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199화 (198/812)

199화 만주 진격

북양함대가 궤멸당하는 동안, 이홍장이 구경만 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북양함대는 해방(海方) 논쟁 이래 이홍장이 20년간 숙원으로 여기던 사업이었다. 이대로 전멸당하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하지만 북양대신 겸 직례총독에서 물러나 군사지휘권을 박탈당한 이홍장에게 군사적 수단이 없었다.

흠차대신 유곤일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공친왕에게 종전을 위한 정치 공작에 들어갔다.

이홍장의 즉각 정전 요구에 공친왕도 공감했다. 가망 없어 보이는 반격의 날을 기다리느니 북양함대가 절반이라도 남은 시점에서 협상에 들어간다면 협상력을 높일 수 있을 터였다.

"종전 협상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중당의 의견에 동의하오. 문제는 조건이오. 저들이 어떤 조건을 요구할 것 같소?"

공친왕의 자문에 이홍장이 솔직히 응답했다.

"첫째, 전쟁의 명분이 된 조선의 자주독립 인정이겠지요."

"그건 당연하고. 더욱 중요한 건?"

"둘째,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할 겁니다."

"그건 어쩔 수 없겠지. 협상에서 최대한 액수를 깎아야겠지만."

"셋째, 영토 할양. 이제 피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공친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영토 할양을 피할 수 없다는 건 그도 인식하고 있었지만, 황제와 조정은 이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저들이 얼마나 영토를 요구할까?"

"아라사 공사관을 통해 들은 정보가 있습니다. 조선은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 조선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을 원합니다."

"으음……. 일본은?"

"일본은 일단 팽호 열도와 대만을 요구할 겁니다. 더 나간다면, 현재 점령 중인 여순과 요동 반도까지 요구하리라 추정됩니다."

공친왕은 난색을 표했다.

"요동 반도는 절대 안 되오. 여순에서 바다로 나가면 북경에서 지척이 아니오! 황상은 물론이고, 조정에서도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거요."

"바로 그 점을 서양 열강, 특히 아라사에 호소해야겠지요. 아라사는 전쟁을 중재할 용의가 있어 보입니다."

공친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협상의 전권으로 중당이 직접 가줄 수 있겠소?"

이홍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저는 패전의 책임자로 지목받아 조정의 규탄을 받고 있는데, 어찌 그런 중책까지 맡겠습니까?"

"중당은 아라사와도 법국과도 협상을 잘 이끈 경력이 있지 않소. 능히 국익을 지키며 적들과 협상을 할 수 있는 이는 조정에 중당밖에 없소."

"아니, 저는 이미 너무 늙었습니다. 기력이 크게 쇠해 오히려 나라에 누를 끼칠까 걱정입니다. 부디 조속히 다른 이를 선발해 주십시오."

이홍장은 거듭 고사했다. 그는 현실적으로 전쟁 지속은 불가능하다고 내다봤다. 게다가 협상을 위해 영토 할양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재의 조정은 이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다.

'싸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싸움에 대해서 논하는 게 아니다.'

이홍장은 상황 인식을 못 한 채 입으로만 떠드는 북경의 주전파들에게 신물을 내고 있었다. 패전처리를 해서 모든 책임을 지는 것도 질려버렸다.

그렇다면 협상을 나가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섣불리 영토할양을 주장한다고 매국노로 찍힐 가능성만 컸다. 패전과 영토 할양의 책임을 오로지 이홍장 한 사람에게 덮어씌울 게 뻔했다.

'완화군과 이토가 부럽군. 나는 앞으로 적과 싸우는 것도 모자라 뒤로는 무능한 아군과 싸워야 하니! 적보다 무능한 아군이 더 두렵다.'

공친왕은 이홍장의 생각을 읽었다.

'이 노인네,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청조가 위험했을지도 모르겠군. 이미 늙어서 다행이야.'

비록 패전했을지라도, 이홍장의 임기응변과 현실 인식은 정확했다. 그리고 자신이 오랫동안 충성한 청조의 무능함과 무책임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공친왕의 생각처럼 이홍장이 20년만 젊었더라도, 북경의 뜻에 순종해 자기 기반을 날려 먹을 전쟁에 뛰어드는 대신, 북경을 향해 총칼을 거꾸로 겨누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홍장은 너무 늙었고, 청조에 충성한 기간이 길었다. 이미 그는 어쩔 수 없는 청조의 충직한 신하였다. 북양함대, 아니 청 왕조라는 서서히 침몰 중인 배의 키를 놓을 수가 없었다.

공친왕은 황제와 서태후를 거듭 설득하여 즉각적인 정전 협상에 동의를 받아냈지만, 사신 인선을 놓고 옥신각신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패전 조약에 도장을 찍는 굴욕적인 자리를 맡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결국 호부시랑 장음환과 호남 부(副)순무 소우겸이 강화 사절로 임명되었다. 청나라 관료들은 외교관을 기피했기 때문에 외교 실무 능력을 갖춘 이가 별로 없었다. 장음환은 미국 공사를, 소우겸은 러시아 공사를 지낸 바 있어 능력을 인정받아 임명된 것이었다.

