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국민의 형성
그동안 개화 정책을 추진하고 밀어붙이는 정부와 국민은 이를 두고 현저한 인식 차이를 보였다.
하지만 전쟁이 그 간극을 분명히 줄여 주고 있었다. 전쟁은 정부가 명령했지만, 국민이 수행했다. 국민개병제로 탄생한 신식 군대가 침략자를 무찔렀다는 건 상징적이었다.
수동적이었던 '백성' 혹은 '신민(臣民)'은, 점차 능동적인 '국민' 혹은 '시민'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전선은 전방에만 형성되지 않았다. 후방에도 심리적인 전선이 형성되고 있었다.
조선은 1889년 개국 이래 처음으로 근대적 공채를 발행했고, 대조선 건국국채(建國國債)로 명명되었다.
하지만 아직 자본주의 발전이 미약한 조선에서 공채의 개념은 익숙하지 않았고, 건국국채의 판매량은 지지부진했다.
정부의 종용을 받은 관영 회사들이 국채 매입에 나섰으나 이들은 대원군 집권기의 원납전(願納錢)처럼 돌려받지 못할 악성 채무 정도로 인식했다.
"나라에 바치는 추가 세금이라고 생각합시다."
"뭐, 우리가 돈을 벌어들이는 것도 나라가 식산흥업 정책을 추진하는 덕이니까. 보답은 해야겠지."
1894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비로소 국채에 대한 인식이 전환됐다. 일본은 막대한 비용의 전쟁공채를 찍어냈고 조선도 뒤이어 전쟁공채를 발행했다.
"조선 동포들이여, 압제자 청국에 맞선 독립전쟁에 전 국민이 함께하자!"
"반드시 전선의 병사들만 전쟁하는 게 아닙니다. 전쟁은 경제전이기도 합니다. 경제전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함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구매하는 전쟁공채가 총탄과 대포가 되어 전선의 병사들과 함께합니다. 여러분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함께 싸우는 후방의 전사들입니다!"
"여러분이 구매한 전쟁공채는 승전으로 보답받을 것입니다!"
"대조선국 만세! 조선 독립 만세!"
개화 정책의 이득을 보고, 한창 민족주의가 발흥하고 있는 한성과 도시에서는 전쟁공채의 판매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공채뿐만 아니라 과중한 전시특별세가 부과되었지만,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는 분명 승전의 효과였다. 도시에는 각종 신문을 통해 전쟁 소식이 쏟아졌고, 특히 평양전투의 승리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관보 외에도 《한성일보》, 《한성신문》, 《독립신문》, 《대조선매일신문》, 《시사주보》 등 발흥기에 접어든 민영 언론들은 경쟁적으로 전쟁을 보도했다. 한성과 달리 지방지는 미미했지만, 전선이 형성된 평안도 일대에서는 지방지인 《서북신문》이 특파원 역할을 했다.
"호외(號外)! 호외요! 평양 전투 승리! 대조선국 승리! 청군 궤멸!"
"호외! 호외판 특별 발행! 압록강 도하 성공! 청군 궤주!"
신문은 최초로 순한글 전용을 표방한 《독립신문》을 제외하면, 모두 국한문 혼용체로 발행되었다. 국민교육이 한창 진행되어 청소년세대의 문맹률은 급감했다고 하지만, 중장년세대는 여전히 문맹률이 높았다.
이들을 위해 신문을 낭독해 주는 변사가 등장했고, 신문도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그림을 삽입했다.
당시의 사진 기술로는 움직이는 전투를 찍기가 어려웠고, 종군기자가 기사를 보내오면 화가들이 전쟁화를 그리는 식이었다.
조선의 전통화와 서양식 묘사를 합친 듯한 전쟁화가 쏟아졌다.
"금년 시월 열닷새, 우리 자랑스러운 조선군이 침략자 청국 오랑캐를 무찌르고……."
"자, 이 그림을 보시오! 우리 조선군의 용맹스러운 모습을!"
"오오!"
