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유신(維新)의 종말
"군기장경 담사동이 천진으로 찾아와서 장 공을 뵙길 청합니다."
"그래? 안으로 뫼시게."
담사동은 안으로 들어와 장지동과 만났다. 호남 출신 담사동은 전 호광총독 장지동과 잘 아는 사이였다. 장지동은 강학회의 회장이었고, 담사동은 호남의 강학회를 주도했다.
담사동은 장지동에게 예를 표한 후, 즉각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뜨려는 원세개에도 함께 들을 것을 권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황상께서 내리는 밀명입니다."
"황상께서 이 늙은이에게 밀명을?"
"이화원이 불측하게도 황상을 끌어내리려는 음모를 계획하고 있으니, 이를 먼저 제압해야합니다."
"어허, 어찌 그런 일이. 확실하오?"
"태후의 생일인 10월 10일을 기해 정변을 꾀하는 게 거의 확실합니다."
"그럼 내가 어찌하면 좋겠소?"
"위험 상황이 발생하면 천진으로 밀명을 내리겠습니다. 그 즉시 북양삼군을 북경으로 돌입시켜 황상을 보호하고, 이화원을 포위하고 팔기군을 지휘하는 영록을 제거하십시오. 뒷일은 우리가 책임지고 알아서 하겠습니다."
"으음……."
"장 공은 호광의 변법을 이끌었고, 강학회 회장을 맡아 변법을 지지했습니다. 그렇기에 황상께서는 장 공을 믿고, 이런 일에 대비해 북양대신 겸 직례총독의 요직을 맡긴 것입니다."
담사동은 이어 원세개에게 시선을 돌렸다.
"원 장군 또한 우리 강학회의 일원으로 변법을 지지해온 걸 알고 있소. 일이 성사되면 장 공은 신설되는 내각의 총리대신을 맡게 될 것이니,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되실 것입니다. 원 장군은 군부의 요직을 맡게 될 것이오."
"황상께서 명령을 내린다면, 따를 뿐이지요."
원세개의 말에 담사동은 만족감을 표했다. 그는 장지동보다 원세개를 더 신뢰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늙은이는 그저 황명을 따를 뿐이오. 다만 태후께 위해를 가해서는 아니 될 것이오."
"태후는 황상의 법적 모친이신데, 효자이신 황상께서 어찌 위해를 가하겠습니까? 단지 앞으로 여인은 함부로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고, 이화원에서 편히 노후를 모시게 해야지요."
"알겠소이다. 그럼 황상의 명을 기다리지요."
"장 공께 나라의 명운이 걸렸습니다."
담사동이 물러난 후, 장지동은 고개를 돌려 원세개를 향했다.
"어찌 생각하나?"
"저야 공의 은혜를 입은 아랫사람이니, 명하신 대로 따를 뿐이지요."
"태후께서도 내게 밀서를 보내셨다네. 아무래도 북경에서 변란이 일어날 것은 확실한 듯싶군."
"곤란한 일이군요."
"자네 의견을 들어보고 싶네. 나와 자네만 아는 비밀이 될 터이니, 가감 없이 솔직히 말해보게."
장지동은 원세개의 인성은 믿지 않았지만, 그의 기민한 감각은 높이 평가했다.
원세개는 계속 여러 번 사양하는 시늉을 하다가, 마침내 의견을 밝혔다.
"황공한 일이나, 변법파 정권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변법파의 기반은 오직 황상의 신뢰뿐입니다. 황실, 조정, 군대, 지방, 민심 어느 한 쪽도 확실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렇지."
"북양군을 동원해 이화원을 제압해서 성공한다면 총리 지위를 얻겠지만, 변법파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과 영원히 척을 져야할 것입니다. 황상의 신임은 변법파에게 더 지극하니 총리도 허울뿐인 자리가 될 것입니다."
"으음."
"하지만 단지 중립만 지키는 것만으로도, 공은 성공한 쪽에게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장지동은 웃음을 흘렸다. 원세개는 장지동의 생각을 정확히 읽고, 딱 그가 원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개혁을 지지한다고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유학자요 향신 출신인 장지동이었다. 변법파는 지켜야할 선을 넘고 있었다.
"자네 생각이 꼭 나와 같네. 북양군은 어떠한 상황에도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북경의 일에 개입하지 않을 생각이야."
"역시 공께서는 현명하십니다."
