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요동 정벌
1895년 3월. 동아시아 삼국 전쟁은 종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봉황성에 주둔하는 조선군 주력은 마침내 만주 진격에 나섰다. 군무대신 이선이 명목상 북벌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군의에 참석했다.
"근위사단, 1, 2, 3사단의 7개 여단이 서북방으로 진격하여 일본 1군의 공세에 호응해 안산을 접수하고 요양을 점령한다."
조선군의 주력은 해성에서 요하 방향으로 공세를 개시할 일본 1군의 우측면, 해성 동북방의 안산과 요양을 공격하기로 일본군과 합의했다.
"6여단과 의용군으로 구성된 별동부대는 북방으로 진격하여 연산관과 마천령을 넘어 봉천 방향으로 기동하는 척하여 적을 기만한다."
원래 조선군의 진격로로 예상되었던 봉황성에서 봉천으로 이어지는 북쪽 루트는 별동대를 보내, 봉천 방향의 적을 기만하기로 했다.
북벌군 사령관 이선이 북진을 앞두고 격려 연설에 나섰다.
"친애하는 장병 제군, 마침내 북벌의 순간이 왔다. 우리는 평양과 압록강의 승전으로 삼전도의 치욕을 씻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제군, 우리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가?"
병사들이 일제히 큰소리로 외쳤다.
"아닙니다! 부족합니다!"
"조선이 요동으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요양은 청조의 첫 수도이기도 하지만, 옛 고구려의 요동성이기도 하다. 고구려가 수나라 100만 대군을 무찔렀던 바로 그 요동성이다. 그리고 우리 태조대왕께서 500년 전에 원나라를 무찌르고 수복했던 바로 그 요동성이다."
이선은 요동의 역사, 자랑스러운 선조의 역사를 언급하여 장병의 사기를 북돋웠다.
고구려가 수나라의 대군을 무찔렀던 곳이자, 태조 이성계가 고려 공민왕의 명을 받아 북진하여 점령했던 곳이었다. 이후 수나라와 원나라는 멸망의 길을 걸었다. 1895년 현재에 이르러, 청나라도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천년의 세월이 지나, 요동은 다시 중화제국의 무덤이 될 것이다! 요양으로 진격하여 효종 대왕의 숙원을 풀고,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를 수복하자!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와아아아아!"
"요동을 정벌하자!"
병사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북벌, 요동 정벌이라는 말에 가슴이 뛰지 않을 조선인은 거의 없었다. 조선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대규모 병력이 움직이는 500년 만의 대외원정이니만큼 보급과 질병을 철저히 관리해야 합니다. 일본군이 전사자보다 10배 많은 병상자를 냈다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후방에서 각종 보급과 의료를 담당하는 내무대신 박영효, 탁지대신 어윤중, 농상공무대신 유길준, 군무협판 겸 군의부장 서재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선과 각료들은 일종의 '전쟁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만주의 도로 사정이 굉장히 열악한 관계로, 지난 3개월간 보급로의 확보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서북 지방의 인부 2만 명과 현지 인부 1만 명, 마필(馬匹) 1만을 징발하여 점령지의 도로를 부설했고, 앞으로 수송을 담당할 겁니다."
여름 홍수와 전쟁의 여파로 1894년 만주의 작황 사정은 최악이었고, 1895년 봄이 되자 기근이 임박했다. 현지조달에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조선에서 식량을 운송해야 했다.
사실상의 휴전이었던 동계 3개월간, 조선군은 놀고만 있던 게 아니었다. 후방의 자원을 동원하고, 원활한 보급을 위해 노력을 기하고 있었다.
"아직 동상 외에는 큰 질병은 없습니다만,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일본군의 전언에 따르면, 만주 일대에 콜레라가 만연합니다. 대군이 움직이면 전염병에 취약한 만큼, 위생 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합니다."
콜레라, 조선에서 호열자(虎烈刺)라고 불린 이 질병은 처음 발병한 19세기 초 이래 무시무시한 질병이었다. 동양에서도 무수히 많은 희생자를 낸 전염병이었다.
조선에서도 1880년대까지는 콜레라가 지속해서 발병하여 많은 희생자를 내곤 했다.
갑신경장 이후 조선 정부는 위생과 의료 체계 확립에 최선을 다했다.
당시 내무대신을 맡은 김옥균은 강력한 위생 정책을 밀어붙였다. 한양과 같은 도시에서는 상하수도가 설치되고, 공공 화장실이 도처에 생겼다. 과거처럼 아무 데서나 용변을 보거나 배설물을 버리는 자는 순검의 몽둥이세례를 받았다. 서양인이 '도처에 인분이 널려 있는 악취 나는 도시'라고 경멸하던 한양은, 단기간에 위생을 강조하는 깨끗한 도시로 변모했다.
