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적의 적은 나의 친구
5월 28일 오전, 대관식에 참석한 각국 사절들이 차르를 접견하는 예식이 있었다.
오스만,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청나라, 조선, 일본, 포르투갈, 벨기에, 스웨덴, 덴마크, 세르비아, 페르시아, 그리스, 네덜란드, 미국, 브라질, 멕시코, 시암 순으로 접견이 진행되었다.
이홍장과 청나라 사절단 다음으로 이선과 조선 사절단이 차르를 알현하러 갔다.
차르 부부와, 차르의 매제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이 조선 사절단을 맞이했다. 대공은 조선을 방문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 특별히 부른 것이었다.
대군주의 선물을 지참한 사절단은 정중하게 차르 부부를 향해 예를 올렸다.
"황제 폐하, 경사스러운 대관식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니 더할 나위 없이 기쁩니다. 조선국에서 보내는 예물을 간소하나마 바칩니다."
"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이 경사를 함께 기뻐한다는 뜻을 돌아가 귀국 대군주 폐하께 전해 주시오."
"삼가 황명을 받들겠나이다."
의례적인 인사가 오고 간 후, 니콜라이는 이선에게 물었다.
"대관식이 볼만하던가요?"
"더없이 웅장하고 화려합니다. 러시아 국민이 조국과 황제 폐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과연 공작은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군. 대관식은 신과 황제, 국민의 일치를 경험할 수 있는 자리요. 이틀 뒤에 있을 호딘카의 연회에 수도의 백성들을 초대해 이 기쁨을 함께할 생각이오. 40만 개의 기념품을 준비했지."
이선은 문득 호딘카(Khodynka)의 비극이 떠올랐다. 그는 차르에게 건의해야겠다고 판단했다.
"폐하, 신민을 사랑하는 폐하의 마음이 지극하십니다. 다만 저는 한 가지 우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감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든 편하게 말씀하시오."
"기념품 40만 개라고 하셨는데, 모스크바의 주민과 전 러시아에서 몰려올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를 통제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경찰은 얼마나 배치되어 있는지요?"
"음……. 잠깐만. 산드로, 경찰이 얼마나 배치될 예정이오?"
"모스크바 경찰 1,800명이 배치됩니다."
알렉산드르 대공의 답에 이선이 다시 말했다.
"경찰 천여 명으로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지 못할 겁니다. 폐하, 1891년 오쓰 사건을 기억하시지요?"
"어찌 잊겠소? 공작의 예지와 용기로 짐이 폭한의 암살 기도를 막을 수 있었지."
니콜라이는 여전히 그날의 일을 감사히 여기고 있었다.
"저는 그때와 같은 불길함을 느낍니다. 부디 폐하께서는 안전에 만전을 기울여 주십시오."
차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지점을 이선이 지적하자 이상했다.
"그건 모스크바 총독인 숙부님의 소관이오. 짐이 관여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모스크바 총독은 차르의 숙부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으로, 대공비 엘리자베트는 황후 알렉산드라의 언니였다.
"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전제 군주이시니, 마땅히 폐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게 아닌지요?"
이선의 말은 니콜라이보다 알렉산드라를 만족시켰다. 황후는 신성한 전제 군주인 남편이 숙부들에게 너무 끌려다닌다는 불만을 갖고 있었다.
"공작의 말씀이 옳습니다. 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황제이신데, 총독에게 명령할 권리를 갖고 계시지요."
알렉산드라에 이어 알렉산드르 대공도 동의를 표했다.
"공작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준비는 철저해서 나쁠 게 없지요. 폐하, 명령해 주시면 제가 직접 행사장을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소. 그러면 대공이 직접 수고해 주시오."
니콜라이는 수락하고, 이선과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가려고 했다. 그때 시종장이 차르에게 다가와 말했다.
"폐하, 황공하오나 시간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밖에서 일본 사절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 이런. 내가 깜빡하고 있었군.
니콜라이는 이선을 향해 우호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 이상 시간을 끌면 조선만 특별 대우한다고 뒷말이 나올 거요. 특히 일본인들의 질투가 심하겠지. 다음에 다시 이야기 나누도록 합시다."
"예, 폐하.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선과 조선 사절단은 밖으로 나와 일본 황족 후시미노미야, 이노우에 가오루와 인사를 했다.
말은 안 해도, 일본인들은 니콜라이 2세가 다른 사절단과 달리 조선 사절단과는 오랜 대화를 나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28일 저녁에는 성대한 만찬이 있었다. 29일에는 황실 극장에서 오페라가 상연되었다. 대관식 축제는 끝이 없었다.
