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221화 (220/812)

221화 북방으로 가는 길

가을이 되어 콜레라는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평양에서 방역 대책을 진두지휘한 이선과 방역 위원회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종결 선언을 했다.

"제2의 평양전투, 또다시 승리로 이끌다!"

"만청 오랑캐에 이어 호열자도 격퇴!"

"방역위원회와 의사들에게 경의를!"

"새로운 조선에 패배란 없다!"

"승리의 지도자, 완화군!"

이선과 방역위원회의 활동을 치하하는 언론 보도가 쏟아졌다. 조·청·일 전쟁의 평양 전투 승전에 비견하는 보도가 끊이지 않았다.

왕족과 정부 인사가 직접 역병이 도는 지역으로 나아가 적극적인 방역 대책을 세운 건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평양 주민들은 자신들이 직접 눈으로 보았기에 더 잘 알고 있었다.

"호열자를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완화군 대감 덕분이다!"

"완화군 대감 만세!"

이선이 머무는 평안남도 관찰사 관저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칭송과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이선은 밖으로 나와 대중에게 답례했다.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한 호열자가 진압되어 다행입니다. 병마로 목숨을 잃은 이들에게 조의를 표하고, 병석에 누운 이들에게 정부는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호열자가 이 땅에 다시는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몰아냅시다."

"와아아아!"

"대조선 만세! 완화군 만세!"

"하지만 내가 칭송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방역 일선에서 활약한 의사와 관리들이 칭송을 받아야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노고를 아끼지 않은 이들에게 진심 어린 경의를 표합니다."

이선이 의사와 관리들에게 칭송을 돌리자 주민들도 일제히 손뼉을 치고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다.

평양 주민들이 ‘한양에서 보낸 관리들’에게 이토록 고마워하며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선의 행동은 그 기준에서 당연하였지만, 주민들은 깊은 감동과 존경심을 느꼈다.

"고귀하신 왕족과 지체 높은 대신들이 직접 왕림해서 역병에 대처하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그 공을 아랫사람에게 돌리다니."

"길티, 완화군 대감은 다르디."

"충성하지 않을 수가 없군 기래."

이선도 평양 주민들이 자신에 대한 지지가 유독 강하다는 걸 체감하고 있었다.

개혁을 수행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전국적으로 이선에 대한 존경과 지지가 강했다.

그중에서도 평양이 유독 지지가 강한 건, 역시 이선이 몸소 평양 전투와 방역 대책에 최선을 다한 덕이었다.

멀리서 소문이나 신문을 통해 듣는 것보다 직접 눈으로 보는 것만큼 확실한 길이 없었다.

"평양은 옛 조선과 고구려의 도읍이었습니다. 평양이 우리 민족의 수도였을 때, 국력이 가장 강성한 시기였습니다. 중국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이 땅은 침략자의 무덤이 되었습니다. 작년 전투처럼 말이지요."

이선은 평양의 관리와 군인, 유지와 상공인들이 모인 환송연에서 옛 역사를 상기시켰다.

"이번 독립 전쟁은 실로 고구려의 위대한 역사를 계승한 것입니다. 마침내 천년 만에, 북방으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나는 북방을 대조선의 새로운 터전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평양이 바로 그 중심지가 될 곳입니다!"

"오오!"

"대조선 만세!"

"가자, 북으로!"

"고구려의 영광을 재건하자!"

이선의 연설은 평양 사람들에게 큰 자부심을 주었다.

지금껏 조선 왕조는 제후국의 신분에 만족하며, 역사적 실체가 불분명한 기자(箕子)를 조상으로 내세웠다. 평양에 조성되어 있는 기자릉이 바로 그 증거였다.

조선왕조는 단군과 기자를 조상으로 여기고 제사를 올렸다. 특히 군주로서 ‘성인의 교화’를 실천했다고 여긴 기자는 숭배 대상이었다.

청나라와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조선은 자연스럽게 기자를 지워 버리고 단군과 주몽의 후예를 자처하기 시작했다. 광개토대왕과 을지문덕, 대조영과 강감찬이 민족의 위대한 조상으로 소환되었다.

요동 정벌에 성공한 이후 고구려와 발해를 계승하자는 여론이 더욱 쏟아졌다.

‘현실적으로 고구려를 재건하는 건 무리지만, 제국주의 시대에 조선이 나아갈 길은 북방뿐이다.’

이선에게 고구려를 재건하겠다는 환상은 없었다. 발흥하는 민족주의적 여론을 만족시키기 위해, 고구려라는 역사적 상징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기존 영토에 영원히 안주할 생각도 없었다. 해양으로 나가는 길은 영국과 일본에 막혀 있고, 조선이 팽창할 수 있는 지역은 북쪽뿐이었다.