직례와 북양군의 군권을 지닌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 장지동이 ‘중립’을 결정함에 따라, 변법의 사실상 운명이 결정되었다.
산동 안찰사로 임명된 장훈이 이끄는 신건육군이 산동에 진입하자, 과연 청조 최고의 정예군답게 의화단을 잇달아 격파했다.
의화단이 뿔뿔이 흩어져 숨자, 산동의 치안은 안정되어 갔다. 장훈은 산동에 계속 주둔하여, 초무(剿撫) 양면 정책을 쓰며 저항하는 자는 강경하게 진압을, 항복하는 자는 용서해주었다.
장훈에게 황제의 밀명이 도달한건 음력 9월 28일, 양력 11월 1일이었다.
"이화원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 태후의 생일인 10월 10일을 기해 정변을 모의하고 있으니, 9일까지 북경으로 입성해 황상을 보위할 것."
장훈은 정변의 진위 여부가 의심스러웠으나, 청조의 충신인 그는 황명을 따르기로 했다.
청조의 충신으로서 황제와 태후 사이에 중립을 지키려고 했으나, 태후가 정말로 정변을 모의한다면 황제를 택하는 게 도리에 맞았다.
"전군은 10월 9일까지 북경으로 회군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천진으로 가서 열차를 이용한다."
광서제와 변법파는 서태후와 수구파의 쿠데타를 일으키면, 친위쿠데타로 제압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유사시 북경을 내주더라도, 황상을 모시고 천진으로 파천한다. 신군과 북양군을 동원하면 손쉽게 탈환할 수 있다."
"그리 되면 북경은 반역 도당의 소굴이니, 천도의 명분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열강도 우리를 지지할 것이다."
"진정한 변법과 유신은 이제부터 시작일세."
"설령 실패한다한들, 우리는 황상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몸. 후회는 없네."
강유위와 변법파 지도부는 친위쿠데타의 성공을 다짐했다.
문제는, 광서제와 변법파가 서태후의 오랜 정치적 경험을, 특히 팔기군을 너무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때 팔기군은 청조의 천하통일에 가장 기여한 정예군이었지만, 청말에 이르러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 청불전쟁, 삼국전쟁을 거치며 일절 쓸모없는 허수아비 군대임을 확실히 드러냈다.
하지만 아무리 쓸모없는 팔기군이라 할지라도, 팔기의 모든 특권을 박탈하고 목을 조여 오는 변법파가 마땅 할리 없었다.
임오군란을 일으킨 조선의 구식군인들처럼, 팔기군은 터지기 직전의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수구파의 군사력을 얕잡아보고 있던 광서제와 변법파는, 이화원과 팔기군의 ‘심상치 않은’ 동태도 눈감아주고 있었다.
그래야 친위쿠데타가 정당화될 수 있었다.
서태후는 본래 변법파의 예상대로 자신의 생일인 음력 10월 10일에 정변을 계획했지만, 지체했다가 변고가 생길까 두려워 정변 날짜를 앞당겼다.
장지동으로부터 ‘중립’ 의사를 들은 서태후는, 조속히 정변을 일으켰다.
서태후의 빠른 결단력이, 정변의 승부를 갈랐다.
광서 25년 음력 9월 29일, 1899년 11월 2일 밤.
이 날은 그믐이라 달빛조차 약한 칠흑 같은 밤이었다.
이날 밤, 반동(反動)이 시작되었다.
"역적 강유위 일당이 팔기를 영구히 폐지하고, 만주인의 모든 권리를 없애려하고 있다. 저들은 만주인의 변발을 자르고, 우리의 옷을 입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우리의 언어를 금지하고, 한인의 노예로 만들려하겠지."
"역적들이 태후 폐하를 감히 해하려한다. 이를 지켜만 보고 있겠는가?"
"변법파는 나라를 서양에 팔아넘기려는 매국노 무리들이다. 변법파 무리들을 모조리 죽여 대청과 황실을 보위하자!"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황실의 원로로 강경한 배외주의자이자 수구파인 이혁단군왕(已革端郡王) 장친왕(莊親王) 재의(載?), 장친왕 재훈(載勛), 군기대신 영록, 전 호광총독 유록(裕?), 전 산서순무 육현(毓賢) 등 만주 황족과 귀족들이 궐기했다.
