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칭제건원(稱帝建元)
칭제건원. 군주를 황제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자는 주장이다.
중국은 온 천하에 오직 한 나라의 황제만이 있다고 주장했으니, 중국 외 국가의 칭제건원은 중국과의 대립을 의미했다.
한반도에서는 고려 전기까지 칭제건원을 하였으나, 중국 중심의 중화 질서가 확립되면서 황제를 칭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칭제건원에 대한 요구 자체는 오래되었으니, 고려 인종 때 묘청의 서경 천도와 칭제건원론이 대표적이다.
조선은 명나라의 충실한 제후국을 자처했으나, 제국만이 사용할 수 있는 독자적인 묘호(廟號)와 황제의 용어들을 사용하는 이중적인 면모도 보였다.
명나라가 망하고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 현실적으로 조선은 청에 사대하여 칭신(稱臣)하면서도, 내심 중화는 망했으며 조선이 정통을 계승했다는 의식이 생겼다. 이른바 소중화 의식이다.
소중화론자들은 언젠가 조선이 중화의 정통을 계승해 칭제건원을 희망하였으니, 이미 영조 때부터 그런 주장이 있었다. 청의 국력이 압도했던 당시의 국제 정세를 생각하면 허황된 주장이었다.
근래에 이르러 개화당은 갑신경장 직후에 칭제건원을 주장했으나, 국제 정세를 고려해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조선이 청을 무찌르고 사대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자, 조야의 민심은 칭제건원에 대한 여론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삼가 생각건대, 옛날의 황(皇)과 제(帝)는 자주독립의 뜻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대저 황제라 칭하고, 짐이라 칭하며 마침내 연호를 고치는 것은 실로 지극한 표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 등이 구구하게 상주하는 것은, 바로 하늘의 뜻이요 민심입니다."
"러시아가 표트르 1세 시대에 이르러 제국을 선포하고, 프랑스가 나폴레옹 1세 시대에 이르러 제국을 선포하고, 프로이센이 빌헬름 1세 시대에 이르러 승전과 함께 제국을 선포하였으니, 그 누가 반대하였습니까? 우리나라도 청을 무찌르고 자주독립을 쟁취했으니, 마땅히 제국을 선포해야 합니다!"
"동양에서 청나라의 군주는 황제요, 일본의 군주는 천황을 자처하는데, 어찌하여 그 동렬에 선 조선만이 국왕으로 불려야 한단 말입니까? 이것이 온 나라의 신하들과 백성들이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황제의 칭호를 올리는 것을 계속 권하는 이유입니다."
칭제건원 주장에는 조정의 개화파 관료도, 재야의 유생들도 예외가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유학자들은 정통 중화를 계승했다는 관점에서 칭제건원을 주장한다면, 개화파는 만국 공법을 찾아 국가주의와 국제법적 관점에서 칭제건원을 외친다는 점이었다.
내부협판 김가진, 법부협판 유기환(兪箕煥)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는 절충적 관점을 드러냈다.
"유럽에서 황제라고 부른 것은 로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후 게르만은 로마의 계통을 이어 그 위호를 사용하였고, 오스트리아는 로마의 옛 땅으로서 황제라고 불렀고, 독일은 게르만 계통을 이어 마침내 황제로 칭호를 정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국토는 중국과 접하고 있는 관계로 의관과 문물이 모두 명나라의 제도를 따랐으니, 그 계통을 이어서 위호를 정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와 청나라는 똑같이 동양에 있으니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로마의 계통을 이어받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조선이 명나라의 정통을 계승했다는 유학자들의 주장과, 독일과 같이 국력의 신장을 통해 제국을 선포해야 한다는 개화파들의 주장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자주독립의 상징으로서, 마땅히 황제에 오르시고 연호를 제정하소서!"
왕실과 정부에서는 칭제건원을 기정사실로 여겼다.
이미, 승전 직후인 1895년 10월에 칭제건원을 하려 하였으나, 대군주의 밀서 문제가 터지면서 자연스레 연기되었던 것이다.
이선이 사절단을 이끌고 유럽에 가 있는 동안, 대원군과 종친들, 김옥균과 개화당은 이선의 추대 공작을 벌여 왔다.
"완화군 이선은 성상의 장자로, 적법한 왕통을 갖고 태어나셨습니다. 위로는 국가와 군부(君父)를 위해 충성과 효를 다하고, 아래로는 만백성의 안위를 위해 헌신하니, 그 성대한 덕을 칭송함이 온 나라에 끊이지 않습니다. 천명과 민심의 여망(輿望)이 완화군에게 향한 지 오래되었으니, 마땅히 이에 응하시어 천년 대계의 기틀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동포 여러분, 생각해 봅시다. 국란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한 분이 누구입니까? 경장을 실현해 오래된 적폐를 뿌리 뽑고 새 제도를 실현한 분이 누구입니까?
식산흥업으로 국부(國富)를 윤택하게 하고, 백성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 분이 누구입니까? 부국강병으로 침략자를 무찌르고, 북벌을 이루어 내어 자주독립을 쟁취하게 한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완화군이십니다. 마땅히 새로운 나라, 새로운 제국의 황제는 완화군이 되지 않으셔야 하겠습니까!"
