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211화 (210/812)

211화 아버지와 아들

각의에서는 밀서에 대해 비밀을 유지하고, 극비리에 조사하도록 결정했다.

문제는 사실을 입증할 방법이었다. 현재 유일한 증거는 대군주가 썼다는 밀서뿐이고, 증언자는 이홍장이었다.

정황과 심증은 있어도 확실한 물증은 없었다.

"폐하께 고하여 사실을 확인하는 게 좋겠으나 신하 된 도리로 군주께 시시비비를 가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김홍집과 온건파 대신들은 방법을 고민했지만, 그들 역시 군주에 대한 실망이 컸다.

유학을 익힌 이들로서는 충성을 맹세했던 군주가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는 생각과 동시에, 대군주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의심도 들었다.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오. 차체에 반드시 헌정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야 합니다."

김옥균과 개화당 각료들은 밀서를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였다.

승전으로 인해 고조된 여론, 완화군에 대한 국민적 신망, 문명과 진보에 대한 열망.

개화당은 그동안 구상하던 군민 공치, 입헌 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장애가 될 만한 사항이라면 대군주와 왕실, 보수파들의 반대지. 이를 선제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요."

이선은 사실관계만 말하고, 각의 내내 거의 침묵만 지켰다. 아무리 정부의 실질적인 지도자라지만, 군주의 장자라는 처지에 함부로 나서기가 어려웠다. 조선 사회에서 여전히 유교적 명분론은 중요했다.

'조선이 근대화로 나아가고 있다마는, 500년 동안 쌓여온 유교적 토양을 한순간에 부정할 수 없다. 정권의 안정성 자체가 흔들릴 수가 있어.'

이선은 사흘간 조정에 나가지 않고 자택에 칩거했다. 자신은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과연 곧 반응이 왔다. 운현궁에서 이선을 불러들인 것이다.

대원군의 부름을 받은 이선은 운현궁에 이르렀다. 대원군의 손자이자 이재면의 장남, 궁내부 협판인 이준용(李埈鎔)이 이선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완화군 형님. 할아버님께서 형님을 급히 찾으십니다."

"급히 찾으시다니, 어인 일인가. 국태공께서는 무탈하시겠지? 얼마 전에 문안드렸을 때만 해도 평안하셨는데."

"건강은 심려치 마십시오. 오늘은 나라의 일로 부르신 겁니다."

이선과 이준용은 사촌 간으로 이선보다 두 살 아래였다. 본래 대원군이 총애하는 손자는 이선이었지만, 그가 정부의 중책을 맡게 되면서, 대원군을 모시는 일은 주로 이준용의 몫이었다.

"할아버님, 완화군께서 오셨습니다."

"들라하라."

이선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대원군이 꼿꼿한 자세로 맞이했다. 대원군의 나이 일흔다섯, 전과 비교하면 많이 노쇠했지만 특유의 눈빛만큼은 여전히 형형했다.

"할아버님께 문안 올립니다. 기체후일향만강하셨는지요."

이선이 절을 올리자 대원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좋다. 준용이는 나가 있거라."

"예."

단둘이 남자, 대원군의 표정이 굳어졌다.

얼마 전까지 대원군은 이선을 칭찬해 마지않았다. 귀국한 후 운현궁에 승전과 강화조약을 알리자 대원군은 크게 기뻐하며 외쳤다.

"과연 내 손자로다! 나는 네가 이 나라 조선을 흥하게 하리라 믿었느니라!"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너는 일을 어찌 그런 식으로 하느냐?"

"예?"

대원군의 어조가 더욱 엄해졌다.

"주상의 밀서 말이다. 그런 중차대한 일을 어찌하여 내게 먼저 알리지 않고 조정에 먼저 알렸느냔 말이다."

극비로 정해진 사안을 대원군이 알고 있었지만, 이선은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이준용이 알렸겠군.'

정부와 왕실 내에 발이 넓은 이준용은 대원군의 눈과 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라의 중차대한 일이니, 마땅히 내각에 알리는 게 수순 아니겠습니까."

이선이 유유히 답하자 대원군이 탁자를 내리쳤다.

"왕실의 일이다! 주상이 밀서를 보냈든 보내지 않았든, 조정 대신이란 자들이 군주를 어찌 생각하겠느냐? 대체 왕실의 권위가 어찌 되겠느냐 말이다!"

이선이 왕실보다 국가를 더 중시했다면, 대원군에게 국가란 곧 왕실이었다.

"승전으로 인해 왕실의 권위가 그 어느 때보다 드높은 시기이옵니다."

"그래, 맞다. 왕의 장자인 네가 승전을 이끌어 왕실의 권위를 끌어올렸다. 효종 대왕 이래 오랜 숙원을 풀었으니, 네 업적은 누구와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 주상이 그 권위를 스스로 깎아먹은 셈이 아니냐!"

대원군은 한탄하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 밀서의 진위는 어찌 되느냐?"

