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광서신정(光緖新政)
주청 특명전권공사 홍영식이 부임을 알리고 한국 황제의 국서를 전달하기 위해, 자금성을 찾아 광서제를 알현했다.
국서봉정식에서 광서제는 매우 반가운 어조로 말했다.
"이렇게 보게 되어 반갑소. 귀국의 황제 폐하는 안녕하시오?"
"예, 평안하십니다. 우리 황제께서도 황상께 깊은 우의를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대한국 대황제는 대청국 대황제에게’로 시작하는 국서의 첫 문장도, 예전 같으면 중화라는 자존심에 매달리는 청국 입장에서 분개할 일이었지만, 변법파의 영향을 받은 광서제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짐은 조선, 아니 한국의 변법과 경장을 이끌어 낸 귀국 황제께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소. 바야흐로 대청도 변법을 실시한 지금, 한국의 변법개화를 대표하는 홍 공이 북경에 와 주어 기쁘게 생각하오."
"황상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외신(外臣)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황상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 황제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귀국 황제께 짐의 말을 꼭 전해 주시오."
"예, 반드시 그러하겠습니다."
"좋소. 경은 앞으로 짐을 많이 도와주길 바라오."
홍영식은 광서제의 환대를 어느 정도 예상했으면서도, 막상 겪고 나니 얼떨떨했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참람하게도 대국에 반역을 꾀한 조선 개화파 일당’으로 몰려 구금되었던 홍영식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국빈 대접을 받았다.
그 이전에도, 조선 국왕은 중국 천자의 제후에 불과했다. 그 신하인 조선의 사신은 중국 천자를 감히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 중국 천자가 직접 한국 황제에게 존경심을 표하다니, 세상이 바뀌긴 바뀌었군.’
세상이 바뀌었다. 그만큼 광서제가 절박하다는 의미였다.
4살에 즉위했으나, 24년째 허수아비처럼 지냈던 광서제는 마침내 처음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서태후와 수구파를 몰아내고 변법을 이룩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얼마 전까지 적이었던 일본과 한국의 방식을 배울 용의가 있었다.
광서 24년 여름, 일대 개혁이 중국을 몰아쳤다. 하루가 다르게 포고령이 떨어졌다.
광서신정(光緖新政)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전국에 철도를 부설한다. 농업과 상공업을 발전시킨다. 기술 발명을 장려한다. 황도에 도시 계획을 실시한다. 예산을 기획해서 사용한다. 관리들이 외국을 왕래하여 발전상을 관찰하게 한다. 선교사와 외교관을 보호한다. 시대에 뒤떨어진 법률을 개선한다. 만주인의 상업 종사를 허용한다."
잇따른 포고령에서 근대적 제도의 확립과 상공업의 장려, 혁신을 추구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양무’의 범위를 크게 넘지 않았으나,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과거 시험의 인재 선발 방식으로 팔고문을 폐지하고 책론으로 바꾼다. 북경에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을 설립해 그 졸업자는 우대한다.
각 성에 신식 학당을 설립하여 서학의 연구에 힘쓰라. 서원은 대학당으로, 부·주·현 학교는 중학당으로, 향학은 소학당으로 바꾸라.
편역학당을 설립해 서양 학문을 번역한다. 의학당을 개설해 양의를 양성한다. 국영 신문을 출판해 나라의 일을 홍보한다. 정치와 경제의 전문가를 뽑는 특별 고시를 실시한다. 사민(士民)이 상소하여 말을 하는 데 제약을 두지 않는다."
교육 제도의 혁신은 서양식 근대화를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었다. 하지만 급작스러운 과거제의 변화, 특히 팔고문(八股文)의 폐지는 유학자들과 과거 수험생들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다.
"성현의 학문을 서양 오랑캐의 기술로 대체하겠다니, 이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인제 와서 팔고문을 폐지한다니, 대체 그동안 공부한 건 어쩌란 말이냐?"
