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대제의 후계자
면회를 마친 이선은, 며칠 뒤 니콜라이 2세의 초대를 받았다.
한동안 환담을 나누던 중, 니콜라이는 이선에게 물었다.
"내무부의 보고를 받았네. 자네가 공안 질서 수호국에 체포된 폴란드 분리주의자를 면회했다고."
"아, 오랜 친구입니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12년 전에 바르샤바에서 같은 기차를 타고 왔던……."
"아아! 기억나네. 자네가 데려왔었지. 예쁜 귀족 아가씨였던 것 같은데. 근데 어쩌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갔는지."
이선은 자초지종을, 최대한 차르의 시각에서 거부감이 없도록 설명했다. 니콜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폴란드 분리주의자들은 제국의 오랜 골칫덩어리야. 증조부님이신 니콜라이 1세 재위 이래 반란을 끊임없이 일으키고 있지.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지. 폴란드는 하층민은 물론이고 귀족의 충성심조차 믿을 수가 없어."
이선은 굳이 차르의 편견을 고쳐 주지 않았다. 대신 선제의 사례를 언급했다.
"니콜라이 1세께서는 엄격한 분이셨지만, 잘못된 길에 접어든 청년이 정신을 차리도록 관대한 처분을 내리기도 하셨습니다. 해방자 황제이신 알렉산드르 2세께서는 더욱 그러하셨고요. 주모자가 아닌 이상 황제의 관용을 베풀어도 좋지 않겠습니까?"
"음, 어떻게 말인가?"
"마르가리타 얀코프스카의 사촌인 미하우 얀코프스키도 한때는 반역자였으나, 알렉산드르 2세의 사면을 받아 연해주에 정착했습니다.
그는 조선으로 와서 신생 조선 기병대의 창설에 도움을 주었고, 지금도 러시아와 조선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지요. 얀코프스카는 의사이니, 여의사가 드문 조선에 초빙하고 싶습니다. 그녀가 조선에서 속죄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니콜라이는 씩 웃었다.
"그 여인이 어지간히 자네 마음에 들었나 보군."
"아, 송구하오나……."
"아니, 송구할 게 뭐 있나. 결혼했다면 모를까, 미혼의 젊은이가 그럴 수도 있지. 나도 이해하네. 폴란드 여인들이 매력이 있어. 자네, 내 옛 애인이 폴란드 여자인 걸 아나?"
"그렇다면 그 소문이 사실입니까?"
"자네도 알고 있었나? 뭐, 공공연한 비밀이니까. 물론 알릭스랑 약혼하면서 완전히 정리했네."
니콜라이는 황태자 시절, 마린스키 황립 발레단의 발레리나 마틸다 크셰신스카(Matylda Krzesi?ska)와 사랑을 나눈 적이 있었다.
황실 발레단은 ‘대공들의 정부(情婦)들’이라 불릴 정도로, 황족들과의 연애 사건이 빈번했다.
폴란드 출신으로 니콜라이보다 4살 연하인 마틸다 크셰신스카는 뛰어난 재능과 야망을 품은 발레리나였고, 황태자의 눈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황태자와 마틸다의 연애는 3년 정도 지속되었으나, 결국 니콜라이가 알렉산드라와 약혼하면서 애인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황족들이 정부를 두는 일은 허다했지만, 애처가인 니콜라이는 결혼 이후에 정부를 둘 생각이 없었다.
"뭐, 지금도 가끔 마틸다의 발레 공연을 보러 가곤 한다네. 프리마 발레리나로서의 자질이 충분하거든. 그만큼 야망도 대단하고. 그녀의 새 애인은 내 사촌 동생이라네."
니콜라이는 일방적인 결별을 하진 않고, 사촌 동생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대공에게 마틸다를 소개했다.
세르게이 대공은 마틸다에게 푹 빠져들었고, 그녀의 애인이자 후원자가 되었다. 마틸다는 대공의 후원을 받아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근데 폴란드 여자들은 너무 기가 센 것 같아. 마틸다도 집착이 너무 심했지. 헤어진다고 할 때 자살하겠다고 난리였다네. 자네도 각오해야 할걸."
