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침몰하는 배
1895년 1월. 양력과 음력으로도 모두 해가 바뀌었지만, 동아시아 삼국의 전쟁은 지속하였다.
그사이 청나라에서는 혁직유임(革職留任), 즉 관직은 삭탈하지만, 임무는 계속하는 처분을 받았던 이홍장을 대신할 인사가 정해졌다.
태평천국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양무운동을 이끈 양강총독(兩江總督) 유곤일(劉坤一)이 흠차대신으로 임명되어 산해관 동쪽의 전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유곤일은 이홍장과 비슷한 행보를 걸었던 양무파 관료이지만, 호남성 출신으로 상군계인 유곤일은 회군계인 이홍장과는 정치적으로 대립 관계였다.
유곤일의 임명은 회군과 더불어 청군에서 그나마 믿을만한 군대인 상군을 투입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신 양강총독 유곤일, 삼가 황명을 받드나이다."
신임 흠차대신 유곤일은 어려운 상황에서 책무를 떠맡게 되었다. 유곤일의 나이 66세, 30년 전 태평천국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지만 근대전에 관해 잘 알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직례성에 20만, 만주에 8만 병력이 잔존한다지만, 대부분 머릿수만 채우는 정도였고 실질적인 전쟁수행 능력은 한없이 떨어졌다.
이홍장을 대신해 상군계인 유곤일이 임명되었다고 해도, 청 조정의 손발이 안 맞기는 매한가지였다.
전쟁인지 강화인지, 단기 결전인지 장기전인지 모두 다른 소리를 냈다.
"이대로 계속 전쟁을 지속하면 북경이 위태롭습니다. 조속히 강화를 추진해야 합니다."
"그 무슨 말입니까? 절대 안 됩니다, 폐하. 서안으로 천도하는 한이 있더라도 결사 항전해야 합니다. 장기전으로 가면 적은 출혈을 강요받아, 결국 두 손 두고 말 겁니다."
"우리 국토에서 장기전으로 가면 그 손실은 고스란히 대청이 받는다는 걸 어찌 모르시오!"
"그럼 겨우 섬나라 왜국과 속국이었던 조선 따위에게 협상을 구걸하자는 말이오? 대체 대청의 처지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건 황상을 잘못 보좌한 우리 모두의 책임이지만, 지금은 책임 소재만 따질 때가 아닙니다. 속히 강화를 추진하여 희생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이대로 협상에 나서면 완패일 뿐입니다. 강화할 땐 하더라도, 최소한 적에게 타격은 한 번 입혀야 합니다. 유 총독이 대군을 모아 반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적과 일전을 겨룬 뒤에……."
"그러다가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 더 불리한 조건으로 협상에 임할 수밖에 없단 말이외다!"
"적을 우리 영토로 깊숙이 끌어들이는데, 최소한 한 번은 이기지 않겠소!"
유곤일이 강소성, 안휘성을 담당하는 양강총독을 오랫동안 맡았다지만, 강남 지역은 전쟁에 부정적이었다. 만주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남의 나라 일 취급하고 있었다.
북양함대의 위기에도, 남양함대는 전쟁 투입을 거부했다.
"10년 전 법국과 전쟁을 할 때, 남양함대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동안 북양함대도 구경만 하지 않았소? 그때 북양함대는 준비가 안 되었다고 했지. 남양함대도 준비가 안 되긴 매한가지요."
이미 반(半)군벌화된 지방군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으면 전쟁에 소모되길 꺼렸다.
그야말로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총리아문을 이끄는 공친왕은 조정과 군부의 지리멸렬함에 학을 뗐다. 그는 이홍장과 정세관이 거의 일치했다. 이홍장은 북양대신 겸 직례총독에서 해임되었다지만 내각대학사와 총리아문 대신 직은 유지했고, 아직 중앙정치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종전 협상은 반드시 해야 하오. 앞으로 협상력을 얼마나 갖추느냐가 관건이겠구려. 중당이 보기에 새 흠차대신이 반격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 같소?"
공친왕의 자문에 이홍장은 고개를 저었다.
"유 공은 유능한 관료이지만, 작금의 난국을 타개하는 건 누가 와도 무리입니다."
"내 생각도 같소. 하루라도 빨리 협상에 들어가야겠군. 황상과 태후께 승인을 받아야겠소."
"결단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더욱 불리한 조건으로 임하게 될 겁니다."
"영토 할양은 피할 수 없겠소? 조선의 독립 승인과 배상금 지불은 얼마든지 양보할 용의가 있는데."
"적이 승세를 잡은 이상 없을 겁니다. 하지만 조정이 영토 할양을 승인할지 모르겠군요."
이홍장의 예상대로 주전파는 말할 것도 없고, 주화파들조차 전쟁의 지속에 대해 부정적이면서 영토 할양은 피하고 싶어 했다.
공친왕은 일단 광서제와 서태후의 승인을 받아 중재자인 미국을 통해 조선과 일본에 정전 협상을 제안했다.