19세기 말, 때는 제국주의 시대. 힘이 곧 정의고 약육강식이 정당화되는 시대였다. 조선은 막 약자에서 강자의 말단에 끼게 되었고, 이제 열강과 협상할 수 있는 ‘국제적 시민권’을 얻은 셈이었다. 이선은 그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평양은 북방으로 나아갈 중요한 요지. 앞으로 집중적으로 육성해야 하오."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상징성을 배제하더라도, 평양의 잠재력은 충분했다.

조선 제2의 도시, 발전한 상업, 유리한 교통, 평야와 넉넉한 배후지.

장차 북방으로 국력을 투사시킬 조선의 새로운 중심지로 성장하기에 충분한 잠재력이 있었다.

"전쟁으로 파괴된 평양을, 근대적 도시로 탈바꿈합시다."

500년 수도로 조선 왕조의 오랜 전통을 보존해 온 한양을 완전히 뜯어고친다는 건 불필요한 일이었다. 한양의 근대적 변모도 착착 진행 중이었지만, 이런저런 제약이 많았다. 한양에는 워낙 많은 기득권이 얽혀 있었다.

하지만 평양은 달랐다. 근대적 도시계획을 시행하기에 충분한 환경이었다. 전쟁과 전염병으로 손상된 평양 일대를 근대적 도시로 재건할 생각이었다.

북진정책을 국시로 삼은 고려가 평양을 서경으로 부르며 ‘제2수도’로 삼은 것처럼, 북방의 중심지로 육성할 계획을 세웠다.

"갑시다, 북으로."

전염병이 진정된 후 이선은 시찰을 이어나갔다. 새로 확보한 북방 영토가 시찰 대상이었다.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할양된 영토는 3개월간의 국경 조사 끝에 1895년 8월 15일 정식으로 조선에 통치권이 이양되었다.

압록강 너머 요동에 약 2,2000제곱킬로미터, 두만강 너머 간도에 약 33,000제곱킬로미터.

도합 55,000제곱킬로미터로, 함경도 전체보다 더 넓은, 기존 조선 영토 4분의 1에 달하는 새로운 영토가 확장되었다.

‘잠재력은 충분하다. 앞으로 조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할 지역이지.’

새 영토는 정치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가치를 갖고 있었다.

고구려의 고토를 수복했다는 정치적 상징성, 청국과의 완충지대를 확보했다는 전략적 가치, 조선에 부족한 귀중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경제적 가치.

‘당면한 문제는 아직 잠재력만 충만한 미개발지역이라는 점인가.’

오랫동안 청조가 봉금령(封禁令)으로 이주에 제한을 걸었던 지역이라, 오랫동안 황무지처럼 남았다.

봉금령 이전에도 한족들이 몰래 들어와 살았고, 1870년대에 봉금령이 해제된 이후에 비로소 한족들이 이주해 들어왔다.

그러나 조선에 가까운 지역일수록 청조의 행정력과 한족 이주는 제한적이었고 그 빈자리를 파고든 게 조선인이었다.

할양받은 길림 동남부, 북간도 지역은 인구의 절대다수가 조선인이었다. 그동안은 불법 이주였지만, 정식으로 조선 영토에 편입되면서 조선의 행정력이 미치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인구는 턱없이 적었고, 대부분이 미개발된 지역이었다. 소수의 만주족 부재지주들은 떠밀리듯 떠났고, 겨우 7만의 조선 이주 농민들이 황무지를 개간 중이었다.

"일단, 이 지역은 함경북도에서 관할하면서 주민의 이주와 발전을 촉진합시다. 세종대왕께서 4군 6진을 개척하던 전례를 고려해 봅시다."

조선 전기, 세종의 4군 6진 개척 이후 영토 확장은 45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선은 아직 갑작스러운 영토 확장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다.

당분간은 국가 주도하에 이주와 개발 정책을 추진해야 했다.

이선이 이 지역에서 가장 눈독을 들이고 있는 곳은 훈춘과 화룡 일대의 탄광이었다. 훈춘과 화룡 탄광은 한반도에는 극히 드문 유연탄을 보유하고 있어, 산업 발전에 꼭 필요했다. 이선은 바로 탄광 개발에 착수하도록 했다.

압록강 너머 봉천성 동남부, 요동 지역은 문제가 달랐다. 이 지역은 어느 정도 개발된 지역이었으나, 동아시아 전쟁의 주전장이 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다.

수만 단위의 조선군과 일본군, 청군의 전투가 계속 이어졌던 곳이고, 특히 청군이 청야 전술을 구사하면서 파괴를 면한 지역이 드물었다.

"일단 재건부터 해야겠습니다. 이 지역은 당분간 평안북도에서 관할하면서, 재건에 노력을 아끼지 맙시다. 우리의 새로운 영토니까."