"폐하,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오해할 게 뭐 있나. 자네가 내게 이런 부탁한 게 처음인데. 귀족 신분으로 반란에까지 뛰어든 여자라니, 원."
"저는 그녀를 오랜 친구로서, 차마 잘못된 길로 접어드는 걸 지켜만 볼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 잘못된 길은 바로잡아야지."
니콜라이는 잠시 생각을 했다.
오흐라나의 보고에 따르면, 얀코프스카의 혐의는 폴란드 분리주의 및 사회주의 선동이었다. 구체적인 행위는 사회당 기관지에 논설문을 썼다는 것과 노동자들에게 무료 진료를 해 주면서 폴란드 독립과 사회주의 사상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니콜라이 2세가 볼 때 그 정도는 대단한 혐의는 아니었다. 반정부 세력을 엄격하게 대처했던 알렉산드르 3세와 달리, 니콜라이는 가소롭게 여겼다.
니콜라이는 풀어 줘도 별 상관이 없다고 판단했다.
"여자들은 감상적이고 동정심이 많지. 귀족 출신인 젊은 여의사가 하층민의 삶을 보고 잠시 사회에 분노를 품었다고 해도 이해가 돼."
"그렇습니다. 특히 얀코프스카는 심성이 착하고 동정심이 많아서, 잠시 잘못된 판단을 내렸을 뿐입니다. 개전(改悛)의 여지가 충분합니다. 폐하의 관용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직 재판을 받은 것도 아닌데 사면을 논할 일도 아니지. 전향만 한다면, 내가 내무부에 명해서 풀어 주라 하겠네."
"감사합니다, 폐하. 그녀도 폐하의 은혜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폐하의 은혜에 기꺼이 전향하고 폐하께 충성 맹세를 할 것입니다."
이선이 고개를 숙이자, 니콜라이가 갑자기 정색을 했다.
"대신 조건이 있네."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폐하."
"나는 곧 알릭스와 함께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방문할 예정인데, 자네가 함께해 줬으면 하는군."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선 입장에서도 바라던 바였다. 차르가 오스트리아와는 발칸 문제를 논의하겠지만, 독일과는 당면한 동아시아 문제를 논의할 가능성이 컸다.
‘독일은 삼국 간섭의 당사자이고, 역사대로라면 곧 칭다오를 점령하려 들 터이니 분명히 이 일을 논의하려 할 것이다.’
"빌리와는 만난 적이 있지? 그도 자네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독일과 러시아가 적대적인 관계에 있으나, 빌헬름 2세와 니콜라이 2세는 서로를 애칭으로 부르며 친밀하게 대하는 관계였다.
"카이저께서 워낙 박학다식하고 포부가 넘치는 분이라, 제가 그분께 많이 배웠습니다."
"음, 야심만만하지. 그래서 내가 대하기가 좀 까다로운 측면이 있지만. 아무튼, 빌헬름도 러시아의 미래가 태평양에 있다고 보고 있네."
니콜라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화제를 돌렸다.
"근데 설마 이 폴란드 여인 때문에 내가 주선한 혼사를 거절한 건 아니겠지? 유리예프스카야 공주만 불쌍하게 됐군."
이선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오해이십니다. 국혼이 성사되지 않은 건, 말씀드렸다시피 조선 왕실의 반대와 러시아 황실에서 요구한 정교회 개종 문제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국혼은 불가합니다."
니콜라이는 껄껄 웃으면서 이선의 어깨를 쳤다.
"하하, 자네가 당황하는 거 처음 보는군. 농담일세. 자네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네. 개종 문제는 황실 어른들이 정색하고 계셔서, 내가 황제라고 해도 어떻게 할 수가 없네. 조선에서도 마찬가지겠지."
"그렇습니다. 문화적 차이가 있다 보니.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폐하."
"자네는 내 할아버님뿐만 아니라, 내 목숨도 구했네. 그런데 이런 사소한 부탁 하나 못 들어주겠나?"
"폐하의 은혜에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좀 아쉬운 감이 있군. 자네 가문이 우리 가문과 결합하였더라면 더욱 가까워졌을 텐데 말이야……."
