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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혁명의 시대-235화 (234/812)

235화 현실과 이상

"내 삶과 조선의 진로가 영감을 줬다니 책임감을 느끼는군요."

"책임감 느끼지 않아도 돼요. 정해진 운명이었고,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까."

"처음부터 정해진 운명이라는 건 없죠. 애초에 당신은 혁명 운동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 같은데."

"귀족 출신이, 그것도 여자가 왜 굳이 이런 험한 일을 하냐는 건가요? 그렇다면 폴란드에는 여성 혁명가들의 전통이 있다고 말씀드리죠."

1830년 11월 봉기의 에밀리아 플라테르(Emilia Plater), 1863년 1월 봉기의 마리아 피오트로비초바(Maria Piotrowiczowa).

러시아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이들은 독립 투쟁의 상징이 됐고, 19세기 말에는 이들을 본받아 더 많은 여성 혁명가들이 등장한다. 훗날 ‘마르크스 이후 최고의 두뇌’로 명성을 떨칠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도 폴란드 출신이었다.

"아니, 귀족이든 여성이든 자유 의지로 택하는 일은 존중합니다. 난 의사로서의 삶을 말하는 겁니다. 어렵게 의사가 됐는데, 의사로서 많은 이들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죠. 하지만 바르샤바에서 빈민을 위한 병원에 들어간 후에 생각이 바뀌었어요. 노동자들의 빈민가를 가 본 적이 있나요? 한동안 페테르부르크 귀족 사회에 있다가 가니까 더 대비되더군요.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천국과 지옥처럼 나뉘어 있어요."

마르가리타의 목소리가 순간 높아졌다.

"소수의 귀족과 자본가들은 부를 주체하지 못하는데, 다수의 노동자는 병을 치료할 여유조차 없어요. 아이들은 다수가 영양실조에 시달리죠. 결국, 이 저주받은 사회가 만들어 낸 병이에요! 사회의 병을 치료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러시아와 동유럽의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ia, 지식인 계급)가 유독 사회주의에 심취한 건, 그만큼 사회의 모순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혁명적 부르주아지와 자유주의가 역사적 역할을 수행한 서유럽과 달리, 러시아는 시대착오적인 전제정에서 산업화가 시작되며 자본주의적 모순까지 더해졌다.

자유주의적 개혁의 가능성이 미미한 러시아에서, 변화를 원하는 인텔리겐치아는 혁명 운동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해합니다. 동양에도 이런 말이 있어요. 작은 의사는 병을 고치고, 보통 의사는 사람을 고치지만, 진정한 큰 의사는 나라를 고친다."

엄밀히 말하면 이선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중국인 의사 손문(孫文)이 청조를 타도하기 위해 혁명의 길로 나가면서 한 말로, 아직 유명한 말은 아니었다.

"좋은 말이네요. 역시 옳은 일을 선택하는 데에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군요."

"그렇다면 나라를 어떻게 고칠 것이냐. 이 지점에서, 위로부터의 개혁을 실천하는 나 같은 사람과,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꿈꾸는 당신 같은 사람의 시각이 달라지겠죠."

"썩어 빠진 러시아에선 위로부터의 개혁 가능성이 없어요. 오직 혁명만이 있을 뿐이지!"

"그렇다고 그 해답이 사회주의는 아니지. 애초에 마르크스도 자본주의적 발전이 최고조에 달한 나라에서 혁명을 상정했지, 러시아나 동유럽 같은 낙후한 농업 국가에선 아니지요."

"교수님 같은 말을 하는군요. 동양에서 온 왕자님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뭘 알아요?"

"흠, 남들보다는 잘 안다고 자부하는데."

이선은 영어로 한 구절을 읊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지배 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그걸 외우고 있다니 놀랍네요."

"내가 그 지배 계급에 속하는데 대응 전략을 세우려면 잘 알아야지. 동양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공산당 선언 말고도 웬만한 저작은 다 읽어 봤어요."

이선은 청산유수처럼 사회주의 이론과 역사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 시대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다뤄 보는 주제였지만, 혀는 매끄럽게 굴러갔다.

마르가리타도 이선의 방대한 지식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벌벌 떨어야 할 유럽의 지배 계급들보다 훨씬 잘 알고 있군요. 그래요, 그 지배 계급에 속하시는 분이 왜 나를 설득하려고 하죠? 왕자님의 친구인 차르가 시키던가요? 반역자를 정신적으로 굴복시키라고?"

"차르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은 아닙니다. 여긴 나 자신의 의지로 왔고, 그도 아직 모를 겁니다. 이번에는 내가 묻지요. 당신에게 중요한 건 폴란드 민족 해방인가요, 프롤레타리아 계급 해방인가요?"

이선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마르가리타는 허를 찔린 듯했다.

"그, 그걸 질문이라고. 당연히 같이 가는 거죠. 폴란드 독립과 사회주의 혁명은 함께 추구할 목표이지, 대비되는 게 아니에요."

