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새로운 전장
강화 회담 장소로 지정된 시모노세키에 삼국 전권 사절이 모일 예정이었다.
조선 전권대신인 이선은 외무대신 김옥균, 신임 법무대신 유길준, 외교고문관 르장드르 등 사절단을 거느리고 시모노세키로 향했다.
경부선 열차를 타러 가기 위해 사절단 일행이 역으로 향하자 군중이 구름같이 몰려들며 환호했다.
"대조선국 만세!"
"대군주 폐하 만세!"
"우리의 영웅, 완화군이시다!"
"조선의 국익을 위해 힘써 주십시오!"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 만세!"
"침략자 청국의 징벌을!"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를 수복하자!"
열렬히 환호하는 군중을 보며 이선과 사절단은 손을 들며 답례했지만, 특별열차에 오른 뒤에는 쓴웃음을 지었다.
"군중의 기대에 얼마나 부응할지 모르겠군."
"그만큼 저들이 완화군 대감의 외교력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전쟁으로 민족주의 열풍이 불면서, 강화 협상에 대한 대중의 기대치는 한없이 올라갔다. 언론은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를 모두 수복하자고 선동했고, 거듭된 승리에 대중은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이선을 필두로 한 정부 각료들은 현실 감각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날 계획이었다.
"강화 회담에서 요구 사항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 청국의 전쟁 배상금 지불, 완충지대를 확보하기 위한 영토 할양."
회담장으로 떠나기 전, 이선은 비밀회의에서 각료들과 요구 사항을 합의했다.
"사실 정부 입장에서는, 관리가 안 될 넓은 영토보다는 차라리 넉넉한 전쟁 배상금을 받는 게 낫습니다. 외채를 갚고, 금은 본위제와 산업화에 필요할 자금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탁지부대신 어윤중이 현실론을 제기했다. 그와 실무관료들은 조선이 전쟁을 치르기에 얼마나 재정적으로 취약한지 절실히 깨달았다. 각종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넉넉히 확보하고, 산업화의 밑거름으로 삼길 원했다.
"하지만 영토 할양을 받지 않는다면, 목숨 걸고 싸운 군부와 국민은 받아들이지 못할 겁니다. 전략적으로 꼭 필요한 지점은 받아내야 합니다."
김옥균의 말에 각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토 할양은 조선인 다수 거주지역의 자결(自決)과 청국으로부터 완충지대를 확보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으로부터 크게 벗어나면 안 됩니다. 그 이상은 서양 열강의 반대에 부딪힐 게 뻔합니다. 특히 요동 반도는 어림도 없지요."
이선은 지도를 가리키며 각료들에게 설명했다.
"두만강 북쪽, 조선인이 다수 거주하는 간도 일대. 여긴 우리가 요구할 명분이 충분하고, 청국도 특별히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불모지처럼 보이지만, 석탄과 각종 광물이 넉넉하지요."
이선의 손가락이 요동으로 향했다.
"압록강 북쪽, 우리 군이 점령한 안동에서 요양에 이르는 지역. 이건 청국이 반대할 거고, 서양 열강도 썩 좋아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청국의 침략을 막기 위한 완충지대 설정이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관철하겠습니다. 요양까지는 무리더라도, 최소 안산까지는 할양받고자 합니다."
"안산은 작은 역참에 불과한데, 요양과 영구를 잇는 전략적 위치 말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직은 아무도 신경 안 쓰고 있지만, 질 좋은 철광이 다수 있는 거로 추정됩니다. 산업화에 필요한 강철과 석탄 지대는 반드시 확보해야 합니다."
"훌륭합니다. 다만 걱정되는 건, 할양받을 영토의 넓이가 군부와 여론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것인데……."
이선은 각료들에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영토의 면적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향후 국가 운영에 있어서 전략적으로, 산업적으로 가치가 있는 영토를 확보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 전쟁을 기점으로, 청국의 혼란은 앞으로 심화할 겁니다. 우리가 내실을 잘 다지면, 앞으로 영토 확장의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선과 김옥균이 제시한 협상안은 각의에서 승인받았다. 총리대신 김홍집은 내각의 협상안을 대군주에게 바쳤다.
"군무대신 이선을 전권대신에, 외무대신 김옥균을 전권부사에 임명한다. 짐은 경들을 믿고 전권을 맡긴다. 반드시 조선의 국익을 관철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지극하신 성은에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대군주의 재가도 떨어짐에 따라, 협상의 전권을 받은 이선은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으로 떠났다.
4월 11일. 일본 시모노세키(下關).
부산을 떠난 부관연락선(関釜連絡船)은 조선 사절단을 태우고 순조롭게 시모노세키 항구에 입항했다.
주일 공사 김가진이 수행원을 이끌고 항구에 기다리고 있었다. 이선과 사절단이 배에서 내리기 전, 김가진이 배에 올라 인사를 올렸다.