니콜라이의 호의에 이선은 웃으면서 화답했다.
"당장은 무리여도 5년만 기다려 주십시오, 폐하. 조선은 새로이 제국을 선포하면서 왕실 전범을 새로 제정할까 합니다. 이제 제가 군주이자 왕실의 수장이 되면, 조선이 많이 달라질 겁니다."
"오! 그거 반가운 말이군."
이선은 차르의 방에 걸려 있는 표트르 대제의 초상화를 가리켰다.
"제가 일전에 말씀드렸지요. 저는 표트르 대제를 본받고 싶다고,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를 송두리째 바꾼 것처럼, 조선도 완전히 바뀌게 될 겁니다."
"과연 표트르 대제는 위대한 군주이자 나의 조상이시지. 나 역시 그리되길 바라네."
니콜라이는 표트르 대제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그는 위대한 조상의 초상화를 볼 때마다 압박감과 부담감을 느꼈다.
이선처럼 큰 포부를 가지고 국가를 개혁하겠다는 지도자에게는 어울리는 인물이었지만, 니콜라이처럼 전통과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지도자에게는 아니었다.
어쩌면 표트르 대제의 정신적 후계자는 혈통을 이어받은 니콜라이가 아니라, 이선일지도 몰랐다.
차르의 명령으로 마르가리타는 풀려날 수 있었다. 단, 전향해서 차르에게 충성 맹세를 하며, 향후 10년간 러시아를 떠나는 조건에서였다. 사실상 국외 추방형이었다.
이선은 그녀가 조선으로 갈 수 있도록 손을 써 두었다. 나중에 자신이 귀국할 때 함께 돌아갈 예정이었다.
이선이 차르에게 부탁해서 ‘친구’를 조선에 데려간다는 이야기는, 사절단의 귀에도 들어갔다.
특히 이강은 친교를 맺은 러시아 황족들을 통해서 소문을 들은 바였다.
"형님! 이거, 이거……."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아는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 아니다."
"아니, 남자와 여자 사이에 그런 일이 아니면 대체 뭡니까?"
"아, 아니라고. 서양 의사 초빙한 거야."
이선의 부정에도 이강은 멈추지 않았다.
"그럼 저도 서양 가수 초빙해도 됩니까? 저한테 그리 말씀해 놓고선 어찌 이럴 수가 있으십니까? 표리부동(表裏不同)하게."
"표리부동? 차라리 내로남불이라고 해라."
"내로남불이 뭡니까? 그런 사자성어도 있어요?"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이선은 씩 웃었다.
"국가 간의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하면 문명과 해방이고, 적이 하면 야만과 침략이야. 포장하기 나름이지."
이선의 말에 이강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박장대소를 하며 손뼉을 쳤다.
"하하, 역시 완화군 형님! 제가 이래서 형님을 존경합니다. 형님의 화술에는 당해 낼 수가 없군요."
"네가 생각하는 일 없을 테니 걱정 마라. 왕족으로서의 책무를 저버리는 일은 하나도 없으니."
"암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무튼, 산책하러 나가려는 참이었으니 따라오든지."
"알겠습니다."
이선은 이강, 호위무관 장무영만을 대동하고 페테르부르크 넵스키 대로에 나섰다.
유럽에서 동양인은 드문 존재였고, ‘조선의 왕자들’은 어느 정도 명성이 알려졌기에 개중에는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행인이 간혹 알아보고 인사를 하면, 이선 형제도 정중히 답례했다.
"미국이 세상에서 제일 미녀가 많은 줄 알았는데, 러시아에 와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이강은 지나가는 여인들을 보며 시를 읊듯이 말했다.
"허리는 버들처럼 가늘고 살결은 옥과 같고, 화장하지 않고 눈썹을 그리지 않아도 아름다운 모습이 자연스럽게 갖춰졌으니, 어여쁘고 가녀려 차마 가누기도 어려워라! 소매 없고 가슴을 드러내도 예절은 가장 바르니, 때로 명을 받아 황궁에 들어가 나비처럼 사뿐히 다투어 춤을 추네. 긴 치마 땅에 끌며 꽃떨기로 수를 놓네."
