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세상을 향해
운현궁은 이선의 생각이 어떻든, 후보로 점찍어둔 여인과 혼례를 추진할 생각으로 보였다.
‘일단 사절단을 다녀온 이후로 미루자고 시간은 벌어 두었지만, 대원군은 한번 마음먹으면 쉽게 포기할 위인이 아니지.’
이선은 얼굴 한번 대면하지 못하고, 대화 한번 나눠보지 못한 채 가문의 뜻대로 혼례를 올려야 하는 전통 방식을 싫어했다.
특히 왕족은 삼간택을 거쳐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직접 개입할 수는 없었다.
‘자유연애에 의한 결혼이 가장 좋은데, 그럴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정착되려면 30년은 필요하겠지.’
겨울의 어느 날, 이선은 중궁전을 찾았다.
사실상 대군주가 유폐되고, 왕태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이래 왕후도 자연히 소원(疏遠)해졌다.
그래도 법적으로 모자간이라, 이선은 정기적으로 중궁전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완화군 입시옵니다."
"안으로 뫼셔라."
이선이 내전으로 들어가 인사를 올리는데, 뜻밖에도 왕후의 곁에 묘령(妙齡)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서로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사진 속의 여인이었다.
여인도 갑작스러운 사내의 출현에 당황해했지만, 누구인지 바로 알아봤다. 국가적 유명인사인 완화군을 모를 리가 없었다.
"소, 소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아닐세. 그대와 모처럼 해후했는데, 이대로 가기에는 아쉽지 않은가."
"그, 그래도……."
여인이 얼굴을 붉히며 거듭 물러날 뜻을 보이자 왕후는 이선에게 시선을 돌렸다.
"괜찮겠지요, 완화군?"
"물론 괜찮습니다."
흔쾌히 답변하는 이선을 보면서 왕후가 칭찬했다.
"역시 완화군은 구례(舊禮)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왕후는 이선에게 여인을 소개했다.
"이 아이는 내 먼 친척입니다. 내게는 삼종질녀(三從姪女)가 되지요."
삼종질녀란 팔촌인 삼종의 딸, 곧 구촌 조카를 의미했다.
"그대에게는 완화군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왕후의 물음에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선에게 인사를 올렸다.
"감히 완화군 대감을 뵙사옵니다."
"뵙게 되어 기쁩니다."
이선은 인사를 주고받으며, 여인을 살짝 쳐다보았다.
한복을 입은 여인의 외모는 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의 미인상에, 현대적이고 서구적인 용모가 섞여 있었다.
여인의 얼굴에는 홍조가 살짝 어려 있었다. 여인이 인사를 마치고 고개를 올리자 서로 잠시 시선이 부딪쳤다.
미혼 여성을 빤히 쳐다보는 건 큰 실례라, 이선은 금세 시선을 돌려야 했다.
"곤전(坤殿)의 삼종질녀가 되시면, 제게도 친척이 되겠군요."
이선과 왕후는 법적으로 모자 관계였으니, 여인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호적상으로는 십촌 관계인 셈이었다.
‘친척이라기엔 사돈의 팔촌급 되는 거리지만.’
"그렇지요. 그리 보면 한집안과 같습니다."
왕후는 기뻐하면서 여인에게 말했다.
"그대가 형제가 없어서 오라비 있기를 소원했었지? 든든한 오라비가 생겼구나."
"화, 황공하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여인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부끄러워했다.
"이 아이는 원체 총명한 데다 내 팔촌 오라버니께서 특별히 아끼시어 교육에 많이 공을 들이셨답니다. 마침 갑신경장 이후 부녀교육도 국가적 과제로 떠올랐으니. 특별히 이화학당에 다니기도 했답니다."
"호오, 이화학당에요. 명문가에선 쉽지 않은 일인데, 대단한 선택을 하셨군요."
1886년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으로 이화학당이 생기긴 했지만, 학생을 모집하는데 애를 많이 먹었다.
서양식 교육에 대한 거부감도 있지만, ‘여자가 배워서 무엇하냐’는 구태의연한 인습적 사고 때문이었다.
국가적으로 의무교육을 강조함에 따라, 새로운 시대에 발 빠르게 적응한 중인 계급에서 여자아이들을 보내면서 여학교도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양반가에서는 언감생심이었다. 전통적으로 부녀 교육을 중시하는 가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에게 여성의 교육이란 유교적 부녀 교육일 뿐이었다.
그런데 여인은 드물게도, 명문가인 광산 김문임에도 서양인이 운영하는 이화학당을 다녔다는 것이었다.
