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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혁명의 시대-239화 (238/812)

239화 시베리아 횡단

차르 니콜라이 2세와 카이저 빌헬름 2세와의 회동을 끝으로, 이선의 공식 유럽 일정은 끝이 났다.

차르는 독일을 거쳐 외가인 덴마크로 향했다. 이어서 영국과 프랑스를 방문한 후 러시아로 귀국할 예정이었다.

"시간 괜찮으면 덴마크까지 함께 가지 그래. 덴마크도 조선의 수교국이 아닌가."

니콜라이의 권유에 이선이 정중히 사양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정부에 10월까지 조선으로 돌아가기로 약속했습니다. 시간을 맞추려면 이만 가야지요."

"음,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 그럼 귀국 행로는 어떻게 할 건가?"

"이탈리아로 가서 배를 타고 귀국할까 합니다만."

니콜라이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이용해 귀국하게. 완공하려면 많이 남았네만, 올해 이르쿠츠크 구간까지는 개통했거든. 내가 당국에 최고의 예우로 영접하라고 명령을 내려 두겠네."

이선은 잠시 생각하다가,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이용하는 첫 동양인이 될 기회였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이번에 헤어지면 언제 또 볼 수 있으려나?"

니콜라이가 아쉬움을 표하자 이선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왕위에 오르면 세상을 돌아다니긴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래도 당분간 어렵지 않겠습니까. 우리 두 사람 모두 나라를 다스려야 할 중대한 책무가 있으니."

"그렇지. 정말 책임이 무겁다네. 그대와 그대가 다스릴 나라에도 신의 가호가 있길 바라네."

"폐하께서도 성수무강하시고, 러시아의 앞날에도 행운이 깃들길 바랍니다."

니콜라이와 이선은 우정을 담아 악수를 나누었다.

어쩌면, 이번이 동갑내기 두 통치자의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었다.

이선은 독일 수도 베를린으로 향해 조선 사절단과 합류하고, 카이저가 승인한 지원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각 부처 장관들을 만났다.

모든 업무를 마무리한 이선은, 자신을 대신해 구미 순방 사절단을 이끌 부사 이강과 박영효에게 전권을 이행했다. 이강은 왕실을 대표해서, 박영효는 정부를 대표해서 이선의 업무를 대신 수행할 예정이었다.

"앞으로 경들이 방문할 프랑스와 영국, 미국은 모두 세계의 열강이오. 러시아의 동맹국 프랑스, 세계 최강 영국, 떠오르는 강국 미국은 모두 가깝게 지내야 할 나라들이지."

이선은 사절단에게 당부했다.

"이들은 모두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기에 왕실 외교가 큰 의미가 없소. 그래서 굳이 내가 방문하지는 않지만, 그만큼 대중의 여론이 중요한 나라요. 특히 영국에서는 거동과 언행을 조심해야 하오. 내가 친서에 적어 둔 사항을 잊지 말고."

"예, 명심하겠습니다."

"의화군. 어련히 잘할 거라고 믿지마는, 조선 왕실을 대표해 외교 사절 역할을 잘해 내길 바라오. 앞으로 경에게 거는 기대가 크니까."

이선의 기대에 이강이 웃으면서 화답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소. 그럼 내년 봄에 조선에서 다시 만납시다."

이선은 사절단과 유학생에게도 송별 인사를 했다. 사절단은 일정을 마치면 귀국하겠지만, 유학생들은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에 남아 각자의 분야에서 선진 학문을 익힐 예정이었다.

"여러분이 바로 미래의 조선을 이끌어 나갈 동량(棟梁)이오. 부디 많은 걸 배우고, 조선으로 돌아와 그 재능과 노력을 꽃피우길 바라겠소."

유학생들은 눈빛을 내며 이선의 말을 경청했다. 이선이 그들의 미래를 신뢰하는 것처럼, 그들도 조선의 낙관적인 미래를 기대했다.

