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대한국 헌법
1899년, 광무 3년은 무엇보다 헌법 제정 논의로 활발한 해였다.
헌법은 근대 국가의 근간이고, 입헌 체제의 초석이었다.
1787년 미국 헌법을 시작으로 헌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전 유럽을 뒤흔든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절대 군주제가 몰락하고, 빈(Wien) 체제가 복구된 이후에도 반동적인 군주들조차 헌법의 제정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양 열강 중에서 신성한 전제 군주국을 내세우는 러시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나라에는 헌법이 존재했다.
헌정은 법치의 최고로 여겨졌고, 아시아에서도 헌법 제정이 논의되었다.
비 서양 국가로는 오스만 제국이 1876년에 최초로 헌법을 제정했으나, 술탄의 친위쿠데타로 곧 좌절되었다.
동양에서는 일본이 자유민권운동의 진통 끝에 1889년 정부 주도하에 헌법이 제정되니, 이를 대일본제국 헌법, 흔히 메이지 헌법이라고 불렀다.
천황의 대권을 강조한 흠정헌법이지만, 일본은 아시아 최초의 헌정을 실시하는 입헌 국가가 된 것이다.
1890년대에 이르러, 대한제국이 헌법 제정을 논의했다.
법에 의한 통치라는 근대적 법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건, 이선 한 사람의 소망이 아니었다. 근대 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은 개화파 대부분이 공감했다.
1898년 12월, 이선은 기존의 헌법조사위원회를 법규교정소(法規校正所)로 재편하고, 10명의 의정관을 임명했다. 의정관은 중추원 칙선의관을 겸했다.
법규교정소 총재 김홍집 이하 10명의 개화파 관료들 외에, 미국인 르장드르와 그레이트하우스, 영국인 브라운, 프랑스인 크레마지, 독일인 슐체 등 외국 고문관들이 헌법 자문에 참여했다.
"각국의 헌법을 참조하여 비교 분석하되, 대한국의 역사적 전통을 감안하여 헌법 작성을 시행하라."
황제 이선의 명에 따라, 그간 헌법조사위원회는 각국의 헌법을 조사해서 참고했다.
대한제국은 군주제 국가라는 특성상, 군주가 제정하는 형태의 흠정헌법(欽定憲法)이 참고 대상이었다.
여러 헌법을 참고한 끝에, 1814년 프랑스 부르봉 왕정의 『헌법 헌장(Charte Constitutionnelle)』, 1850년 『프로이센 헌법』과 이를 계승한 1871년 『독일 제국 헌법(Verfassung des Deutschen Reiches)』,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大日本帝國憲法)』이 주된 참고 대상이 되었다.
흠정헌법의 시초가 된 프랑스 헌법 헌장을 참고한 프로이센 헌법을 독일 제국 헌법이 계승했으며, 일본의 메이지 헌법은 프로이센 헌법을 참고하여 반포하였으니, 흠정헌법의 계보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이외에도 1818년 바이에른 헌법, 1831년 벨기에 헌법, 1832년 러시아 제국법전, 1848년 사르데냐(이탈리아) 헌법도 참고했다.
각 헌법을 번역한 문서들이 법규교정소를 거쳐 황제 이선에게까지 상주되었다. 이선은 국무로 바쁜 와중에도 각국 헌법 번역문을 참고하고, 직접 헌법 심의에 참여했다.
"성상께서 법제에 이토록 밝으시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헌법은 국가의 근간이며, 더욱이 흠정헌법의 형식을 갖게 되었으니 짐이 직접 심의하지 않을 수가 없소."
헌법이란 개념은 아직 동양에서 생소한 것이었고, 통치권의 규정에 관해서는 더욱 그랬다.
의정관들이 황제의 신성한 군상대권을 침해하길 두려워해 자기 검열을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의정관이 관련 조항을 심의하여 상주하면 이선이 직접 주석을 달아 주곤 했다.
특히 1장의 ‘군상대권’과 2장의 ‘국민의 권리와 의무’는 황제 이선의 양보가 없으면 논의조차 쉽지 않을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헌법이 서양의 개념을 번역한 것이니만큼, 용어 사용을 놓고도 첨예한 대립이 있었다.