변사가 그림을 보여주며 신문을 낭독하고, 이를 설명하는 식이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신문은 경쟁 체제가 생기면서, 점차 자극적으로 변해갔다.
자연스럽게 아군의 승리는 과장되게 묘사되었고, 적군의 패배는 더욱 추태로 그려졌다.
조선군과 동맹군인 일본군은 근대 문명을 이끄는 군대로, 청군은 시대에 뒤떨어진 야만적인 군대 묘사되었다.
"北伐!"
어떤 신문은 신문 전면에 큼지막하게 북벌이라고 박아 놓고, 내용 없이 그림만 실어 넣었다.
서양식 제복을 입고 체격도 크게 묘사된, 용맹한 조선군이 총탄과 대포가 쏟아지는 압록강을 넘어 돌진하는 것과 대조되게 변발과 호복의 후줄근한 차림의 청군은 도망가거나 죽을 뿐이었다.
이 자극적인 호외판은 발행 즉시 판매가 완료되어, 인쇄소는 새로 찍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신문 낭독회는 도시 사람의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들도 낭독회를 이끄는 변사의 말솜씨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점차 낭독회의 규모는 커지고,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한창 인기를 끌기 시작한 판소리꾼은 전쟁을 노래했고, 승전을 묘사하는 연극도 만들어졌다.
특히 서양 공사관이 밀집되어 있는 정동 일대는 새로운 예술의 중심지였다.
1892년 조선 건국 500주년을 기념하여 정동에 조선 최초의 극장이라 할 수 있는 2000석 규모의 희대(戱臺)가 들어섰다. 임금과 대원군이 좋아한다고 알려진 판소리와 광대와 기녀들의 가무가 주로 상연되었다.
본래 유교 국가 조선에는 이런 활동을 천시하는 분위기가 있었으나 전쟁이 상황을 바꿨다.
압록강 도하 이후 국립극장인 희대에는 전쟁극이 상연되었다. 일종의 종합예술이었다. 소리꾼이 전쟁을 노래하면 분장한 배우들이 무언으로 극을 이끌었다. 그러면 변사가 감동적인 어조로 전쟁을 묘사했다.
<평양 전투>는 공전의 인기를 끌었다. 주인공으로 상정된 이는 단연 완화군 이선이었다. 그전까지 왕족을 주인공으로 묘사하는 건 금기와도 가까웠지만, 그만큼 이선에 대한 인기가 높았던 것이다. 전시하에서 언론을 엄격히 검열하는 정부도 연극 상연을 허용했다.
어느 그림에 묘사된 것처럼 한 손에는 태극기, 한 손에는 칼을 치켜든 완화군이 청군을 무찌르자 객석에는 탄성과 환호가 쏟아져 나왔다.
'무슨 마약을 하면 이런 걸 만들지? 제정신으로 만들 수 있는 내용이냐? 손발 오그라들겠다…….'
정작 당사자인 이선의 기준에서 보면 조악하기 짝이 없는 전쟁 프로파간다였으나, 바로 내셔널리즘 혹은 민족주의라는 새로운 마약이 만들어낸 효과였다. 민족주의에 자극된 사람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특히 새로운 예술에 열광하는 건 젊은 학생들이었다. 한성의 각급 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에게 연극은 엄청난 인기였다.
각종 고등교육 기관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군대를 면제받았다. 새로운 애국심과 민족주의에 눈을 뜬 학생들은 이에 부채의식과 책임감을 느꼈다.
학생들이 단기 장교나 의용병으로 지원하여 학내의 정원이 급감하자, 교육정책을 관리하는 학무부에서는 고등교육을 받는 학생의 전선 지원을 못 하게 해 달라고 군무부에 청원할 정도였다.
군무부에서도 학무부의 청원을 받아들였다. 그만큼 학생들은 엘리트로서 높은 기대를 받고 있었다.
변사와 소리꾼, 완화군을 연기한 배우의 인기는 놀라울 정도였다. 극이 끝나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모여들었다. 특히 학생들의 환호가 열렬했다.