"그래도 우선순위라는 게 있을 거 아닌가요? 그 둘이 상충하는 순간도 분명히 올 테고. 사회당 지도부에서도 생각하는 바가 있잖습니까? 당신이 따르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민족 독립을 훨씬 우선할 사람인데. 결국, 혁명이란 건 수단에 지나지 않지."

마르가리타는 이번에는 정말로 놀라고야 말았다.

"어, 어떻게 알고 있죠? 오흐라나가 그런 것까지 알려 주던가요?"

이선은 빙긋 웃으면서 그녀 외에는 누구도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추었다.

"오흐라나가 알려 줄 리가.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거라고 칩시다. 내 정보망이 워낙 방대해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ozef Piłsudski)는 바로 작년에 폴란드 사회당(PPS)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혁명적 민족주의자인 피우수트스키는 당 강령을 고쳐 폴란드 독립을 최우선 과제로 상정했다.

러시아 제국에서 산업화가 가장 잘 된 폴란드는 민족주의 성향까지 더해지며 전투적인 노동자 계급을 보유했다. 이들은 폴란드에서 가장 잘 조직된 집단이었다.

독립을 추구하는 모든 정파가 노동자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했다. 사회당뿐만 아니라 폴란드 독립보다 사회주의 혁명을 더 중시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사회 민주당(SDKPiL), 가톨릭 민족주의 우파 성향의 민족 민주당(SDN) 모두 노동조합을 창설해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려 했다.

후일 독립 폴란드의 지도자가 되는 피우수트스키는 ‘우리는 사회주의라는 붉은 기차를 탔지만, 독립이라는 역에서 내렸다’라고 말할 정도로, 독립 투쟁의 수단으로 사회주의를 이용했을 뿐이었다.

이선은 현란한 언변으로 폴란드 독립운동의 현황과 전망에 대해 논했다.

마르가리타는 혼란스러웠다.

‘대체 이 왕자는 어떻게 이런 것까지 알고 있는 거지?’

"헛소리하지 마요! 차르는 당신의 예언에 넘어갈지 몰라도, 우리는 아니에요."

"아니, 좀 솔직해져 봅시다. 독일인과 러시아인들은 폴란드인을 동등한 민족으로 여기지 않지. 당신들은 거기에 분개하고 있고. 하지만 폴란드인들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인들을 동등한 민족으로 여기지 않잖아요. 이들은 독립할 능력이 안 되니 모두 옛날처럼 폴란드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게 당신들 생각 아닌가?"

"……."

순간 마르가리타는 할 말을 잃었다. 폴란드 독립운동가들이라 할지라도, 주변 민족에 대해 우월 의식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마르가리타 자신도, 그녀가 열렬히 지지하는 피우수트스키처럼,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혁명적 민족주의자였다.

"아니, 부끄러워하지 말아요. 그게 본질이니까. 원래, 다 그런 법이야. 오스트리아 제국에 가장 격렬히 저항하던 헝가리가 주권을 얻고 기득권이 생기자 크로아티아와 루마니아인을 탄압하는 걸 봐요. 폴란드도 마찬가지. 폴란드가 독립하면 리투아니아와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인정할 수 있을까?"

"그, 그런 걸 막기 위해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이 필요한……."

"좋아요. 당신들 소원대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폴란드가 독립된다고 가정합시다. 지금은 가능성이 없어 보여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현실이지. 그럼 민족 간의 앙금을 풀고 만국의 프롤레타리아가 단결할까?"

이선은 예언처럼 말했다.

"천만에. 사회주의 러시아는 대러시아 쇼비니즘의 또 다른 형태가 될 거고, 폴란드 역시 러시아 제국의 잔해 위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를 되찾으려고 하겠지. 사회주의 러시아가 세계 혁명과 노동 계급 해방을 부르짖으며 독립한 폴란드를 공격하면, 당신은 받아들일 수 있어요?"

이선은 피우수트스키와 사회당 지도부가 전망하는 미래를 정확히 짚어 내고 있었다.

이들은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이 폴란드 해방을 이끌어 내리라는 국제주의자와 극좌파들의 전망을 비웃고, 사회주의 러시아는 러시아 쇼비니즘의 또 다른 형태가 되리라고 추측했다. 폴란드 독립은 폴란드인의 손으로 쟁취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이선의 말은 끊임없이 계속 이어졌다.

‘도대체 이 왕자는 모르는 게 없어. 대체 정체가 뭐지?’

마르가리타는 오흐라나의 고문보다 이선의 말에 더 정신이 흔들렸다. 이선의 말은 마치 파우스트를 현혹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대, 대체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거죠? 당신은 차르의 친구잖아요."

"흠, 조선과 폴란드는 분명 매우 흡사한 측면이 있어요. 주변에 독립을 억압하는 제국이 있죠. 그리고 독립을 쟁취한 후에는 그 제국의 잔해 위에서, 고토를 되찾아 옛 영광을 되찾고 싶어 하지. 그런 점에서 장차 피우수트스키 씨와 나는 말이 매우 잘 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피우수트스키는 러시아라는 적에 맞서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러일 전쟁 때는 멀리 일본까지 찾아 지원을 요청할 정도였다. 일본의 지원을 받은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선은 현시점에서 충실한 ‘친러파’였지만, 앞으로 역사적 변화에 따른 모든 변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당분간은 러시아 제국이 조선 최고의 우방이지만, 영국의 압박을 받게 되면 다른 선택을 해야 할지도 모르지. 러시아와 영국, 어느 쪽이 조선의 새로운 물주가 될지, 모든 사안에 대비해 카드는 쥐고 있어야지.’

