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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혁명의 시대-261화 (260/812)

261화 제국의 역설

1898년 9월이 되자, 광서제와 변법파는 더욱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변법파의 핵심인 강유위와 담사동은 광서제로 하여금 표트르 대제와 메이지 일본을 모범으로 삼아 낙후한 국가를 아예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치라 권했다. 광서제도 ‘중국의 표트르’가 되겠다는 야심을 가졌다.

문제는 청나라가 표트르의 러시아도, 메이지 일본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변법파는 북경의 공사관 구역을 자주 드나들며, 각국 외교관들과 친분을 맺었다. 변법파는 외국의 지지가 곧 정권의 안정을 담보한다고 믿었다. 서구식 개혁에 나선 변법파에 관해 서양과 일본은 당연히 우호적이었다.

한국 공사관을 자주 찾는 이는 전 일본 공사, 호남 안찰사 황준헌(黃遵憲)이었다. 바로 1880년에 김홍집에게 ≪조선책략≫을 전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호남의 변법을 주도한 황준헌은 변법파의 일원이었다.

"김홍집 공은 조선 경장의 주역이 되었는데, 나는 여전히 나라를 위해 이룬 것이 없어 걱정입니다. 불과 15년 사이에 귀국은 참으로 큰 변화를 이끌어 냈습니다. 대체 그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조정의 확고한 지도력과 민심의 지지 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외국과의 관계도 중요했습니다."

막 외국과의 교류에 나선 조선을 대표해, 수신사 김홍집이 황준헌에게 국가의 진로를 묻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었다. 이제 김홍집은 자주독립을 이룩한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이었다.

황준헌은 거꾸로 한국에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일본 전문가이기도 한 황준헌은 일본과 한국의 개혁 방식을 분석해 변법파에게 조언했다.

홍영식은 변법파 일원들과 자연히 가까워졌으나, 지나치게 친분을 갖는 것에는 주의했다.

‘변법개화에 나서는 저들의 노력이 반갑기는 하나, 중국이 일사불란하게 개혁으로 나서는 건 우리 입장에서 곤란하다.’

홍영식 개인의 입장이라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개혁에 나서는 변법파에게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대한제국의 국익을 대표하는 관리였다.

대한제국과 청나라 사이에는 만주 국경 문제를 놓고 갈등이 얼마든지 터질 수 있었다.

‘더욱이 성상께서는 이 정권이 언제까지 갈지 모른다고 하셨지.’

중국의 상황을 보면 볼수록, 변법파가 놓인 위치는 일본 유신파와 조선 개화파가 가졌던 어려움과 비교할 수 없었다. 홍영식은 변법파의 개혁이 오래가지 못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서태후 주위에 수구파가 갈수록 결집하고 있었고, 이들은 변법파의 통치에 극도로 불만을 품고 있었다. 특히 만주 귀족들의 불평이 자자했다.

"소위 변법을 한다는 자들은 모두 한족, 남방 출신 한족들입니다. 이자들이 중국을 위한다는 건 결코 대청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변법은 한족에게는 유리할지 몰라도, 만주족에게는 해로운 것입니다. 원래 대청은 만주족이 지배자요, 한족은 가복(家僕)이었습니다. 가복이 주인의 머리에 올라서려는 것입니다."

만주 귀족들은 한족 관료들이 청조를 찬탈하려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그들의 의심 대상은 본래 군권을 지닌 이홍장과 양무파들이었지만, 최소한 이들은 청조와 황제에 대한 충성심은 확고하다는 걸 확인했다. 하지만 변법파에게는 전혀 그런 기대가 들지 않았다.

"저들은 중국의 전통을 완전히 파괴하려고 있습니다. 중국을 서양 오랑캐와 다를 바 없게 만들려고 합니다! 중화가 더 이상 중화가 아니게 된다면, 대체 이 나라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전통을 사수하려는 한족 수구파들도 서태후에게 몰려들었다. 그들은 변법파가 중국의 전통을 완전히 박살 내려 한다고 의심했다.

"이 늙은이는 이미 은퇴한 몸이오. 황상께서 어련히 잘하시겠소? 나는 이화원에서 즐겁게 노후를 보낼까 하오."

"아니 됩니다! 이 혼탁한 나라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분은, 예나 지금이나 태후 폐하밖에 없으십니다."

서태후는 짐짓 세상사에 관심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럴수록 수구파들은 오히려 그녀의 주위에 결집했다.

물론 서태후가 권력욕이 사라져서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권력에 관한 그녀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핵심은 군대였다. 서태후의 심복인 영록이 팔기군을 지휘하고 있지만, 화려했던 과거와 달리 팔기군은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서태후는 군권을 지닌 양무파들이 변법파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광서신정은 각 지방의 행정권과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양무파 관료들의 ‘비판적 지지’ 위에 가까스로 유지되는 상황이었다.

직례·하북을 다스리는 직례총독 이홍장, 강소·강서·안휘를 다스리는 양강총독 유곤일, 호북·호남을 다스리는 호광총독 장지동, 광동·광서를 다스리는 양광총독 담종린(譚鍾麟) 등은 각 지방의 실질적인 지배자나 다름없었다.

