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왕족의 숙명
"이 사안은 국가적인 문제라서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닐세. 본국과 상의해보고 답을 주겠네."
이선이 시간을 요청하자 니콜라이는 흔쾌히 답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신중히 논의해 보고 답을 주게."
다음날, 이선은 사절단 중 의화군과 고위 관료들을 소집했다.
니콜라이 2세의 제안을 전하자, 이들은 하나같이 난색을 표했다.
"황제 폐하의 호의는 정말로 감사한 일이나……."
"조선 역사 500년에 전례가 없는 일이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위로는 왕실에서 아래로는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반대가 엄청날 것입니다."
난색을 표하는 박영효, 유길준, 이범진, 서재필, 민영환, 윤치호 등은 모두 개화파에 속하고 외국 경험도 충분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조선 왕실이 러시아 황실과 국혼을 맺으면 외교적으로 큰 도움이 되리라는 데 동의했지만, 국내에 정치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서양에서는 오히려 왕족이 외국 왕족과 결혼한다지만, 동양은 다릅니다. 황공한 일이나, 왕가의 존귀한 혈통에 외국인의 피가 섞이는 걸 누가 받아들이겠습니까?"
박영효 본인이 부마가 되어 왕실의 일원이 되었기에, 왕실의 보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결혼 3개월 만에 옹주가 죽어 박영효는 평생 혼자 살아야 할 운명이었지만, 이를 딱하게 여긴 임금이 혼인을 허락해 주어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러시아 공사를 역임한 그 자신은 이 혼사의 외교적 이득을 재빨리 파악했지만, 왕실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윤치호 공이나 서재필 공은 국제결혼의 경험이 있지요."
"흠, 개인의 차원에서 볼 땐 바람직한 일이나……."
"부끄럽습니다만, 솔직히 어딜 가나 주목받는 건 어쩔 수가 없지요."
윤치호와 서재필이 민망한 웃음을 흘렸다.
윤치호는 상해 근무 중 만난 중국 여인과 결혼했다. 외국인과의 혼사가 워낙 드문 조선이라 이도 상당한 화젯거리였는데, 더 놀라운 일이 생겼다.
서재필은 미국 유학 중 만난 미국 여인과 결혼했다. 서재필의 부인 뮤리엘 암스트롱(Muriel Armstrong)은 초대 철도우편국장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 대령의 딸로, 제임스 뷰캐넌 전 미국 대통령의 오촌 조카였다. 연애결혼이었지만, 부인의 가문으로 인해 서재필은 단숨에 미국 주류사회로 진입할 수 있었다.
조선 최초로 서양 여성과의 결혼은 만인의 화젯거리가 되어, 서재필이 유학을 마치고 부인과 함께 귀국하자 사람들이 몰려나와 구경을 할 정도였다.
서재필 부부는 어딜 가나 주목받는 존재였고, 뮤리엘 부인은 이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황제 폐하의 호의를 이대로 저버린다는 건 아쉬운 일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흔한 기회입니까?"
"그렇습니다. 청국이나 일본에선 하고 싶어도 못할 일 아닙니까?"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문명개화론과 사회 진화론이 지식인의 사고를 지배하면서, 서양인과의 결혼은 수치스러운 게 아니라 권장할 일이었다.
초대 문부대신을 지낸 모리 아리노리 같은 이는 공개적으로 ‘일본인은 백인과 결혼하여 인종 개량을 이뤄야 낸다’라는 말을 공공연히 할 정도였다.
정작 이렇게 말한 모리는 국수주의자들의 목표가 되어 암살당했으나, 백인에 대한 숭배가 사회 전반적으로 깔려 있었다.
조선은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었으나, 오랫동안 폐쇄적이었던 조선에서 서양과 백인에 관한 호의는 근래 들어 부쩍 확산된 건 사실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개화파 관료들은 서양과의 국혼을 찬성할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여론을 무마시킬 수 있는 ‘전례(典例)’를 찾으려고 머리를 굴렸다.
"전례를 찾아보면 아주 없는 것도 아닙니다. 황제의 막내딸이라면, 쿠빌라이 칸과 제국대장공주가 있지 않습니까. 고려의 충렬왕이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공주와 결혼한 바 있지요."
"하긴, 충선왕에서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모두 몽골 공주이긴 했지."
고려 25대 충렬왕과 31대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고려는 몽골 제국과 인적 관계로 결합되어 있었다. 비록 간섭은 받았다고 하지만, 이를 통해 고려가 얻는 유무형적 이득도 상당했다.
"그건 전례로 참조하기가 어렵습니다. 고려가 원나라의 제후국이었을 때 일어난 일 아닙니까. 조선은 이제 당당한 자주독립국이거늘, 러시아가 우리 상국이란 말입니까?"
"맞습니다. 그런 전례를 끌여들었다간 오히려 반발만 더 커질 겁니다."
조선인들 사이에서 ‘원 간섭기’는 수치스러운 역사로 여겨지니만큼, 전례로 언급하기도 힘들었다.
"조선 역사를 통틀어도 전례가 있습니다. 태종 대왕께서 양녕대군을 명나라 영락제의 공주와 혼례를 추진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조선 초기, 태종이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명 황제 영락제의 공주와 혼사를 추진한 바 있었다.