"내가 명색이 중궁전으로서, 국가에서 대계를 정한 일에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정의 방침을 따라, 우리 가문에서는 여인들도 학교를 보내라 권하였습니다."
"과연, 곤전께옵서는 현명하십니다."
"그리하여 이 아이가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인 첫 세대가 되었지요."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여인은 계속 자신에게 화제가 주목되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이화학당을 다녔으면, 다양한 학문을 익히고 영어도 할 줄 아시겠군요."
이화학당은 전통적 교육도 가르치지만, 미국인 선교사가 세운 학교이니만큼 서양식 교육과 영어가 중시되었다.
"소, 소녀는 어리석고 무지하여 익히기는 하였으나 감히 논할 정도는 되지 못합니다."
완화군의 말이 자신에게 향하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겸손이 조선의 미덕이기는 하나, 자신이 가진 재능을 깎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규수(閨秀)께서는 장차 조선 여인의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조선의 미래는 교육에 있으니, 몸소 먼저 익힌 이로서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이선의 말에 여인은 신선한 충격을 받은 듯,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군 대감의 말씀에 황공하옵니다."
‘아무리 신식 교육을 받았다지만, 남녀 간에 자유롭게 이야기를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구나. 하긴, 이만해도 대단한 용기를 낸 셈이지…….’ 남녀칠세부동석까지는 아니더라도, 엄연히 성별의 유별함을 강조하는 유교 사회에서 왕실과 명문가에 속하는 미혼 남녀가 대화를 나누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나마 이 자리는 중전이 적극적으로 주선해 준 덕에 한 공간에라도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규수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하문(下問)하시옵소서."
"규수께서는 장차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십니까?"
"예, 예?"
여인은 당혹스러워하며 되물었다. 일전에 서양인 여교사로부터 비슷한 질문을 받긴 했지만, 이런 질문을 하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많은 걸 배웠을 터인데,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없냐는 것이지요."
"저, 저는 여인의 몸이니 마땅히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따라야지요."
『예기(禮記)』의 의례(儀禮) 편에 나오는 삼종지도. 여인은 어려서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식을 따라야 하였다.
"삼종지도라. 예기는 주나라 때 비롯되어, 한나라 때 편찬된 책입니다. 무려 2000년이 지난 이야기지요. 물론 성현의 가르침은 시대를 뛰어넘는다고는 하나, 국민 개개인의 재능을 창출하는 작금의 시대에 어찌 맞겠습니까? 감히 말하자면, 삼종지도란 낡은 시대의 윤리입니다."
이선의 말은 전통 교육을 받은 왕후가 듣기에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그녀는 삼종지도가 여인의 도리란 가르침을 마음속 깊이 내재화했고, 내명부의 수장이 된 다음에도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왕후는 대원군이 원하던 ‘내조 잘하고 고분고분한 아내’의 상에 충실했다.
하지만 이선이 생각하는 신시대의 여성상은 완전히 달랐다.
여인도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하지만 중전과는 다른 신선한 충격이었다.
서양인도 아니고 조선인, 하물며 왕족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으리라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소녀가 감히 말씀을 올려도 될련지……."
"자유롭게 말씀하십시오. 나는 그게 좋습니다."
여인은 완화군에 이어 왕후의 눈치를 보았다. 왕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인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세, 세상을 구경해 보고 싶습니다."
"예? 실례지만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여인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잘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심호흡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사대부 여인의 몸이라 감히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처지입니다. 물론 다른 집안 규수와 달리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중전마마와 아버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었던 덕이지요."
여인은 사대부 가문의 여인답게, 자신의 욕망을 조심스럽게 드러내면서도 어른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오나 학교에서 세상의 지식을 익히고 나니 제가 살고 있던 세상이 너무나 넓고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이화학당에서 영국인 여류여행가 분을 초청해서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비숍 여사를 말씀하십니까?"
이선의 말에 여인이 반가워했다.
"맞습니다. 그분께서 완화군 대감도 여러 번 뵈었다고 하셨습니다. 찬사를 아끼지 않으시더군요. 조선, 아니 동양의 역사를 바꾼 분이라고. 저희 선생님과 학생들도 모두 공감했습니다."
"하하, 그랬군요."
면전에서 칭찬을 들으면 민망하기는 이선도 마찬가지였다.
"전 세계를 여행한 비숍 여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도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모릅니다. 생전 처음 듣는 나라의 이야기, 알지 못하던 사람의 이야기인데도 어찌 그렇게 재미있던지요. 나도 저렇게 자유롭게 세상을 구경할 수 있다면……. 그런 생각이 들고는 했답니다."
