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명백한 운명
시간을 잠시 앞으로 돌려, 1898년 3월.
영국령 홍콩은 국제도시였다. 도시의 지배자인 영국인과 주민의 대다수인 광동인 외에도, 다양한 국적의 사람이 있었다.
신생 대한제국에서도 홍콩에 무역 회사가 설립되고, 상인과 기자가 파견되었다.
또한, 홍콩에는 ‘필리핀 임시정부’를 자처하는 필리핀 독립운동가들이 거주했다.
한국과 필리핀, 이전까지 전혀 교류가 없었던 두 나라 사람이 영국령 홍콩에서 만나게 된 것도 국제화의 일환이리라.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임시 대통령 각하. 대한제국에 필리핀 독립운동을 소개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반갑습니다. 귀사를 통해 우리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어 기쁩니다. 우리는 중국으로부터 독립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고, 당당한 자주 국가의 일원이 된 귀국을 본받고 싶습니다."
자칭 필리핀 ‘임시 대통령’, 29세의 청년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는 연배가 비슷한 한국인 기자의 임시정부 방문을 반갑게 맞이했다. 아기날도의 나이는 젊지만, 필리핀 독립운동 세력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한국인들에게 아직 필리핀은 생소한 나라입니다. 간략히 그 역사를 소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럼……."
아기날도는 기자에게 필리핀의 역사를 설명했다.
1565년 이래, 필리핀의 여러 섬은 대항해시대의 전성기를 맞이한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필리핀(Philippines)’이란 이름 자체가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필리핀에 대포와 종교를 싣고 왔고, 무력 정복과 기독교화를 동반했다. 300년의 지배 기간 동안 필리핀은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가톨릭을 믿는 나라가 되었다. 스페인 식민 제국이 쇠락하는 상황에서도, 필리핀은 쿠바와 함께 스페인의 중요한 식민지였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는 식민지 필리핀을 일깨웠다. 필리핀 토착 엘리트들은 스페인에서의 자치와 독립을 주장했다.
필리핀의 민족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호세 리살(Jose Rizal)이 1896년 스페인 총독부에 의해 공개 총살당하면서, 필리핀의 독립운동은 더욱 거세졌다.
1892년에 결성된 카티푸난(Katipunan)은 기존의 자치운동에서 무장독립운동으로 전환했다. 리살의 죽음은 필리핀 전역에서 스페인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카티푸난의 주도하에 1897년 전국 무장봉기와 필리핀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된 무장지도자 아기날도는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독립 세력은 중과부적이었고, 총독부의 무력 진압으로 패퇴를 거듭했다.
12월, 아기날도는 필리핀 총독과 협상하여 무력 투쟁의 포기 대가로 독립운동가들의 망명과 40만 페소 지불, 스페인의 자치운동 허가를 약속받았다. 아기날도와 임시정부 인사들은 홍콩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독립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스페인 식민 당국은 필리핀인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그 어떠한 정치 개혁도, 자치운동도 허가하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무력 투쟁이 재개될 것입니다."
아기날도와 임시정부 인사들은 홍콩과 싱가포르를 오가면서, 각국을 상대로 외교전과 무기 구매에 힘썼다. 스페인이 추방 자금으로 준 돈은 다시 독립 투쟁을 위해 쓰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일본이 임시정부를 돕는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소문이 사실입니까?"
"필리핀 독립의 대의를 돕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일부 일본인도 그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기날도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임시정부 인사가 일본령 대만에 자주 방문한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필리핀에서 포르모사(대만)야 지리적으로 가깝지 않습니까? 홍콩에서도 가깝고."
"일본은 근래 대만민주국을 붕괴시키고, 독립운동을 가혹하게 진압했습니다.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필리핀 임시정부가 일본 제국의 지원을 받는다면 모순이 아닐까요? 일본이 원하는 건 필리핀의 독립이 아니라 남양으로의 영향력 확대일 것입니다."
기자의 날카로운 질문에 아기날도는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럼 한국에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스페인 침략자에 맞서 싸울 동지들이라면 누구든 환영합니다. 중국 침략자에 맞서 독립을 쟁취한 한국인들은, 특히 자주독립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길 것입니다. 우리 아시아인이 연합하여 서양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 독립을 이룩해야 합니다."
아기날도의 아시아주의 주장에 기자도 공감의 뜻을 보였다.
"우리 한국인들은 강자에 맞서는 약자를 존중하며, 자주독립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이 기사를 읽는 모든 한국인은 필리핀 독립운동에 공감하게 될 것입니다. 정말로 한국 청년들이 아시아 해방의 대의를 위해 오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군요. 필리핀 독립의 날이 오면, 두 나라는 당당히 손을 잡을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때 기자님을 마닐라로 초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꼭 목표하신 바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필리핀 임시정부 대통령과 한국인 기자는 우정의 뜻으로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회사로 돌아간 기자는 본사로 인터뷰 기사를 송고하고, 비밀 전문을 작성했다.
