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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혁명의 시대-233화 (232/812)

233화 비밀 조약

제1조. 일본이 동아시아의 러시아령, 청국과 조선의 영토를 공격하면, 본 조약을 즉시 적용하는 계기로 간주할 것이다. 이 경우 각 조인국은 그 시점에 소유하고 있는 모든 육해군 병력으로 상호 지원하며, 각종 장비를 보급하는 데 상호원조를 할 의무를 가진다.

……

제4조. 공격의 우려가 있는 지점에 러시아군이 도착할 수 있도록, 청국 정부는 만주를 통하는 철도의 부설에 동의한다. 이 부설의 모든 조건은 페테르부르크의 청국 공사와 러청 은행과의 교섭에 의해 계약의 형태로 확정된다.

제5조. 군사 행동 시에는 러시아는 자국의 군대 수송과 보급을 위해 이 철도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다. 평시에도 러시아는 같은 권리를 행사한다.

제6조. 조약 당사국에서 내란이 발생하여 국내의 안녕과 질서가 심하게 어지러워질 경우, 각 조인국은 정부 간 협의를 통해 군대를 파견하여 돕는다.

조약이 효력을 발휘하는 건 상기 조약을 청국 황제가 승인하는 날이며, 이후 15년간 유효하다. 그 기한 종료 6개월 전에 각국은 연장 협정을 체결하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은 비밀로 하며, 각국 정부 외에는 절대로 공개하지 아니한다.

"이로써 삼국의 운명은 하나로 묶이게 되었습니다. 신께서 이 동맹을 보우해 주시길."

조약 당사자들은 악수를 하며 조약 체결을 기뻐했다.

일본을 적으로 하는 동아시아 삼국 동맹, 러시아-청-조선 비밀 조약이 체결되었다.

초안에는 1조의 적을 ‘일본과 영국’으로 상정하였으나, 비테와 이선이 모두 반대하여 삭제하고 일본의 위협에만 대처하도록 했다.

동맹 기간은 처음에는 10년이 제안되었지만, 이홍장의 강력한 주장으로 15년으로 연장되었다.

밀약이었으므로, 공식적으로는 ‘만주 철도 부설협정’으로 발표될 예정이었다.

청나라 입장에선 유사시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러시아의 지원을 확실히 받아 내는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마침내 천하에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던 중화 제국이, 동등한 국제 질서 하에서 동맹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러시아 입장에선 소원하던 만주 철도, 공식 명칭 ‘동청 철도(東淸鐵道)’를 부설하여 동아시아로 가는 신속한 길을 열었다.

러시아는 비테의 구상대로 동아시아로 평화적 침투를 할 수 있었다. 철도 부설에 이어 러시아의 주선으로 청은 프랑스로부터 차관을 빌릴 예정이었다.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급증할 수 있었다.

조선 입장에선 유사시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안보를 보장 받았다. 중립을 추구하던 조선의 정책은 지난 전쟁에서 일본과 동맹을 맺어 청에 맞서 싸우는 것으로 끝났다.

이제 자주독립국 조선은 역동적으로 국제 관계에 참여할 생각이었고, 삼국 비밀 동맹은 그 시작이었다.

"완화군의 말대로 정말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었군. 불행했던 과거는 잊고, 함께 새 출발을 하도록 합시다."

청나라 입장에선 옛 제후국이자 중화 질서에 반기를 든 ‘역적’인 조선과 동등한 동맹을 맺는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울 수 있었으나, 현실주의자인 이홍장은 개의치 않았다.

"조선도 귀국과 동등한 동맹을 맺을 수 있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제 중당께서는 세계를 순방하신다지요?"

이홍장은 앞으로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 등을 순방할 예정이었다.

"음, 각국을 둘러보며 서양의 진보를 직접 내 눈으로 봐야겠소. 지난 전쟁은 중국이 얼마나 진보로부터 뒤떨어져 있는지 깨닫게 되는 계기였소."

"중당의 위치에선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지 않을 터인데, 과연 중당께선 영걸이십니다."

전통 사회를 살아온 70대의 노인이 쉽게 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선의 찬사에 이홍장이 손을 내저었다.

"내 인생의 숙원이었던 양무와 북양 함대는 끝내 실패했지. 비록 이 늙은이가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죽기 전에 국체(國體)는 지킬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할 생각이오. 앞으로 중국도 변화해 나갈 것이오. 기대해도 좋소."

"귀국의 변혁을 기대하도록 하지요."

이선은 이홍장의 각오에 덕담을 건넸지만, 청나라의 앞날에 드리운 그림자는 짙고도 깊었다.

삼국 밀약 안에 또 다른 밀약이 있었으니, 바로 이선과 니콜라이 2세의 비밀 약조였다.

원래 조약의 제6조는 초안에는 없었다. 하지만 이선이 강력하게 밀어붙여 성사시켰다.

"동맹은 외환(外患)뿐만 아니라 내우(內憂)에도 대처해야 합니다. 내란이 발생할 경우에도 대비하도록 하지요."