"……네가 지은 시냐?"
"사절단의 누군가가 황궁 무도회에서 영감을 받아 지은 시지요. 내용이 마음에 들어 외우고 다닙니다."
"이것들이 진짜, 여자 보러 서양 왔냐? 내가 너를 일부러 러시아까지 불러낸 이유를 보여 주마."
이선 일행은 원로원 광장을 지나갔다.
"여기가 바로 70년 전에 데카브리스트 반란이 일어났던 곳이다. 이른바 12월 혁명이지. 너도 서양 역사를 배웠으니까 알고 있겠지?"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청년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사건이죠."
"그래, 고결한 이상주의자들이었지만 실패했지. 변혁은 아무리 이상적이라고 해도 소수 음모자에 의해 성공하지 않는다. 내가 왜 그토록 다수의 지지를 얻으려 했는지 알겠나?"
실제 역사의 1825년 데카브리스트 봉기와 1884년 갑신정변은 비슷한 측면이 많았다. 낡은 사회를 부수기 위해 변혁을 꿈꾼 소수 엘리트 계급의 정변. 하지만 군주와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채 참담한 실패로 끝이 났다.
이선은 이를 반면교사로 여기고, 낡은 사회의 변혁을 성공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이선 일행은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 앞에 섰다. 바다를 향해 힘차게 뻗어 가는 자세의 기마상. 15년 전에 이선이 다짐했던 곳이었다.
"표트르 대제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
"예, 낡은 러시아를 바꾼 위대한 군주죠."
표트르 대제는 동양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다. 메이지 유신을 선포한 일본과 패전 이후 개혁에 착수한 청나라가 모두 본받는 대상이었다.
낙후한 사회를 한 사람의 뛰어난 군주가,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급진적으로 바꾸어 냈으니, 동양의 군주제 국가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여기기에 충분했다.
"이 황제는 특이하게도, 군주 한 사람의 의지로 나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꿔 버렸다. 황제가 직접 외국으로 유학 가서 기술을 배운 건 이 사람밖에 없지. 러시아가 강대국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건, 이 황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요."
"반대도 그만큼 극심했지만, 손수 반대자들을 도끼로 내려치면서 죽였다든가. 한쪽에서는 위대한 명군, 한쪽에서는 끔찍한 폭군."
표트르 대제의 급진적 개혁은 극심한 반발을 일으켰다. 반란은 모조리 잔혹하게 제압되었지만, 반대파들 사이에선 여전히 소문이 떠돌아다녔다.
‘진짜 황제는 외국에서 살해당하고, 가짜가 황제를 자칭하고 있다.’
그런 뜬소문이 떠돌 정도로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사회를 뒤바꿔 버린 것이다.
표트르는 대북방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러시아 제국을 선포하고, 오랜 전통을 파괴하고, 후계자도 자기 마음대로 정했다.
외국인 평민 출신 애인 예카테리나를 황후에 이어 사후 황제로까지 만들었다. 그야말로 거침없는 전제 군주였다.
"때로는 이 황제의 삶이 부럽다네. 정말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거 다 했거든."
"형님도 그렇게 하시면 되지요. 낡은 조선을 바꾸고 있는 형님이 오히려 과중한 책무로 인해 제약에 걸리는 게 안타깝습니다."
이강의 말에 이선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너는 말이 통하는구나. 하지만 당장은 곤란하지. 표트르 대제처럼 더 큰 영광이 필요해."
"큰 영광이라 하시면?"
"승리, 더 많은 승리! 나는 이미 삼전도의 치욕을 씻었다. 더 나아가 자금성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만주의 고토를 회복한다면, 누가 감히 내게 뭐라고 하랴?"
이선은 지금까지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야심을 드러냈다.
"앞으로 5년, 최대 25년 이내에 조선을 넘어 동양의 구도를 확 바꿔 버리겠어."
이선은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을 바라보며 옛일을 떠올렸다.
15년 전에는 생존과 개혁을 다짐했다면, 이제는 제국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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