제국익문사 홍콩 특파원의 이름은 이회영, 예비역 육군 참령이었다.
일본군의 여순학살을 경험하고 전쟁에 회의(懷疑)를 느끼게 된 이회영은, 전쟁이 끝나고 1896년 상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역했다.
전역 후 이회영은 언론계에 들어섰고, 독립신문 기자로 잠시 일했다.
하지만 정보 장교로서 유능함을 발휘한 이회영을, 상층부는 내버려 두지 않았다.
새로 설립한 제국익문사가 그에게 접촉했다. 여러 외국어가 능통한 이회영은 익문사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익문사 독리 김옥균과 독대한 후에야, 이회영은 비로소 익문사가 국영 통신사가 아니라 정보부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참령은 무관 학교 1기 수석 입학이지. 스물아홉에 참령이니 진급도 빨랐고. 아직 공직에서 멀어지기엔 너무 젊은 나인데? 부친은 전 이조참판, 형님 석영은 중추원 의관, 아우 시영은 총리대신 김홍집 공의 사위이자 헌법조사위원회의 일원이고. 가문 전체가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진정한 명문가지."
김옥균의 치하에도, 이회영은 명문가를 내세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저 한 사람 정도는 언론 자유를 위해 일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때, 김옥균의 뒤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복 차림이지만, 이회영은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화, 황제 폐하!"
"물론 언론 자유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지금은 국가 건설의 단계지. 제국익문사는 어둠 속에서 국가를 방위하는 방패요. 이 참령의 귀한 능력과 순수한 열정을 짐도 잘 알고 있소. 그 능력과 열정을 다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써 줬으면 합니다."
황제가 직접 설득하니, 이회영도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명을 받들어, 성총을 보좌하겠습니다."
정보 장교 출신인 이회영은 제국익문사의 첩보원 교육을 빠르고 우수하게 이수할 수 있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유창히 구사하는 이회영은 홍콩 특파원으로 배치되었다.
영국과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아시아 동향을 비롯하여 일본, 특히 대만총독부의 동향 파악이 이회영의 주된 임무였다.
근래 들어 가장 정세가 요동을 치는 곳은 단연 필리핀이었다. 필리핀 임시정부가 홍콩에 자리를 잡자, 이회영은 모든 정보력을 총동원해 동향을 파악했다.
필리핀 임시정부가 일본의 지원을 받는 건 분명했다. 스페인과 갈등을 빚는 미국과도 접촉을 늘려 가고 있었다.
- 미국 아시아 함대가 홍콩에 정박 중. 일본 해군과 영국 해군, 독일 해군도 홍콩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 필리핀 임시정부는 국내에 무장봉기를 지시했음. 미국과 일본이 자금과 무기를 지원해 주고 있는 것으로 추정. 미국과 일본이 협력 관계인지, 경쟁 관계인지는 아직 불투명함. 조속한 시일 내로 미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이 발발할 것으로 보임.
이회영의 비밀 보고문을 받은 이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역사와 달리 일본이 나서고 있단 말이지. 그렇다면 떡밥을 더 던져 볼 필요가 있겠군…….’
1898년, 이 해는 세계 역사에 결정적인 해였다.
바로 미국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발돋움한 해였다.
신임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는 제국주의자였다. 북미 전역을 넘어 태평양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미국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 믿었다. 미국의 시야는 하와이 왕국을 넘어 필리핀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미국의 첫 목표는 턱밑에 있는 쿠바였다. 쿠바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쿠바 독립운동가들은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고, 미국 여론도 쿠바 독립에 관해 우호적이었다.
1898년 2월 15일, 쿠바 재류 미국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아바나에 입항한 전함 메인(Maine) 호가 침몰했다.
침몰 사유를 두고 미국과 스페인의 의견이 엇갈렸지만, 미국 정부는 스페인의 기뢰로 인해 격침된 것이라고 일단락 내려 발표했다.
호전적인 미국 언론은 전쟁을 부추겼다.
"Remember the Maine(메인 호를 기억하라)!"
"메인 호의 복수를! 스페인을 몰아내자!"
"카리브해를 앞마당으로 삼고, 태평양을 향해 진출하는 것은 미합중국의 명백한 운명이다!"
미국 여론은 압도적으로 전쟁에 공감했고, 4월 21일 미국 정부는 스페인에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23일 스페인이 최후통첩을 거부함에 따라, 미국 의회는 4월 25일 스페인에 정식으로 선전 포고했다.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스페인령 서인도(쿠바)를 놓고 시작한 전쟁이지만, 전쟁의 불씨는 스페인령 동인도까지 번져 나갔다. 스페인령 동인도에는 필리핀과 괌, 마리아나 제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필리핀에 이해관계가 있다고 믿는 두 나라가 이 전쟁에 끼어들고 싶어 했으니, 바로 독일과 일본이었다.