이홍장은 이선이 즉위한 후 조선 내의 내란을 우려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6조는 별다른 의심 없이 조약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는 현시점에서는 예상할 수 없으나,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큰 사건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제가 예언 하나 하지요. 폐하께서만 알아두십시오. 청국은 향후 5년 내로 큰 내란에 휩싸이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청국에는 비극이 되겠으나, 어쩌면 조선과 러시아에는 엄청난 기회가 될 겁니다. 만주로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이선은 니콜라이 2세에게 ‘예언’을 했다.

역사대로 진행된다는 가정 하에, 의화단 사건은 1900년에 발생할 예정이었다.

‘과연 의화단이 역사처럼 준동할 것인가?’

역사가 바뀌었지만, 이선은 그럴 것이라 보았다.

패전 이후 청은 현실을 깨닫고 개혁의 몸부림을 쳤으나, 그러기에는 너무 시기가 늦었고, 지배층은 고루하고, 국가는 거대했다.

일본이나 조선과 달리, 청은 황실과 조정의 지배층이 몇 명 바뀐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고, 4억 중국인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이선은 의화단 사건이 일어난다는 데 배팅했다. 그리고 조선은 러시아와 손을 잡고 다시 북방으로 진출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삼국 밀약, 특히 6조는 이를 위한 선제적 조치였다.

이선과 니콜라이는 청국에서 내란 발생 시, 조약에 의거하여 공동 출병을 고려한다는 밀약 안의 밀약을 맺었다.

삼국 밀약이 체결된 후, 이선은 일본 사절단을 이끄는 이노우에 가오루 전 외무대신의 방문을 맞이했다.

역사대로라면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건 이노우에가 아니라 육군을 대표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

야마가타는 대동강을 경계로 조선의 세력권을 나눠 갖자는 제안을 러시아에 했고, 러시아는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자고 하여 러일 전쟁 이전의 어설픈 타협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역사의 변화로 인해 야마가타는 그런 제안을 던질 일 자체가 없었다.

"완화군 각하를 뵙기가 참 어렵군요. 근래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이노우에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러시아와 청국, 조선 사이에 잦은 회동이 이뤄지고 있어 뭔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밀약인 이상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아, 아시다시피 나와 황제 폐하는 좀 특별한 관계다 보니 그렇습니다."

"역시 러시아와 조선은 특별한 관계인가 봅니다."

"별말씀을요. 완화군과 니콜라이 2세가 그렇다는 거지요. 조선은 주변국을 모두 특별하게 여깁니다. 동양 평화를 위해 함께 싸웠던 동맹국 일본도 특별하게 생각합니다."

이선은 개인적인 친분이라고 선을 긋고, 일본에 대해 여전히 우호적이라는 뉘앙스를 던졌다.

"일본 역시 조선은 함께 동양 평화를 이끌어나갈 파트너라고 생각하지요."

"하하, 과연 그렇습니다."

일본은 할양받은 대만에서 벌어지는 게릴라전을 진압하느라 상당한 힘을 쓴 상황이었다. 대만 민주국은 끝내 붕괴하여 일본의 식민 통치는 확립되었고, 일본은 대만 지배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조슈와 육군은 대륙 진출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못했으나, 사쓰마와 해군은 대만을 중심으로 남양으로 진출할 계획을 세웠다.

사쓰마와 해군은 ‘북수남진(北守南進)’을 내걸었다. 북쪽(대륙)은 지키고 남쪽(해양)으로 팽창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들이 관심을 보이는 건, 대만 남쪽의 스페인령 필리핀과 남양 군도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슈 출신이지만, 근래 들어 사쓰마의 주장에 기울어졌다.

그러자 여전히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야마가타가 제동을 걸었다. 조슈 출신 이노우에는 이토와 뜻을 함께 하는 복심이지만 야마가타의 주장도 받아들여, 러시아에 가서 북방 진출의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 있는지 왔다.

하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러시아-청-조선이 결합하는 양상을 보이자, 이노우에는 북방 진출이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전략을 수정해야 했다.

"앞으로는 낡은 청국을 대신해 일본과 조선이 함께 동양의 평화를 지켜 나가야 합니다."

"원론적으로 동의합니다. 일본이 동양 평화를 위해 앞장선다면, 조선 역시 힘껏 도울 것입니다."

"역시 각하께서는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예컨대 근래 들어 필리핀에서 스페인 제국에 맞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던데, 일본이 아니면 누가 도울 수 있겠습니까? 귀국은 아시아 약소민족의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음, 동양의 운명은 동양인이 개척하도록 해야지요."

이선 입장에서도, 일본이 북수남진을 택한다면 바라던 바였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러시아 및 청국과 일본에 맞선 밀약을 체결했지만, 일본이 아예 조선을 넘보지 않는다면 그게 가장 좋은 일이었다.

이선은 일본이 안심하고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계속 우호적인 입장을 보일 생각이었다.

그러면 일본은 필연적으로 남방에서 러시아가 아닌 열강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었다.