팔기군은 외국군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으나, 북경의 정변을 일으키기엔 충분했다.
사전에 내통하고 있던 환관과 무관이 건청문(乾淸門)을 활짝 열어 팔기군의 입성을 도왔다.
"네 이놈들, 대체 이 무슨 무례냐?"
"황제 폐하! 역적 강유위 등이 찬탈의 음모를 꾸미고 있어, 태후 폐하께옵서 긴급히 명을 내려 진압하라 하셨습니다!"
"뭐, 뭣이?"
한밤중에 팔기군은 단숨에 자금성을 점령하고, 황제의 신병을 확보했다.
황제의 신병이 확보된 시점에서, 승패는 갈리고야 말았다. 광서제는 그날 밤 즉시 궁전 서쪽에 있는 중남해의 영대에 유폐되었다.
다음날 새벽, 서태후는 황제의 옥새로 칙명을 반포했다.
자희단우황태후(慈禧端佑皇太后)는 황명을 받들어 고한다. 황상께서 깊은 병을 앓고 계신 바, 역적 강유위 등은 황상의 병을 감추고 국정을 농단해 왔다.
이에 황태후는 역적들의 음모를 분쇄하고, 대청의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 부득이하게 수렴청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강유위 일당은 대청을 찬탈하려는 역적의 무리이다. 대청의 충신들은 궐기하여 역적을 타도하고, 종묘사직을 수호하자!?
대청 광서 25년 10월 1일
"태후께서 명하셨다! 역적들을 쳐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의화단의 소문은 북경에도 파다하게 퍼졌고, 변법파와 서양을 증오하는 수구파와 빈민들도 결집했다.
이들은 팔기군과 연합하여 ‘역적’들의 본부인 제도국을 습격했다. 제도국에 있던 관리들은 모조리 두들겨 맞고 체포되었으나, 강유위와 변법파 지도부는 없었다.
"역적놈들, 어디로 숨었느냐?"
"놈들이 도망치게 놔두지 마라!"
새벽에 변법파 지도부는 갑작스러운 정변 소식을 듣고 황급히 제도국으로 모여들었으나, 이미 광서제가 팔기군에게 잡혀 유폐되었다는 비보를 들어야 했다.
"주저할게 뭐가 있소? 단지 계획이 우리 생각보다 빨라진 것뿐이오. 즉시 천진으로 이동해 북양군과 신군을 동원해 반란을 제압합시다!"
"이미 황상께서 저들에게 피체되었으니, 우리는 역적으로 규정되었소. 신군을 이끄는 장훈은 그렇다 쳐도, 장지동과 원세개가 우리를 지지하겠소?"
"그렇다면 앉아서 죽을 생각이오? 할 수 있는 수단은 다 써봐야지요!"
절망감이 변법파들에게 깃들었다. 황제의 신병이 넘어간 상황에서 북양군이 그들을 지지할 가능성은 희박해보였다.
그때, 담사동이 분연한 자세로 일어섰다.
"이미 나는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했었소. 국가의 개혁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칠 수 있다면, 하등 아까울 것이 없소!"
담사동은 강유위와 그 제자 양계초에게는 피신을 권했다. 강유위에 대한 수구파의 증오가 워낙 극심한데다, 지방에서도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으니 반란에 맞서는 지도부 역할을 맡기기가 어려웠다.
"강 공과 양 공은 저들의 표적이니, 일단 공사관구역으로 몸을 피해 화살을 피하시오. 나 담사동이 저 역적들에 맞서 싸우겠소."
"너무 위험하오. 공도 일단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고, 천진에 전보를 보냅시다."
"외국 공사관에 피해서 명령을 보내면, 누가 우리를 따르겠소? 자고이래 피를 흘리지 않고 성공한 변법은 없었소. 만약 실패한다면, 그대들은 타국으로 망명해 변법의 대의를 이어나가주시오."
담사동, 유광제, 양예, 임욱 등 제도국 핵심인사인 변법파 4인과, 감찰어사 양심수(楊深秀)와 강유위의 동생인 강유전(康有溥)은 반동에 맞서 싸울 것을 결심했다.
눈물을 머금고 동지들과 헤어진 강유위와 양계초는 급히 치외법권 구역인 공사관 구역으로 향했다. 먼저 공사관 구역에 들어와 있던 황준헌이 이들을 맞이했다.