조선과 일본도 조건에 따라 정전협상에 응할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휴전시기와 협상 장소부터 난항을 보였다.
청나라는 협상 돌입과 동시에 즉각적인 휴전을 원했지만, 조일 동맹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회담장은 상해를 제안하는 바입니다."
"어찌하여 회담 장소로 패전국의 영토로 가야 한단 말이오? 히로시마를 제안합니다."
"히로시마에는 일본군 대본영이 있잖소! 이야말로 지나친 굴욕이오. 대청은 아직 패배하지 않았소!"
조선이 중재안을 내놓았다.
"그럼 삼국의 중간 지점인 인천이 어떠한지?"
"아직 황해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인천은 전선에서 너무 가깝소."
"급한 건 그쪽인데 너무 까다롭게 구시는군."
문제는 회담 장소보다 조건이었다. 청나라는 조선의 독립 인정과 배상금 지불로 협상 조건을 마무리하길 원했지만, 조선과 일본이 그런 조건으로 응할 리가 없었다.
북경 조정이 영토 할양에 부정적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조일 동맹은 전쟁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북양함대를 완전히 격파하고, 요동을 완전히 접수하고 직례로 나아가 북경을 턱밑까지 위협하기 전까진, 청국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계획대로 작전을 수행한다."
1895년 2월 1일. 일본군 제2군 소속 3개 사단, 제2, 4, 6사단이 산동 공격에 나섰다. 연합함대와 함께 한 육·해군 합동작전이었다.
일본군은 거의 저항도 받지 않고 위해위 동남방 영성만에 상륙하는 데 성공했다.
정여창이 지휘하는 북양함대 사령부는 위해위와 인근 섬인 유공도(劉公島)에 방어진을 구축해 결전에 대비했지만, 사기는 현저하게 낮았다.
일본군도 육해군 간에 갈등이 있다곤 하지만, 청군은 북양함대 내에서도 대립이 격화됐다.
북양함대 장교들은 대부분 좌종당이 세운 복건 선정학당 출신이었다. 안휘 출신이자 이홍장의 측근인 정여창은 계속된 패전으로 이들로부터 신망을 잃은 상황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정 제독이 해군에 대해 아는 게 뭐 있나?"
"회군 출신들만 싸고돌다가 이렇게 됐지."
"이홍장도 실각한 마당에 그 오른팔인 정여창도 얼마나 더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겠나?"
"어차피 이기지도 못할 터인데, 전력을 유지하려면 빨리 정전이라도 하지."
이미 정여창은 여순 함락의 책임을 지고 북경으로 소환될 뻔했다. 하지만 이홍장이 위해위 방위의 책무가 크다 하여 연기된 상황이었다.
신임 흠차대신 유곤일도 강남 병력을 산동으로 이동시키라 명하고, 일단 정여창에게 '공으로 속죄하라'고 직무를 유지했다.
이런 상황이니 정여창의 명이 제대로 설 리가 없었다. 정여창은 휘하의 장교들을 불신했고, 서양인 군사고문관들을 훨씬 신뢰했다. 위해위 방위의 실무를 맡은 것도 서양 고문관들이었다.
"전군, 진격하라!"
"포격 개시!"
2월 7일, 상륙을 완료한 일본군 제2군은 위해위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청군은 10년이란 시간을 두고 축조한 위해위 요새에 160문의 대포, 3만의 병력, 전함 9척, 포함 6척, 어뢰정 10척이라는 상당한 전력을 갖추고도 전의가 현저히 낮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 위해위만은 내줘서는 안 된다. 반드시 지켜야 한다!"
전의를 상실한 휘하 장교들과 달리 정여창은 분투했다. 정여창 직계의 회군은 열심히 방어했다.
"발포!"
"돌격!"
총탄과 포탄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일본군 주력인 2사단은 위해의 남안의 포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청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11여단장 오데라(大寺) 소장이 전사할 정도였다. 일본군 최초의 장성급 전사자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전의가 훨씬 강했다. 일본군은 2월 15일까지 위해위 북안의 포대를 점령하고, 시내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육상 포대는 모조리 떨어진 셈이었다.
육지로는 일본 육군, 바다로는 연합함대. 북양함대는 좁은 위해위 만과 유공도 안에 완전히 포위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여창은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군의 항복 권유를 거절하고, 북양함대와 유공도의 포대로 저항하며 버텼다. 북양함대는 탈출하는 대신 유공도 해상에 기뢰를 설치하여 일본해군의 진입을 막았다.
"나는 절대 도망치지 않는다. 함대와 운명을 함께할 것이다."
정여창은 결사 항전을 외치고, 이홍장에게 필사적으로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홍장은 정여창을 지원할 방도가 없었다. 북양함대는 포위됐고, 남양함대는 전력이 부족하다며 출동을 거부했다. 유곤일이 파병한 강남군이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 남은 상황이었다.
"기뢰로 인해 함대가 진입하지 못하니, 어뢰정을 투입하여 북양함대를 격멸시킨다."