‘일본 입장에서도 러시아를 상대하는 것보다, 스페인을 상대하는 게 훨씬 편하겠지. 만약 그렇다면 필리핀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미국과 충돌 가능성이 있고. 일본이 해양에 나가려 할수록 영미와 갈등을 빚게 될 거다. 일본이 역사처럼 영미를 등에 업고 대륙을 휘저을 가능성을 줄여야 해.’

물론 일본이 이선의 뜻대로 움직여 준다는 보장은 없었다. 이선은 자신의 구상이 현실화할수록, 열강 사이에서 계속 외교적 곡예를 넘을 생각이었다.

이선은 소기의 외교적 성과를 톡톡히 이뤄 냈다. 이선이 조선에 밀약 체결을 보고하자, 조선 정부는 감사와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이선이 보낸 두 번째 제안은 부정적인 답변이 날라 왔다.

각하, 정부는 동맹 조약 체결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조선은 러시아와의 굳건한 동맹 위에서 자주독립을 보장 받고, 북방으로 나아갈 길을 열 것입니다.

다만 러시아 황실이 제안한 국혼은 현재로서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총리대신 김홍집과 내각 각료들은 일제히 난색을 표했습니다.

조선 왕실에 외국인, 특히 서양인과의 혼인은 전례가 없습니다. 왕실은 물론이요, 사대부와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전 계층적인 반발에 부딪힐 수 있다는 이유입니다.

러시아 황실의 제안은 정중하게 거절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입니다.

제 개인의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국혼은 충분히 매력적인 제안입니다. 러시아와의 관계는 더욱 굳건해질 것이고, 조선은 열강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리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여론이 이를 받아들일지 우려가 됩니다. 특히 국태공과 대군주께서 절대 용인할 수 없을 거고,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각하께서 어떤 판단을 내리시든, 변함없는 존경과 충성을 표합니다.

내무대신 김옥균

이선은 전문을 받아들이고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애초에 논의 대상도 아니고, 의화군이 러시아 공주와 국혼을 맺는 것도 난색을 표한 것이다.

‘젠장, 러시아 황실을 설득하는 것보다 조선 왕실을 설득하는 게 더 어렵다니. 군사 동맹을 맺는 것보다 국제결혼을 하는 게 더 힘들다니 헛웃음만 나온다.’

이선은 조선의 보수성에 새삼 짜증을 느꼈다. 이조차도 15년 전의 극도로 폐쇄적이고 수구적인 조선과 비교하면 엄청난 진보지만, 조선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한계가 있었다.

이선의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이 시대에 와서 가장 깊은 호감을 느꼈던 건 마르가리타였다.

그는 그녀의 외모만이 아니라 내면- 이상, 지성, 진취성, 애국심, 진보성을 높이 평가했다.

단순히 왕족의 신분이라면 이미 8년 전에 그녀에게 함께 조선으로 가자고 권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국가를 이끌어야 하는 자는, 막중한 의무와 무수히 많은 제약이 있었다.

이선은 유라시아 반대편에 있는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편지는 한두 달에 한 번씩 도착했지만, 편지를 볼 때마다 그녀의 성장은 도드라졌다.

마침내 의사 시험에 합격하고, 정식 의사가 됐어요. 앞으로 제가 가진 의술을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위해 쓰고 싶어요. 왕자님이 조선의 백성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처럼, 저 역시 인민을 위해 봉사하겠어요.

청국에 맞서 싸우는 왕자님과 조선에 대한 소식은 유럽에서도 명성이 자자해요. 조선은 왕자님의 지도로 자주독립을 쟁취하리라 믿어요. 100년 전 폴란드에도 왕자님과 같은 지도자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아, 불쌍한 폴란드!

노동자와 여성, 아이들을 위한 병원과 야학에 합류했어요. 가엾은 사람들! 교육의 기회도 박탈당하고, 헐값에 가혹한 노동으로 착취당하고 있어요. 제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단지 병을 치료하고, 글자를 가르치는 것만으로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선에게 보내는 편지는 검열을 피하는 덕인지, 마르가리타의 속내가 감추지 않고 드러나고 있었다.

이선은 그녀의 성장이 기쁘면서도,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폴란드 애국자이자 진보주의자인 마르가리타는 차르 체제의 잠재적인 적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편지는 끊겼다.

러시아에 도착한 후 이선은 연락이 끊겼던 마르가리타의 거처를 수소문했다. 그저 친구로서 다시 만나보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비관적이었다.

"마르가리타 얀코프스카는 폴란드 독립운동에 가담했습니다. 정치범으로 수배되었고, 지금은 종적을 감췄습니다."

이선은 비로소 왜 마르가리타와 연락이 끊겼는지 알 수 있었다. 과거 그녀의 선조들이 걸었던 지난 길을 스스로 걷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그녀가 보였던 애국심과 헌신을 생각하면,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이선은 더욱 마르가리타와 가까이할 수 없었다. 폴란드 독립운동에 가담한 ‘반역자’는 차르의 적이었다. 러시아 제국의 호의를 사야 하는 이선에게 있어, 그녀는 잊어야만 했다.

이선은 씁쓸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선이 이강에게 냉정하게 외쳤던 말은, 결국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의 인내도 슬슬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

- 23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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