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세계 제국의 야망
오스트리아-헝가리 방문을 마친 후, 이선은 독일로 향했다. 조선 사절단 대부분은 독일에 체류 중이었다.
니콜라이 2세는 우크라이나 키예프로 돌아갔다가, 8월 초 독일령 브레슬라우(Breslau)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카이저 빌헬름 2세와의 회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선도 카이저의 초대를 받아 브레슬라우에 도착했다.
훗날의 폴란드령 브로츠와프가 되는 브레슬라우는, 이때만 해도 독일 동부의 최대 도시였다.
1896년 8월 15일, 브레슬라우에서 차르의 방문을 환영하는 독일군 열병식이 열렸다.
"니콜라이 2세 폐하, 폐하의 즉위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독일은 대서양으로, 러시아는 태평양으로 나가 세계의 바다를 주름잡게 될 겁니다."
"빌헬름 2세 폐하, 참으로 포부와 야망이 넘치는 훌륭한 말씀입니다."
프로이센 근위대의 사열 행진을 보면서 빌헬름 2세는 한껏 허세를 부렸다. 높은 모자를 쓰고 화려한 군복을 입은 근위대는 더운 여름 날씨에도 흐트러짐 없이 움직였다.
카이저는 러시아의 새 차르에게 독일군의 위용을 보여 주어, 아무리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어도 독일과 적대하는 게 무익하다는 걸 보여 주려고 했다.
"이선 공, 공이 보기엔 독일 제국군의 위용이 어떠하오?"
카이저의 질문에 이선이 정중히 답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폐하. 과연 세계 최고의 정예 군대입니다. 이런 군대를 거느리고 계신 폐하가 참으로 부럽습니다."
"하하! 듣기 좋은 말이군. 강한 군대는 국력의 상징이지. 귀국도 그리될 것이오. 청국을 상대로 승전을 거둔 걸 축하드리오."
"감사합니다. 이는 폐하의 공이기도 합니다. 독일 군사 고문단으로부터 프로이센식 군제 개혁을 이룬 덕입니다."
이선의 말에 카이저는 더욱 기분이 좋은 듯했다.
"우리 독일군을 모델로 군제 개혁을 한 일본과 조선이 승리를 거뒀다니, 독일의 승리라고도 할 수 있겠군."
말은 그렇게 해도, 빌헬름 2세는 동양의 전쟁에 대해 다른 속내를 갖고 있었다.
브레슬라우 궁전에서 환영연이 열렸다. 만찬장에 들어서던 이선은 낯익은 그림 하나를 보았다.
군복을 입고 날개 달린 발키리가 동쪽 하늘을 가리킨다. 동쪽에는 부처가 용을 타고 불길을 몰고 오고 있다. 유럽의 도시들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다. 발키리는 여러 여신에게 외친다.
Volker Europas, wahrt eure heiligsten Guter(유럽의 민족들이여, 그대들의 신성한 보물을 지켜라)!
‘황화론이군.’
1895년, 서양식 근대화에 나선 일본과 조선이 청국을 무찌르자, 빌헬름 2세는 ‘황화론(黃禍論, Gelbe Gefahr)’을 제창했다.
"서구화된 일본을 본받아 중국이 서구화에 성공한다면, 분명히 그들은 유럽에 당한 굴욕을 갚으려고 할 것이다. 잘 조직된 4억의 침략자를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유럽 문명이 단결하여 이들을 제압해야 한다!"
이선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림을 바라보자, 옆으로 다가온 카이저가 물었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소?"
동양인에게 황화론의 의미를 묻다니 참으로 불쾌한 일이었지만, 이선은 불쾌감을 감추고 정중히 답했다.
"발키리는 곧 독일을 의미하고, 여신들은 유럽 각국을 의미하겠군요. 부처는 일본, 용은 중국을 의미하며, 불길은 동양에서 밀려오는 위협이겠군요."
"역시 공은 총명하군. 동아시아의 전쟁 결과를 보고 그린 그림이라오."
카이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오해는 마시오. 물론 모든 동양인이 위험하다는 뜻은 아니니까. 짐이 경계하는 건, 먼저 서구화에 성공한 일본이 거대한 중국의 힘을 흡수해 유럽에 맞서 싸우는 거니까. 이를 방지하기 위해 독일, 러시아, 프랑스가 연합해 일본의 대륙 침략을 저지한 것이오."
빌헬름 2세가 황화론을 제창한 건 단순히 해묵은 인종 차별주의를 자극한 건 아니었다.
카이저는 ‘현실 정치(Realpolitik)’를 주장한 전임자 비스마르크와 달리, ‘세계 정치(Weltpolitik)’를 외치며 유럽을 넘어 세계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
황화론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독일이 아시아에 진출하는 걸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러시아를 자극해 계속 동아시아 진출을 유도하여, 유럽 문제에 신경을 덜 쓰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독일은 자국과 별 관계도 없어 보이는 삼국 간섭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동양의 프로이센’을 자처했던 일본에 굴욕을 안겨준 것이었다.