원나라와 고려의 전례를 참고해서 추진했지만, 결국 흐지부지되고야 말았다.
외척을 경계하는 태종으로선, 세자빈이 대명 황제라는 거대한 존재를 등에 업고 몽골 공주들처럼 권력을 부릴까 봐 우려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이 혼사가 성사되었더라면 태종은 양녕대군을 폐하고, 세종을 세자로 내세울 수도 없었을 터였다.
"이뤄지지도 못한 일을 전례로 언급하기엔……."
"그리고 그건 왕조 초기, 명나라와 조선의 특수한 관계에서 비롯된 거 아닙니까."
"지금 이 시국도 건국과 비유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사례라는 겁니다."
관료들의 갑론을박을 보면서, 이선은 생각에 잠겼다.
실제 역사에서도 영친왕 이은이 일본 왕족과 결혼하는 일도 격렬한 심리적 반발에 부딪혀야 했다.
혼사를 강요한 일제의 강압에 반발한 게 가장 큰 요인이었다지만, 꼭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훨씬 뒤, 해방된 후에 이은의 아들인 황태손 이구가 미국 여인과 결혼한 일도 이왕가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아무리 나라가 망했다지만, ‘대통을 계승한 왕족’이 서양인과 결혼하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 혼사는 막 국제 사회에 진입한 조선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니 가급적 추진하는 게 좋다는 겁니다. 필요하다면 고려든 태종 대왕이든 전례로 삼지요."
"하오나 반발이 클 터인데……. 특히 국태공과 대군주 폐하께서 용인하시겠습니까?"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그런다면 곤란하겠지만, 왕족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 나는 의화군 강을 국혼의 대상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갑자기 화제가 이강에게 전환되자, 관료들은 일제히 그를 쳐다보았다.
"과연, 의화군 대감이라면……."
"묘안입니다. 국태공이나 왕실에서도 크게 반대하지 않겠군요."
이강은 깜짝 놀라 이선을 향해 말했다.
"형님, 저는 전혀 그럴 준비가……."
"네 나이도 이제 스물인데 슬슬 혼사를 고려할 때 아니겠느냐? 무도회에서 예카테리나 공주와 이야기 나눠봤지? 너와 한 살 차이니 나이도 딱 적당하지 않으냐."
"혀, 형님. 잠시만요. 단둘이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대감들, 죄송하지만 잠시 자리를 피해 주십시오."
의화군의 요청에 관료들이 이선을 쳐다보았다. 이선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들은 모두 방에서 물러났다.
방에는 형제만이 남았다. 이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님, 저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애초에 황제 폐하께서 국혼을 제안한 건 형님이지 제가 아닙니다."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아까 대신들 반응을 봤지? 이 나라에서 서양에 가장 우호적인 개화파 관료들조차 우려한다. 장자이자 차기 군주로 언급되는 내가 서양인과 국혼을 치렀다간 나라가 뒤집어질 거다."
"왜 형님이 차기 군주가 됩니까? 대군주 폐하께서 청국에 밀서를 전달해 문제가 되었다는 건 저도 전해 듣긴 했습니다만, 왕태자 전하가 계시지 않습니까?"
이강은 미국에 나가 있어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했다. 이선이 간략하게 지난 일을 설명하자, 이강은 한숨을 쉬었다.
"일이 그렇게 되었군요. 형님의 책무가 무겁게 되었습니다."
"나 역시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아무튼 내가 왕족으로 남아 있다면 이 혼사를 받아들 수 있겠으나, 군주가 된다면 곤란하다. 그러니 네가 나를 대신했으면 하는데."
하지만 이강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저도 예카테리나 공주와 이야기를 나눠 봤습니다. 제가 느꼈던 건, 그분이 특별히 여기는 건 형님이지 제가 아닙니다. 형님은 그분의 아버지, 선황 폐하를 구한 은인이 아닙니까. 그런데 아우인 제가 어찌……."
"원래 왕족 간의 결합이란 정략결혼이다. 너도 러시아 황태후 폐하를 만나 봤을 거다. 원래 그분의 약혼자는 알렉산드르 3세의 형인 니콜라이 황태자였어. 하지만 국가의 필요에 따라 그리되었지."
"그, 그래도 저는 안 됩니다."
"대체 왜 안 된다는 거냐? 서양 여자랑 결혼하는 게 꺼려진다는 거냐?"
잠시 고민하던 이강은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젊은 서양인 여성이었다.
"미인이구나. 배경을 보니 뉴욕 같은데. 미국의 배우라도 되나?"
"예, 그렇죠? 미국 최고의 도시, 뉴욕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미인이죠."
"이 여인이 누군데? 설마, 너……."
이선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네, 저와 혼인하기로 약속한 여인입니다."
이선은 저도 모르게 벌컥 화를 냈다.
"주미 공사관의 말이 틀리지 않았군! 놀기 좋아하고 파티만 돌아다닌다더니. 내가 너더러 공부하라고 미국을 보냈지, 연애하라고 보낸 줄 아느냐?"