"강유위,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
그래도 사대부의 반발은 중앙 정부에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정치 제도의 근본적인 변혁이었다.
"옛 관습을 수정하고 새로운 제도를 정하여 행정 효율을 재고한다. 불필요한 기구를 철폐하고 인원은 줄인다. 첨사부, 통정사, 광록시, 홍전시, 태상시, 태복시, 대리시. 호북, 광동, 운남 순무는 해당 지역 총독이 업무를 겸임한다. 앞으로 조정은 시대에 뒤떨어진 자들은 파직하고, 시무에 능한 인재를 등용할 것이다."
폐지한 관직은 분명히 시대에 뒤떨어진, 고대부터 내려오는 관청들이었다. 하지만 수구파들에게 이는 전통의 붕괴였고, 관직을 잃은 자들의 분노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광서제와 강유위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급진적인 변법파 담사동(譚嗣同), 유광제(劉光第), 양예(楊銳), 임욱(林旭) 등 4인이 군기처 장경으로 임명되어 강유위를 보조했다.
세력을 얻은 강유위는 더욱 웅대한 계획을 세웠다.
"일본과 한국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고, 문화와 사회가 유사합니다. 저들도 비슷한 경로를 거쳤습니다. 저들의 사례를 참고하여, 앞으로 중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이렇습니다."
첫째, 과거 제도와 법률 규범을 혁신한다.
둘째, 제도국을 설립하고 12개의 관리국을 설치한다. 관리국은 유럽의 부와 같다. 사법, 재정, 교육, 농업, 공업, 상업, 철도, 우정, 광무, 문화, 외교, 국방.
셋째, 각 성에 민정국을 창립하고 지역별로 분국을 설립하여 지방 자치의 시작으로 삼을 것.
넷째, 헌법을 제정할 것.
다섯째, 북경에 국회를 설립할 것.
여섯째, 행정, 입법, 사법의 삼권 분립의 원칙을 사용할 것.
요컨대 전통적인 유교 국가를 서구식 입헌 군주제로 대체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수구파는 물론이고, 양무파조차 감히 상상도 못 하던 일이었다.
강유위의 구상은 조정에서 비교적 진보적인, 양무파의 집결지인 총리아문조차도 불쾌함을 느꼈다.
"중국의 전통은 완전히 무시하는가? 강유위는 대체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갈 셈이냐?"
황제의 포고령은 계속 떨어졌지만, 문제는 집행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조정은 포고하는 시늉만 했고, 각 성은 지방 자치의 기초를 삼겠다는 제안에도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변법을 지지하는 호남순무 진보잠(陳寶箴)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성은 황제의 포고령을 무시했다.
"북경과 자금성은 머나멀고, 유교 질서가 지배하는 향촌과 서원은 가까운데 누구의 말을 들으랴?"
"황태후가 버젓이 이화원에 계시는데, 변법파 애송이들이 얼마나 버틸지 의문이군."
황제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미 청조의 중앙 권력은 형해화(形骸化)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태평천국 전쟁 이래 중앙 권력은 쇠락했다. 태평천국을 진압한 건 청조의 중앙군이 아니라, 각 지역에 기반을 둔 신사(紳士) 층과 향용(鄕勇)이었다.
이들의 대표가 바로 상군(湘軍)의 증국번, 초군(楚軍)의 좌종당, 회군(淮軍)의 이홍장이었다. 회군을 계승한 북양함대와 상·초군을 계승한 남양함대가 청·불 전쟁과 조·청·일 전쟁에서 서로의 전역(戰域)을 방관하다 패전을 면치 못했다. 북양함대 내부에서도 안휘와 복건 출신으로 파벌이 나뉘어 자멸의 길을 걸었다. 지역성이 청조에 대한 충성심보다 강했기 때문이었다.