일본은 대만의 지척에 있는 필리핀의 정세에 주목했다지만, 독일은 의외의 존재였다.
"짐이 스페인을 설득해 평화적으로 필리핀을 인수하려고 했거늘, 미국이 빼앗으려 든단 말인가? 상도덕 없는 무례한 양키놈들!"
카이저 빌헬름 2세는 ‘양지 정책’으로 적극적인 식민지 확장을 꾀했다. 이미 대부분의 세계가 열강에 의해 분할된 시점에서, 독일이 노릴 수 있는 건 미개척지나 2류 제국주의 국가의 영토였다.
독일은 1897년 교주만 확보에 이어, 스페인령 동인도에 눈독을 들였다.
필리핀을 판매하는 대신, 스페인이 독일에 진 채무를 탕감해 주고, 더해서 거액을 얹어 주는 조건으로 영토 매매 협상을 진행했다. 스페인도 관리하기 힘든 식민지 판매를 놓고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하지만 식민지 판매 불가 여론에 밀린 스페인이 협상에 미적거리는 사이, 미국이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하고 쿠바와 필리핀을 동시에 노릴 의사를 보인 것이다.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었지만, 자기중심적인 카이저는 미국이 독일 몫으로 떨어질 예정인 필리핀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칭다오의 아시아 함대는 홍콩으로 집결하라! 천박한 양키들에게 독일 제국의 위용을 보여 주어라!"
카이저의 명령으로 독일 아시아 함대가 집결했다. 미국과 일전을 벌이지는 않아도, 한바탕 무력시위를 보일 생각이었다.
1차 동아시아 전쟁 이후 ‘북수남진’을 새로운 팽창 정책으로 삼은 일본에, 필리핀은 중요한 지역이었다.
일본이 목표했던 청국으로부터의 ‘조선 독립’은 이루어졌으나, 대륙 진출은 삼국 간섭으로 좌절되었다.
일본이 차지한 식민지는 대만이었다. 1895년 대만민주국의 독립운동을 가혹하게 진압한 일본은, 대만총독부를 설립해 본격적인 통치에 나섰다.
초대 총독 해군 대장 가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 2대 총독 육군 중장 가쓰라 다로(桂太?), 3대 총독 육군 중장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거쳐 1898년 4대 총독으로 육군 중장 고다마 겐타로(?玉源太?)가 취임했다.
총독의 면면에서 알 수 있듯이, 모두 육·해군의 핵심 인사들이었다.
대만을 기반으로 삼아 대외 팽창을 계획해야 한다는 의견에 모처럼 삿초 번벌과 육·해군이 일치했다.
1896년 이토 히로부미의 뒤를 이어 총리로 취임한 마쓰가타 마사요시는 사쓰마 출신으로 해군의 지지자, 정부 내의 대표적인 북수남진론자였다.
바뀐 역사의 흐름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실제 역사라면 일본 군부와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1891년 오쓰 사건으로 실각하고, 이토와 마쓰가타가 일본 정계를 주도했다.
여전히 야마가타는 배후에서 조슈 출신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군부에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직책 없이 정부 정책에 관여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한 게 없는 육군과 달리, 북양함대를 궤멸시킨 해군은 최대 수혜자였다. 실제 역사에서 ‘육주해종(陸主海從)’, 즉 육군이 중심이 되고 해군이 부차적으로 되었던 것과 달리, 일본은 종전 이후 ‘해주육종’으로 나가게 되었다.
대양 진출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일본은 대만에 이어 스페인령 동인도를 넘보게 되었다. 필리핀은 대만에서 지척이었다.
"결국,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이 시작되었는가."
보고를 받은 총리 이토는 신음을 흘렸다. 얼마 전, 마쓰가타의 뒤를 이어 3차 이토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토는 자신의 총리 재임기에 또다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고민이었다.
육군과 해군을 가리지 않고, 팽창의 기조는 일치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육군은 대만을 기반으로 중국 대륙의 복건성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고, 해군은 필리핀과 남양 군도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여전히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을 두려워했지만, 스페인은 상대할 수 있는 2류 제국주의로 여겨졌다.
대만총독부는 그동안 은밀히 필리핀 독립운동을 후원해 왔다. 필리핀이 독립되면 자연히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미국이 ‘명백한 운명’을 내세우며 태평양의 새로운 변수로 등장한 이상, 이토 내각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각하, 하라 공사가 한국에서 전문을 보내왔습니다."
"오, 그래."
이토는 주한 공사 하라 다카시의 전문을 받아들였다. 보고문에는 한국 황제와의 회견 내용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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