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격화(激化)
헌법 초안을 읽은 후, 이선은 헌법조사위원회를 소집하였다.
"초안은 잘 읽어 보았소이다. 경들의 노고가 많았소. 다만, 이 초안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소."
"결함이라 하오시면……?"
"군주의 통치권에 관해서는 세세하지만, 신민의 의무와 권리, 기본권과 의회에 관한 언급이 너무 적소. 헌법이란 곧 나라의 백년대계인데, 통치권만을 규정하는 문제가 아니외다."
박정양 등이 제출한 초안은, 독일 제국 헌법을 참고한 일본 메이지 헌법을 축약한 것에 가까웠다. 헌법을 국가의 근간으로 삼으려 했던 이선으로선, 이렇게 간략한 헌법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짐이 경들에게 헌법 조사와 초안을 맡긴 이유가 무엇이겠소? 이 나라에서 가장 법제에 밝고, 국가의 방향성에 관해 잘 아는 이들이기 때문이오.
그런데 이 초안은 지나치게 시간에 쫓겼다는 느낌을 받는군. 당초 짐이 광무 2년에 헌법을 반포하겠다고 한 건 계획이지, 반드시 해야 할 의무는 아니오. 국가의 백년대계는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상관없소. 초안을 보완해서 다시 준비하도록 하시오."
이선의 거부권 행사에, 헌법조사위원회는 다시 심의에 들어가야 했다.
당초 자신의 초안이 위원회에 거부되었던 유길준은 이를 기회로 여겨, 별도로 황제에게 제출하였다.
이선은 유길준을 불러들였다.
"경의 초안은 위원회 초안보단 좀 낫군. 확실히 더 근대적인 헌법이라 할 수 있소."
"예, 폐하. 영국 권리장전, 미국 헌법, 독일 헌법, 프랑스 헌법, 메이지 헌법을 모두 참고해 최적의 대안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기회를 얻은 유길준이 신명나게 설명을 했다. 이선은 복잡한 기분이었다.
‘조선 최초로 미국에서 국제법을 전공했으니, 분명 국내에서 제일가는 법제 전문가이긴 한데…….’
"경의 의견은 잘 알겠소만, 대한제국이 군주제 국가임을 명심하시오. 미국과 프랑스가 선진국이긴 하나 민주 공화국이므로 대한과 입장이 다르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각 헌법에서 필요하고 좋은 점만 습득하고자 합니다."
"좋소. 하지만 조사위원회와 의견이 다르다고 독단적으로 나서지 말고, 그들과 화합해서 중론을 만드시오. 짐은 조사위원회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 대한은 이제 막 개화에 접어든 나라요. 이 나라 사람 대다수는 경의 초안을 받아들이지 못할 거요. 지나치게 서두르다가는 오히려 대의명분을 잃을 수 있다는 걸 명심하시오."
"예, 폐하. 명심하겠습니다.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황제의 격려와 경고를 동시에 받은 유길준은, 독립협회 지도부에게 알현 결과에 관해 알렸다.
"과연 성상께서는 현명하시오. 헌법 초안에 관한 보완을 명하셨소. 내 초안이 조사위원회 초안보다 낫다고 말씀하셨으니……."
"역시! 내각의 대신이란 작자들보다 성상께서 더 우호적일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성상께 힘이 되어 드려야지. 만민공동회를 소집해 헌법 제정 운동을 강화하고, 정부에 압력을 행사합시다."
독립협회 지도부의 섣부른 반응에, 유길준은 떨떠름했다. 황제가 자신에게 신임을 표하긴 했으나, 조사위원회와 화합하라고, 지나치게 서두르지 말라고 명했었다.
"이는 조사위원회뿐만 아니라, 정부와 갈라지지 말라는 의미 아니겠소? 만민공동회를 계속 소집했다가는, 적만 늘리는 게 아닐까 싶은데……."
"우리가 주도권을 잡으려면, 대중의 힘이 모였을 때 분명히 보여 줘야지요. 민의가 우리를 따른다는 것을."
"성상께 누가 되지 않도록 속도 조절은 할 터이니, 너무 심려치마시지요."
독립협회는 6월을 제헌(制憲) 운동의 달로 선포하고, 만민공동회를 거듭 개최했다.
하지만 만민공동회를, 불특정 다수인 군중의 욕망을 지도부가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건 그들의 착각이었다.
최초로 정치적 의견을 분출하게 된 평민들은, 점차 통제되지 않는 욕망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만민공동회가 계속 될수록 목소리는 더욱 드높아졌다.
황국협회와 보수파는 독립협회의 적을 자처하며 무력시위로 위협했다. 그럴수록 만민공동회 참가자들은 오히려 강경해졌다. 황국협회에 관한 분노는, 더 나아가 정부와 대신들을 향해 날아갔다.
"황국협회 놈들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깨부수겠다고 공공연히 위협하는데, 동지들은 당하고만 있을 겁니까?"