"이렇게 좋은 소식과 극을 보여주어서 감사합니다!"
"지난번에 보고 다시 동무들과 함께 왔습니다. 얼마나 감격에 벅찼는지 많이 울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승리였습니다!"
"극도 너무 좋았습니다. 우리는 민족주의에 대해 너무 몰랐습니다. 정말 위대합니다, 선생!"
각본가이자 변사가 단상에 올라가 환호에 응답했다.
"고맙소, 고맙소, 여러분! 학생들은 조국의 미래요! 주변의 동무들을 많이 데리고 오시오! 입장료 없으면 와서 말을 하시오. 누구든 도와주겠소!"
"와아아아아!"
"대조선 만세! 대군주 폐하 만세!"
전쟁은 여론을 도취시켰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들어 신문을 보면서 떠들었다.
"누가 조선인더러 문약하다고 그랬나? 이렇게 용맹한 병사들인데!"
"암, 그렇지."
"청국 오랑캐 놈들에게 그동안 수모를 당한 게 억울하이."
"몇 배로 갚아주면 되지! 고구려와 발해의 옛 영토를 되찾자고."
개화 정책에 가장 부정적이었던 향촌 사대부들조차 승전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조선군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만주에 진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향촌 사대부들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면서도 승리를 기뻐했다.
"아아, 마침내 만청 오랑캐를 무찌르고 묵은 치욕을 씻었도다! 열성조께서 기뻐하시리라."
"삼전도의 치욕을 씻고, 인묘(仁廟)와 효묘(孝廟)의 원수를 갚을 때가 온 것이오."
"효종 대왕과 우암 선생 이래 존주대의와 복수설치는 우리 유림의 숙원이었소. 비록 작금의 조정이 서양 오랑캐의 습속에 물들었다고는 하나 오랜 염원인 북벌을 성취했으니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소."
"하기야, 만청 오랑캐보다야 서양 오랑캐가 낫다는 걸 보여줬으니."
"숭정 갑신년(1644) 이래 오랫동안 중화는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이제는 마땅히 조선이 중화의 정통을 회복하고 계승했다 할 수 있지 않겠소?"
사대부들은 정부가 추구했던 자주독립과 민족주의의 발흥, 국민의 형성과는 다른 방향에서 승리를 축하했다. 이들에게는 북벌은 곧 존주대의(尊周大義)를 실천하는 장이었다.
"지금은 조금 이르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북벌을 완수하면, 모든 유림의 이름으로 칭제건원을 청해야 하오."
"칭제건원이라! 그렇다면 이제 조선이야말로 진정한 중화이군."
"다른 건 몰라도, 칭제건원 여론만은 우리가 주도해야 하오."
"조선은 본래 사대부의 나라. 비록 시대가 바뀌었다고는 하나, 외면만 해서는 안 되지요. 이제 우리 유림들도 조정 시책을 거부만 할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공론에 뛰어들도록 합시다."
"다들 땅을 팔아서라도 전쟁공채라는 걸 사들이도록 해요. 우리가 가진 공채가 많을수록 조정도 우리 눈치 안 볼 수가 없지."
"요새는 언론이라는 걸 통해서 공론을 알립디다. 우리 유림들도 언론을 만들고, 중추원에 다시 들어갑시다."
"언론만으로는 부족하오. 서양식으로 정당을 만들자고 하는데 본래 붕당도 따지고 보면 정당이 아니오? 하루라도 빨리 유림의 정당을 만듭시다. 그리고 중추원으로 진출해야지."
"좋소. 그렇게 합시다."
전쟁의 도취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아이들도 군인들을 보면 환호성을 내지르며 뒤쫓았고, 군인들이 부르는 군가를 따라 불렀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백만이냐! 조선 남아 가는 곳에 승리뿐이다!"
"역시 군인이 제일 멋있어. 저 멋진 옷이랑 칼 찬 것 좀 봐."
"멋있기만 해? 군인들은 영웅이야!"