일본해군은 어뢰정 전대를 충돌시켰다. 1·2·3전대는 일본해군 소속, 4전대는 전쟁 동안 연합함대에 합류한 조선해군 소속이었다. 조선해군의 사실상 유일한 전력인 5척의 어뢰정은 산동 작전부터 연합함대와 행동을 함께했다.
"충무공 이순신의 얼을 계승한 조선해군 장병이여, 침략자의 군함을 격멸시키자!"
"와아아아!"
그동안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북양함대를 피해 도망 다녀야 했던 조선해군도 공격을 열렬히 환영했다.
2월 17일 새벽, 세계 해전 사상 최초의 야간 어뢰전이 개시되었다.
"어뢰 발사!"
쿠웅!
연합함대의 어뢰 공격은 효과적이었다. 야간에 기습을 받은 거대한 북양함대의 전함들은 좁은 만 안에서 효율적인 전투를 수행하지 못했다.
5일에 걸쳐 야간 어뢰전은 계속되었다.
전함 위원과 내원이 차례로 격침되고, 북양함대 기함 정원도 대파되었다. 정원은 항해능력을 상실했고, 움직이지 못하게 된 전함은 거대한 표적에 불과했다.
"적에게 넘겨줄 수 없다. 자침하라."
전함 진원에서 지휘하던 정여창은 눈물을 머금고 정원에 자침을 명령했다.
콰앙!
북양함대의 상징, 정원이 자침하여 폭발하자 정여창은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유공도에 상륙한 정여창은 더 이상 전투를 수행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북양함대에 남은 건 이제 4척의 군함과 포함뿐이었다.
육지의 장교와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해 탈주를 거듭했고, 항복하는 자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2월 22일, 이홍장은 지원은 어려우니 탈출을 권고하는 전보를 보냈다. 북양함대는 고립무원이었다.
그날 밤, 정여창은 북양함대의 마지막 군의를 열었다.
"지원군은 없소.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탈출이냐 죽음이냐요. 나는 단 몇 척이라도 탈출하길 바라오."
"적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황인데, 어찌 탈출하겠습니까? 장병을 희생시키지 않으려면 속히 항복해야 합니다."
"어찌 항복이란 말을 그리 쉽게 담는가? 우리는 북양함대의 마지막 보루다. 후일을 위해 몇 척의 군함이라도 살려야 한다."
"그게 불가능하니 항복하자는 것 아닙니까? 이제 더 싸운다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휘하 장교들은 물론이고, 서양인 고문관들도 항복을 권했다.
일부 장교들 사이에선 항복을 거부하는 정여창을 죽여서라도 투항하자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정여창은 이제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일본은 거듭 정여창에게 항복을 권했다. 연합함대 사령장관 이토 스케유키의 명의로 항복 권유문이 전달되었다.
"각하는 최후까지 분투했다. 북양함대가 궤멸하였더라도 각하의 책임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에노모토 해군대신이나 오토리 조선공사도 과거 정부에 반기를 들었음에도 사면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재능에 따라서 높은 지위에 승진했다. 각하는 무능한 정치의 결과에 의한 패전에 책임이 없으므로, 항복하여 뒷날을 기약하길 권한다."
정여창이 신뢰하는 영국인 고문관 맥클루어도 정여창을 설득했다.
"죽으면 안 됩니다.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포대를 잃은 육군의 장군, 지원군을 보내지 않은 총독과 순무들 아닙니까. 제독은 고립무원의 상황에서도 분투했습니다. 제독은 일본군에 인도되어 국제법으로 보호될 것입니다. 항복이 불명예스럽다고 판단되면, 제3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주선해 줄 수 있습니다. 미국이 협상을 중재하는 상황이니, 미국으로 망명한다면 저지할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정여창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북양함대 사령관으로서 책임을 져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최후가 항복이라는 건 무인으로서 견딜 수가 없는 일이오. 하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쓸데없이 희생만 늘어날 터이니, 내가 죽고 나면 귀관이 내 관인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해 주길 바랍니다. 나는 도저히 항복 도장을 찍을 수가 없군요."
정여창은 사령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그는 상관 이홍장과 적장 이토 제독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썼다.
------
본 제독은 휘하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귀 제독에게 휴전을 바라는 바이다.
위해위에 있는 현 함대와 유공도 및 포대 병기를 귀국에 헌상할 것이므로, 육·해군 내의 외국인 관원, 병사, 인민들의 생명을 상해함이 없이 그 고향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갈망하는 바이다.
광서 21년 정월 이십팔일
혁직유임 북양해군제독 정여창
연합함대 사령장관 이토 스케유키 귀하
-----
이홍장과 함께 해군을 키우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건만, 결국 화염 속으로 사라지고야 말았다.
'20년의 노력이 바닷속으로 침몰하고야 말았구나. 이는 내 책임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1895년 2월 22일 밤. 북양해군제독 정여창은 스스로 독배를 들어 음독 자결했다.
이튿날, 북양함대는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 북양함대의 종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