전부 60대 이상의 노신인 이들은 양무는 적극 지지했지만, 변법에 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변법은 중국의 전통을 무너트리려고 하고 있었다. 다만 이들이 광서신정을 묵인하는 건, 청조와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 있는 노신들이기 때문이었다.

"변법파 애송이들이 나라를 어디로 이끄는지 모르겠소."

"러시아와 일본이 유신으로 강성해진 건 사실이나, 중국은 그 나라들과 같지 않거늘."

"하지만 황상께서 주도적으로 경장을 이끌고 계시니, 일단은 지켜봅시다."

9월 9일, 이토 히로부미가 청나라를 방문했다. 이토는 미·서·일 전쟁 종결 직후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후임으로 오쿠마 시게노부가 내각을 조직했다.

이토는 파리에서 예정된 강화 조약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청나라의 초청을 받아들여 북경을 방문했다.

불과 3년 전, 시모노세키에서 청나라에 패전과 영토 할양의 굴욕을 안겨 줬던 이토지만, 변법파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일본이 서양 국가 스페인을 상대로 ‘승전’ 한 직후이므로, 메이지 일본의 위업은 청나라에서 더욱 대단하게 여겨졌다.

이토의 초청 소식에 수구파는 긴장했다. 황제가 이토를 수석 고문관으로 삼아, 변법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렇지 않고선 굳이 이토를 초청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었다.

서태후와 수구파에게 이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인이 고문으로 취임한다니, 이건 있을 수 없습니다! 서양 고문관을 채용한 것과는 경우가 다릅니다!"

"섬나라 오랑캐, 왜인을 본받는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이제는 중국을 위협한 왜적을 등용해 나라를 팔아먹을 생각인가?"

이토의 고문관 초빙은 뜬소문이었다. 변법파가 이토를 초청한 건, 황제가 메이지 유신의 ‘원훈’ 이토를 만나 유신의 방법을 조언받기 위함이었다. 만약 초빙을 하더라도, 이토 본인이 전혀 승낙할 의사가 없었다.

하지만 소문이 서태후를 자극한 건 틀림없었다. 이화원에 있던 서태후는 모처럼 자금성으로 왕림했다.

"나 역시 그 일본인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소. 동석해도 되겠지요?"

"……그리하십시오."

섭정 시기처럼, 서태후는 병풍 너머에서 이토의 알현을 감시했다.

황제는 병풍 너머 서태후의 눈치를 보느라, 이토와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만을 나누었다.

광서제와 이토의 만남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이 사건은 황제와 태후 사이의 간극을 노골적으로 보여 줬다.

광서제는 여전히 서태후가 자신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려고 드는 걸 참기 힘들었다.

서태후는 광서제가 청조를 멸망으로 이끌려고 한다고 의심했다.

이제 황제와 태후의 불화는 가릴 길이 없었다.

"황상께서 태후와는 더 이상 같이하실 수 없을 것 같소. 이번 기회에 태후의 정치 참여를 막아 버립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오?"

"역사에서 배웁시다. 황실의 여인들이 분수 넘치게 권력을 탐한 시절이 있었지. 바로 당나라요. 당나라의 충신들이 측천무후를 압박하여 당나라의 사직을 다시 세웠고, 현종은 권력을 농단하던 태평공주를 제압했소. 우리는 이를 본받아야 합니다."

"표트르 대제는 누이 소피야 공주를 몰아내는 친위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고, 일본은 삿초 주도의 친위 정변을 일으켜 메이지 정권을 수립했고, 조선은 완화군 주도의 친위 정변을 일으켜 갑신경장을 실시했소. 그 결과 세 나라는 대개혁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

"좋소. 우리는 황상의 굳건한 지지가 있으니, 수구 세력을 타도할 수 있을 것이오."

문제는 이를 집행할 군사력이었다. 변법파는 군사력의 취약함을 인지했다. 이들은 신뢰할 만한 군사력 확보를 위해 고민했다.

9월 16일, 군제 개혁이 실시되었다. 황제의 군사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친위군을 북경에 창설하기로 했다.

문제는 누가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논의 끝에 신건육군을 이끌고 있는 장훈에게 대임이 주어졌다. 신건육군은 7천에 지나지 않았으나, 당시 청군 중에 최고 정예병이었다.

"장훈을 금위군 통령으로 임명하니, 속히 상경하여 황명을 받들도록 하라."

"삼가 황명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특정 파벌에 속하지 않는 장훈은, 변법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부정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정치성을 드러내지 않았고, 청조와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바로 그 점이 황제의 마음에 들었다.

"황명을 받들어 북경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신하 된 자로서 황명을 충실히 따를 것이나, 정치에 무지한 제가 저 혼란한 북경에서 장차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입니다. 중당께서 가르침을 주십시오."

장훈이 이홍장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홍장은 장훈의 상급자로, 북양 삼군을 지휘해 직례의 군권을 총괄했다.

이홍장은 고심했다. 황제와 태후의 갈등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이홍장은 태후와 더 가까운 후당이었고, 황제가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서태후는 비밀리에 이홍장에게 격문을 보내 변법파를 규탄했다.