"그럴 수야 없지요!"
"법무대신 유길준 공이 제출한 초안을 조사위원회에서 따돌렸답디다. 참정 박정양 공은 관민공동회에 정부 대표로 참석했으면서도, 태도를 완전히 바꿔 버렸습니다!"
"그거야 총리 김홍집이 압력을 넣었기 때문 아닙니까?"
"내무대신 김옥균도 개혁을 열망하는 동지들을 배신하고, 김홍집 일파에 붙었답니다!"
"인민은 무지하니 정치적 권리 따위는 줄 수 없다는 겁니다! 계속 자기들끼리 일본 삿쵸 번벌 정치처럼 과두 독재를 하겠다는 거지요!"
"그러고도 개화당의 지도자를 자처하는가? 배신자!"
"일본식 번벌 정치, 과두정을 지향하는 개화당은 물러가라!"
"성상께서는 영명하시어 민의를 존중하십니다! 민의를 가로막는 내각은 사퇴해야 할 것입니다!"
"김홍집 내각은 사퇴하라!"
"김옥균은 물러나라! 내각 총사퇴!"
만민공동회의 급진화에, 독립협회 지도부는 당혹감을 느꼈다.
유길준·서광범·서재필·윤치호 등 지도부는 본인이 장차관급 각료이기도 하고, 옛 동지들과 과도하게 척을 질 생각이 없었다.
민의를 내세워 헌법 제정과 의회 설립 과정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던 것이지, 제헌 운동의 급진화는 계산 밖의 일이었다.
운동의 급진화는 후폭풍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만민공동회에서 내각 총사퇴를 요구한다고? 내 이런 무례한 놈들을 봤나!"
졸지에 반동 세력의 우두머리 취급을 당한 김홍집은 강한 불쾌감을 느꼈다. 자신이 임오군란 이래 급진개화파와 위정척사파들 사이에서 국가의 균형을 잡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위정척사파들에서는 매국노 취급을 당했던 그로선, 인제 와서 애송이 급진파들에 보수 반동이라고 매도당하는 건 불쾌한 일이었다.
"내무대신! 전국의 치안을 책임진 공이 왜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는 겁니까? 순검은 두었다가 어디다 쓸 생각이오?"
김홍집의 화살이 향하자 김옥균이 허허 웃었다.
"아직 만민공동회가 불법한 행위를 저지른 바가 없는데, 순검을 동원해 진압이라도 하라는 겁니까?"
"내무대신이 집회 불허라도 할 수 있지 않소!"
"집회를 불허하면 오히려 더 과격해질 터인데요."
"이미 과격해지고 있소! 성상께서 임명한 내각의 총사퇴를 요구하는 집회가 과격하지 않단 말이오?"
"저들이 요구하든 말든, 성상께서 불허하실 터인데 뭐가 걱정입니까."
"아주 천하태평이시군. 내무대신이 책임을 방기한다면, 내각을 대표해 성상께 집회 해산과 금지령을 상주할 터이니 그리 아시오."
만민공동회의 화살이 날아온 김홍집은 과격화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천명했지만, 또 다른 비난의 대상자인 김옥균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만민공동회가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고 나서자, 황국협회와 보수파들은 기꺼운 반응을 보였다.
"드디어 저놈들이 자멸의 길을 걷는군."
"정부 실력자인 김홍집과 김옥균을 적으로 돌리다니, 어리석은 놈들."
"옛 동지라 할 수 있는 정부 주류들과도 척을 졌으니, 누가 놈들을 옹호해 주겠소?"
"이제 공세를 퍼부을 때가 된 것 같소."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소?"
"이럴 때를 위해서 준비해 둔 게 있지. 고전적인 방법이오만, 효과는 좋을 것이오."
6월 20일, 사대문에 익명의 괘서(掛書)가 내붙었다.
……민주 정치는 세계의 대세이다. 전제주의를 타도하자! 반동의 온상, 김홍집 내각을 타도하자! 미국과 법국을 본받아, 민주 공화국을 이룩하자!
선포 조선 공화국!
대통령 박정양
부통령 유길준
내무대신 서광범
외무대신 윤치호
군무대신 서재필
법무대신 이상재
탁지대신 남궁억
학무대신 정교 ……
괘서는 지금껏 조선 역사에 전례가 없었던, 공화국 수립을 운운했다.
공화국 초대 각료라고 선포된 이들은, 대통령으로 명시된 박정양을 제외하면 전원 독립협회 인사들이었다.
민심의 동요가 강해지자, 독립협회는 당혹감을 느끼고 즉시 부정 성명을 발표했다.
"이건 음해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결코 황제 폐하에 관한 충성심을 저버린 적이 없으며, 지엄한 황권을 침해할 생각도 없소!"