대한국의 백성을 인민(人民, People), 국민(國民, Nation), 신민(臣民, Subject) 중 무엇으로 규정하느냐를 가지고 논쟁이 벌어졌다.
보수파와 동도서기파 김홍집 등 대다수 대신은 신민을, 김옥균과 박영효 등 개화당은 국민을, 유길준과 윤치호 등 자유주의자들은 인민을 주장했다.
"주권이 황제 폐하께 있는데, 당연히 피치자는 신민이 되어야 맞지요. 일본 헌법에서도 신민으로 규정하고 있소."
"국민이란 표현이 근대 국가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대한국은 국민개병, 국민 교육을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인민은 고대 이래 오랫동안 써 왔던 표현입니다. 국민이야말로 오히려 신조어지요. 영어 People, 독일어 Volk의 대응어로도 가장 적당합니다."
"국민이든 인민이든, 황제의 통치를 받는 자들은 모두 신민이지요!"
법규교정소에서 갑론을박이 일자, 이선이 제안했다.
"신민이란 단어는 국가의 일원으로서 주체성이 떨어지는군. 인민은 자연 상태의 사람을 일컬으니 흠정헌법과 성격이 맞지 않고. 신민과 인민을 관행적으로 쓰더라도, 헌법이 규정하는 대상은 국민으로 하는 게 좋겠소."
이선의 제안에 따라, 결국 법규교정소는 헌법의 백성을 국민으로 규정했다.
6월, 법규교정소는 7조 72항의 헌법을 작성해 황제에게 상주했다. 이선의 수정과 첨가를 한 후, 법규교정소는 중추원에 헌법안을 심의하게 했다.
중추원의 보수파 인사들은 헌법의 진보성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자유주의 인사들은 민권의 약화에 아쉬움을 표했으나, 결국 황제와 정부가 합의한 이상 대세는 정해졌다.
중추원의 절대 다수가 헌법안에 찬성하여, 모든 절차가 완료되었다.
1899년, 광무 3년 8월 14일.
이날은 태조 이성계의 즉위를 기념하는 개국기원절이었다.
조선의 개국은 1392년 음력 7월 17일로, 이를 양력으로 환산해 8월 14일이 되었다.
실제 역사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제헌헌법의 반포일로 7월 17일이 된 것에는,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계승했으며, 임시정부는 대한제국과 조선을 계승했음을 상징적으로 알렸다.
헌법 반포식이 있는 환구단으로 황족과 문무백관, 중추원 의관이 모여들었다.
헌법 반포에 큰 기대를 갖고 있는 국민도 환구단 밖에 모여들었다. 태극기를 손에 들고 있는 국민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역사적인 이날, 7조 72항의 대한국 헌법 조문이 공개되었다.
흠정 대한국 헌법(欽定大韓國憲法)
제1장 군상대권 (君上大權)
1조. 대한국은 오백 년 동안 전래(傳來)했으며, 앞으로 만세 불변할 대황제 폐하께옵서 통치한다.
2조. 대한국은 세계 만국의 공인된 자주독립의 제국으로, 결코 국권을 침해받지 아니한다.
3조. 대한국 대황제는 국가의 원수로 국가 권력의 모든 권리를 통합하고, 대황제께서 부여한 이 헌법에 정해진 규정에 따라 권리를 행사한다.
4조. 대한국 대황제는 국민의 총의(總意)를 대표하여, 통치권을 행사한다.
5조. 대한국 대황제는 의회의 협찬(協贊)을 받아, 입법권을 행사한다.
6조. 대한국 대황제는 법률을 제정하고 반포, 집행, 개정을 명할 수 있다.
7조. 대한국 대황제는 대사(大赦)·특사·감형·복권을 명할 수 있다.
8조. 대한국 대황제는 대한국 육·해군을 통수(統帥)하며, 편제를 정한다.
9조. 대한국 대황제는 계엄(戒嚴), 해엄(解嚴)을 선포할 수 있다. 계엄하에서 군상대권의 시행은 방해받지 아니한다.
10조. 대한국 대황제는 각 행정 기관의 제도와 문무관의 봉급을 제정하거나 개정할 수 있고, 행정상 필요한 여러 가지 칙령을 반포할 수 있다.
11조. 대한국 대황제는 의회를 소집하고, 개회, 폐회, 정회 및 해산을 명령할 수 있다.
