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구만리장천
인천항에는 사절단과 이를 환송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으로 북적였다. 대대적인 공사로 근대적 접안 시설을 갖춘 인천항은 동아시아를 잇는 새로운 물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었다.
"장도(長途)가 되겠습니다만, 아무쪼록 평안히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신임 내무대신 김옥균과 군무대신 홍영식, 외무대신 서광범 등 각료들이 이선과 사절단을 환송했다.
"고맙습니다. 이번 사행을 통해 조선의 국익을 최대한 확보할까 합니다. 시모노세키 강화 회담에 이어 장차 동양의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자리가 될 것입니다."
청나라에서는 전 북양대신 이홍장이 직접 사절단을 이끌고 떠나게 되었다. 러시아만 방문하는 게 아니라 세계를 일주하며 각국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70대 노구를 이끌고 떠나는 이홍장은, 비장한 각오로 관을 짜고 배에 싣게 했다. 타지에서 죽을 각오를 한다는 의미였다.
일본에서는 본래 총리 이토 히로부미가 가려고 했으나, 자국의 정치 문제로 전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가 사절단을 이끌었다. 이노우에는 이토의 오랜 동지이자 복심(腹心)이었으므로 사실상 이토가 직접 참석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러시아에서 벌어질 외교전은, 시모노세키 강화 회담의 2차전이나 다름없었다.
"군 대감이시라면, 어떤 결과를 얻어 와도 놀라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번에도 멋진 승리를 거두시겠지요. 하하하."
각료들은 웃으면서 이선의 성공을 기원했다.
"내가 부재하는 동안, 제공(諸公)이 총리대신 김홍집 대감을 잘 보좌해 주길 바랍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작년부터 왕태자의 대리청정 체제였으나, 실질적인 통치는 김홍집 내각이 맡고 있었다.
각료에 속했던 박영효와 유길준 등이 사절단에 합류하게 됨에 따라, 사절단이 떠나기 전에 개각(改閣)이 진행되었다.
인물은 대동소이했으나 보직 변경이 있었다.
이선은 목소리를 낮추고 각료이자 개화당 동지들에게 말했다.
"경들이 내각에서 요직을 맡게 된 이유를 잘 알 것이오. 경들은 내 오른팔과 왼팔이니까. 행정과 외교, 경찰과 군부를 잘 관리하시오. 내가 없는 동안 대군주께서 무탈하시겠지만, 그래도 만반의 대비는 해야 하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이선은 최측근에게 내각의 요직을 맡겼다. 내무대신은 관료 조직과 경찰을, 외무대신은 외교를, 군무대신은 군부를 전담했다.
대군주는 사실상 강녕전에 유폐 상태였지만, 만에 하나라도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귀찮은 일이었다.
이미 대세는 완전히 기울어졌기에 관료와 군대, 국민 중 누구라도 대군주를 따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혹여 외세와 결탁하려 한다면 골치 아파질 수 있었다.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국가를 철저히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경복궁에는 어떠한 잡인도 출입할 수 없을 겁니다."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선의 뜻을 받들었다. 이들은 이미 이선을 군주로 여기고 있었다.
"군 대감께서는 언제 돌아오시겠습니까?"
"사절단이야 내년까지 일정이 이어지겠지만, 나는 각국과 외교적 협의를 마치면 돌아올 예정이오.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돌아오는 시간을 포함해 아마 10월쯤이지 않을까 싶소."
"알겠습니다. 그때까지 칭제 건원 여론을 조성하겠습니다."
왕실 인사들이 칭제 건원을 주도하려는 대원군과 달리, 개화당은 여론을 움직여 ‘국민의 총의’로 칭제 건원을 하려고 했다.
"이번에 유럽에 갈 때 각국 왕족과 외교관들도 새 제국의 대관식에 초청할 생각이오. 이왕이면 우리끼리 모여서 즉위하는 것보다야 각국 대표단의 축하를 받으면서 즉위하면 더 좋겠지."
사절단은 차르의 대관식을 참관하고, 내년 봄으로 계획한 제국 선포와 즉위식에 참조할 예정도 있었다. 즉위식은 동양의 전통 의례와 서양의 대관식을 모두 참조한 형태로 계획했다.
이선의 초청으로 각국 대표단이 참석한다면, 제국 선포는 그 즉시 세계만방으로 공인되는 것이었다.
"기대됩니다. 그럼 먼 길 잘 다녀오십시오."
"고맙소. 경들을 믿고 잘 다녀오도록 하지."
이선은 동지들과 악수를 나누며 작별했다.
인천에서 출발하기 전, 사절단은 2진으로 나누었다. 민영환, 서재필, 윤치호와 수행원 등 10인은 요코하마를 경유, 미국으로 가서 유학중인 의화군 이강을 대동하고, 대서양을 건너 러시아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본 사절단에는 사절과 수행원, 유학생 외에도 서양인 5인이 탑승했다. 이들은 조선 사절단의 안내역이자 자문역이었다.