"제가 이홍장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작년뿐만 아니라 1883년과 1885년에도 밀서가 전해졌다는 말에, 대원군은 옛일을 상기시켰다.

"주상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임오년 군란의 일을 기억하느냐?"

"어찌 잊겠습니까?"

"그때도 주상의 밀사를 자처한 자가 청군의 개입을 요청하려다 인천에서 잡히지 않았느냐. 주상이 부정하여 민겸호와 민영준에게 그 죄를 물어 역적으로 다스렸지."

대원군은 냉소를 흘렸다.

"하지만 난 주상을 잘 알고, 그 역적놈들도 안다. 그놈들은 모리배일 뿐 나라를 뒤엎을 만큼 간 큰 놈들은 못 돼. 주상이 직접 쓰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 주상의 묵계 정도는 받았을 거다."

대원군은 임오년 청병의 배후에도 대군주이리라 추측했다. 단지 그때도 필요에 따라 눈을 감아줬을 뿐이었다.

"이제 때가 무르익었으니, 끝을 볼 때가 된 것 같구나. 어쩌면 이 늙은이에게 주어진 마지막 소임일지도 모르겠군. 이 일은 내게 맡기도록 해라."

대원군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어찌하시렵니까?"

"일단 외부에는 드러나지 않게 주상을 추궁해야지. 조정이 나서기 전에 왕실이 먼저 해결해야 한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으니 오늘 바로 입궁해야겠군."

이선은 일단 대원군에게 맡기기로 했다.

대원군의 힘이 예전만 못하다고는 하나 여전히 왕실의 큰어른이었고, 그를 따르는 사람은 많았다. 무엇보다 유교적 명분론 아래에서도 대군주가 부담감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좋다, 함께 가자."

저녁에 대원군과 이선은 경복궁으로 입궁했다. 대군주는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에 중전 김씨는 함께 있었다.

"폐하, 국태공과 완화군 입시옵니다."

"뫼시거라."

대군주는 의아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찾은 건 오랜만의 일이었고, 하물며 이 시간에 완화군과 함께 찾은 것은 드문 일이었다.

"폐하, 강녕하시옵니까?"

부친이지만 신하의 신분인 대원군이 먼저 아들이자 군주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덕분에 강녕합니다. 태공께옵서는 평안하신지요?"

"주상의 성은 덕에 무탈합니다."

대군주에 이어 중전도 대원군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대원군은 인사를 받은 후, 중전에게 말했다.

"신이 급히 강녕전을 찾은 건 국가와 왕실의 중대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황공하오나 중궁전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켜주셨으면 합니다."

중전은 대원군의 위압적인 태도에서 불안감을 느꼈지만 순응했다.

"아녀자가 어찌 국가의 중대사에 관여하겠습니까? 신첩은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옛 중전 민씨 같으면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대원군의 독단을 막고 남편의 곁에 남았겠지만, 중전 김씨는 순응하고 물러섰다. 그녀는 폐비의 사례를 보면서,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게 미덕이라고 여겼다.

"폐하, 심기를 굳건히 하시옵소서."

뭔가 불길한 일이 터질 것이라는 직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이었다.

대원군은 왕실의 중대사를 내세워 내관도 물러나게 하고, 궁인의 접근도 막았다.

강녕전에는 오로지 대군주와 대원군, 완화군만 남았다. 대원군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 어찌하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대체 그 무슨 말씀입니까?"

대군주가 되묻자, 대원군은 이선에게서 서한을 받아 전달했다.

서한을 읽는 대군주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이게 무엇입니까?"

"누군가 성상의 명의를 팔아, 청국에 조선을 정벌해 달라고 요구하는 문서가 아니겠습니까?"

"어떤 놈이 감히 이따위 괴문서를 만들었단 말입니까? 대체 이 서한의 출처가 어딥니까?"

"청국 이홍장이 강화회담에서 전달한 문서라고 하더군요."

임금이 목소리를 높였다.

"만청 오랑캐가 전쟁 명분을 얻으려고 이따위 거짓 문서를 만들다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입니다."

"이런 일이 이번 한번이었다면 신도 그렇게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이홍장의 말에 따르면, 계미년(1883)과 을유년(1885)에도 총리아문과 북양관저에 비슷한 내용의 밀서가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조선에서 정치적 변화가 있었던 직후의 일이더군요."

"모두 거짓입니다! 이홍장 이 자가 전쟁에서 지고 나더니 추악한 수작으로 조선의 군신을 이간하고 승리를 더럽히려고 하는 게 아닙니까!"

임금은 거듭 부정했지만, 대원군은 차갑게 웃었다.

"임오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요. 그때도 청병의 개입을 요청하는 밀사가 잡혔지만, 주상께서는 부정하셨고 신은 묵인하였습니다."

"그, 그건 역적 민겸호와 민영준이 짐의 명의를 도용하여 처벌받은 일이 아닙니까?"

"폐하, 그건 신이 그렇게 믿어드렸지요. 왕실의 권위를 위하여. 하지만 계미년의 일은 어찌 설명하시렵니까? 신도 그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 그 무슨 말씀입니까?"