회담 장소로 상해를 포기한 청나라는 일본과 조선에 나가사키를 제안했다. 상해에서 직항로가 있으니 접근성이 수월하리란 판단이었다.

일본은 대본영이 있는 히로시마와 가까운 시모노세키를 다시 제안했고, 조선도 동의했다.

'부산까지는 경부선을 이용하고,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는 연락선을 타면 금방이니까. 실제 역사와 그대로 가는 게 변수를 통제하기에 오히려 낫겠군.'

이선은 회담장으로 시모노세키를 받아들였다. 외무대신 김옥균을 전권부사로 시모노세키로 파견하고, 요동 진격을 논의한 후 자신이 전권대신으로 직접 가기로 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지경이 못 되는 청나라는 시모노세키를 받아들이고, 강화 사절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상해에서 출발한 청나라 사절단이 시모노세키에 2월 24일 도착했으나, 이미 전날에 북양함대는 궤멸하고 항복한 뒤였다.

정전 협상에 대한 조정의 반대를 뒤엎는데 걸린 시간, 인선을 놓고 걸린 시간, 전권의 부여 여부를 놓고 걸린 시간, 항해하는 데 걸린 시간을 합치니 근 한 달이 걸린 것이다.

동아시아 사정에 정통한 서양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논했다.

"청국은 체면과 사소한 계략으로 전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수천 명의 생명과 엄청난 재정의 낭비를 자초하였으며, 북양함대 전체가 격침되거나 나포되었다. …… 만약 위해위 전투가 발생하기 전에 신속히 정전 협상에 나섰다면, 북양함대의 절반이라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청국의 협상력이 이렇게까지 떨어지진 않았을 터이다."

북양함대 궤멸 소식이 전해지자 북경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북양함대 궤멸과 정여창의 마지막 편지를 전달받은 이홍장은 충격으로 자리에서 쓰러졌다.

일본은 무인의 품위를 지켜 자결한 정여창을 높이 평가했고, 그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었다. 북양함대의 군함들은 모조리 노획되었지만, 포로가 된 북양함대 수병들은 석방되었다. 일본해군은 조포(弔砲)와 조기로 정여창의 유해에 경의를 표하며 정중히 청국으로 보냈다.

패장에게 가혹한 건 오히려 청 조정이었다. 패전 책임을 죽은 정여창에게 쏟아냈고, 광서제도 분노하여 외쳤다.

"북양함대의 전멸은 정여창의 책임이다. 생전에 받은 관직을 모두 삭탈하고, 가산을 몰수하여 전사한 장병들의 보상금으로 삼으라. 죄인의 장례는 허용하지 않겠다!"

죄인으로 처분을 받은 정여창의 관은 검은색으로 칠해졌고, 장례도 허용되지 않아 자택에서 유족들만이 쓸쓸하게 망자의 넋을 위로해야 했다.

그래도 광서제는 냉정함을 유지했다. 정여창보다는 그 상관인 이홍장에게 책임을 물리고 싶었지만, 죽은 정여창에게만 책임을 돌렸다.

위해위가 함락되고 북양함대가 궤멸한 이상, 협상으로 이 난국을 타개할 사람은 이홍장밖에 없었다.

공친왕의 조언을 받은 광서제는 현실을 인지하고, 속히 정전 협상을 명했다.

일본 전권대신으로는 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가 임명되었다. 조선 전권부사 김옥균은 시모노세키에서 이들과 회동했다.

"위해위 전투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이제 북양함대는 끝장났군요."

"고맙습니다. 귀국의 분전 덕이기도 하지요. 조선의 독립도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김옥균은 이토 및 무쓰와 의례적인 덕담을 주고받은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조선 전권대신인 완화군께서도 곧 오실 예정입니다. 바로 협상에 들어갈 겁니까?"

"아니오. 저들은 전권위임장이 없습니다. 일일이 북경에 상신한 후에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야 협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지요."

청나라는 장음환과 소우겸에게 전권사절이란 이름은 붙여주었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부여하지 않았다.

그래도 협상을 진행하려면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트집을 잡아 협상을 지연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일본의 전권은 총리와 외무대신이오, 조선도 왕족인 완화군과 외무대신인 귀공이 전권을 맡았지요. 차관급인 저들은 격이 안 맞습니다."

김옥균은 일본의 속내를 파악했다.