이선은 귀국길에 오를 수행원들과 함께 러시아로 돌아갔다. 러시아 정부에서는 푸차타 대령과 시테인 서기관에게 하여금 조선 사절단의 귀로에 동참하게 했다. 각 지역의 관리들에게도 최상의 대접을 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귀국 행렬에는 낯익은 사람도 동참했다. 표트르 세묘노비치 최, 즉 최재형이었다.

대관식에는 러시아의 수많은 소수 민족도 초대되었는데, 최재형은 연해주 고려인 대표였다.

"최재형 군. 연해주 고려인 대표로 대관식에 참석했다면서? 대단하네."

"제가 아니라 우리 동포들이 대단한 거지요. 그리고 그 길은 군 대감께서 열어 주셨습니다."

"하하, 어디서든 우리 동포가 성공하는 건 기쁜 일이네. 아무튼, 동행해서 기쁘군."

귀국 수행원 중에는 여성도 셋이 있었다. 왕실 의전관 손탁, 유학생 김아영, 그리고 사절단 여성 주치의 얀코프스카였다.

"고마워요.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마르가리타는 이선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썩 밝지 못했다. 마르가리타는 전향서를 써 차르에게 충성 맹세를 했고, 한동안 내무부에서 사상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녀는 정신적 굴욕감을 느끼는 듯했다.

"뭐, 은혜라고 할 게 있나요. 당신의 사촌처럼, 조선에서 가진 능력을 쓰면 됩니다. 당신의 의술을 통해 세상을 바꿔 나가 보도록 해봐요."

이선의 격려에 마르가리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인생이 그녀의 앞을 기다리고 있었다.

9월 3일, 이선 일행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1만km가 넘는 귀국 여정에 돌입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 니즈니 노브고로드, 카잔, 사마라, 우파, 옴스크, 크라스노야르스크, 이르쿠츠크까지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이용할 예정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크까지도 5천km, 19세기 말의 증기 기관차는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도 않았다. 창밖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자작나무를 보며, 이선은 새삼 러시아의 광활함에 감탄했다.

‘도대체 이 거대한 제국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지? 일본인들이 공포를 느낄 만도 하다.’

일본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 철도 부설에 공포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비밀 동맹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러시아가 청국과 손을 잡고 만주 철도 부설 조약이 공표되자, 러시아의 만주 진출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앞으로 동양 정세에서 청나라의 몰락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고, 러시아와 일본의 역할이 중요해질 것이다.’

이선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조선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장차 북방, 남만주 일대를 세력권으로 삼고자 하는 조선에 러시아의 지원은 필요했다. 러시아도 조선을 파트너로 삼아 만주 진출에 나설 의사를 보였다.

‘러시아의 만주 진출에 숟가락을 얹고, 일본의 남방 진출을 유도한다.’

문제는 옛 동맹국 일본의 반발이었다.

일본이 ‘북수남진’과 해양 진출을 현실적인 대안으로 고려한다고 해도, 북방에 관한 관심을 접은 건 아니었다.

이선은 일본의 관심과 진출 방향을 남쪽으로 돌릴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할 의사가 있었다.

일본이 대만에 이어 스페인령 필리핀에 관심을 보이니, 이선은 지지의 뜻을 밝혔다.

열차는 한참을 달려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이르쿠츠크 동쪽으로는 미완공 구간이었다. 바이칼 호수 구간이 워낙 난공사로 악명이 높아서, 공사가 지연되고 있었다.

바이칼 호수는 페리를 통해 지나가고, 이후 구간부터는 마차를 이용해 횡단해야 했다.

"바다만큼 넓은 호수라니."

"여기서부터는 확실히 동양이라는 게 느껴지는군요."

"바이칼은 몽골인들의 성지고, 알타이계 민족의 시원지로 여겨지니까. 조선 민족의 시원도 이곳일지도 모릅니다."

