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214화 (213/812)

214화 천명

이선의 말을 끝까지 들은 대원군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서양 사정이야 네가 나보다 더 잘 알겠지. 여기가 서양이라면 네 말이 옳을 수도 있고. 하지만 여기는 조선이다."

"동서양의 문제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세계적으로 전제정의 수명은 20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선은 1910년대에 세계의 전제정이 대부분 몰락하는 걸 염두에 두고 있었다. 20세기 초를 주도할 국가들은 의회제 국가였다.

"미사여구 집어치우고, 정치의 본질은 권력을 어떻게 잡고 유지하느냐다. 너는 그걸 간과하고 있어. 내가 10년 동안 권력을 쥐고 있었음에도, 한순간에 무너졌음을 잊지 마라."

"송구한 말이오나 그건 합법적 권위가 부족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할아버님께서 단지 임금의 생부라는 이유로 집정을 하고 있으니 임금의 동의가 사라지는 순간 무너질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왕의 절대적인 뜻이 아니라, 헌법과 의회를 통해 합법적인 권력을 구축하겠다는 것입니다."

"네 말대로 5년 내로 입헌정치를 실시한다고 치자. 선거라는 것도 하겠지? 의회에서 다수파가 되지 않으면 어찌할 거냐? 순순히 반대파에게 정권을 내줄 거냐?"

"그게 민의에 기초한 것이라면 따르는 게 도리입니다만, 적어도 당분간은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선은 대원군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헌정이라고 해도 정부가 정책을 주도하고, 의회는 견제기구로서 법안과 예산을 심의한다.

입헌군주제라 할지라도 정당 체계가 아직 미약하므로 영국식 의회 다수당이 아니라, 군주가 수상을 임명하여 정부를 조직하는 프로이센식을 채택할 생각이다.

선거권은 당분간 도시 중산층과 지식계층으로 한정한다. 선거권의 범위는 차츰 확대하고, 보통선거는 2~30년 뒤로 생각하고 있다.

정부는 승전으로 일궈낸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중단 없는 개혁에 나서고, 민의를 대표하는 의회는 이를 보조한다.

"이런 상황에서 왕실은 민심의 지지 위에서 만대에 이를 것입니다."

"아까 들었을 때보다 훨씬 듣기 좋군. 그래도 본질은 결국 개화당이 계속 집권하면서 권력을 내려놓지 않겠다는 거 아니냐. 도시 주민들이나 지식인들은 개화당을 계속 지지할 테니까."

"지금보다는 훨씬 합법적이고 대중적인 권위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네가 군주가 되면 더 압도적인 권위를 누리지 않겠나?"

"너도 우리 왕조의 역사를 알겠지. 태조 대왕께옵서 즉위하시기 전, 모든 걸 그만두고 고향인 동북면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신 일이 있다. 당연히 가신들이 이를 결사적으로 만류했지. 태조께서는 결국 뜻을 꺾고 개경에 남아 대업을 이어나가셨다."

대원군은 왕조 창립 시기를 상기시켰다.

"정도전과 조준 등이 고려 공양왕의 선위를 받아냈을 때 태조께서는 잠저(潛邸)의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신하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간 후에도, 덕이 부족해 자격이 없다고 수차례 사양했지. 이게 과연 겸양의 뜻이겠느냐, 본심이었겠느냐?"

이선은 생각하는 바가 있었지만, 대답을 보류했다.

"후손 된 입장에서 쉽게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내 생각은 이렇다. 태조께서는 본래 무장이셨으니, 때로는 동북면으로 돌아가 자유롭게 사는 날을 꿈꾸셨을 것이다. 500년 고려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나라의 왕이 된다는 건 어찌 부담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바로 천명을 계승한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인의 추대를 거부하지 않으신 게다!"

대원군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 우리 왕조는 오랜 세월에 걸쳐 이 나라를 다스려왔다. 다시 5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중국을 무찌르고 새로운 천명이 도래했다. 바로 그 천명이 너를 통해 구현되었거늘, 어찌하여 마다하느냐? 왜, 아비를 몰아내고 아우를 겁박하여 옥좌에 앉기는 싫단 말이냐?"

이선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할아버님, 그런 명분론적 이유도 분명히 있습니다. 저는 왕조사에 왕실의 불행을 하나 더 추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태종 대왕께서도 부왕을 몰아내고, 아우를 죽였다. 당대의 관점에서 보면 패륜이라 하겠지. 하지만 왕조의 기틀을 세우는 빛나는 업적을 세우셨다. 태종의 업적이 아니었더라면, 세종 대왕의 빛나는 치세가 있었겠는가! 대체 무엇을 망설이는 게냐?"

"제가 군주가 되면 오히려 제약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는 외교인데 왕관을 쓰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실질적으로 국가에 이바지하고 싶습니다."