미국에서 최신 의학을 배우고 돌아온 서재필은 근대적 의료 체계 확립에 앞장섰다. 의사에 대한 대우가 높아지면서, 제중원 의학교와 관립 의학교를 졸업한 의사들의 수요와 공급이 계속 늘어났다.
서양 사정에 밝은 이선은 독일 세균학자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의 최신 콜레라 이론을 재빨리 받아들였고, 정부 주도 아래에 '호열자 대처법'을 발간하여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그 결과 1890년대에 이르면 조선의 전염병 발병률은 현저히 떨어질 수 있었다. 농촌에서는 여전히 전염병의 위험성이 남아 있었으나, 인구가 밀집된 도시에서는 기초적인 의료와 방역 체계가 확립된 덕분이었다.
하지만 만주의 위생 상황은 여전히 열악했다. 조선보다 더 체계적인 군사 의료 체계를 갖춘 일본군도 질병으로 인해 고생했고, 특히 각기병의 발병으로 인한 희생자가 많았다.
잡곡 위주의 식단을 섭취하는 조선군과 일본 해군은 각기병 발병이 없었지만, 일본 육군은 백미 위주의 식단을 고집하는 바람에 각기병 환자가 속출했다. 해군이 조선군의 사례를 들어 잡곡 배식을 권유해도 육군은 쓸데없는 자존심을 지키느라 병사의 희생을 자처했다.
반대쪽의 청군은 민간에서 시작된 콜레라 발병으로 희생자를 내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의료 체계를 갖추지 못한 청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청군이 대처에 실패하면서 콜레라가 청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일본군에게로 번지는 상황이었다. 본의 아닌 세균전이었다.
만주의 제반 상황은 이처럼 총체적 난국이었다. 일본군과 달리 이선과 조선 정부가 만주 진격을 꺼려했던 현실적인 요인들이었다.
"어쩔 수 없지요. 최대한 위생과 방역에 신경을 쓰고, 단기간에 전투를 끝내는 수밖에. 각 군에 만전을 기하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군대가 원활히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후방에서 최선을 다합시다."
"알겠습니다."
"우리 병사들을 위해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1895년 3월 1일. 조선군의 진격이 시작되었다. 4개 사단 55,000명의 병력이었다. 조선군의 핵심이자, 전력이나 다름없는 군대였다.
같은 날, 일본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일본 1군 3개 사단은 '요하 평원 소탕 작전'으로 명명된 공세에 돌입했다.
1사단은 개평에서 해안로를 따라 개항장인 영구로, 3사단과 5사단은 해성에서 요하에 면한 우장을 취하기 위해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다.
몰릴 대로 몰린 청군도 격렬하게 저항했다. 우장이 뚫리면 요하를 넘어 요서였다. 만주군 사령관 송경은 우장의 사수를 명령했다.
우장에서는 그 이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질 정도였다.
"발포!"
"돌격!"
"죽여라!"
우장 시가전은 전에 없이 격렬하여 청군은 수천의 전사자를 낸 후에야 우장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조선군의 진격에서 청군의 위협은 없다시피 했다. 오히려 어려운 건 진격 그 자체였다.
봉황성에서 안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여전한 추위로 동결되어 있었고, 수만의 대군이 한 번에 움직이기에는 길이 좁았다. 만약 청군의 반격이 있었더라면 골치 아플 상황이었다.
보병의 진격은 그래도 수월했으나, 야포를 운송하는 데 심각한 차질을 빚고 있었다. 수송을 전담하는 인마의 통행은 심한 제약을 받고 있었다.
3월 10일, 조선군은 안산 동남쪽 팔반령(八般嶺)에 도달했다. 이 고개만 넘으면 안산, 요하 평야였다.
조선군은 팔반령에서 적군이 방어에 나서리라 예상했으나 의외로 청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척후를 맡은 4연대 특무부대장 홍범도의 보고를 받은 조선군 사령부는 의아했다.
"여기가 뚫리면 바로 요하 평야인데? 지형적 우위를 스스로 버린다고?"
"안산을 포기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지 않나? 함정 아닌가?"
"일단 오늘은 팔반령에서 숙영하고, 내일 안산으로 진격한다."
조선군의 의문은 다음날 우장의 전황이 전해지면서 풀리게 되었다. 청군의 상당수는 우장과 요서에 몰려있었다. 안산의 청군은 고립을 우려해 조선군이 팔반령에 도달하기 직전, 안산을 포기하고 만주군의 주력이 있는 요양 방향으로 퇴각했다.
