인 지대였다.

1880년대 들어 금령이 해제되고 한족의 이주가 촉진되었다지만, 여전히 인구는 적고 도로 사정은 최악이었다.

그나마도 개전 이후 전방이 되면서 청국이 모두 징발해간 뒤였다.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마을에 남아난 건 없었다.

5만이나 되는 병력이 매일 소모하는 군량도 적지 않은데, 현지 조달은 거의 불가능하니 조선에서부터 싣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12월이 되면서 극심해진 추위도 문제였다. 동계 전투에 대비했다고는 하지만, 만주의 추위는 조선의 추위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일단 선발대를 보내 적황(敵況)을 확인합시다. 4여단과 5여단이 선봉을 맡아 주시오."

"예! 알겠습니다!"

"명을 받듭니다!"

평안도 출신인 4여단과 함경도 출신인 5여단은 동계 전투에 대한 대비가 상대적으로 잘되어 있었으므로, 조선군은 선봉을 이들에게 맡겼다.

조선군은 봉황성에서 봉천으로 향하는 두 갈래 통로에 부대를 파견했다. 4여단은 북서쪽 기동로를 따라 12월 7일 연산관(連山關)까지 진격했고, 이튿날 선봉대가 봉천으로 가는 중요한 지점인 마천령(摩天嶺)에 도달했다.

5여단은 북동쪽 기동로를 따라 대서구(大西構)에 도달했다.

4여단 4연대 특무대장 홍범도 참령은 부하들을 이끌고 마천령을 정찰했다.

"청군답지 않게 삼엄한 방비로군. 무엇보다 지형이 너무 좋지 않아."

홍범도는 망원경으로 마천령을 살피면서 혀를 끌끌 찼다. 청군도 더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험준한 마천령을 틀어막으며 삼엄한 방비를 했다.

"이놈들, 정말 작정하고 있군. 심양은 쉽게 안 내준다는 것인가."

분명 연산관-마천령 통로가 봉천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마천령을 우회해서 가기에는 험준한 산악이 가로막고 있으니, 대군의 진격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래서야 많은 희생이 각오 될 터였다.

아니면 서쪽으로 크게 우회해서 안산(鞍山)과 요양을 점령한 후, 남만주 평야를 지나 봉천으로 진격하는 방법이 있었다.

다만 이 방향은 일본군의 작전 영역과 겹쳐서, 송경이 이끄는 만주군 지휘부는 직접 요양에 주둔하며 전투에 대비했다.

특무대의 보고를 받은 4여단 지휘부는 일단 연산관에서 진격을 멈추고, 사령부의 명령을 기다렸다.

대서구로 향한 5여단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규모 청군 부대가 대서구에 주둔 중이라는 걸 확인하고, 진격을 멈췄다.

4여단과 5여단의 보고를 받은 조선군 사령부는 고심에 빠졌다.

봉황성에서 연산관까지 진격하는 동안, 조선군의 우려대로 청군은 청야 작전으로 나왔다.

마을이란 마을은 전부 불탔고, 식량과 각종 물자는 징발하고 싶어도 남은 게 없었다.

청군 지휘부도 깨달은 바가 있는 게 분명했다. 전면전에서 거듭 패배하고 있으니, 송경과 이크탕가는 자존심을 내 버리고 유격전으로 전환했다.

청군 기병대가 조선군의 측면과 후방을 습격했다. 조선군은 그때마다 적을 격퇴했지만, 치고 빠지는 청군의 전략에 점차 피로감을 느꼈다. 특히 보급선을 지키며 보급을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현 위치를 고수하며, 점령지를 관리한다."

사령부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는 조선 정부의 뜻이기도 했다.

그 무렵, 여순 학살에 관한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 정부도 깜짝 놀랐다.

'미친놈들 아냐? 학살에 대한 국제법적이나 인도적인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이나 전략적으로도 도움이 될 게 뭐 있나? 전쟁 명분은 더럽혀지고, 적에게 유리한 선전 효과를 주는 셈이 아닌가.'

이선은 여순에서 올라온 이회영의 보고와 서양 언론의 보도를 보며 분개했다.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필사적으로 변명하고 은폐를 시도했지만, 서양 언론의 비판은 멈추지 않았다.

일본의 변명은 '청군이 먼저 일본군 병사들의 시신을 능욕해, 전우의 참상에 분노해서 벌어진 우발적인 사건'이라는 것이었고,

'서양 열강은 중국이나 다른 비문명국을 침략할 때 이런 일이 없었나?'

라는 물귀신 작전이었다.

어찌 되었건 총리 이토와 외무대신 무쓰까지 나서서 사태 진화에 나선다는 건 그만큼 여론이 좋지 않게 돌아간다는 의미였다.

"약탈, 강간, 살인 등 민간인에 대한 일체의 범법 행위를 엄히 처벌한다. 군율을 어기는 자는 즉결처분 될 것이다."

조선은 부랴부랴 점령지 대책을 세우도록 했다. 전쟁 전 국제 적십자 위원회에 가입한 조선은, 제네바 협약의 준수와 포로에 대한 존중을 여러 차례 밝히고 이를 시행으로 옮겼다.

일본도 적십자에 가입되어 있었고, 그동안 제네바 협약을 준수해 왔다. 하지만 여순 학살로 깨져버린 것이다.

조선군은 점령지에 민정청을 설치하고, 지배하에 들어온 청국 백성들을 구제하고 보살피는데 애썼다. 전쟁과 청야 작전으로 고통받던 백성들은 조선과 청국 두 나라 모두에 증오심을 품고 있었으나, 조선은 적극적인 선무공작에 나섰다.

"조선국은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존중하고 우대한다.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

이는 선전 목표도 있었지만,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이유도 있었다.

"이 지역은 옛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이자 전쟁 이후 조선국 영토로 할양받을 곳이다. 즉, 앞으로 우리의 자산이 된다는 의미다. 우리의 자산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는 일절 금지하라."

조선 정부는 압록강 이북 지역, 최소한 압록강에서 봉황성에 이르는 지역은 종전 후 조선에 합병하기로 내심 방침을 정해놓은 상황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손실을 입힐 수는 없었다.

1894년 12월, 조선군은 진격을 일시 정지했다. 그리고 후방을 안정화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북진은 1895년, 새해에 재개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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