12조. 대한국 대황제는 조약을 맺은 다른 나라에 사신을 파견하고 머물게 하며 선전 포고, 강화(講和)를 비롯한 여러 약조를 체결할 수 있다.
13조. 대한국 대황제는 문무관의 출척(黜陟)·임면을 행하고 작위·훈장 및 기타 영전(榮典)의 수여를 명할 수 있다.
14조. 대한국의 황위는 황실전범(皇室典範)으로 계승을 정하며, 황실전범은 대황제께서 제정하여 공포한다.
15조. 대한국 신민이 대황제의 군상대권을 침해할 움직임이 보인다면, 이미 행한 것과 아직 행하지 않은 것을 막론하여 신민의 도리를 잃은 자로 간주한다.
1장은 흠정헌법의 특성상 황제에게 국가주권, 통치권, 입법권, 사법권, 군통수권, 외교대권을 모두 귀속시켰다. 이는 프랑스 헌법헌장, 프로이센 헌법, 메이지 헌법의 해당 조항을 참고한 것이었다.
다만 이후 조항에서 통치권은 국민의 총의를 대표하여, 행정권은 정부의 보좌를 받아, 입법권은 의회의 협찬을 받아, 사법권은 법관의 독립성을 규정해 자의적인 황제 전제(專制)를 법적으로 제한했다.
제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
16조. 대한국민이 되는 요건은 법률의 의무를 따른다.
17조. 대한국민 중 법률 명령에 부합해 자격을 갖춘 사람은 평등하게 문무관이나 의원이 될 수 있다.
18조. 대한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갖는다.
19조. 대한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납세의 의무를 갖는다.
20조. 대한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모든 국민은 자녀에게 기초 교육을 받게 할 의무를 진다.
21조. 대한국민은 법률의 범위 안에서 거주 및 이주의 자유를 갖는다.
22조. 대한국민은 법률의 범위 안에서 언론, 저작, 출판 및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갖는다.
23조. 대한국민은 법률에 의하지 않고 체포, 감금, 수사, 신문, 처벌이 불가하다.
24조. 대한국민은 재판관의 재판을 받을 권리를 빼앗기지 아니한다.
25조. 대한국민은 법률에 정한 경우를 제외하고 서신의 비밀을 침해당하지 아니한다.
26조. 대한국민의 소유권은 침해당하지 아니하며, 공익을 위한 처분은 법률이 정한 바를 따른다.
27조. 대한국민은 사회의 안녕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는다.
28조. 대한국민은 사회의 안녕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의회를 통해 정부에 청원할 수 있다.
29조. 대한국민은 국가 법률의 의무를 준수해야 한다.
30조. 전시와 국가재난의 특수한 상황하에서 계엄이 선포될 수 있으며, 계엄의 요건 및 효력은 법률로써 정한다. 계엄이 선포되면 2장의 권리는 일시적으로 제한될 수 있다.
2장이야말로 한국 역사의 중대한 진전이라 할 수 있었다. 국민의 의무와 권리가 최초로 법적 보장을 받았고, 특히 권리 신장이란 측면에선 대단한 진보였다.
납세와 병역, 국민 교육의 의무를 지녔지만, 법적 평등, 거주 및 이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정치 결사의 자유, 종교의 자유, 교육의 권리, 관리 임용의 권리, 선거권과 피선거권, 법률에 의한 보호, 소유권의 보호를 천명했다.
다만 26조는 소유권을 보호하면서도 ‘공익에 의한 처분’을 가능하게 해 토지 개혁을 암시했고, 30조는 불가피한 상황의 경우 권리의 제한을 암시했다.
이 모든 것은 기존의 조선 왕조와 비교하면 천지개벽의 변화였다.
제3장 의회
31조. 의회는 중추원과 민의원의 양원으로 성립한다.
32조. 중추원은 중추원 관제에 정해진 바에 따라 의원을 칙선, 선출한다.
33조. 민의원은 선거법에 따라 선출된 의원으로서 조직한다.
34조. 모든 법률은 의회의 심의를 거친다.
35조. 양 의원은 정부가 제출한 법률안을 의결하며, 민의원은 법률안을 제출할 수 있다.