이선은 여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세계는 극히 작은 세계였다. 집안을 벗어날 수 없고, 멀리 나가 봐야 학교였다. 그나마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것도 개화의 영향을 받은 ‘개명한’ 집안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녀도 잘 압니다. 다 부질없는 상상일 뿐이라는 것을. 영국과 조선은 엄연히 다른 나라고, 조선의 여인은 서양 여인들처럼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지요. 이제 저도 혼기가 찼으니, 부모님이 혼처를 정해주시면 혼례를 올려 현모양처로서 살아가는 게 도리에 맞겠지요."
여인은 아직 자신이 완화군의 삼간택 후보라는 걸 모르는 듯 했다. 대원군이 먼저 낙점을 했고, 왕후에게 귀띔은 했으리란 추측은 갔다.
‘그러니 중궁전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겠지.’
정치적 욕심이 없는 왕후도, 자신의 가문에서 차기 왕후를 배출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이선이 왕후와 어린 대군을 우대한다고 약속해도, 대군주가 퇴위한다면 어찌 될지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가문에서 차기 왕후가 나온다면, 이선이 처가를 외면하지는 않을 터였다.
‘운현궁과 중궁전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군.’
법적으로 먼 친척, 십촌 관계인 건 별문제 될 것도 없었다.
이미 대원군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십이촌인 민자영을 중전으로 삼은 전례가 있었다. 임금과 중전이 십삼촌 관계임에도 강행한 것이다. 다른 세도가와 달리 자신의 처가인 여흥 민문이면 믿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대원군의 기대는 철저하게 박살났다. 그래서 임오군란으로 재집정한 후에 새 중전을 간택할 때에는 철저히 골랐다. 고심 끝에, 전통적인 노론 명문가이지만 정치적으로 무해한 광산 김문을 선택했다.
대원군의 예상대로 중전은 내명부 수장으로 해야 할 역할에만 충실했다. 외척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대원군이지만, 광산 김문의 여식이라면 국모의 자리를 맡겨도 되겠다는 확신이 생긴 것이었다.
‘애초에 시대가 바뀌어서 외척이 설칠 수 있는 환경도 아닌데. 내가 그걸 용납할 사람도 아니고. 이게 트라우마라는 건가?’
대원군이 손자며느리 감으로 물색한 여인의 부친은 진사에 불과했기에 관직에도 오르지 못했고, 남자 형제조차 없었다.
그러면서도 개화의 영향을 받아 서양식 교육도 받았으니, 장차 왕위에 오를 완화군의 부인으로 적격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당사자 의견 따위는 전혀 생각조차 안 하는구만.’
이선은 여인의 소망과 체념을 들으며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자신과 혼례를 올리면 장차 국모라는 최고의 영예에 오르겠지만, 나이 스물도 안 되어 개인으로서의 삶은 끝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꿈꾸는 대로 ‘세상을 향해’ 나아갈 일은 없었다. 구중궁궐에서 내명부 수장으로서의 역할을 평생 하는 게 그녀의 운명이었다.
"시대가 변했거늘, 조선의 여인이라고 하여 어찌 작은 세상에만 안주하겠습니까? 정부에서는 올해부터 여성도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하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자신의 능력과 굳건한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더 큰 세상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이선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임오년 이후 관비(官費) 유학생 제도가 신설되었다. 이선은 진작부터 여성 유학생도 파견하자고 주장했다. 정부 인사 대부분은 이에 부정적이었지만, 이선의 노력으로 올해부터는 여성 유학생을 보내기로 했다.
이선은 구미 사절단에 포함될 청년 유학생 50인 중, 5인은 여성의 몫으로 할당할 예정이었다.
"그렇다 해도 제가 어찌……."
"마음먹기 나름이겠지요. 규수께서도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선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여인과 왕후 모두 당혹스러워하는 듯 했다.
하지만 여인이 원한다면, 이선은 정말로 사절단에 동행시킬 생각이 있었다.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면, 더욱 넓은 시각을 갖게 되겠지.’
이선은 잠시 더 환담을 나눈 후, 왕후와 여인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오늘 뵙게 되어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곧 다시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황공하옵니다."
내전 밖으로 나온 이선은 문득 여인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조선에서 초면에 미혼 여성의 이름을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낡은 관념을 뛰어넘는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여인은 신식 교육을 받았음에도,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기 어려워했다. 이선의 권유를 받은 후에야, 낮은 허들을 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또다시 새로운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선은 여인이 그 장벽을 뛰어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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