"공친왕이나 이홍장이 직접 와야 격이 맞겠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실질 권한이 없는 관리가 협상을 맡았다가, 북경에서 협상결과를 뒤엎을 수 있었다. 실권자인 공친왕이나 이홍장 중 한 사람이 와서 협상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아무래도 저들이 반격을 한 번이라도 성공시킨 후에 협상에 나서고 싶은가 봅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요동의 1군을 향해 청군의 공세가 4번이나 있었습니다. 번번이 격퇴하긴 했지만. 1군은 공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조선군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당장 공세가 가능합니까?"

무쓰의 물음에 김옥균이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아, 지금은 곤란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1군의 불만이 자자합니다. 일본군이 혈투를 치르는 동안 조선군은 봉황성과 점령지 안에만 틀어박혀 있다고요."

1월 말부터 한 달 동안, 만주군은 요서와 요양에서 영구와 해성을 향해 대공세를 감행했다.

일본군은 청군의 공격을 무찌르긴 했지만, 청군도 이번만큼은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4차례나 치열한 공세를 벌였다.

일본군은 봉황성의 조선군에게 요양과 봉천 방향으로 진격해 적의 배후를 위협하고, 동계 전투에 동참할 것을 거듭 요청했다. 하지만 조선군은 그때마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가며 연기해 왔다.

"일전에 통보하였다시피, 아군도 3월 중에 공세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대본영에서는 조선군이 의도적으로 교전을 회피하고 있지 않냐는 의혹이 있던데요."

무쓰의 추궁에 김옥균이 정색을 했다.

"그리 말씀하시면 곤란하지요.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일본군이 요동에 상륙하기 전까지 평양에서 적의 주력을 격퇴한 건 우리 조선군이 아닙니까?"

"귀국을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압록강 도하 이후 3개월째 진격이 멈춰서 있으니 대본영에서는 그런 의혹을 가질 만도 합니다."

"보급 상황이 수월하지 않습니다. 적은 곳곳에서 유격전을 벌이고 있고, 아군은 대외원정이 처음이라……."

김옥균은 정색하던 표정을 풀었다.

"귀국의 군대가 정예라는 건 세상이 다 압니다. 유신 이래 30년 가까이 군제개혁에 매진한 덕분이지요. 그만큼 모든 면에서 준비가 잘 되어 있지요."

김옥균은 일본에 찬사를 보내고, 사정하는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조선은 군제개혁에 나선 지 채 10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징병제를 실시한 지도 불과 5년이지요. 더욱이 우리에게는 대외원정의 경험이 없습니다. 조국 방위와 대외 원정은 또 다른 일 아닙니까. 공세가 지지부진한 것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귀국에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정부는 이해합니다. 군부는 오직 전략적인 일에만 몰두하기에 상황이 답답하겠지만, 정부는 좀 더 포괄적으로 볼 필요가 있지요."

이토가 이해의 뜻을 보이니, 김옥균이 재빨리 받았다.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 군무대신께서 늘 말씀하시길,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라 하였습니다. 전쟁 그 자체에 매몰되면 안 되지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군요. 옳은 말입니다."

이토는 군부가 지나치게 강경한 태도를 고집하는 게 불만이었다. 군부가 원하는 대로 직례 결전을 벌이면 서양 열강의 개입을 피할 수 없다는 계산이 나왔지만, 대본영은 북경을 함락시켜 결판을 내겠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위해위를 함락시키고 북양함대를 궤멸시킨 시점에서 더 이상의 전투는 불필요하다는 게 이토의 의견이었으나, 군부는 직례 결전의 전초 단계인 요동 공세를 강행했다.

"협상은 공친왕이나 이홍장이 오기 전까지 지연될 겁니다. 그동안 1군은 3월 초순에 요동 공세를 재개할 겁니다. 조선군도 힘써 주기를 바랍니다."

"예, 본국에 그리 보고하겠습니다. 아군도 틀림없이 3월 중에 요양을 향해 공세를 시작할 겁니다."

김옥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군이 그동안 전투를 회피해온 건, 대본영의 의심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일본군이 청군과의 전투에 매진하여 양측이 전력을 소모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이 거듭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혹한의 만주에서 벌어지는 동계 전투는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전사자보다 동상과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10배 이상 많을 정도였다.

이선의 지시대로, 조선군은 일부러 가혹한 환경의 동계 전투를 피했다.

일본군의 지원 요청을 받아도, 김옥균의 말처럼 조선군의 준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정중히 거절했다.

그리고 날씨가 좀 누그러지는 3월이 오기를 기다렸다.

김옥균의 보고를 받은 이선은 원수부에 공세 준비를 명령했다.

"3월 초에 일본군이 공세를 준비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정전 협상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 공세가 될 것입니다. 아국의 협상력을 극대화하려면, 현시점의 전선을 고수하는 것보다는 최대한 점령지를 늘리는 게 좋습니다. 단지 지금까지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아군은 충분히 휴식을 보내고, 공세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일본이 우장과 영구에서 청군의 주력을 상대하는 동안, 우리는 우회하여 안산과 요양을 접수합시다.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마침내 만주 진격의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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