36조. 의회는 매년 소집되며, 1년 중 최소 3개월의 회기(會期)를 가진다. 필요할 경우 칙명에 의해 회기를 연장할 수 있다.
37조. 중추원과 민의원의 의원은 연임이 가능하나, 양 의원에 동시에 겸임할 수 없다.
38조. 민의원 해산의 명이 있을 때, 민의원은 해산하며 중추원은 정회한다. 해산 이후 90일 이내에 선거를 실시하며, 150일 내에 회기를 소집한다.
39조. 양 의원은 국민으로부터 청원을 받을 수 있으며, 대황제께 상주할 수 있다.
40조. 의원은 의회에서 발언한 의견 및 표결에 대하여 원외에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
41조. 의원은 현행범죄 또는 내란외환에 관한 죄를 제외하고 회기 중 의회의 허락 없이 체포되지 아니한다.
……
3장의 의회는 독립 기관으로, 민의를 대표하여 입법권을 행사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정부에 비판적인 야당 의원이라 할지라도, 면책 특권을 보장받아 수행할 수 있었다.
다만 의회에는 정부를 조직하거나 견제할 권한이 없어, 현실적으로 황제와 정부가 제출하는 법안을 심의하는 하위 기관에 불과했다.
제4장 정부
46조. 내각 총리대신은 국무 부처의 장(長)이자 수상으로, 대황제 폐하께서 임명한다.
47조. 국무 부처의 각 대신은 대황제를 보필하며 그 책임을 진다. 모든 법률과 칙령 및 다른 국무에 관한 조칙은 각 책임 부서를 필요로 한다.
48조. 국무대신과 정부 관료는 언제든지 의회에 출석하여 발언할 수 있다.
……
4장의 정부는 의회가 아니라 황제에게 책임을 지는 구조로, 황제가 총리 이하 대신과 문무관료 임명권을 갖고 있었다. 정부 역시 법률에 의해 통치해야 했다.
제5장 사법
55조. 사법권은 대황제의 명을 받아 법률에 의하여 법원이 이를 행한다. 법원의 구성은 법률로써 정한다.
56조. 법관은 법률이 정하는 자격을 갖춘 자로 임명한다. 법관의 신분은 법률로써 보장한다.
57조.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
5장의 사법 역시 황명을 대리하는 구조였으나, 사법부와 법관의 독립성을 인정해 삼권분립의 초석을 닦았다.
6장 재정
61조. 새로이 조세를 부과하거나 세율을 변경하는 것은 법률로써 이를 정해야 한다.
62. 재정은 탁지부에서 일원화하여 관리한다.
63조. 국가의 세출·세입은 매년 예산으로써 의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정부는 예산을 먼저 민의원에 제출한다.
64조. 황실 내탕금은 정해진 액수에 따라 매년 국고에서 이를 지출하며, 의회의 심의를 받지 아니한다.
……
6장의 재정은 황실 재정과 정부 재정을 명확히 분리시키고, 탁지부로 일원화시켰다.
또한 조세 부과와 세율 변경은 반드시 법률로 정하고, 연간 예산안은 의회의 심의를 거쳐 정부의 임의적인 착취를 금했다.
7장 헌법 개정
71조. 장래 이 헌법의 조항을 개정할 필요가 있을 때는, 대황제 폐하의 칙령으로써 의안을 의회에 부쳐야 한다. 이 경우에 양 의원은 각각 그 총원 3분의 2 이상 다수를 얻지 않으면 개정의 의결을 할 수 없다.
7장의 개헌 역시 임의가 아니라, 양원의 3분의 2가 동의해야만 개헌이 가능했다.
부칙
72조. 이 헌법은 초대 민의원이 선출되고 소집되어, 대황제 폐하께서 친림하여 공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
대한국 헌법은 흠정헌법이라지만, 민의의 대표자인 민의원이 소집되어 비준한 후에 공포하는 것으로 정했다. 이는 광무 4년(1900)이 될 터였다.
광무 3년 8월 14일
대황제 폐하 흠정
내각총리대신 김홍집
참정대신 박정양
내무대신 김옥균
외무대신 박영효
탁지대신 어윤중
법무대신 김윤식
학무대신 민영익
농상공대신 김가진
궁내대신 이재순
중추원 의장 조병세
중추원 부의장 최익현
중추원 부의장 유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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