러시아 국민에게 그 정점은 30일에 있을 야외 축하연이었다. 40만 명에게 차르의 인장이 찍힌 잔이 기념품으로 제공되고, 소시지와 빵, 케이크와 맥주가 제공되었다.
전날부터 모스크바 주민들은 밤을 새워가며 몰려들었다. 이미 새벽에 인파는 50만 명에 달했다.
오전이 되어 맥주와 기념품을 가득 실은 마차가 도착하자, 경찰이 통제할 수 없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이럴 수가.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큰일이 나겠다."
아침 일찍 현장에 나가 있던 알렉산드르 대공은 상황의 심각성을 판단했다. 그는 경찰 외에도 카자크 기병을 동원하여 질서 유지에 만전을 기했다.
"줄을 서시오! 줄을! 재고는 넉넉하게 있으니까, 염려 말고 줄을 서면 다 받아갈 수 있소!"
민중에게 공포의 대상인 카자크 기병들이 말을 타고 돌아다니며 질서 유지를 외쳤다. 혼란스러웠던 행렬은 겨우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일부 지역에서 혼란이 발생하여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긴 했으나, 실제 역사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 ‘호딘카의 비극’은 아예 발생하지도 않았다.
이 사건은 니콜라이 2세의 치세 초기부터 피에 물들게 되었던 비극이었다. 차르는 개인적으로 크게 슬퍼하여 행사를 취소하고 백성을 위로하려 했으나, 황족들의 압박에 시달려 프랑스 공사관에서 주최한 무도회에 참석하여 비난을 자초했다.
이 일로 인해 민중은 ‘피의 니콜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니, 러시아 혁명으로 가는 불길한 첫 단추가 끼워진 것이다.
호딘카에서 상황을 정리한 알렉산드르 대공은 차르에게 보고했다.
"하마터면 유혈 사태가 일어날 뻔했지만, 다행히도 신속히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오, 산드로. 경의 노고가 컸소. 부상자에게는 적절한 치료와 더불어 짐의 은사금을 내리도록 하시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니콜라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이선 공의 조언을 따르길 잘했군."
"역시 이선 공은 주님께서 로마노프 왕조를 위해 보내주신 분이 맞군요."
"맞소. 공작의 예지력은 가끔씩 놀라울 정도라니까."
알렉산드라의 찬사에 니콜라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니콜라이는 새삼 놀랐다. 이선은 마치 미래를 미리 내다보고 예견하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차르는 이선을 불러들였다.
"자네 예측이 이번에도 맞았네. 하마터면 대관식 직후부터 큰 사고를 겪을 뻔했어. 자네의 예지, 고맙네."
"별말씀을. 폐하를 위해 도움이 돼서 기쁩니다."
이선도 자신의 ‘예지(叡智)’에 만족감을 느꼈고, 니콜라이는 새삼 이선에게 더욱 신뢰감을 느꼈다.
"그래, 자네는 내게 예언자나 다름없군. 혹시 다음에는 어떤 신탁을 내려 줄 건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답을 안 해 줄 순 없고. 다만 복채가 좀 비싼데."
"하하, 얼마든지 지불하도록 하지. 극동 문제에 대해서 신탁을 내려 주시게. 요새 이게 고민이야."
이선은 자신이 설득하려던 주제를 차르가 먼저 꺼내니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홍장 백작이 폐하를 알현했던 일로 고민이시군요.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정말 듣던 대로 고명한 대신이더군. 당당한 풍채의 흰 수염이 인상적일세. 과연 대단한 인물이야."
니콜라이는 단순한 인상 비평을 했다.
"그렇지요. 하지만 폐하는 먼 길을 와서 러시아의 호의를 원하는 그를 이용해 영광을 쟁취해야 합니다. 표트르 대제가 발트해로 나아가고, 예카테리나 대제가 흑해로 나아갔듯이, 폐하께서는 태평양으로 나아간다는 사명이 있습니다."
이선의 말에 니콜라이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직접 극동을 순방한 이래, 자신이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야망이었다. 그런데 이선이 이를 자극하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시 나를 알아주는 건 자네밖에 없네. 그래, 그럼 어쩌면 좋겠나?"
"좀 조심스럽습니다. 저는 조선을 대표하는 입장이니, 러시아를 위해서만 말할 수 없는 처지라는 걸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히려 그 말에 니콜라이는 만족감을 느꼈다.
"그래, 역시 자네는 애국자야. 조선을 대표하는 자네가 조선을 위해 말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개의치 말고 이야기해보게. 나 역시 러시아의 황제이자 자네 벗으로서 경청하도록 하지."
"예, 그렇다면 말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선은 니콜라이에게 원하는 ‘신탁’을 들려주었다.
다음 날, 6월 1일.