이선은 귀국 직후부터 칭제건원의 거센 여론을 듣게 되었다. 속으로는 어찌 생각하건, 겉으로는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나는 나이가 어리고 덕이 부족하거늘, 어찌 이런 과한 논의를 합니까?"
"이는 실로 천명을 계승하고, 2천만 신민의 여망이 한 분에게 모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군주 폐하와 왕태자 전하가 계시는데, 내가 나선다는 건 자식이자 신하 된 자로서 분수에 넘친 일이오."
"천명과 민심이 한뜻에 이르렀으니, 두 분께서도 대감께서 황위에 오르는 걸 기꺼이 찬성할 것입니다."
"이는 옳지 않습니다. 경들은 나를 불충불효한 자로 만들 생각입니까? 세간에서 나를 어찌 비난하겠습니까?"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반대파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저 열화와도 같은 민심의 여망을 군 대감께서는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이선의 사양은 반대파를 의식했다기보다는, 관례적인 겸양을 표한 것이었다.
태조 이성계의 즉위가 기정사실화 된 이후에도, 이성계는 문을 걸어 잠그고 사람을 피해 대외적으로는 겸양을 표했다.
이선은 왕조 창업자의 선례를 고스란히 따르는 중이었다.
이선이 겸양을 표하는 동안, 이미 칭제건원의 실질적인 논의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왕실 종친과 보수적 여론을 설득하는 일은 대원군이, 정부 관료와 진보적 여론을 끌어모으는 일은 김옥균이 물밑에서 진행 중이었다.
"먼저 새로운 시대의 근원이 될 연호를 제정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내각에서 이를 논의해 주길 바랍니다."
왕태자의 명, 실질적으로는 이선의 명에 총리대신 김홍집이 각료들과 함께 연호를 논의했다.
"조령을 삼가 받들어, 새로운 연호를 의정(議定)하고 내각의 논의를 거쳤습니다. 연호는 광무(光武)와 경덕(慶德)으로 비망(備望)하여 바칩니다."
‘결국, 광무인가.’ 관례상 두 개를 비망했다지만, 실질적으로 전자를 택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연호로 광무를 택한 건, 결국 같은 논리 때문이었다.
"한 고조를 계승한 광무제가 역적 왕망을 무찌르고, 망해가던 한나라를 되살려 중흥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태조 대왕 이래 오백 년 동안 유구한 왕업이 계승됐으며, 근래에 이르러 경장과 북벌로 중흥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 중흥의 업적은 광무제에 비견될 수 있으니, 새로운 연호로 이보다 더 어울리는 것이 없습니다."
후한 광무제는 최고의 명군이자 중흥(中興)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므로, 작금을 조선 중흥의 시대로 여기는 신료들은 광무보다 더 적절한 연호를 찾기 힘들다고 여겼다.
이선은 실제 역사에서 부왕의 연호로 쓰였던 광무가 자신의 연호가 된다는 것에 역설을 느꼈지만, 굳이 내각에 재론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광무란 의미 자체는 참으로 좋지 않은가. 단지 망국의 연호가 돼서 문제였지. 실제 역사에서 광무는 고종의 연호이자 멸망한 나라의 상징이 되지만, 바뀐 역사에선 새로운 제국의 상징이 되리라.’
"나라에 있어 건원하는 것은 연수를 기록하는 동시에 천하와 더불어 신뢰를 세우자는 일이다. 건원할 연호는 광무 두 글자로 한다. 개국 506년을 광무 원년으로 선포하니, 천지와 종묘사직에 고하는 큰 의식을 거행할지어다."
개국기원 506년, 1897년 1월 1일을 기해 광무 원년이 선포되었다.
광무 원년 1월 1일, 각국 외교 사절들에게 연호가 광무로 개칭되었음을 통보하는 한편, 종묘사직·영녕전(永寧殿)·경모궁(景慕宮) 등에 건원고유제(建元告由祭)를 올렸다.
대리청정 중인 왕태자, 왕실을 대표하여 대원군과 이선, 내각 각료들이 종묘에 모여 건원고유제 의식이 진행되었다.
독자적인 연호가 건원되니, 이제 칭제까지는 정말로 한발만 남은 상황이었다.
조정 원로대신인 전 지중추부사 봉조하 김재현(金在顯), 전 영의정 봉조하 심순택(沈舜澤), 총리대신 김홍집 이하 전 현직 관원 800여 명이 연명으로 칭제의 상소를 올렸다.
"신들이 생각건대, 자주권을 잡고 독립의 기틀을 마련하여 드디어 연호를 세우고 조칙을 시행하며 모든 제도가 눈부시게 바뀌었으니, 이는 참으로 천명이나 인심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어찌 지혜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야말로 조정의 문무백관을 총괄한 상소였다. 중국의 고례(古例), 만국 공법을 비롯한 국제법 분석, 고조선과 삼국 시대 이래 한국 역사를 두루 살피는 글이 이어졌다.