"호오, 그런가요."

"그럼 북방의 여러 민족이 조선의 형제일 수도 있겠군요."

"뭐, 워낙 오래된 이야기지만."

19세기 말은 범(凡, Pan)민족주의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게르만계 민족의 단결을 주장하는 범게르만주의에 대항해 슬라브계 민족의 범슬라브주의에 등장했듯, 범슬라브주의에 대항해 범우랄-알타이주의, 범투란주의(Pan-Turanism)도 등장했다.

투란주의는 우랄 계통의 마자르(헝가리)인들이 주창하기 시작했고, 러시아 제국의 핀란드인들과 오스만 제국의 튀르크인들이 공명(共鳴)했다.

투란주의자들은 더 나아가 시베리아의 소수 민족들과 몽골인, 심지어 조선과 일본까지 투란 민족으로 여겨 단결의 대상으로 여겼다.

유럽발 범민족주의에 일부 일본 학자들도 투란주의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이선이 빈에 도착했을 때, 오스트리아인들보다 헝가리인들이 더 큰 관심을 보인 건, 이 때문이었다. 투란주의자들은 중국을 무찌른 조·일 동맹을 범투란주의의 성공적 실례(實例)로 여겼다.

‘후, 한국 민족주의도 이제 막 불러일으킨 마당에, 투란주의는 무슨…….’

이선은 자신을 찾아온 헝가리 민족학자들의 조선 방문 요청에는 흔쾌히 동의했으나, 범투란주의에는 냉소적이었다.

애초에 투란주의의 주적은 러시아였고, 러시아 제국의 해체가 목표였다.

투란주의를 주창하는 건 헝가리, 이를 받아들인 건 러시아를 적으로 여기는 오스만 튀르크나 독립을 원하는 핀란드인들이었다.

조선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념이었다.

‘먼 훗날에 만주인이나 몽골인을 대상으로 써먹을 일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지.’

이선은 현실주의자였다. 투란주의와 같은 허황된 범민족주의를 믿지 않았지만, 장차 조선의 국력이 신장한다면, 만주나 몽골을 ‘형제 민족’ 운운할 수도 있었다.

바이칼 동부에서 연해주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마차 여행은 고된 여정이었다.

길은 생각보다 잘 닦여있고, 각 지방에 도착할 때마다 러시아 관리들의 열렬한 환대가 있었다지만, 장기간의 마차 여행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들었다.

시베리아는 이미 9월부터 날이 갑작스레 추워졌고, 사람들은 피로가 겹쳐 감기로 골골댔다.

마르가리타는 사절단 주치의로서 첫 임무를 수행했다. 그동안 이선과 사절단에게는 조선에서부터 함께한 주치의가 있었지만, 구미 사절단에 동행하여 귀국에 동참한 의사는 마르가리타뿐이었다. 그녀는 약을 구해 정성껏 환자들을 돌봤다.

"역시 당신을 데려오길 잘했군요."

이선의 말에 마르가리타는 쓴웃음을 지었다.

"페테르부르크 의대를 졸업할 때만 해도 시베리아에서 조선 사람의 감기를 치료할 줄은 몰랐는데요."

"그래서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는 거죠."

특히 김아영은 여성 의사의 존재가 고마웠다. 아무리 개화사상을 익힌 신여성이라지만 남녀유별을 당연하게 여겼기에, 남성 의사에게 몸을 드러내는 건 거부감을 피할 수 없었다.

아영은 조선에서부터 알고 지냈지만, 나이 지긋한 손탁 여사보다는, 젊은 마르가리타 쪽에 훨씬 더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둘은 언어 교환을 했다. 긴 여정 동안, 마르가리타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가르쳐 주고, 아영은 조선어와 한글을 가르쳤다.

아영이 감기에 걸리자, 마르가리타는 마치 언니처럼 그녀를 보살폈다.

"고마워요, 닥터 얀코프스카."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거예요? 그냥 마르가리타라고 불러요."