이홍장은 조선 사절단이 머무르는 공관을 찾았다.
"어서 오십시오, 중당."
이홍장은 인사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거두절미하고,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주제를 다뤘으면 합니다."
"바라던 바입니다."
"지난 전쟁 이후, 나는 장차 중국을 위협할 적으로 일본임을 확신하게 되었소. 물론 조선에 대해서도 염려하는 바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일본의 호전성과는 비견할 바가 못 되지."
이홍장은 여전히 조선은 덜 위협적이라고 보았고, 러시아를 통해 조선을 제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일본은 달랐다. 시모노세키 강화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은 6개월간 계속된 대만의 저항을 짓밟고 식민지로 삼았다.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요동반도를 토해낸 걸 억울해하며, 다시 대륙으로 나아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본래 해방파(海防派)였던 이홍장은, 동아시아 전쟁으로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중국에게 진정한 위협은 대륙이 아닌 바다에서 오며, 당면한 적은 일본이었다.
"짐작했겠지만, 나는 일본에 맞서 러시아와 군사 동맹을 체결하기 위해 왔소."
"그러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러시아는 만주 철도 부설을 원하고 있을 터이니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겠지요."
"내가 주로 상대하는 대상은 외무대신과 재무대신인데, 결국 결정하는 분은 러시아 황제 폐하시지. 그런데 황제께서는 우리의 논의에 꼭 조선이 함께하길 원하시더군. 만약 동맹을 원한다면 양국 동맹이 아니라 삼국 동맹이 되어야 한다는 거요."
"호오, 그런 일이."
이선의 능청에 이홍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모르는 척하지 마시오. 완화군이 러시아 황제 폐하께 무슨 조언을 했던 것 아니오?"
"하하, 뭐 조선 나름대로 외교를 하는 거지요. 최종 판단은 황제께서 내리시는 거고요."
이홍장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귀공이 러시아 황제와 친한 덕을 톡톡히 보는군. 좋소.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이제 조선이 염려하는 가상의 적은 대청이오, 일본이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적과 동지는 때에 따라 바뀌는 법이지요. 작년까지 조선의 독립을 위협하는 적이 청국이었기에 부득이하게 맞서 싸웠던 것이고, 일본이 대륙 팽창의 야심을 저버리지 않는 한 그들이 되겠지요."
이선은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절반의 진실만을 말했다. 그는 이미 차르와 향후 계획에 대해 논했다.
"그리고 적의 적은 친구인 법이지. 영국이 중국에 등을 돌리고 일본을 지원했으니, 일본이 중국의 적이듯이 영국의 적인 러시아는 중국의 명백한 동맹이 될 수 있소."
이홍장은 이이제이의 방법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이자 제안했고, 지난 전쟁으로 외교적 고립을 절감하며 동맹이 절실히 필요했던 청 황실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해관계는 일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본을 막기 위한 동양의 삼국 동맹을 추진해 봅시다."
"동양의 삼국 동맹이라. 프랑스는 러시아의 동맹이니, 유사시 끌어들일 수도 있을 겁니다. 프랑스 자본의 도움이 필요하시지요?"
이선은 이홍장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제시했다.
러시아의 군사력과 프랑스의 자본.
군사적, 경제적 위기에 놓인 청국에 노불 동맹의 지원이 필요했다.
"바로 그렇소. 동양에서 러시아-청-조선의 삼국 동맹이 맺어지면, 일본의 위협을 확실히 차단할 수 있소."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니, 함께 추진해 보도록 할까요."
"음, 좋소. 삼국이 본격적으로 함께 논의해 보도록 합시다."
그 후 1주일간, 이홍장과 이선, 러시아 외무대신 로바노프-로스토프스키, 재무대신 비테의 4자 회담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니콜라이 2세는 바쁜 와중에도 회담의 진행을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철도 문제를 우선하는 러시아와, 군사 동맹을 우선하는 청국 사이에 줄다리기가 계속되었다. 이선은 이를 중재하면서 조선에 유리한 방향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홍장은 열강의 방해가 있을지도 모르니 철도 부설과 운영의 주체를 청국이 맡아야 한다고 했는데, 니콜라이 2세는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러시아가 만주에 철도를 부설하려는 진정한 이유는, 청국을 방어해야 할 경우 러시아 군대를 신속히 파견하기 위함이오. 만일 일본이 청국에 대해 분쟁을 야기한다면, 귀국을 지원하기 위해 즉시 군대를 파견하겠소."
차르의 말은 곧 유사시 안보 보장이나 다름없었다. 원하는 말을 들은 이홍장은 본국에 양보할 의사를 밝혔고, 북경도 이를 승인했다.
6월 9일, 협상은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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