"조선을 간섭 대상에서 배제한 건, 조선은 러시아의 우방이기 때문이지. 이는 귀국에 대한 짐의 호의이기도 하오."
카이저는 대단한 호의를 베푼다는 식으로 말했다.
"폐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짐은 러시아가 극동과 태평양에 진출하길 원하오. 그대도 이를 원하지 않소?"
"……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함께 니키를 설득해 볼 수 있겠군. 짐이 듣기로 그가 그대의 조언을 좋아한다더군. 니키는 사람은 참 좋은데, 결단력이 부족해서 말이야. 그래서 짐과의 회담에도 그대를 데려온 것 아니겠소?"
"과언이십니다. 저는 조언을 구하시면 그저 답을 드릴 뿐, 판단은 폐하께서 내리시는 겁니다."
"하하, 그러니 설득을 해 보자고. 기대하리다."
카이저는 이선의 어깨를 툭 치면서 갔다.
이선은 카이저의 경박한 태도에 불쾌감을 느꼈지만, 그의 야망과 허영심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만찬이 진행되는 동안, 카이저와 차르는 서로를 애칭으로 부르면서, 다양한 문제를 논했다.
"요새 크레타가 문제요. 아무래도 그리스와 튀르크의 전쟁은 피할 수가 없겠군. 하여튼 발칸에선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니까."
크레타섬의 인구는 대부분 그리스인이지만, 오스만 제국령이었다.
1896년 5월, 그리스인들이 독립을 요구하자, 오스만 군대가 가혹하게 진압했다. 그리스 왕국은 격분하여 함대를 파견했고,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지자 열강이 개입해 중재에 나섰다.
"무슬림이 정교도들을 학살했소. 러시아는 정교회의 보호자로서, 이를 묵과할 수만은 없소. 반드시 튀르크에게 책임을 물릴 것이오."
러시아는 정교회 국가인 그리스의 편을 들었고, 이번 기회를 틈타 오랜 야망이었던 보스포루스 해협 점령을 논의했다.
육·해군과 외무부의 의견이 갈리고 있어서, 니콜라이 2세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오, 친애하는 니키. 러시아의 차르가 정교회의 보호자로서 의무를 다해야 하는 건, 나도 알고 있소. 그래서 알렉산드르 2세께서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해방을 도왔지.
하지만 영국인들이 이를 늘 방해하지 않소? 1878년에 독일이 베를린 회의에서 러시아의 발칸 해방을 막은 건 본의가 아니었소. 저 간교한 영국인들이 러시아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하니, 우리는 중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소."
"친애하는 빌리, 독일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소."
"결국,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요. 러시아가 발칸 문제에 개입하여 튀르크와 전쟁을 각오한다면, 영국은 또다시 러시아에 반대하는 책동에 나설 것이오. 물론 나는 비스마르크처럼 영국의 손을 들어줄 생각이 없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러시아의 손을 들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오."
"음……."
"니키, 발칸 따위에 집착하지 마시오. 도대체 그런 산악투성이의 호전적인 부족들이 사는 동네가 뭐가 그리 대단하겠소. 러시아의 영광은 동쪽, 태평양과 극동에 있소. 훨씬 적은 노력으로, 훨씬 많은 영광을 얻을 수 있소."
카이저는 이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않소, 이선 공?"
이선은 일단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영국은 보스포루스 해협 문제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합니다. 페르시아 문제도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만주 철도 부설은 청국 최고 지배층과 합의된 사항이니, 영국이 감히 뭐라 하겠습니까?"
"그래, 맞소. 얼마 전에 이홍장 백작과 회담을 했는데,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가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요동을 지킬 수 있게 도와주어 고맙다고 하더군. 우리는 그들에게 크나큰 빚을 안겨 준 것이오."
6월, 러시아 방문을 마친 이홍장이 독일에 오자, 카이저도 그를 후히 대우했다.
하지만 선의로부터 비롯된 건 아니었다. 독일은 중국의 해안을 조차하여 동양 진출의 기지로 삼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여러 후보를 고려하던 독일은 산동반도의 교주만(膠州灣, 자오저우만)을 최종 선정했다.
"독일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일본은 결코 요동반도를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오.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과 중국의 영토 보전의 옹호자인 독일이 안정적인 해군 기지를 소유하지 못한다면, 어찌 이와 같은 목적을 수행할 수 있겠소?"
빌헬름 2세는 이홍장을 압박했다.
"러시아는 만주 철도를 부설하기로 합의했고, 프랑스도 중국 남부에 경제적 이권을 얻었소. 하지만 삼국 공조에 대한 보상을 오직 독일만 받지 못했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이홍장은 반발했다. 삼국이 중국의 영토 보전을 약속해 놓고서, 그 대가를 요구한다는 건 모순이었다. 만주 철도 부설은 러시아와의 동맹 대가로 허용한 것인데, 독일은 무조건 조차를 요구하고 있었다.