"……우리나라는 삼한(三韓)을 통합하였고 육지의 영토가 4천 리에 뻗어 있으며, 인구는 2천만 명이 되니, 오늘날 모든 신민들이 누군들 우리 군주께서 지존의 자리에 올라 지존의 칭호에 응하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옛일을 인용하여 오늘을 증명하고 사정을 참작하고 형세를 헤아려 보아도 실로 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여론을 따르시어 큰 칭호를 받아서 명성을 만국에 알려서 천하와 더불어 다시 시작하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종묘사직에 매우 다행이고 신하들과 백성들에게도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무려 구순을 맞이한 김재현과 칠순을 넘긴 심순택 등 원로대신들이 일제히 이름을 내걸어 황제 즉위를 청원하니, 왕실도 화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원군은 마지막 공작에 나섰다.
1년 넘게 ‘신병(身病)’을 핑계로 경복궁 강녕전에 머물고 있는 대군주를 설득하여, 대군주가 직접 선위와 완화군의 황제 즉위를 요청하는 조서를 반포하게 하였다.
"마침내, 이대 천자가 우리 가문에서 배출하게 되었으니, 아버님의 소원이 이루어졌군요. 축하드립니다."
"신이 주상과 같이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난 아들을 두었고, 주상께서는 황제가 될 운명을 타고난 아들을 두신 덕이지요."
대군주는 황제 즉위에 극도로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결국 대원군이 써 준 조서에 어보를 찍는 데 동의했다.
수족이 모두 잘린 대군주는 이제 완전히 체념상태였다. 대원군의 말대로 아들이 황제가 될 운명이라고 받아들여야 했다.
대군주의 명의로 마지막 조서가 반포되었다.
대군주는 다음과 같이 이르노라. 짐은 종묘사직에 삼가 고하고 신민들에게도 널리 알리는 바이다.
요(堯) 임금이 제위를 물려주어 순(舜) 임금이 계승한 것은 《서경(書經)》을 펴면 첫 번째 뜻으로 되어 있다. 이는 실로 종묘와 사직을 중시하고, 국운을 계승하기 위한 정상적인 법이며 통용되는 의리로 역사책에도 전해지는 미담이다.
짐이 왕위에 오른 30여 년, 많은 난관을 겪으면서 정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늘 걱정과 두려운 마음을 품고 지내 왔다는 데 대해서는 이미 지난번 대리청정의 조령에서 다 말한 바이다.
다행스럽게도 짐의 장자인 완화군 선은 하늘이 준 총명과 효성, 우애로 덕망과 재능을 키워 왔기에 온 나라 사람들이 그의 정사를 학수고대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났다.
왕조 초기에 태조 대왕께서 정종 대왕께 선위하고, 정종 대왕께서 태종 대왕께서 선위하고, 태종 대왕께서 세종 대왕께 선위하였으니, 이로써 우리 왕조의 억만년 무궁할 복을 공고히 하였다. 이야말로 우리의 전범(典範)으로 본받아야 할 일이다.
이에 짐은 우리 조종의 법도를 따라 완화군 이선에게 나라의 정사를 맡기고자 하니, 어찌 종묘와 사직의 복이 아니며 나라의 행운이 아니겠는가?
아! 완화군 선은 나라의 정사를 주관하면서 밝은 시대를 여는 훌륭한 임금이 되도록 하라!
대군주의 조령이 반포되자, 왕실과 내각에서는 대군주를 요 임금에 빗대어 덕망을 칭송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와 왕실을 대표해 총리대신 김홍집과 궁내부대신 이준용이 대군주의 조서와 어보를 받들어 완화궁을 찾았다.
이선은 굳게 사양하며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에 대원군과 문무백관이 완화궁으로 모여들어 천명과 민심의 뜻을 외쳤다. 진귀한 구경거리에 사람들도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완화군께옵서는 속히 나오시어 천명과 민심을 받드시옵소서!"
자택 안의 이선은 쓴웃음을 짓다가, 표정을 굳히고 의관을 정제했다. 뻔한 형식이었지만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태조 이성계의 전례를 따르자는 대원군의 각본에, 모두가 열심히 연기하는 중이었다.
마침내 완화궁의 문이 열리고, 이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칙임관 1등 육군 대장의 대례복을 입고 대훈위금척대수장을 패용한 이선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늠름하고 근엄했다.
"나는 어리석고 어려, 이와 같은 중책을 맡을 수가 없습니다. 제공께서는 깊이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천명과 민심이 하나로 모였고, 성상 폐하께옵서도 지극한 은혜를 베푸셨거늘, 어찌하여 사양을 하십니까?"
"황공한 일이나 나는 덕과 능력이 부족하여 진실로 중책을 맡을 수 없습니다."
이선은 관례상 세 번 사양을 한 후, 마침내 조서와 어보를 받아들였다.
"위로는 열성조와 성상 폐하, 아래로는 2천만 신민의 열망을 받들어, 이선이 삼가 천명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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