"네, 네에."

아영은 마르가리타의 아름다운 외모와 어려운 의술까지 익힌 능력에 부러움과 열등감을 느꼈다.

마르가리타의 하얀 얼굴을 보면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지금까지 꾹 눌러 참았지만, 문득 약 기운을 핑계로 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영은 마침내 용기를 내었다.

"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이, 이선 왕자님과는 어떤 사이시죠? 왕자님은 오랜 친구라고 소개했는데……."

마르가리타는 미소를 지었다.

"왕자님이 소개한 그대로죠."

"네, 그, 그렇군요……."

마르가리타는 역으로 물었다.

"아영 아가씨는 왕자님의 피앙세죠?"

"피, 피앙세요?"

"아, 모르는구나. 약혼녀 말이에요."

아영은 의미를 몰라서 되물은 게 아니었다. 아직 그렇게 자처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아영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아, 아니에요. 그건 나라에서 정하는 일이지……."

"부끄러워할 것 없어요. 왕자님이 아가씨를 특별하게 여기니까 사절단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는 거잖아요?"

아영은 부끄러움을 느끼다가, 순간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마르가리타야말로 왕자님과 특별한 관계니까, 조선까지 데려오는 거 아닌가요?"

아영이 얼굴을 붉히며 푹 고개를 숙이자, 마르가리타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가씨.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왕자님과 나는 그저 친구예요."

"하지만……."

"그래요, 분명 그가 나를 어려운 상황에서 구해 준 주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 줬죠.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고요."

"여, 역시 서로 특별하게 여기는군요."

"아니에요. 난 그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이 전혀 없어요. 나는 왕자님의 요청대로, 의사로 조선에 기여할 생각이에요."

"그래도 왕자님이 당신을 좋아한다면, 내가 물러나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어딜 봐도 나보단 당신이 훨씬 아름답고 똑똑한걸요."

아영의 말에 마르가리타는 큰 눈을 더욱 크게 떴다.

"후후, 난 내가 동양에서 왕비가 될 거라고 생각할 만큼 꿈 많은 어린 소녀가 아닌데."

마르가리타는 손을 들어 아영의 볼을 토닥였다.

"당신은 정말 착하군요. 자신에게 자신감을 가져 봐요. 당신은 나보다 한참 어린걸요. 그만큼 미래가 더 많다는 거죠. 왕자님에게 어울리는 건 당신이지 내가 아니에요."

"그래도……."

"자,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아파서 쓸데없는 생각이 드나 본데, 밝은 미래만 생각해요. 오늘은 푹 자도록 해요."

마르가리타의 말에 아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숙였다.

‘그녀의 말이 옳아. 어쩌면 내가 비극의 여주인공이라는 쓸데없는 상상에 빠진 걸지도. 그동안 완화군께서 주신 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나 봐.’

10월 10일, 마침내 이선과 사절단은 연해주에 도착했다. 조선에서 가까워진 만큼, 눈에 보이는 고려인 마을도 많았다.

고려인은 이선과 사절단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했다.

"대조선 만세! 완화군 만세!"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러시아에서 살아가며 고국의 성공을 들으면 어찌나 기쁜지 모릅니다."

"고맙소, 여러분. 머나먼 이국땅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을 보니 진심으로 기쁘오."

고려인은 러시아의 소수 민족 중에서도 성실함과 교육열로 주목받는 존재였다. 고려인들은 고국 조선의 성공을 기뻐했고, 이선은 그들의 성공을 기뻐했다.

이선이 처음 통치한 대상인 연해주의 고려인들은 성공한 민족의 표상이었다. 모든 조선인이 그들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이는 ‘공정한 통치와 다양한 기회’ 덕이었다.

이선은 조선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갔고, 앞으로도 써 나갈 예정이었다.

이제 제관(帝冠)이 눈앞이었다.

- 240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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