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252화 (251/812)

252화 국민의 황제

1898년, 광무 2년 봄.

백가쟁명으로 물꼬가 터진 대한제국의 정치적 방향을 놓고 토의가 점차 격렬해졌다.

"성상께서는 잠저 시절부터 서구식 헌정에 대해 우호적이시니, 반드시 헌정과 정당 정치를 확립해서 군민공치를 실현해야 하오."

"맞소. 대한에 언제 또 이런 진보적인 군주가 계시겠소? 이 기회를 놓치면 아니 되오."

독립협회 지도부는 그동안 완화군 이선에게 충성을 다했던 개화당 소장파 출신이었다. 이들은 이선의 진보성을 높이 평가했고, 황제가 된 지금도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독립협회 일각의 운동이 점점 과격화되자, 지도부는 다소 무리수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선의 선의를 믿고 군민공치 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이들이 희망하는 건 의회제와 영국식 정당 우위 내각제, 국민 주권이 구현되는 입헌 군주제였다.

"성상께서는 우리의 충심을 아실 것이오. 우리도 성상이 추구하시는 국민 국가의 방향에 관해 알고 있소. 다만 여전히 보수파들의 힘이 워낙 강하고, 총리대신 이하 각료들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니 잠시 때를 기다리고 계신 것이겠지요."

"김홍집 대감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 그렇다 치고, 왜 고균과 금석, 금릉위까지 이런 답니까? 독립협회와 개화당이 모두 힘을 합치면 늙은이들이 뭐가 두렵단 말입니까? 개화당이 그토록 원했던 대중 동원을 우리가 해내고 있는데?"

비난의 화살이 김홍집에 이어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 개화당 주류를 향해 날아갔다. 소장파는 주류가 독립협회 운동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연대하지 않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금릉위야 원래 왕실의 부마라, 백성을 천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지. 서양에 가서도 왕족 대접받길 바라는 양반 아니오."

"그럼 고균은? 입버릇처럼 프랑스를 본받자고 하더니."

"풍운아이자 혁명가였던 고균도 이제 늙은 게지. 금석은 고균이 하자는 대로 따르는 사람이고."

"하긴, 고균도 나이가 곧 쉰이니."

"단순히, 나이 문제가 아니오. 갑신경장 이래 고균은 너무 오랫동안 권력의 핵심에 있었소. 자연히 보수화된 거지."

"정, 변화가 없으면 이들과 결별하는 수밖에. 우리에게는 성상의 믿음과 민중의 신뢰가 있소."

"좋소, 우리가 성상의 고민을 덜어 드립시다."

독립협회가 믿는 건 황제의 선의와 민중의 동원이었다.

독립협회는 헌법 제정을 주도적으로 집행하기 위한 운동에 착수했다.

독립협회는 서구식 시장 경제를 지향하면서도 민족 경제의 보호자를 자처했기에, 전통적으로 한성부의 경제를 주도했던 시전상인들의 지지도 받았다.

외국 자본의 침투, 정부의 지지를 받는 대자본가의 성장을 두려워하던 시전상인들은 황국중앙총상회(皇國中央總商會)를 결성해 각종 비용을 떠맡았다.

5월, 만민공동회가 매일 같이 개최되었다.

"충군애국!"

"국권수호!"

"헌법제정!"

"의회개설!"

"선거실시!"

"자유민권!"

주중에는 수천의 군중이, 주말에는 수만의 군중이 모여 구호를 외쳤다.

정부는 선을 넘지 않는 이상 집회 개최와 참석의 자유를 보장했고, 집회 참여자들은 집회를 검열하는 순검과 반갑게 인사를 나눌 정도였다.

5월의 화창한 날씨 속에, 이들은 황성에 정치적 봄이 도래했다고 여겼다.

만민공동회의 대중 동원이 점점 강화되자, 보수파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들은 즉각 대응에 나섰다.

새로 조직된 황국협회는 삽시간에 회원 수천 명을 모집했다. 황국협회를 이끄는 중추원 의관 홍종우는 창립식에서 독립협회를 비난하고, 절대왕권 수호를 천명했다.