이선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가 없을 경우에도 대비해야지요. 군주 혼자 만기친람하는 것보다 유능한 관료제와 민의를 대표하는 체제를 구축해 정권의 안정과 지속성을 보장하는 게 더 좋습니다."

대원군이 웃음을 흘렸다.

"허! 서른도 안 된 놈이 늙은 할아비 앞에서 제 죽고 난 후의 일을 염려하니 우습구나."

"송구스럽습니다. 하오나……."

"됐다. 이 늙은이야말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야말로 안심하고 죽을 수 있도록 할 생각이다."

대원군은 대화를 끝냈다. 이선이 예를 표하고 자리에서 물러나려는데 대원군이 불러 세웠다.

"완화군."

"예?"

"이 늙은이가 정치를 몇 년이나 했다고 생각하느냐?"

"30년이 넘었지요."

"그렇지. 네가 살아온 세월보다 더 길다. 하지만 막후공작을 한 시기를 합치면 그보다 더 길다."

대원군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더니, 손짓하며 물러가란 뜻을 보였다.

자택으로 돌아온 이선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고질병인 불면증이 개전 이후 점점 심해져서 밤에 잠을 제대로 자는 날이 드물었다.

그 날은 하지(夏至)라서 유독 해가 길었다. 이선은 잠들지 못한 채 아침 해를 맞이했다.

오전이 되자, 내각의 동의를 얻은 이선은 강녕전에 사실상 유폐된 부왕을 찾아 마지막 설득하려 했다.

이선이 제복으로 갈아입고 입궐을 준비하던 차에 군복 차림의 사내들이 이선의 자택으로 몰려들었다.

"군무대신 각하!"

이들은 원수부와 근위사단의 영관급 장교들이었다. 신식 군제교육을 받은, 이번 전쟁의 실질적인 공로자들이었다.

"뭔가?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나?"

장교들이 서로 눈짓을 보내더니 일제히 함성을 외쳤다.

"우리의 지도자, 완화군 만세!"

"군부는 군무대신 각하께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하는 바입니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이선은 상황이 대략 짐작이 갔다. 그들의 면면을 보니, 서재창, 신응희, 유혁로, 이규완, 정난교 정령을 필두로, 대부분 개화당 파벌에 속한 이들이었다.

"대체 이게 뭐 하자는 건가? 군부 내에 사적인 파벌을 형성해 개인에 대한 충성을 공공연히 외치다니! 그대들은 국가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나? 그러고도 조선의 군인이라고 할 수 있나?"

이선은 버럭 역정을 냈다.

"각하, 군부 내에 개전을 앞두고 대군주께서 청 황제에게 밀서를 보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 군인들은 조선과 대군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는데, 통수권자이신 대군주께서 적국과 내통했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누가 그런 소문을 퍼트렸나? 유언비어에 동요되지 말라고 선포한 게 군부인데 군부의 근간인 그대들이 유언비어에 동요되면 어떡하란 말인가!"

그때, 장교들 뒤에서 김옥균과 박영효가 모습을 드러냈다.

"군 대감, 이들의 충정을 너무 꾸짖지 마십시오. 이들은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모인 것입니다."

"하, 경들이 소문을 냈소? 내각에서 비밀로 하자고 해놓고서 각의에 참석한 경들이 소문을 내다니!"

"저희는 아닙니다. 궁내부 협판 이준용 공이 군부의 장교들에게 알렸습니다."

이선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대원군께서 손을 다 쓰셨구먼."

전날 저녁. 이선이 운현궁을 나선 후, 이준용은 즉각 움직여 개화당 계열 장교들을 만나 밀서 건을 퍼뜨렸다.

이준용이 밀서의 내용을 알리자, 장교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게 정말입니까?"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왜 군무대신께서는 가장 먼저 그 사실을 파악하시고도, 공개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이준용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완화군은 대군주의 장자요. 신자(臣子) 된 도리로 군부(君父)의 잘못을 어찌 지적할 수 있겠소? 완화군께선 충효가 지극하니, 차마 밝힐 수가 없는 일이겠지요."

"허어, 이런……."

"오히려 불충불효 하였다고 자책한 완화군께서는, 내일 아침에 대군주를 알현하고 스스로 정부와 군직에서 물러나시려 한답니다."

이준용의 선동은 근거 없는 것이었지만, 장교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뭣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군무대신께서는 승전의 최대 공로자이신데,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완화군은 내 사촌 형님이시오. 그분의 훌륭하신 성품은 내가 잘 알지. 고민으로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할 정도요. 그러니 완화군과 함께 전선을 누빈 충용한 군인인 경들이, 그 고뇌를 덜어 드려야 하지 않겠소?"

'완화군이 밀서 사건으로 오히려 대군주에게 대죄(待罪)하고 사직하려 한다.'