압록강 이북 요동 지역은 국경 일대를 제외하면 조선인 인구가 드물었고, 소수의 만주족 지주와 다수의 한족 소작농으로 구성되었다. 한족 소작농은 대개 바다 건너 산동 출신이었다.

전선이 요동에 형성되고 전투가 지속하면서, 한족 소작농 대부분은 경작권을 잃은 채 뿔뿔이 흩어졌다. 전쟁이 끝나고 소작농들은 귀환을 도모했지만, 조선 당국은 구태여 이들의 귀환을 허락하지 않았다.

시모노세키 조약은 할양된 영토에 잔류하기로 한 주민의 재산권을 존중해 줬지만, 토지 소유권과 달리 불분명한 토지 관리와 소작은 처분하기 나름이었다.

만주족 지주들은 대부분 잔류를 선택했다. 파괴된 땅이더라도 그냥 내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던 것이다.

"강화조약에 의거, 조선 정부는 현지인의 재산권을 존중하오. 단, 잔류를 희망하는 자는 조선에 충성을 맹세하고, 법률을 준수해야 하오. 세금을 제대로 납부하고, 토지 경작은 청국인이 아닌 조선인에게 맡길 것. 이를 거부하면 추방될 것이오."

만주족 지주들은 새로운 주인인 조선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들의 토지 소유권을 보장받는 대가로, 토지 경작은 이주할 조선인 농민들에게 맡겨야 했다.

만주와 달리 조선은 정부에 의해 소작료가 법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정부는 소작료로 3분의 1을 권유했고, 어떤 경우에도 최대 5할을 넘길 수 없었다.

그동안 소작농들에게 마음껏 소작료를 걷으면서 횡포를 부리던 만주 지주들은 조선 당국의 강력한 조치에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여야 했다.

‘장차 토지개혁으로 소유권에도 대변동이 있을 거다.’

이선은 새 영토에서 만주족 대지주들을 용인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들은 지역에 대한 애착이나 토지를 개발하려는 진취성도 없었다. 그저 고율의 소작료로 농민을 착취하던 ‘악질 지주’의 표본이었다.

당장은 강화조약을 준수하기 위해 소유권을 존중하는 제스처를 보였지만, 조선 영토에 들어온 이상 이선이 구상하는 토지개혁을 피할 수 없었다.

"요양이 눈앞이라. 청인들이 아쉬워할 만하군."

이선은 조청 간의 새로운 국경선인 태자하에 도착하여, 대안에 있는 요양을 바라보았다. 이제 요양은 청의 최전선 도시였다.

할양받은 요동은 면적은 작아도 전략적 가치는 간도보다 훨씬 높은 곳이었다. 그래서 청나라도 이곳만큼은 할양을 피하려고 했고, 삼국간섭으로 요동 반도가 다시 청국에 넘어갈 때 이 지역도 되찾기를 은근히 고대했다.

하지만 이선은 러시아와 협상하여 조선령 요동의 점유를 열강으로부터도 확실히 인정받았다.

"안산은 조선의 새로운 변방이다. 장병 제군은 북쪽 변방을 지키는 간성(干城)이 되어야 한다."

특히 서북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안산의 전략적, 경제적 가치는 컸다. 조선은 종전 후 동원령 해제 후에도 정예 4여단을 안산에 주둔시키고, 조선의 새로운 전선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바로 안산 철광의 개발에 착수했다. 주변국에서 아직 미처 알지 못하는 사실이지만, 안산은 동양 최대 규모의 강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역시 조선의 산업 발전에 꼭 필요한 자원이었다.

‘신영토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키고, 더 나아가 세력권의 확대를 도모하려면, 역시…….’

이선의 시선은 북쪽으로 향했다.

‘러시아와 협상해야겠군.’

러시아는 만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특히 새로 즉위한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만주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선은 차르와 특별한 관계에 있었다.

얼마 뒤인 1896년 5월, 모스크바에서 차르의 대관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이선은 조선을 대표하는 사절단의 단장을 맡기로 했다.

‘만주를 놓고, 러시아와 조선이 이해관계가 겹친다는 걸 설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사절단의 규모는 전례 없이 큰 수준으로 예정됐다. 단순히 차르 즉위를 축하하는 게 아니라, 신진 관료와 청년들에게 서양을 시찰하고 유학할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

차르 대관식에 주목하는 건, 조선뿐만이 아니었다. 청과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러시아가 동양에서 새로운 주축으로 등장했음을 의미했다.

청나라에서는, 이홍장이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러시아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로서는 생전 처음 유럽으로 가는 길이었다.

일본에서도, 총리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사절단을 이끌고 방문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시모노세키 회담에 참석한 3국의 대표가 다시 모스크바에서 재회하는 셈이었다.

동양의 명운을 걸고 하는 외교적 담판은, 시모노세키에서 모스크바로 이어질 예정이었다.

북방으로 가는 길이 활짝 열려 있었다.

- 22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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