"대한은 황제의 나라이며, 오백 년 전제 군주의 전통이 있소이다! 우리는 대황제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민당의 폭거에 맞서 지엄한 군상대권(君上大權)을 수호할 것이오!"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황국협회는 대원군을 지지하던 보수파 계열 인사들을 중심으로, 보부상 조직의 동원력을 확보했다.

보부상은 대원군 시절에는 우대를 받았지만, 식산흥업을 추구하는 개화당 정부에서 찬밥 취급을 받았다. 보부상 중에는 근대적 자본가로 변신한 대한천일은행장 이용익처럼 성공한 인물도 있지만, 대개 경제적 몰락의 수순을 밟고 있었다. 이들이 보수파에 포섭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독립협회 놈들이 도시를 믿고 기세등등한데, 지방 여론은 압도적으로 근왕이 강하다는 걸 알게 해 주마."

근대화의 수혜를 가장 먼저 받은 황성, 인천을 비롯한 개항장들, 평양을 비롯한 대도시들은 진보에 우호적이었지만, 농촌은 전통과 보수성을 유지했다.

특히 사대부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한 삼남 지방의 농촌은, 황성으로부터 전해 오는 소식에 불쾌함을 느꼈다.

"개판이구만, 개판이야. 이제 하다 하다 못해 백정 놈까지 나랏일에 뛰어들겠다고 나서고 있다니. 사대부의 나라 조선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단 말인가!"

"성상께서 다 용인해 주고 계시니, 이렇게 된 거 아니요?"

"나라 꼴이 말이 아닐세. 이러다간 정말 상투 자른 천것들이 우리 상투를 붙잡고 조롱하려 들겠군."

"결국, 결단은 성상의 몫인데, 성상께서 저놈들 목소리만 듣고 있으니 어쩌면 좋소?"

"더 이상 침묵할 때가 아니오. 영선군 이준용이 황국협회를 조직해 세몰이에 나섰다고 하니, 우리도 동참합시다."

"운현궁이 그동안 사대부를 상대로 한 짓을 생각하면 탐탁지는 않지만, 어쩔 수가 없군."

"우리야말로 왕조의 충신임을 강조합시다."

경제적 몰락을 두려워하는 보부상이 황국협회에 가담했듯, 사회적 몰락을 두려워하는 향촌 사대부들이 황국협회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들은 ‘악의 도시’처럼 여겼던 황성으로 집단 상경해 황국협회에 힘을 보탰다.

"어서 오시오! 반갑소, 동지들!"

"근래 들어 소위 만민공동회를 자처하는 민당의 무리가 무엄하게도 정부를 겁박하고, 성심을 어지럽히고 있소. 만민은 무슨 만민이란 말이오? 저들은 소수의 극단 분자에 지나지 않소."

"우리가 바로 향촌의 여론을 대표하오. 민당의 폭거에 맞서 지엄한 군상 대권을 수호하자!"

"저들이 말하는 대로 의회를 개설하고 선거합시다! 과연, 전국의 여론이 누굴 지지하는지 보여 줍시다!"

세몰이에 나선 황국협회는 자신들이 지방의 여론, 더 나아가 전국의 여론을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으로만 드러나는, 그들만의 착각이었다.

"개화당이든, 독립협회든, 황국협회든, 그 누구도 이 나라 국민의 절대다수인 농민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소."

"그야 개화당은 관리들이고, 독립협회는 상공인들이고, 황국협회는 지주들이니까."

"세금을 내는 것은 대부분 농민이요, 군대에 가는 것도 대부분 농민이요,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것도 대부분 농민인데 어찌 우리를 대변하는 목소리는 없단 말인가?"

중추원의 거의 유일한 농민 대표자, 전봉준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을 세밀히 지켜봤다.

이선의 개혁에 크게 감화된 전봉준은, 지금껏 정부 시책에 충실해 왔다.

독립전쟁 당시 후방을 돌며 농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고, 민심을 다독인 공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태극장을 수여 받았다.