"그럼 안산이 비어있단 말인가?"
"일본군 덕에 손쉽게 점령하는군. 고마운 일이네."
일본군은 조선군의 조속한 진격을 채근했으나,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인해 진격이 늦춰졌다. 오히려 늦은 덕에 안산에 무혈입성할 수 있게 되었다.
3월 11일, 조선군 전위부대가 안산에 입성했다. 청군은 안산 시가를 불 지르고 이미 퇴각을 한 상황이라, 문자 그대로 무혈입성이었다.
조선군의 안산 점령은 중요했다.
"반드시 안산을 확보하시오. 만약의 경우 요양은 점령 못 해도 좋지만, 안산은 반드시 점령해야 하오."
이선의 명령에 조선군 대부분은 안산이 요양과 영구를 잇는 간선도로에 존재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받아들였지만,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안산은 전략적 요충지인 동시에, 아직 개발되지 않은 대규모 철광이 있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인근의 요양에 가려져 그 잠재력을 모른 채, 작은 촌락만 존재했다.
실제 역사에서 일본이 러일전쟁 이후에 남만주가 세력권으로 들어오면서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본격적인 개발은 1930년대 만주국 수립 이후였다. 안산은 이때부터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철강 생산지가 되었다.
안산의 철강공업은 일본제국과 만주국, 후일 중화인민공화국의 핵심 공업지대가 되었다.
이선은 향후 조선의 산업화에 필요한 자원으로, 안산 철광을 원했다. 종전 회담에서 청국으로부터 할양받을 영토의 면적을 줄여도 좋으니, 안산은 확실히 할양받길 원했다. 아직 열강이 그 가치를 모를 때 점령과 개발을 완료할 생각이었다.
안산에 무혈입성한 조선군은 후속 작전을 논의했다. 일본군 파견 장교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瀬 幸彦) 중좌는 공세를 독촉했다.
"일본군이 적의 주력을 상대하며 피를 흘리는 동안, 조선군은 청군의 뒤만 쫓으며 과실만 얻을 생각입니까? 당장 요양의 적군을 격퇴하여 배후를 차단해야 합니다."
"그 무슨 소리요! 귀관도 조선군이 얼마나 험악한 길을 넘어 진격했는지 직접 경험하지 않았소? 우리는 최대한 빨리 온 것이오!"
2사단장 한성근 부장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노장의 외침에 구스노세 중좌가 움찔하자, 1사단장 윤웅렬이 중재를 했다.
"꼭 일본군의 요청이 아니더라도, 아군은 요양으로 진격할 계획이었소. 조선군도 겨우 안산만 점령하자고 대군을 동원한 게 아니외다."
"그렇소이다. 요양을 점령하고, 더 나아가 심양까지 진격하는 게 우리 목표외다. 그래야 비로소 북벌을 완수할 수 있지요."
3사단장 신정희(申正熙) 부장도 요양 진격을 원했다. 근위사단, 1, 2사단과 달리 3사단은 그동안 후방 방위에 전념하느라 별다른 공적을 세운 바가 없었다.
대원군 집정기를 대표하는 무관 신헌(申櫶)의 아들이자 개화파 군인인 신정희는 어영대장과 병조판서, 법무대신을 재임한 고관이었으나, 전쟁 발발과 함께 군직에 복귀했다.
3사단의 실질적인 지휘는 신식 군사교육을 받은 참모장 이규완(李圭完) 정령이었으나, 존경받는 원로 무인인 신정희는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
환갑을 넘긴 신정희는 북벌 완수가 자신의 생애에 주어진 마지막 사명이라 생각했고, 반드시 요동을 정벌하고 종묘에 승전을 고하겠다는 일념이었다.
요양에는 만주군 사령관인 70대의 노장 송경이 지휘하는 약 5, 6만의 병력이 있었다.
요양을 내주면 심양까지 평원으로 이어지니, 청군도 더는 물러서지 않고 요양을 결사 방어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요양으로 진격하여, 청군과 일전을 벌인다. 요양 전투는 요동 정벌의 상징이 될 것이다."
"오오!"
"아군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조선군 사령부는 결전을 회피하지 않고, 요양에서 일전을 결정했다. 근위사단과 2사단이 정면을 맡고, 1사단이 좌익으로, 3사단은 우익으로 기동하여 태자강(太子河)을 건너 적을 3면에서 공세를 퍼부을 계획이었다.
개전 이래 조선군 최대의 전투가 눈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