"보다 중요한 건, 당신이 내 동지 미하우 얀코프스키의 친척이기도 하고, 그는 새로이 창설한 조선 기병대의 중요한 축입니다. 당신도 그처럼 조선에서 새로운 인생을 찾아볼 생각은 없어요?"

함경도에서 대규모 목장을 운영하는 얀코프스키는 사실상 조선군의 군납업자이자 기병 육성가였다. 조선은 기병이 취약했고, 전통적인 조선마로는 기병대 운용에 한계가 있었다. 얀코프스키는 러시아에서 서양마를 들여와 품종을 개량했다.

지난 전쟁에서 만주로 북진하려면 기병의 기동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한 조선 군부는, 얀코프스키에게 명예 정령의 계급을 부여하고 기병 공급의 중책을 맡겼다.

"미하우는 조국 해방의 전선에서 빠져나갔어요. 나더러 그런 배신을 하란 말인가요?"

"배신이라니, 그런 가혹한 말을. 장기전에 대비해야죠. 최적의 정세에 대비해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방을 내질러야지. 내가 괜히 청나라에 10년간 머리를 숙이고 있었는지 압니까?"

"그리고 지금은 러시아에 머리를 조아리잖아요. 러시아가 당신의 새로운 주인인가요?"

"아니, 그게 뭐가 나쁩니까? 약소국은 약소국의 외교라는 게 있어요. 아낌없이 베풀어 줄 대국을 물주로 선택하는 것도 능력이지. 필요에 따라 강대국을 이용해서 성장하는 게 무슨 문제가 있죠?"

이선은 웃음을 거두고 정색했다.

"장렬한 패배는 보기에 아름다워도 현실적인 의미가 없어요. 막말로, 당장 당신이 시베리아로 유배되거나 죽으면, 폴란드가 해방됩니까? 살아서 승리를 쟁취해야지. 이상도 현실에 발을 딛어야만 쟁취할 수 있는 거라고."

"……."

마르가리타는 입을 다물었다. 이선의 말에 반박하고 싶지만, 그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강철 같은 의지를 다짐했다지만, 오흐라나의 안가에 끌려오는 순간 그 의지가 무디어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오흐라나 요원들은 끝내 입을 열지 않으면 가혹한 고문을 하리라 위협했고, 장차 시베리아에서 끔찍한 꼴을 겪으리라고 협박했다.

마르가리타는 조직의 비밀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오흐라나는 믿지 않을 터였다.

그녀는 결코 동지를 배신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만약 이선이 나타나 주지 않았더라면, 오흐라나의 위협은 현실로 나타났을 것이다.

"조선에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특히 여의사가 많이 부족하죠. 워낙 남녀유별이 심한 사회라, 여의사의 존재는 중요해요. 하지만 아직 여성 교육이 궤도에 오르면 시간이 필요하니, 과도기에는 서양 출신 여의사들이 조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죠. 당신도 함께했으면 하는군요."

마르가리타는 그의 제안이 고마우면서도 혼란스러웠다.

"왜, 왜 대체 내게……. 대체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우린 그저 몇 번 만나고, 편지를 주고받은 게 전부라고요. 근데 왜 나를 위해 당신이 이러는 거죠?"

이선이 웃음을 흘렸다. 그 자신도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의문이었다.

"흠, 당신이 그만큼 매력적이라서?"

마르가리타는 순간 얼굴을 붉혔다.

"뭐, 뭐예요."

"아니, 진짜로. 이 시대를 살면서 당신만큼 매력적인 사람을 못 본 것 같아서.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죠."

솔직히 말해서, 마르가리타의 외모가 매력적이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동서양의 아름다움이 조화된 슬라브 여인 특유의 미모를 갖고 있었다. 청순가련한 스타일의 그녀는 오히려 동양 취향에 가까웠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건, 그녀의 내면이었다. 외모가 아름다운 여자는 어디에나 있었다.

이선은 12년 전부터 마르가리타의 내면, 즉 이상, 지성, 진취성, 애국심, 진보성에 끌렸다.

‘…… 이성 관계로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이지만.’

물론 이선은 현실 정치가였다. 그녀와 이뤄질 수 없다는 건 그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하지만 ‘동지’로라도 계속 관계가 유지되길 바랐다.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마르가리타의 태도는 한층 누그러졌다.

"내가 차르에게 부탁해 보죠. 물론 당신도 전향서는 쓰고 충성 맹세도 해야 할 겁니다."

"나, 난 동지를 배신할 수 없어요."

"누가 배신하랍니까?"

이선은 마르가리타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한참 속삭였다. 그녀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 236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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