10여 년의 조선 공사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는 베베르 부부, 베베르의 친족으로 왕실의전관인 손탁, 러시아 공사관 서기관 시테인, 주재무관 보가크 중령이었다.
"공사께선 오랜만에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군요."
이선의 말에 베베르가 아쉽다는 듯이 답했다.
"조선에서 가장 오래 체류한 외교관으로서, 이 나라에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떠나기에 아쉽군요."
베베르는 조선에 가장 호의적인 서양 외교관이었다. 몇 번이나 전임될 예정이었으나, 이선의 요청으로 잔류를 받아들였다. 어느새 재임 기간은 13년에 달했고, 조선과 러시아를 잇는 가교 구실을 했다.
조선은 대훈위이화훈장을 수여해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조선에 매료된 베베르는, 귀국 후에도 조선을 위해 협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보통 조선에서 유럽을 가려면 상해나 홍콩에서 유럽 국적의 기선으로 갈아타야 했다.
이번에는 조선 왕실 명의로 프랑스 선적의 기선을 통째로 전세를 내서, 사절단을 태운 배는 갈아타지 않고 인천에서 러시아령 오데사까지 운행할 예정이었다.
마침 공교롭게도 기선의 이름은 ‘imperatrice’, 즉 프랑스어로 ‘황후’였다. 그동안 외교 언어인 프랑스어를 열심히 익혀 온 이선은, 선명을 보자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승객 95인은 모두 황후 호에 탑승을 완료했다.
"사절과 수행원, 유학생 제군. 장도를 함께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10년 전의 내가 그러했듯이, 앞으로 제군은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다양한 풍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제군의 시각이 새롭게 열리고, 폭넓은 지식을 얻게 될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제군이 장차 이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촉망받는 인재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짝짝짝!
이선의 짤막한 연설에 너 나 할 것 없이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앞날이 구만리장천과 같은 신진 관료와 청년 유학생들은 눈을 빛내며 이선을 바라보았다.
이들에게 이선은 국가를 일신한 지도자이자, 그들에게 미래의 길을 열어 준 안내자였다.
멀리 떠나는 유학생 모두가 각오가 남달랐다.
‘열심히 실력을 양성해서, 장차 저분처럼 국민들에게 희망이 되는 지도자가 되어야지.’
최연소자에 속하는 19세의 안창호는, 이선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1878년생, 국민교육 1세대에 속하는 안창호는 열렬한 개혁 지지자이자 계몽주의자였다. 더욱이 평양이 고향인 그에게 ‘평양 전투의 영웅’ 이선은 구원자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이 세대가 바로 개화의 깊숙한 영향을 받은 첫 세대이자, 이선이 적극적으로 육성하는 청년 세대였다.
‘황후호’는 인천에서 출발해 상해, 홍콩, 싱가포르를 지나 순조롭게 항해했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풍물과 기후에 외국행이 처음인 승객들은 신기해했다.
인도 봄베이(오늘날 뭄바이)에서 잠시 머물며 물자를 보급한 황후호는, 인도양을 횡단했다. 대서양과 태평양에 비하면 작은 바다이지만, 대양에 속하는 인도양은 조선인들에게 망망대해처럼 느껴졌다.
바깥 풍경은 더 새로울 것도 없는 바다에 날씨도 점차 후덥지근해지고, 처음 경험하는 장기 선박 여행에 적응하지 못하고 선실에 드러눕는 이들도 나왔다.
이선은 벌써 몇 번이나 대양을 넘었으므로 익숙해졌지만, 그 자신도 지루해졌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언제 개통하나? 계획대로라면 1900년? 2주면 갈 것을 6주나 항해하려니. 아니, 그렇게 따지면 비행기는 반나절이면 갈 텐데. 비행기가 개발되려면 최소 1903년이군. 자금 여유가 생겼으니, 앞으로 기술 개발과 촉진에 투자해 볼까…….’
분명 19세기 후반에 교통의 혁신이 일어나 세계가 좁아졌지만, 아직 물리적 장벽은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 선상을 돌아다니던 이선은, 선수에서 낯익은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
"바다 구경을 하고 있습니까?"
"아, 군 대감. 평안하신지요."
김아영도 이선을 알아보고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양장이 무척 잘 어울립니다."
댕기 머리에 한복 차림이던 아영은, 유학을 떠나며 단발에 양장을 입었다. 서구적인 용모의 그녀는 양장이 곧잘 어울렸다.
"가, 감사합니다."
아영은 얼굴을 붉혔다. 이런 칭찬을 하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그녀도 이선과 제복이 잘 어울린다고 칭찬하고 싶었으나, 그런 용기는 내지 못했다.