"나도 빨리 커서 군인이 돼야지!"
조선 역사를 통틀어 군인이라는 직업이 이렇게 인기를 끌어본 적이 없었다. 국민교육의 혜택을 받은 첫 세대, 1870년대와 1880년대 생들은 승전의 결과를 보면서 군인과 입신양명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물론 전국이 모두 승리에 도취한 건 아니었다.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 특히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삼남의 농민들은 평안도와 국경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심리적 거리는 멀었다.
전쟁이 하필 가을 수확 철에 발발함에 따라, 개국 503년(1894)도 식량은 대부분 군용으로 공출되었다. 세액으로 정해진 양의 몇 배에 해당하여 농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물론 정부도 대가 없이 지급한 건 아니었다.
"여러분이 내는 세금과 미곡은 정부에서 그냥 거저 가져가는 게 아니라, 전쟁공채에 해당합니다. 승전 이후 몇 배의 가치로 보상받게 될 것입니다."
"뭐여, 이런 종이 쪼가리가 무슨 가치가 있다는 거시여?"
"아따, 전쟁공채라고 안 하요."
"전쟁공채가 머시당가?"
"경장인가 머신가 한 이후로 조정이 순해지긴 했는디, 세금 뜯어가는 거 보면 전과 영판 다른 것도 읎단 말이시."
"결국, 싸움터에 나가서 죽는 것도 다 우리 아그들 아니여?"
농민들이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는데, 전쟁공채를 설명하러 온 향회 의원이 듣고 끼어들었다.
"어허, 모르는 소리 마시오. 우리 모두 대조선의 신민이오. 대조선이 승리하면 모든 신민의 영광인데, 이런 사소한 불평이나 늘어놓으면 되겠소? 전선에서 싸우는 우리 병사들이 들으면 얼마나 슬퍼하겠소."
농민들은 향회 의원의 말에 순종했다. 논리를 받아들여서가 아니라, '높으신 분'에게 맞서서 좋을 것이 없다는 오랜 관습 때문이었다. 하지만 심적으로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었다.
"이는 우리 조선 국민의 전쟁입니다. 동포 여러분, 농민 여러분, 우리 모두 함께합시다."
전국을 돌면서 국민개병과 자주독립의 가치를 선전하고 있는 중추원 의관 전봉준은, 농민들의 고초를 귀담아듣는 역할도 겸했다.
"정부는 무조건 희생만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이제 자주와 자유의 시대가 열렸으니 여러분이 하고 싶은 말은 모두 다 해도 좋소."
전봉준은 본래 일개 병사로라도 전선으로 나가고 싶다고 자원하여 군사교육을 받았으나, 참전은 거절당했다. 전봉준은 군무대신인 이선을 찾아가 직접 청원을 했으나 결과는 같았다.
"전 공은 농민의 대변인이오. 전장보다 의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을 것입니다."
"바로 그 농민들이 군복을 입고 전선에 나아가 싸우는데, 소위 농민의 대변인을 자처하는 자가 어찌 후방에만 있겠습니까? 군 대감께서도 왕실을 대표해 전선으로 가지 않으십니까. 저도 농민과 함께 싸우러 가고 싶습니다."
이선은 전봉준의 진심을 알았다. 전선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전봉준의 눈과 가슴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전쟁이 꼭 전선에서만 치러지는 건 아니지요. 이 전쟁은 우리 조선 전 국민의 전쟁입니다. 후방에서 벌어지는 징병과 생산도 전쟁의 일환이지요. 전 공이 정부를 대신해서 농민의 목소리를 들어 주었으면 하외다. 나는 전 공에게 후방을 맡기고 전선으로 떠나고자 합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자신을 대신해 후방을 시찰해 달라는 이선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전봉준은 이선의 목표가 단순한 승전이 아니라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걸 이해한 사람이었다.
농민이 다수인 조선에서 국민국가의 중요한 축은 농민이었다. 농민을 '국민'으로 형성하기 위해 전봉준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아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