지방의 통제력은 날이 갈수록 떨어져 갔고, 이는 포고령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광동 출신 강유위와 양계초, 호남 출신 담사동과 사천 출신 유광제 등 변법파는 대부분 남방 출신이었기에 북경의 통제력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들이 구상하는 건 북경 중심의 중앙 집권 국가가 아닌, 황제를 정점으로 각 성의 지방 자치가 이뤄지는 연방 형태의 국가였다. 하지만 이들의 구상에도 온갖 혼란이 난무했다.
특히 반만(反滿)주의자였던 담사동은 호남을 기반으로 완벽한 지방 자치, 청조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꾀했던 인물이었다. 담사동과 양계초는 호남과 광동을 에도 막부의 번 중에서 진보적이었던 사쓰마, 조슈와 동일시했다. 변방 삿초의 반(反)막부 운동이 메이지 유신을 촉발한 것처럼, 변방 광동과 호남의 혁명적 운동이 중국을 변혁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강유위의 주선으로 변법파는 반만 혁명이 아닌 대청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입헌 군주제 개혁을 추진하게 되었으나, 이들의 근본적인 딜레마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 나라의 정체성은 대청인가, 중국인가? 아니, 애초에 우리에게 독자적인 국명과 정체성이 존재하는가? 외국에서는 우리를 한인(漢人), 당인(唐人), 청인(淸人)이라고 부르는데 이건 왕조의 이름이다.
혹은 차이나 혹은 지나(支那)라고는 하나 우리가 정한 이름이 아니다. 중국이나 중화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을 높이는 일에 지나지 않으니, 외국이 중국을 외면해도 놀랍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한자와 유교, 공통의 문명과 황제를 갖고 있으나, 공통의 국민을 갖고 있지는 않다. 대체 어떻게 해야 공통의 국민을 창출할 수 있는가?"
바로 이게 변법파의 근본적인 딜레마였다.
서구 국민 국가를 모범으로 한 변법파의 급진개혁에 자연히 반발이 결집되고 있었다.
반발의 중심은 당연하게도, 이화원의 서태후였다. 서태후도 청조의 위기를 인지했기에, 중체서용과 양무운동은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이상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변법이 시작되자, 서태후는 광서제에게 당부와 경고의 말을 전했다.
"황상이 조상의 위패를 보존하고 불태우지 않으며, 변발을 자르지 않으면 나는 간섭하지 않겠소."
즉 종묘사직과 변발로 대표되는 청조의 기본 제도를 뒤엎지만 않겠다면, 서태후의 권위를 위협하지 않는다면 변법을 일정 부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변법이 점차 급진화되자, 서태후는 본능적으로 경각심을 느꼈다. 강유위와 변법파의 목표가 청조의 권위와 자신의 권력을 뿌리째 흔들려 한다는 의구심이 든 것이다.
결국,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는 군권(軍權)의 장악이었다.
조정은 패전 이후에 북양군을 기반으로 독일식 신건육군(新建陸軍)을 창설했지만, 이들이 황제의 확실한 통제하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신건육군은 직례총독 겸 북양통상대신의 관할 하에 있었다. 그 자리를 오랫동안 유지했던 이홍장이 물러난 후, 후임은 왕문소(王文韶)였다.
서태후는 황제와 강유위를 연결한 옹동화를 파직하게 하고, 왕문소를 호부상서로 임명하여 북경으로 향하게 했다. 그 후임 자리를 놓고 서태후가 선수를 쳤다.
"영록은 충성스럽고 군무에 능통하니, 후임 직례총독으로 임명하는 게 좋을 것이오."
서태후는 영록의 임명을 강행하려 했다. 하지만 명백히 후당(后黨, 태후파)에 속하는 수구파 영록에게 직례의 군권을 내주는 일은, 황제와 변법파가 용인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후당의 세력이 여전히 강성한 상황에서 그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일본과 조선의 개혁 사례를 참고합시다. 유신파와 개화파가 확고하게 군권을 통제했기에, 변법을 시행할 수 있었소."