"미국의 자유롭고 진보적인 기풍을 배우라고 하신 건 형님이십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는 미국에서 자유의 소중함을 배웠습니다. 왕족이라고 해서 낡은 전통과 규율에 얽매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자유를 위해 쟁취한 게 미국 여인과의 사랑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저는 이 여인과 혼인하기 위해서라면 왕위 계승권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이강의 당당한 말에, 이선은 순간 뒷목이 당겼다.
‘미국 여자랑 결혼하기 위해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다고? 지가 무슨 윈저 공이야?
이선은 이 시점에서는 갓난아이인 영국의 왕손, 에드워드 8세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20세기 영국 왕실조차 용납할 수 없는 일을 19세기 조선 왕실에서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의친왕 이강은 음주 가무를 즐기고 여자를 밝히는 탕아 기질이 있었다.
미국 유학 중 파티에서 술 먹고 난동을 부렸다든지, 자동차를 몰아 도로에서 질주했다든지, 미국인 여학생과 사랑에 빠져 연적인 남학생과 결투를 벌였다든지 온갖 일화가 가득했다.
탕아였던 의친왕이 각성한 건 망국의 위기에 처해서였다. 그는 ‘민국의 평민으로 살지언정 망국의 황족으로 살지 않겠다.’는 각오를 밝히고, 조선 왕실에서 유일하다시피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이선은 이강의 이런 점을 높이 평가해, 유사시 자신의 후계자로 낙점해 일찌감치 서양으로 유학을 보낸 것이었다.
하지만 망국의 위기 상황에 직면하지 않은 탓인지, 이강은 마냥 철없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좋아. 연애까지는 허용하겠는데, 결혼은 안 된다. 아니, 백번 양보해서 결혼 후 애인으로 둬도 상관없어. 하지만 혼사는 받아들여라."
"그럼 두 여인을 모두 속이라는 것밖에 더 됩니까? 저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이강의 단호한 거부에, 이선은 마침내 언성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네가 무슨 권리로 남들 위에 있다고 생각하느냐? 왕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서다. 솔직히 말해서, 네가 왕자가 아니었더라면, 왕족의 후광을 갖고 돈을 넉넉히 쓰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저 미국 미녀가 너랑 사랑에 빠졌을까? 천만에!"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녀를 만나 보기나 하셨어요? 형님은 사랑도 안 해 보셨습니까!"
이강은 분노로 몸을 떨었으나, 이선은 냉소를 흘렸다.
"사랑? 배부른 소리 하지 마라. 국가를 위해서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 그게 바로 왕족의 숙명이다. 네가 누릴 수 있는 왕족의 권위는 조선 왕가로부터 비롯되었고, 네가 들고 다니는 돈은 조선 국민의 세금이라는 걸 잊지 마라."
이선은 본래 21세기의 기억을 갖고 있는데, 사랑에 대해 그렇게 냉소적일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선은 다른 사람이었다.
"3년 전 저를 미국으로 보내실 때만 해도, 형님은 이러지 않으셨습니다. 형님은 조선에서 가장 자유롭고 진보적인 사고의 소유자이셨습니다. 대체 왜 이렇게 변하신 겁니까?"
왕실에서 내놓은 자식이나 다름없었던, 이강을 특별히 대해 주는 건 큰 형 이선이었다. 이강은 이선을 동경했고, 그 못지않게 자유로운 사고의 소유자가 되리라고 다짐했었다.
"네가 알던 이선은 작년에 죽었어! 대원군에 의해, 대군주에 의해, 관료들에 의해, 군부에 의해, 국민들에 의해 살해당했지!"
이선은 군주로 추대된 시점에서, 한 개인으로서의 삶은 완전히 끝났다고 판단했다.
군주, 특히 그 자신의 판단에 국가의 운명이 달린 전제군주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책무와 의무감이 존재했다.
조선과 같이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약소국에서는 더더욱.
"이제 내게 남은 건 이선이란 개인이 아니라 2천만 국민의 총의(總意)다. 내게 그 총의를 거스를 여유 같은 건 없어. 그리고 그건 앞으로의 너도 마찬가지다."
이선은 이강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앞으로 나를 대리하여 왕실 외교를 집행할 사람은 너다. 너는 나를 대신해서 세계를 돌아다니며 조선의 국익을 이끌어야 해. 그게 이번에 너를 부른 이유다. 내 곁에서 최대한 많이 배워라."
"어, 어째서 제가……."
"조선이 군주국이 아니었더라면 굳이 너를 후계자로 염두에 두지 않겠지만, 지금은 제국의 시대이니 어쩔 수가 없다."
이선은 이강을 외교의 후계자로 양성할 생각임을 분명히 밝혔다.
"이제네 나이 스물이다. 완전히 성년이지. 네 인생의 휴가는 이제 끝났다. 네게 주어진 책무를 저버리지 마라."
이선은 이강의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나는 너를 믿는다.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강을 보면서, 이선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내 멋대로 후계자를 지목하고 그에게 내 뜻을 강요하는구나. 이래서야, 내가 대원군과 다를 바가 뭐지? 결국 이게 왕족의 숙명인가?’
- 231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