"어서 오십시오, 대감. 먼 길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공사야말로 일본의 동향을 전해주느라 노고가 많았지요."
이선은 김가진과 인사를 나누고, 바로 하선했다.
"강화 회담에 대한 일본의 동향은 어떻습니까? 조선에 대한 저들의 여론은?"
"대중의 반응은,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선과 사절단이 배에서 내리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조선국 사절단이다!"
"조선 왕자 완화군이시다!"
"외무대신 김옥균도 있군!"
"동양 평화와 문명화를 이끄는 진보의 동지들!"
"일본의 동맹, 조선국 만세!"
"조선 독립 만세!"
일본 대중의 열광적인 반응에, 이선은 약간 어안이 벙벙했다.
'일본인이 외치는 조선 독립만세라니, 역사의 역설인가…….'
"저 사람들, 일본 정부에서 동원한 겁니까?"
이선의 물음에 김가진이 웃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나온 겁니다. 절반 정도는 정부의 입김이 들어갔다고 하겠습니다만."
"호오."
"그동안 일본 정부가 전쟁 명분으로 조선의 독립을 내세웠고, 조선을 침략자인 거대한 청국에 맞서 싸우는 작은 영웅처럼 묘사해 왔습니다. 그렇기에 일본이 싸우는 이유가 조선의 독립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도 많습니다."
동양에서 언론이 가장 발달한 일본은 전시 프로파간다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일본 정부가 '조선 독립과 동양 평화'를 전쟁 명분으로 내걸고 전쟁에 나서자, 대중의 여론은 열광적으로 환호하며 지지했다. 정부뿐만 아니라, 그동안 사사건건 대립해 왔던 야당과 야권 언론들도 선전 선동에 합류했다.
공교롭게도 조선과 일본의 앞 글자를 딴 '조일(朝日)'은 일본인이 좋아하는 아침 해, 아사히와 한자가 같았다. 조일과 한자가 같은 아사히신문은 조일 동맹의 가치를 가장 널리 선전하는 신문이었다.
일본이 그동안 강조해온 '문명화'를 증명하는 장으로 조선의 변화와 청국의 몰락만큼 극적인 것이 없었다.
동맹국 조선은 야만에서 벗어나 문명국으로 나아가는데 이를 방해하는 야만적인 침략자인 청국에 맞서 싸우는 작은 영웅처럼 묘사되었다.
특히 완화군 이선은 조선을 대표하는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으로 찬사를 받았다.
김옥균은 주일 공사를 지낼 때부터 일본 정부와 지식인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이선과 더불어 갑신경장 이후 조선의 진보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으므로 그 역시 열광적인 환호의 대상이었다.
먼저 문명화를 이룬 일본이 중화질서라는 전근대적 야만을 벗어나 근대 문명 세계에 진입하고자 하는 조선을 도와 '문명과 야만의 전쟁'을 치르는 것처럼 선전되었다.
조선에 대한 기존의 멸시관이 사라진 대신, '일본이 도와야 할 근대화의 후발주자이자 동지'라는 기묘한 시선이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딱 서양 열강이 바라보는 일본관과 비슷하구만.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하는 것 같아 여전히 배알이 꼴리긴 하지만, 조선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을 이용해서 나쁠 것 없지.'
이선을 대신해서, 유창한 일본어 실력을 지닌 김옥균이 대중에게 연설했다.
"친애하는 동맹국, 일본국민 여러분! 이렇게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청국의 부당한 침략에 맞서, 우리 조선국은 비로소 자주와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귀국과 귀 국민의 도움이 있었던 덕입니다. 여러분이 조선의 자주독립과 동양 평화라는 대의를 위해 싸웠다는 걸, 이번 회담을 통해 증명하겠습니다."
"와아아아!"
"조선 독립 만세!"
"동양 평화 만세!"
"조일 동맹 만세!"
군중은 김옥균의 연설에 열성적인 환호로 답했다.
하지만 김옥균의 말은 이중적이었다. 일본이 외치는 '조선의 자주독립과 동양 평화'라는 것이 번지르르한 대의명분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관철이 되는지, 회담에서 증명하겠다는 의미였다.
이선과 조선 사절단은 일본 정부가 제공한 영빈관에 들어섰다. 여장을 풀자마자 조선과 일본 간에 회담이 이뤄졌다.
양측 전권위원인 이선, 김옥균, 이토 히로부미, 무쓰 무네미쓰 4인만이 회의에 참석했다.
"귀국의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귀국의 도움 덕분이지요."
의례적인 덕담이 오간 후, 양측은 바로 실질적인 논의에 들어갔다. 이홍장과의 회담이 시작되기 전, 조일 양국의 요구안을 협의하기 위함이었다.
김옥균이 먼저 조선 측 요구안을 일본에 설명했다. 이선이 각의에서 말했던 사항들이었다.
조선의 자주독립, 전쟁 배상금 지불, 영토 할양. 조선인 다수 거주지역과 완충지대 확보.