라는 이준용의 선동은 효과가 있었다.

그날 밤 즉시, 개화당 계열 장교들이 모여 완화군에 대한 충성과 궐기를 다짐했다.

"완화군은 승전의 영웅이시네. 결코, 물러나게 둘 수 없네."

"애초에 밀서를 보낸 게 대군주라면, 대군주가 책임을 져야 하지 왜 완화군이 물러나야 한단 말인가?"

"우리가 믿고 따른 건 완화군인데, 그분이 이렇게 물러나면 우린 어쩌란 말인가?"

"누가 군무대신으로 임명되느냐에 따라 군부가 물갈이될 수도 있겠지."

"그럴 수야 있나?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만 볼 수 없네."

다음날 새벽, 일단의 장교단은 먼저 외무대신 김옥균의 집으로 몰려갔다.

사태를 파악한 김옥균은 장교들의 충정을 높이 평가하며 진정을 요구했다.

"여러분의 충정에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군무대신께서 물러난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동요하지 말라."

"그렇다면 대군주의 밀서는 어찌된 것입니까?"

"외무대신께서도 시모노세키에서 이홍장이 공개한 밀서를 직접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김옥균은 답변이 궁색해졌다.

"아직 진위는 확실히 파악되지 않았다. 제군은 정부를 믿고 조사 결과를 기다려 주길 바란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우리는 정부의 명령을 기다리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군무대신 댁으로 가세. 대군주를 알현하는 걸 막아야 하네!"

임기응변에 능한 김옥균은 재빠르게 방향을 전환했다.

"제군의 의견이 그렇다면, 내가 앞장서도록 하겠다. 제군은 안심하고 나와 함께 가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김옥균은 장교들을 다독인 후, 박영효에게 사람을 보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내무대신께서 순검을 동원해 경복궁과 완화군 사저를 호위하도록 하라 전하게."

그리하여 일단의 장교단이 완화군 사저에 몰려들고, 이윽고 순검들도 나타나 사저 주위를 경비했다.

때 아닌 불청객들의 출현에, 이선은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을 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금릉위 대감, 대감은 여기 있지 말고 궁으로 돌아가 이준용을 단속하십시오. 이준용이 쓸데없는 소리를 계속 떠벌리면 곤란해집니다."

박영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준용이 정국을 주도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하겠습니다."

이선은 장교들에게 외쳤다.

"내가 사직한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그대들은 분별없이 거짓 소문에 놀아나 이런 사달을 일으키는가! 차분히 원대로 복귀하라."

"이미 저희는 군무대신께 충성을 맹세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궐기하기로 다짐한 바입니다!"

"그렇습니다! 근위사단 장병들도 각하께 절대적인 충성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정말로 이선의 명령 한마디면 군대를 동원할 기세였다. 장교들이 고집을 부리자, 이선은 역정을 냈다.

"그래서 뭐, 이대로 군사반란이라도 일으키자는 건가? 명색이 근위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 궁이라도 쳐들어갈 생각인가?"

"그건 아닙니다. 다만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복귀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장교들은 그대로 저택 마당에 주저앉았다.

그때, 숙원 이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벽부터 여기까지 왔으니, 여러분의 노고가 많습니다. 밥이나 한 끼 먹고 잠시 쉬도록 해요. 완화군이 잠시 생각할 시간은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숙원이 직접 하녀들을 대동해 식사를 제공하자 장교들은 황공해 하며 받았다.

이선은 어머니에게 감사를 표하고, 장교들이 식사하는 사이 김옥균을 방 안으로 불러들였다.

"가관이군! 아주 잘하는 짓이오! 전쟁에서 한 번 이기고 나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나? 장교들이 사사로이 파벌을 형성해 개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상관의 명령도 듣지 않고 궐기하겠다니! 군사정변이라도 일으키겠다는 건가? 고균이 저들을 선동했소?"

"지나친 말씀이십니다. 저들은 순수한 충정의 마음으로 움직인 것입니다."

"저들 대부분은 개화당원이 아닌가! 고균이 몰랐다는 게 말이 되오?"

"진짜로 몰랐습니다. 저도 오늘 새벽에 알게 되어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이선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래, 이미 엎질러진 물이군. 의견이나 들어봅시다. 앞으로 어찌할 거요?"

"저들이 파벌을 형성해 개인에게 충성을 맹세한 게 문제라고 생각하신다면, 군부의 지지를 한 몸에 얻는 분이 통수권자의 자리에 오르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대로 근위사단을 이끌고 경복궁으로 들이치라, 뭐 그런 말인가? 임오군란이라도 재현하자고?"

"그건 아닙니다. 그럼 뒷감당이 너무 어렵지요. 제게 맡겨 주시면……."

이선은 김옥균의 말을 끊었다.

"좋소. 일단 우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봅시다. 앞으로의 정국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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