"특히 조선의 사례를 참고할 만하오. 완화군은 외국의 확고한 신임을 받았으며, 국내적으로도 대원군과 같은 강력한 힘을 지닌 보수파 거물이 개혁을 지지한 덕에 성공할 수 있었소."
"하지만 우리에게 대원군 역할을 해 줄 사람이 어디 있소? 비슷하다면 공친왕이 있는데, 이미 돌아가셨으니."
"한 명 있긴 하지요."
"그게 누구요?"
"전 북양대신 이홍장."
강유위의 말에 좌중이 술렁였다.
"하지만 이홍장은 태후와 가깝지 않소? 더욱이 황상께서는 이홍장을 싫어하시는데."
"영록보다야 이홍장이 낫지. 이홍장은 최소한 말은 통할 수 있는 사람이오. 서양 열강의 확고한 지지도 받고 있고. 무엇보다 직례총독과 북양대신은 오랫동안 이홍장의 관할이었소. 그를 다시 임명한다고 하면, 크게 기뻐하며 황상께 충성할 것이오. 우리 사람을 직례총독으로 세우면 태후도 받아들이지 못하겠지만, 이홍장이라면 용인할 것이오."
"음, 과연 일리가 있소."
광서제는 이홍장을 늙은 퇴물에 후당으로 여겨 탐탁지 않게 여겼다. 변법파는 황제를 설득했다. 북양함대 궤멸 후 이홍장은 힘을 잃었으나, 여전히 양무파 거두로서 그의 지지자는 많았다. 이래저래 확실한 후당인 영록보다는 나았다.
황제는 이홍장의 의사를 타진했고, 이홍장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내각대학사 태자대부 숙의백작 이홍장을 다시 직례총독 겸 북양통상대신으로 임명한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서태후는 심복인 영록이 임명되지 않은 것에 불쾌감을 느꼈지만, 그래도 이홍장이라면 용인할 수 있었다.
"이홍장이라면 동치제 이래 오랫동안 대청과 나에게 충성해 왔다. 변법파 애송이들하고는 결이 다른 사람이지. 이홍장이라면 믿고 군권을 맡길 수 있다."
3년 만에 이홍장이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변법파와 수구파의 갈등 사이에서, 양무파를 대표하는 76세의 이홍장이 다시 본래 무대로 돌아왔다. 이는 변화한 역사였다.
변화는 한 가지 더 있었다. 실제 역사라면 이홍장의 후계자로 신건육군을 이끌어야 할 이는 원세개였지만, 이선의 계략으로 1886년 조선에서 조기 퇴장했다.
이홍장의 징계를 받아 백의종군하게 된 원세개는 아직 젊었다. 원세개는 능력과 수완을 발휘해, 남방에서 다시 경력을 쌓아 호광총독 장지동(張之洞)의 막하에서 자강군(自强軍)을 이끌었다. 하지만 역사의 변화는, 본래 원세개의 몫이었던 신건육군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했다.
신건육군을 이끌게 된 건, 조·청·일 전쟁에서 분투한 기병대장 장훈(張勳)이었다. 전쟁 후반기에 이홍장의 후임으로 북양군을 지휘한 양강총독 유곤일(劉坤一)은 장훈의 능력과 충성심을 높이 샀고, 그를 신건육군의 책임자로 추천했다.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장훈을 황제와 태후도 받아들였다.
"신 장훈, 견마지로를 다해 황은에 보답할 것입니다."
홍영식과 제국익문사 요원들은 청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이선에게 상세히 보고했다.
이선은 전문을 받고 생각에 잠겼다.
‘역사와 달리, 이홍장이 다시 직례총독으로 복귀했으니 변법의 향방이 어찌 될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결코 개혁이 순순히 진행되진 못할 것이다.’
변법과 광서신정이 표면적으로는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선은 광서제와 변법파의 딜레마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 261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