하지만, 전봉준에게 필요한 건 훈장이 아니었다. 중추원 의관의 제복을 입고 있어도 여전히 자신을 농민으로 여기는 전봉준에게, 농민 생활의 안정이야말로 진정한 훈장이었다.

"의관 나리. 전쟁 끝나면 토지 분배가 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3년이 지나도 아무 말이 없네요."

"황명을 받들어 정부가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소. 전국의 양안이 끝나는 대로 조치가 있을 거요."

"오오! 의관 나리 말씀이라면 맞겠지요."

"우리 황제께서는 성군으로, 농민들의 노고를 언제나 잊지 않고 계시오.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암요, 그렇고 말고요. 이런 임금님이 또 없으시죠."

전봉준은 농민들을 다독였지만, 그 자신도 확신이 없었다.

정부는 갑신경장 이후 전국적 양안을 10년에 걸쳐 실시했다. 국유지를 대거 확보하고, 경계가 불분명했던 민유지의 소유권 확립과 지조 개정은 이뤄냈다. 소작농에 대한 법적 보호도 이뤄져 지주가 5할 이상의 소작료를 걷는 것은 금지되었다.

분명 농민 경제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정을 이뤄 냈지만, 그만큼 증대한 세금은 농촌에 부담이었다.

전봉준은 이선이 암시한 전후 토지 개혁의 약속을 믿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3년이 지나도록 토지 개혁 논의는 지지부진했다.

정부 주도자들은 향촌 지주의 세력을 꺾는다는 필요성은 공감했지만, 토지 개혁으로 이들의 경제적 기득권을 침해하는 것은 극도로 조심했다.

이미 정치적, 사회적으로 기득권을 빼앗긴 향촌 지주들에게 경제적 일격까지 가하면 불만이 폭발하리라는 우려에서이었다.

대신, 정부가 대안으로 제시한 건 ‘북방 개척 운동’이었다. 새로 확보한 수복 영토에 토지 없는 가난한 농민들을 이주시키기 위한 정책을 마련했다.

조선 전기의 사민 정책과 비슷한 맥락으로, 농민들은 대개 고향을 떠나길 꺼렸다. 북방 개척 운동은 현시점에선 시작단계였다.

전봉준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이 일어나자 희망을 걸었다.

그는 민중을 대표한다는 독립협회가 당연히 농민 중심의 토지 개혁과 투표권 확대에 동참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회의적인 반응을 얻었을 뿐이었다.

"우리 협회는 소유권이 절대적인 천부적 개념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주들의 토지 소유를 제한해 농민들에게 분배하다니, 시장 경제를 위반하는 급진적인 조치군요."

"농민에게 투표권을 준다는 건 시기상조입니다. 농민들 대부분은 아직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농촌에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된답니까? 그런데 투표권을 부여했다간 역효과만 날것입니다."

"동양에서 최초로 선거를 시행한 일본에서도, 투표권을 얻은 사람은 전체 4천만 중에 50만밖에 안 됩니다."

전봉준은 실망했다. 결국, 독립협회는 서구식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지향하는 자유주의 정당이었다. 이들은 농민의 후진성과 보수성에 내심 경멸감을 품고 있었고, 농민은 계몽의 대상이지 연대의 대상이 아니었다.

향촌 지주들이 가담한 황국협회는 말할 것도 없었다.

독립협회와 마찬가지로 황국협회는 전국 총선거를 지지했지만, 투표권은 일정 이산의 재산을 지닌 계층으로 한정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관해선 독립협회도 이의가 없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도시 중심이냐, 농촌 중심이냐의 차이였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무지한 농민들에게 투표권을 준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인구의 9할이 농민인데, 그럼 의회도 농민들로 다 채워질걸? 그 꼴은 절대 용납 못 한다."

"그건, 개화당도 용납 못 할 일이오."

전봉준은 어느 정치 세력도 농민을 대변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런 방법은 하나, 농민이 스스로 정치 세력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농민은 파편화되어 있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고향 너머를 보지 않았고, 조직되지 않는 이상 만민공동회와 같은 동원은 불가능해 보였다.