- 저 간적의 무리는 황상의 성총을 가려 찬탈의 음모를 꾸미고 있소. 미국, 영국, 일본 등에 군정과 외교를 넘겨, 소위 변법을 성공시키려 하오.

저들은 황상을 이끌어 서양과 밀접한 상해로 천도하여 변발을 자르고 의복을 바꾸며, 국호를 바꾸려 하오. 청조를 찬탈하고 중국의 전통을 송두리째 무너트리려 하고 있소! 중당은 함풍 이래 삼대를 섬긴 충신인데, 어찌 이런 역적들의 음모를 방관할 것이오? 저 역적들을 몰아내야 하오. 나는 경의 충의를 믿소!

이홍장은 변법파가 하는 일이 못마땅했지만, 서태후의 격문은 믿기가 어려웠다. 반대로 태후가 황제를 폐립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이홍장은 그것도 용인하기 힘들었다. 고심 끝에 그는 결단을 내렸다.

"그대는 북경으로 가 황상을 충심으로 보좌하되, 결코 후당과 제당의 이간질에 넘어가 황실의 분란을 일으켜서는 아니 된다. 황상과 태후를 모두 충심으로 받들라. 오직 무인으로서 국가와 황실에 충성한다는 의무에 충실하라. 알겠는가?"

"예! 중당의 가르침을 깊이 받들겠습니다."

9월 21일. 장훈은 신건육군을 이끌고 상경하여, 북경에 진입했다. 광서제는 크게 기뻐하며 그를 친견했다.

"경의 충심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경을 금위군 통령으로 두어, 내 지근거리에 두겠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죽음으로 지극한 황은에 보답하겠습니다."

장훈은 세 번 절하며 충성을 맹세했다.

이로써 황제에게 믿을만한 무력이 생겼다.

광서제와 변법파는 계속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무술변법은 역사와 달리 ‘백일 유신’으로 끝나지 않고, 위로부터의 개혁이 계속 진행되었다.

서태후는 이홍장이 격문에 응하지 않고 정치적 중립을 지키자, 이를 부득 갈았다.

"흥, 변법파와 양무파는 결코 화합하지 못한다. 양무파는 유가 전통에서 성장한 사람들이다. 서양에 심취한 애송이들이 변법이라는 이름으로 전통을 파괴하면 할수록, 양무파는 진저리를 낼 것이다. 그때 저 간적들의 목을 조를 것이다."

노회한 권력자, 서태후는 음습하게 웃으며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광서제와 서태후의 갈등에서, 일단은 광서제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이 홍영식과 익문사를 통해 바다 건너 전해졌다.

보고하던 김옥균은 개화당과 유사한 변법파의 승리에 개인적으로 기쁨을 느끼다가, 대한제국의 관료로서 우려를 표했다.

"만약 이대로 청국이 개혁에 성공한다면, 이웃 나라에 무서운 적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고균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이선은 빙긋 웃으면서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근대화로 나아가려면, 국민 국가(Nation State)를 창조해야 하네. 전근대적 백성이 근대적 국민이 되어야 하지. 한국은 단일한 국가, 단일한 언어, 단일한 역사가 있기에 비교적 수월하게 국민 국가를 창조할 수 있었네. 국민 국가의 핵심은 공통의 정체성을 창출해 내는 것이네."

조선과 달리, 중국에서는 국민국가 건설이, 위로부터의 개혁이 극도로 어려웠다.

중국과 조선이 유교 국가라는 점은 같아도, 직면하는 현실은 천지 차이였다.

"하지만 중국은? 당장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과 만주족 황실의 괴리는 어떠한가? 변방의 다양한 민족들과 한족의 관계는 어떤가?

그렇다면 한족의 이해관계는 일치하는가? 지역마다 판이하네. 중화민족은 아직 그 실체조차 없지. 중화민족이 존재한다면 한족 국가를 수립해야 하는가, 청 황제를 중심으로 대청국을 유지해야 하는가? 전근대적 다민족 제국 대청국을 국민 국가로 전환하려면, 지방에서 순순히 따라 줄까? 그들의 충성심은 어디로 향할까?"

수구파의 저항이, 지방의 외면이, 중앙 권력의 쇠퇴가, 외세의 외압이,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광서신정은 바로 이런 최악의 조건을 뚫고 진행되어야 했다.

"청국의 덩치는 너무 거대하고, 시기는 너무 늦었네. 황제와 변법파가 노력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욱 깊은 수렁에 빠져들 거야. 개인적으로는 청국 황제의 의지를 높이 평가하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그의 개혁은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네."

늙고 쇠락한 제국은 개혁을 시도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든다. 거대한 제국의 역설이었다.

청조와 비슷한 처지인 오스만 제국의 급진 개혁, 청년 튀르크 운동이 오히려 제국의 멸망을 가속화시킨 사례에서도 알 수 있었다.

대제국의 다양하고 오래된 이해관계는, 결코 황제와 선각자 몇 명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청조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머리 위에 이고 힘겹게 걸어 가는 상황이었다.

이선은 그 폭탄이 터질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26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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