"사가에 숨어있던 폐비 민씨가 사람을 보내 주상과 접촉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청국에 밀사를 보낸 게 아닙니까? 그럼 시기가 딱 맞아떨어집니다."

순간 이선은 대원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도 금시초문이었다.

"대체 언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네가 보빙사로 미국에 갔었을 때의 일이다. 구태여 알릴 필요가 없어 통보하지 않았다."

대원군은 다시 임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폐하, 폐하와 신은 모두 다 알고 있습니다. 더는 감추려 두지 마십시오. 다른 자들이 알면 왕실의 권위가 어찌 되겠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다 말하십시오, 이 자리에서."

순간,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던 대군주의 감정이 무너졌다.

"그럼 아버님께서는 무얼 잘하셨습니까? 난군의 무리를 선동하여 궐을 침범해 임금을 겁박하고 중전을 죽이려 들고, 정권을 탈취하지 않았습니까! 중전을 폐한 것도 모자라, 절에 가둔 채 치료도 하지 않아 죽는 날만 기다려두게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명색이 임금이거늘, 궐 안에 앉아 신하들의 강압에 이끌려 옥새만 찍는 신세로 전락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래서 청국의 힘을 빌려 정권을 되찾으려고 하셨습니까? 주상을 위해 역적을 토벌하려는 국내의 충신이 하나도 없었단 말입니까?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대원군은 완전히 빈정거리는 어조였다. 하지만 한번 터진 대군주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

"조정도, 군권도, 여론도 모두 아버님의 손에 들어갔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나는 천명을 받들어 종묘사직을 계승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은 단지 임금의 생부라는 이유로 권력을 차지했습니다. 내가 장성하여 친정한 후에도, 끝내 그 권력욕을 포기하지 못해서! 난군이 궁궐을 침범하고 권력을 탈취하는 짓까지 저지른 거 아닙니까?"

"그러니 주상이 나라를 다스릴 그릇이 못 된다는 거요!"

대군주의 분노에 대원군이 노성을 터뜨렸다.

"대저 저 임오년 난군의 무리가 왜 봉기했소? 왕실에 충성하는 군인들의 급료를 1년이나 주지 않아 그 사단이 일어났소. 도성의 빈민들은 왜 가담했소? 수탈로 인해 백성들이 분개하였기 때문이오. 대체 그 수탈은 누가 저질렀소? 주상의 총애를 받는 폐비 민씨와 그 일족들이 저지르지 않았냔 말이오! 폐비와 민씨 일파들은 당연히 그 책임을 진 것뿐이오!"

대원군의 말은 이미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꾸짖는 어조였다.

"좋습니다. 그게 다 내 부덕의 소치입니다. 통절하게 반성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이 나라 조선은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난군이 궐을 침범하여 정권을 탈취하고, 신하가 군주를 겁박하여 허수아비로 만들었으니, 이는 법도에 맞습니까?"

유교적 명분론하에서 대군주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시대는 변해있었다.

"완화군의 나의 장자라고는 하나, 왕자가 군주를 제치고 국가를 다스릴 권리 같은 건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님께서는 완화군에게 정권을 물려주셨지요. 대체 왜 그런 것입니까? 완화군이 해외에서 불법적으로 양성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고, 아라사를 비롯한 서양 열강들과 친밀하니 그런 것 아닙니까? 내가 군주의 정당한 권위를 되찾기 위해 청국에 호소한 게 죄라면, 권력을 잡기 위해 아라사를 끌어들인 완화군의 행위는 대체 무엇입니까!"

이선이 반박하기 전에, 대원군이 나섰다.

"자, 보시오! 주상이 다스린 10년과 완화군이 다스린 10년을 비교해 보란 말이오."

대원군은 대군주의 친정 10년과, 갑신경장 이후 10년을 비교했다.

"주상의 10년은 임오년의 파탄으로 끝이 났소. 하지만 완화군의 10년은?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고, 군대는 강성해졌으며, 마침내 조선을 억압하던 청국을 무찌르고 자주독립을 쟁취했소. 열성조의 원한을 갚고, 영토를 할양받고, 배상금까지 얻었으니, 그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위업이란 말이오!"

"왜 내게는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 나라의 군주는 바로 나란 말입니다! 나도 군주로서 잘해보고 싶었습니다. 왜 내가 다스렸으면 흥하지 않고 망국으로 갔으리라 보십니까? 왜 아버님은 나를 군주로 인정하지 않고, 아들마저도 나를 무시하는지!"

순간 이선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분명 망국으로 갔겠지만,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군.'

"내 치세 30년 동안, 내가 온전히 다스린 기간은 10년이 채 안 됩니다. 아버지도 모자라, 아들에게까지……!"

대군주는 분노와 열등감, 회한으로 몸을 떨었다.

대원군과 대군주, 대군주와 완화군. 아버지와 아들 간에 계속된 투쟁.

30년, 3대에 걸쳐 반복된 투쟁은 끝을 보이고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