농촌 사회를 연결하는 유일한 조직은 오직 동학뿐이었다. 종교의 자유 이후 합법화된 동학은 교조 최제우의 신원이 달성되자, 특별한 정치적 목적 없이 종교 단체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신도 대부분이 삼남의 농민인 이상, 이들도 변화하는 정치 구조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의회의 수립은 우리 동학에게 다시없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동학의 3대 지도자, 30대의 젊은 손병희(孫秉熙)는 변화한 시대를 받아들였다. 일본과 미국 체류의 경험이 있는 그는 동학의 조직력을 정치적 결사로 재편성할 생각을 품게 되었고, 이는 농민을 대표하는 세력을 꿈꾸는 전봉준의 관점과 일치했다.

"농민과 동학이 연대하여, 성상께서 토지 개혁 완수와 투표권 확대를 이뤄 낼 수 있도록 힘을 보탭시다."

"전 의관의 뜻이 꼭 나와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장차 세상을 바꿀 힘이 있습니다."

삼남의 동학 조직을 기반으로, 농민협회(農民協會)가 결성되었다.

‘농민의 대변자’인 전봉준과 동학 3대 지도자인 손병희의 연합은 당장은 보잘것없어 보여도, 장차 커다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제5의 정치 세력을 의미했다.

"우리 황제께서는 현명하시고 백성을 아끼시는, 다시없을 성군이시다. 단지, 조정 관료와 지주들의 방해로 인해 그 깊은 뜻을 다 펼치지 못하고 계신 것이다. 우리가 황제 폐하께 힘이 되어 드리자!"

"와아아!"

가장 기득권 밖에 있는 야당인 농민협회조차도, 황제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다.

이는 대한제국 초기 정치 풍토에서 불변의 상수였다.

절대다수의 국민이 황제에게 충성하고, 국가의 주권은 황제에게 있다고 생각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모든 정치 세력의 행보는 이선의 귀로 전달되고 있었다

"폐하, 근래 각종 회가 난립하고, 정치적 의견이 분출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격화되지 않을까 우려가 됩니다."

총리대신 김홍집의 우려에 이선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총리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저들은 모두 충군애국을 외치고 있소. 헌법이 제정되면 자연히 잠잠해질 것이오."

제국익문사 독리 김옥균은 황제와 독대하여 정기 비밀 보고를 했다. 국제 문제뿐만 아니라 국내 민심 동향도 중요한 요소였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한 일이나, 독립협회와 황국협회가 지나친게 아닐지 걱정됩니다. 새로 결성된 농민협회도 어디로 튈지 모르고……."

"흐음, 보고를 들으면 참 재미있는 부분이 있소."

주요 정치 세력은 이념과 계급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이 가장 황제의 뜻에 부합한다고 경쟁했다.

황국협회는 절대 군주로서의 황제를 보았고, 개화당은 개명 군주로서의 황제를 보았고, 독립협회는 입헌 군주제와 국민 주권을 지지하는 황제를 보았고, 농민협회는 토지 개혁과 투표권 확대를 지지하는 황제를 보았다.

이 모두 이선의 다양한 측면을 반영한 것이었다.

"마치, 보나파르티즘의 살아 있는 구현과 같군."

보나파르티즘이란, 나폴레옹 3세가 왕당파에게는 군주제 복고를, 보나파르트 지지자에게는 나폴레옹 제국의 영광을, 부르주아에게는 번영을, 농민에게는 안정을, 프롤레타리아에게는 개혁을 약속해 전국민적인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던 걸 말한다.

그 결과, 나폴레옹 3세는 보통 선거에 의한 대통령에 이어 ‘국민의 황제’까지 될 수 있었다.

이선의 지지 기반은 비판자가 많았던 나폴레옹 3세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두터웠으니,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이선은 사실상 모든 정치 집단에 줄을 연결하고 있었다. 지도부 중에 이선과 선이 안 닿는 단체가 없었다.

그는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다가, 선택의 시간을 가늠했다.

- 253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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