"만민공동회가 건의한 헌의육조(獻議六條)의 제1조도, 관민이 한마음으로 대한 황제께 충성하며 전제 황권을 견고히 한다는 것이오. 이런 근거 없는 음해에 넘어가서는 아니 되오!"
독립협회가 즉각 부정 성명을 냈으나, 황국협회는 이를 명분으로 삼아 독립협회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저 민당의 무리가 파당을 결성하여 황제 폐하와 정부를 위협하더니, 마침내 공화국 선포를 운운하기에 이르렀다. 저들은 부정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는가?
"독립협회는 지엄한 군상대권을 위협하는 역적의 무리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타도하라!"
"전국의 충의지사들이여, 황성으로 모여라! 역적들을 타도하여 황은에 보답하자!"
정부를 지지하는 언론, 독립협회를 지지하는 언론, 황국협회를 지지하는 언론들이 잇달아 보도를 냈다. 갑론을박이 이어지면서 황성은 정치적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황제는 혼란상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선은 근래 발발한 미국-스페인 전쟁의 동향에 더욱 신경을 쓸 뿐, 국내의 혼란에 관해서는 별다른 지침을 내리지 않았다.
황제의 복심인 내무대신 김옥균도, 경찰력을 동원할 수 있는 중책에 있음에도 내버려 두고 있었다.
보다 못한 총리 김홍집이 황제에게 집회 불허, 협회 해산 등을 요청하는 상주문을 제출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저 협회의 무리가 지나치게 과격화되고 있습니다. 공화국 운운하는 괘서가 사실이 아닐지라도, 이와 같은 말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불경이고 불충입니다. 즉각 집회 불허와 협회 해산을 명하심이 가한 줄 아뢰옵니다."
이선은 이번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충돌이 발생해 국가가 혼란에 빠져드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내버려 두시오. 짐은 이 기회에 민의라는 걸 확실히 알고 싶으니."
김홍집은 이선이 왜 이리 유보적인지 답답했으나, 명령권자인 황제가 명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6월 25일. 이날은 만민공동회의 정기 집회일인 토요일이었다.
익명의 괘서로 인해 분위기가 흉흉해진 상황에서도, 만민공동회에 모여든 시민들은 민심 안정과 정치 개혁을 요구했다.
"동지 여러분, 동요하지 마십시오! 소위 공화국 선포 괘서는 반대파의 조작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모두 단결하여……."
연사의 연설이 이어지는 순간에, 갑작스러운 사태가 발생했다.
"저기 황권을 부정하는 역적놈들이 있다!"
"역적놈들을 쳐라!"
"뭐, 뭐냐!"
"이 역적놈!"
"으윽!"
수천의 무리가 몽둥이를 들고 만민공동회 현장에 난입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만민공동회는 아수라장이 됐다.
습격자들은 지방에서 상경한 황국협회 회원, 보부상들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무력 공격에 만민공동회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부상자 수십 명을 발생시키고 말았다.
하지만 만민공동회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황국협회가 만민공동회를 습격했다! 우리는 평화 집회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폭력에 대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동지들, 맞서 싸웁시다!"
만민공동회 참가자들은 투석전으로 응수했다.
병역 의무를 다한 황성 시민들이 선봉에 서 대오를 형성하고, 돌멩이를 던져 습격자들에 대응했다.
수적으로 우월한 만민공동회는 오히려 보부상들을 역으로 제압하고, 역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반동의 온상, 황국협회를 때려 부셔라!"
황국협회 본부로 달려든 만민공동회 참가자들은 분노를 담아 닥치는 대로 때려 부셨다. 황국협회 지도부는 황급히 도망쳐야 했다.
6월 25일, 전례 없이 격화된 상황 속에서 정치 투쟁은 최초로 수백 명의 부상자를 내고야 말았다.
다만 서로 죽이고 살릴 정도로 격렬한 상황은 아니었고,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전통 민속놀이인 석전(石戰)이 격화된 것으로 착각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도성에서 정파 간의 폭력 투쟁이 발생한 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 독립협회 지도부는 최대한 질서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음에도, 사태의 격화에 당황했다. 이건 그들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앞으로의 상황은 더 예측불허였다.
다음날, 그동안 관망하는 것처럼 보이던 황제의 명령이 마침내 떨어졌다.
"짐이 민의를 존중한다고 했지, 언제 파당을 형성해 무력을 과시하라고 했더냐? 황성에서 폭력 사태를 주도한 자들은 결코 용인하지 않겠다. 정파를 막론하고 폭력 가담자는 모두 체포하라!"
내무대신 김옥균은 경무청의 순검을 동원해 폭력 사태 주도자들을 일괄적으로 체포했다.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였다.
"독립협회와 황국협회, 각 지도부는 폭력에 가담하지 않은 회원들과 함께 경운궁으로 출두하라. 짐이 그들을 친히 조유(詔諭)하겠다."
독립협회와 황국협회 지도부는 체포와 황제의 출두 요구에 당혹감을 느끼며 경운궁으로 입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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