"폐하. 불행한 전쟁이 끝나지 얼마 않은 시점에서, 영토를 할양하는 것이 청국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헤아려 주십시오."
"이미 서양 열강이 모두 중국에 교두보를 확보했거늘, 독일만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오? 독일이 중국에서 해안 기지를 확보하는 건, 물러설 수 없는 요구요."
"만약 독일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열강들의 상응한 요구가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되면 중국의 영토 보전은 오히려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독일이 중국의 보호자가 되어 주겠소. 교주만을 중국에 우호적인 독일이 지키면, 유사시 귀국의 안보를 책임질 수 있소."
카이저의 요구가 멈추지 않자, 이홍장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니 본국에 돌아가서 논의해 보겠다고 무마했다.
물론 이홍장은 요구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고, 카이저도 시간을 끌 목적임을 간파했다.
"니키. 러시아가 청국으로부터 교주만에 월동할 수 있다는 권한을 부여받은 거로 알고 있는데."
겨울이 되면, 영토 내에 부동항이 없는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월동했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태평양 함대는 다른 월동지를 찾아야 했고, 청국의 허락을 받아 1896년 겨울부터 교주만에서 월동했다.
"그렇소."
"독일 아시아 함대는 새로운 정박지를 찾고 있소. 만약 필요할 경우, 독일 군함이 러시아 해군의 동의를 얻어 교주만에 정박할 수 있겠소?"
"러시아는 교주만을 월동지로 사용할 뿐이니, 독일이 필요하다면 청국과 논의해 보면 될 것이오."
차르의 긍정적인 답변을, 카이저는 교주만 조차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하하! 삼국 공조에서 드러났듯이, 러시아와 독일이 힘을 합치면 일본 따위는 물론이고, 영국도 감히 맞서지 못할 것이오. 러시아가 육상을 통해 만주에 진출하고, 독일이 해상을 통해 교주만을 지킨다면, 누가 감히 맞서겠소?"
"으음."
"이선 공. 독일 해군이 산동반도를 지킨다면, 동양의 세력 균형을 추구하는 조선에도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다시 질문이 이선에게 향했다.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라 이거냐. 일단 원하는 답은 말해 주지.’
"독일과 같이 강력하고 공명정대한 국가가 동양의 세력 균형을 위해 힘써 준다면,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역시, 공은 정말로 말이 잘 통한다니까."
"그럼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뭐든 말해 보시오."
이선은 머릿속으로 할 말을 재빨리 정리했다.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대국이요, 독일은 떠오르는 강국입니다.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는 영국이 이를 방해하려 하지만, 세계 제국을 향한 독일의 정당한 요구를 영국이 방해할 권리는 없습니다. 두 나라가 힘을 합치면, 영국이 어찌 감히 뭐라 하겠습니까?"
"짐의 말이 바로 그것이오! 멀리 동양에서 온 왕자도 이를 이해하는데, 어찌 유럽인들이 이해를 못 해 준단 말인가?"
독일의 국력에 대한 자신감, 세계 제국에 대한 야망,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나라인 영국에 대한 동경과 열등감이 기묘하게 섞인 카이저의 심리.
하지만 카이저의 야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반드시 영국을 뛰어넘고야 말겠다는 카이저의 야망을 이선이 정확히 파악하자, 카이저는 만족감을 느꼈다.
"동양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작년의 삼국 전쟁 이후, 동양의 정세는 크게 변했습니다. 청국이 몰락하고 일본이 득세했지요. 일본은 부국강병에 몰두하여 대륙 진출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 청국은 더욱 약해질 것이고, 일본은 더욱 강성해질 겁니다. 현명하신 두 황제께서 이를 우려하시는 건 당연합니다."
이선은 일부러 일본의 위협을 강조하고, 카이저와 차르에게 찬사를 보냈다.
"바로 그렇소."
"조선은 아직 삼국 중 가장 약하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력 균형에 필요한 나라입니다. 러시아와 독일에 우호적인 조선이 보다 강성해져 일본과 청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다면, 장차 제국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음, 일리가 있소."
"독일 군사 고문단의 교육을 받아, 조선군은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동양의 평화와 세력 균형을 위해서, 독일의 도움이 계속 필요합니다. 조선 사절단과 유학생들이 독일에 머물며 많은 것을 배우고자 합니다. 또한, 독일의 우수한 기술력을 조선에 도입하고자 하니, 부디 폐하께서 도움을 주십시오."
즉흥적인 성격의 카이저는 이선의 말로 허영심을 자극받아 아주 기분이 좋아졌고, 흔쾌히 수락했다.
"아주 좋소. 필요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시오. 짐이 각 부처에 명하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폐하."
이 자리에서, 향후 동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빌헬름 2세는 동양에 진출할 뜻을, 세계 제국을 향한 야망을 밝혔다.
이선은 독일 제국과 빌헬름 2세라는 새로운 참가자가 동아시아에 등장하는 걸 환영했다.
차르와 카이저를 통해, 이선은 자신이 이끌 새로운 제국의 이익을 극대화할 방법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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