장기간 배를 타면서 단둘이 있기는 처음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자, 이선이 먼저 말문을 틔었다.
"선상 생활은 어떤가요?"
"군 대감과 여러 사람의 배려 덕에 아주 편안히 잘 보내고 있습니다."
"그동안 어땠는지 이야기해 주겠어요?"
국내 여행도 해 보지 못한 아영에게 해외여행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그나마 유학생들 중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아씨께서도 유학생으로 뽑히셨군요."
"어머나, 에스더!"
박에스더는 아영의 이화학당 선배였다. 평민 출신인 에스더는 사대부 여식인 아영을 아씨라고 부르며 존대했다.
"지체 높은 아씨께서 유학이라니, 학당에 다니실 때부터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나도 반갑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으니까, 앞으로 에스더가 많이 가르쳐 줘."
"예, 그럼요. 아씨."
가장 연장자인 에스더가 아영을 깍듯이 대하니, 평민 출신 여성 유학생들도 그녀를 어려워하며 높이 대했다.
아무리 신교육을 받았다지만, 머릿속의 신분 의식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다.
"아씨께서 이런 일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 일은 저희에게 맡겨주세요."
여성 유학생들은 순번을 정해 아영을 보조했다.
아영은 미안함을 느꼈지만, 지체 높은 사대부 여식인 아영은 늘 하녀의 도움을 받고 살았기에 실생활에 서툴렀다.
간호사로 일했던 에스더나 평민 출신으로 뭔가 늘 일을 하고 있던 유학생들은 선상 생활에도 잘 적응했던 반면, 아영은 생전 처음 경험하는 상황에 당황하기 일쑤였다.
남녀유별에 익숙한 만큼, 여성 유학생들은 완전히 따로 생활했다.
이선이 여정의 무료함을 피하기 위해 스스럼없이 사람들과 술을 마시거나 게임을 하곤 했다. 수행원과 유학생들은 이선이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걸 영광으로 여겼다.
하지만 여성 유학생들은 감히 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영과 여성 유학생은, 자신의 선실에서 열심히 독서 삼매경이었다.
여성 유학생들은 종종 베베르 부인과 손탁 여사와 차를 마시며 담화를 나누는 게 특별한 일이었다. 나이 지긋한 두 부인은 어린 유학생들에게 서양 생활에 관해 조언을 주었다.
"모든 게 다 새로울 겁니다. 동양인, 특히 여자에게는 더 편견이 심할 거예요. 하지만 여러분이 심지를 굳게 가지면, 외국 생활의 어려움도 잘 헤쳐 나가겠지요."
"우리가 처음 조선에 왔을 때도, 서양 여자로서 살아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보세요, 이제 조선말도 능숙히 하잖아요? 호호."
"맞아요. 우리도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아영의 말을 듣던 이선이 빙긋 웃었다.
"하하, 열심히 공부한다니까 좋군요. 하지만 가끔씩 이렇게 밖으로 나와서 바람도 쐬고 그래요."
"네, 그러겠습니다."
아영의 얼굴에 다시 홍조가 어렸다.
유학생으로 뽑힌 후, 그녀는 왕후로부터 자신이 삼간택 후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구주로 가는 건 말리지 않겠으나, 유학할 생각은 하지 말고 완화군과 같이 귀국하거라. 완화군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고. 완화군이 다른 마음 먹지 못하도록, 네가 잘해야 한다."
아영은 당황스러웠다. 완화군이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이자 차기 군주로 물망이 오르고 있다는 건, 정치를 알지 못하는 그녀도 아는 바였다. 하지만 자신이 장차 왕후가 된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내, 내가 어떻게 감히…….’
아영은 이선이 어떻게 생각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왜 서른이 다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았는지, 그가 자신에게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더욱 궁금했다.
"책은 어떤 책을 주로 읽습니까?"
"아직 외국어 실력이 부족하고 서양에 대해 무지해서요. 영어랑 법어 공부를 하고, 유길준 대감이 집필하신 『서유견문』을 읽고 있습니다."
"그런 거만 보면 재미없지 않아요? 서양은 문학이 발달했어요. 특히 러시아 문학은 볼 만하지요."
"아, 그렇군요."
"마침 다 읽었으니 빌려줄게요. 영어로 된 책 읽을 수 있지요?"
"아, 아주 조금이라면."
이선은 가방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영역판을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아니, 이건 좀 어렵겠다."
그는 다른 책을 꺼내서 아영에게 전했다.
"러시아 근대문학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투르게네프의 소설인데, 짧고 재미있어요. 읽어 봐요."
"네, 감사합니다."
아영은 소설의 표지를 보고 놀랐다.
Ivan Turgenev, Perbaya Lyubov(First Love).
영어가 짧은 그녀도 제목의 의미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순간 아영의 얼굴은 더욱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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