"만약 일이 그르칠 경우를 대비해, 각기 다른 나라 공사관으로 피신합시다. 각국이 우리를 송환하려 할지라도, 단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아야 하오."
"변법에 우호적인 나라를 택해야겠지요. 우리의 대의를 지지해줄 수 있는 나라가 어디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영국, 일본, 한국 정도입니다."
"그럼 세 사람이 각자 삼국 공사관으로 피신하도록 합시다."
강유위는 영국 공사관, 양계초는 일본 공사관, 황준헌은 한국 공사관을 택했다.
"홍 공! 부디 나를 도와주십시오."
"일단 안으로 어서 들어오십시오."
홍영식은 자금성에 들려오는 정변 소식과, 급하게 찾아온 황준헌의 몰골을 보고 변법의 실패를 직감했다.
황제 이선은 변법에 대해 중립적 위치를 취하라고 했으나, 만약 변법이 실패해 고위급 망명객이 발생할 경우 받아들이라는 밀명을 내린 상황이었다.
황준헌은 홍영식 외에도 총리 김홍집과도 친분이 있었고, 오랜 외교관 활동으로 서양과 일본에서도 높이 평가하는 인사라 망명은 허가되었다.
강유위 등은 공사관으로 조속히 피신한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저항을 선택한 담사동 등의 운명은 비참했다.
이들은 북경을 빠져나와 천진으로 향하던 중에 동복상(董福祥)의 감군(甘軍)에 의해 체포되었다.
"태후의 명을 받들어 역적 담사동과 그 일당을 체포하라!"
좌종당과 더불어 신강의 야쿠브 벡 반란을 진압한 회족 장군 동복상의 감군은 향용 중에서도 정예로 인정되었다.
감군은 1897년 무위후군(武衛後軍)으로 재편되었고, 북경 인근에 주둔했다.
대개 이슬람을 믿는 회족 출신인 감군은 서양, 특히 기독교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고, 동복상은 서태후에 의해 포섭되었다.
동복상은 감군을 동원해 서태후의 정변을 외부에서 도왔고, 북경은 완전히 서태후에 의해 장악되었다.
지방 총독 중에 아무도 광서제를 위해 병력을 동원하지 않았고, 침묵을 지켰다. 특히 직례총독 장지동의 침묵이 결정적이었다.
오직 호광총독 진보잠만이 정변 소식을 듣고 광서제 유폐의 위법성을 따졌으나, 그가 머무는 무한은 북경에서 너무나 멀었다. 서태후는 즉각 진보잠의 파직을 명령했다.
체포된 담사동, 유광제, 양예, 임욱, 양심수, 강유전 6인은 반역죄를 선고받고 북경 저자에서 공개적으로 참수되었다. 각국 공사관이 변법에 따른 새 사법제도로 공정한 재판을 받도록 요청했지만, 이미 변법을 폐기한 서태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 담사동이 오늘 흘린 피가 중국의 변혁에 기여할 것이다! 동포들이여, 내가 흘린 피를 잊지 말라!"
담사동 등 6인은 담담하게 최후를 맞이하니, 이들을 동정하는 여론은 ‘육군자(六君子)’라고 부르며 애도했다.
공사관 구역으로 탈출한 변법파 지도부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강유위는 영국령 홍콩으로, 양계초는 나가사키로, 황준헌은 인천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들은 각국 공사관의 보호를 받으며 조국을 떠났다.
"동지들의 희생은 결코 잊지 않겠소."
"반드시 힘을 길러 돌아오리라."
세 번째 수렴청정을 재개한 서태후는 변법을 모조리 폐기하고, 변법에 동조한 인사들은 온건파라 할지라도 파직하여 쫓아냈다.
조정은 서태후를 따르는 만주족과 수구파 인사들로 가득 찼다. 이들은 변법에 따른 반동으로 더욱 더 수구적이고, 서양과 근대화에 대한 반감과 증오로 가득했다.
이로써 청나라를 위로부터 개혁하겠다는 무술변법, 광서신정은 1년 5개월, 503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진보적 인사들은 이를 ‘오백일 유신’, 청나라를 다시 살릴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로 아쉬워했다.
하지만 청나라를 개혁하겠다는 시도는 오히려 더 큰 분열과 증오로 귀결되었다.
이제 청나라의 쇠망은 막을 길이 없었다.
더 큰 폭발이, 예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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