"모두 이의 없습니다. 그럼 일본국의 요구안을 알려드리지요."
무쓰는 일본측 요구안을 보여주었다. 쟁점은 크게 다섯 가지였다.
첫째,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 인정.
둘째, 전쟁 배상금 지불. 배상금 액수는 은 3억 냥.
셋째, 영토 할양. 대만, 팽호 열도, 요동반도 할양.
넷째, 청국과 서양이 맺은 통상조약에 근거하여, 일본에 열강과 같은 통상 특권 부여.
다섯째, 청국이 조약을 성실히 조약을 이행한다는 담보로 위해위와 산해관을 보장 점령.
이선과 김옥균은 쓴웃음을 지었다. 조선이 보기에도 지나치게 가혹한 요구였다.
'역사가 바뀌어도 일본의 침략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군. 단지 방향이 바뀌었을 뿐.'
이선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 말했다.
"대만과 팽호의 할양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동 반도 할양은 원래 계획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만."
"육군에서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육군은 현재 점령지 모두를 할양받길 원하지요. 산동 반도 할양도 원했지만, 이는 정부에서 반려했습니다."
일본 정부와 해군은 대만 할양을 원했고, 육군은 요동반도 할양을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요동 반도 할양은 청국의 반대는 물론이고, 서양 열강의 반대에 부딪힐까 우려가 됩니다. 이래서야 조선의 독립을 보호한다는 완충지대 설정을 넘어서, 북경의 안위가 위태롭지 않습니까?"
"일단 강화 협상은 일본, 조선, 청국 간의 협상입니다. 제3국의 반응을 논하기엔 아직 이르지요."
말은 그렇게 해도, 이토도 똑같은 우려를 표명한 바 있었다. 하지만 육군의 반발이 컸다.
오쓰사건 이후 육군의 대부 야마가타는 책임을 지고 정계 은퇴를 강요받았지만, 공직은 맡지 않고 있어도 여전히 군부에 강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야마가타의 조종을 받는 군부 인사들은 물론이고, 그와 대립하며 실질적으로 전쟁을 이끄는 가와카미 참모차장조차도 요동 할양을 원했다.
요동 작전에서 다수의 희생자를 낸 육군은 반드시 요동 반도를 할양받길 원했다.
결국, 일본 정부는 육군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일본이 귀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피를 흘렸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그 피의 대가를 청국에 청구하려는 겁니다."
"그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조선은 귀국과의 동맹이 승전으로 이어지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귀국의 요구사항에 이의가 없습니다. 귀국도 일본의 요구사항을 문제 삼지 않았으면 합니다만."
"알겠습니다. 그리하시지요."
이선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본심은 아니었다.
"배상금으로 일본은 은 3억 냥을 요구합니다."
"조선은 1억 냥을 요구할 생각입니다."
모두 4억 냥. 청나라의 1년 예산이 은 8000만 냥이니, 5년 치 예산을 요구하려는 것이었다.
가혹한 요구였다. 일본은 전시 특별예산으로 2억 엔을 지출했는데, 3억 냥은 4억 5000만 엔에 해당하니 그 두 배 이상을 받아내겠다는 셈이었다.
재정이 열악한 조선은 일본이 지출한 비용의 훨씬 적은 액수를 전비로 소모했다. 조선의 전비는 합의에 따라 상당 부분 일본이 부담했다.
그에 비하면 1억 냥은 분명 과도한 액수였으나, 조선은 유무형의 인적·물적·역사적 손실을 청나라에 청구할 생각이었다. 이는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필요한 자금이었다.
조선과 일본 전권위원은 요동을 어떻게 분할할지를 놓고 지도를 보며 논의했다.
바다에 면한 요동의 서남쪽은 일본이, 육로로 이어진 동북쪽은 조선이 분할하는 식이었다.
요하 동쪽 우장, 해성, 영구에서 시작해 황해에 면한 반도에 해당하는 부분은 일본이, 압록강에서 안동과 봉황성을 지나 안산과 요양에 이르는 지역은 조선이 요구하기로 잠정 합의했다.
"좋습니다. 이제 양국 간 합의가 이뤄졌으니, 본격적으로 협상이 시작되면 합의한 사항을 청국에 요구하도록 합시다."
"하하, 우리의 단합된 모습에 이홍장이 얼이 빠지겠군요."
"청국이 그동안 동양에서 군림하려던 대가를 지불해야지요, 하하하."
"앞으로 동양평화는 우리 두 나라에 달렸습니다."
이선과 김옥균, 이토와 무쓰는 협의안에 만족감을 표하며 술잔을 부딪쳤다.
하지만 웃는 낯과 달리 속내는 달랐다.
'이렇게 된 이상 일본이 청과 열강의 어그로를 끌게 하고, 조선은 그 사이에서 이익을 누려야겠군.'
외교는 국가의 이익을 관철할, 또 다른 전장이었다. 시모노세키는 조선의 새로운 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