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270화 (269/812)

270화 만인대(萬人隊)

북방에 이상을 둔 건 동학과 농민들만이 아니었다. 새로 형성되는 민족주의자, 신흥 자본가 계층도 신영토이자 옛 고구려의 ‘고토(古土)’인 만주에 관심을 보였다.

개성상인 공응규(孔應奎)·공성학(孔聖學) 부자가 가장 대표적이었다.

전통적으로 인삼 재배와 무역에 종사해 왔던 송상 곡부(曲阜) 공씨 가문은, 개화당 정부의 식산흥업 정책에 따라 공응규의 대에 이르러 크게 번창했다.

공응규는 인삼 품종 개량, 경작 방법 개선 등 인삼 경영 방법의 혁신을 주도하였다. 그는 송상이 근대적으로 전환한 고려삼업회사(高麗蔘業會社)를 주도했고, 사업 영역을 넓혀가며 한국 토착 자본을 대표하는 자본가로 성장했다.

곡부 공씨는 상인이면서 공자의 후예라는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 이름이 성학(聖學)이라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공성학은 부친의 뜻대로 개성 출신 한문학자 김택영(金澤榮)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성균관 교수, 중추원 서기관, 내각기록국 사적과장, 학부 국사편찬위원 등을 역임한 김택영은 한문학자이자 역사학자였다. 즉 정부가 새로이 추진하는 ‘국사(國史)’의 편찬위원이었다.

그는 고려의 후예인 개성 사람이라는데 유민(遺民) 의식과 자부심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개화 이후 역사 해석의 자유가 주어지면서 고려는 이제 더 이상 망한 나라가 아니라, 민족사의 중요한 선조로 존중받았다.

김택영은 대한제국은 고구려의 정통을 계승한 고려의 후계자라는 역사관을 전파했다.

이는 기자조선으로부터 비롯되어 중화를 계승했다는, 기존 유림의 소중화 의식과는 명백히 대치되는 것이었다.

"고조선, 고구려, 고려, 조선, 대한국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바로 우리 역사의 정통이라 할 수 있다. 실로 작금의 대한국은 개국 초기의 고려와 같다. 북진 정책을 추진한 고려를 본받아 조상의 고토를 계승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스승의 역사관에 영향을 받게 된 공성학은, 부친의 지원을 받아 당대에는 드물게 유럽 여행을 다녀온 후, 더욱더 강한 민족주의자가 되어 돌아왔다.

"아버님, 대한국과 우리 가문의 미래는 북방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이윤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민족의 이익에 기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북방을 개척하는 데 동참하고 싶습니다."

"나는 진작부터 성은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성상께서 문명개화와 식산흥업을 추진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가문이 어찌 오늘날 이런 부를 누릴 수 있었겠느냐? 네 뜻이 그렇다면 해 보거라."

공씨 부자의 결단은 식산흥업의 수혜자로서 국가에 갖는 충성심, 공자의 후예로서 공익이 사익을 앞질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무감, 고려의 후예라는 자부심, 문명개화와 민족주의의 세례를 받은 신지식인이라는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공응규 부자는 자본을 투자해 북방 개발과 이주 정책을 적극 후원했다.

신영토의 광산과 탄광 개발에 투자하고, 사비를 들여 농민들의 이주와 황무지 개간을 지원했다.

"대한의 갑부들이여, 금후는 될 수 있는 대로 북방에 투자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이윤도 얻을 수 있지만, 우리 민족의 대의가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동포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웁시다."

"우리는 지금부터 북방으로 가는 것을, 우리 선조가 사는 고토로 돌아간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농민들이 살기 어려워 방랑의 길로 북방에 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던 땅을 도로 찾아간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공응규 부자는 이윤의 관점이 아닌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동료 자본가들을 설득했다.

송상은 진작부터 이선과 특별한 관계가 있었고, 개화당 정부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송상을 비롯한 신흥 자본가 계급은 북방 진출에 뜨거운 관심을 보였고, 적잖은 돈을 희사(喜捨)했다.

마치 유럽의 부르주아지가 더 제국주의적 열망이 강한 것과 흡사했다.

북방 진출을 향해 국가, 자본, 종교, 사상, 농민이 결합하기 시작했다.

한인의 간도 이주는 한참 전부터 이뤄졌으나, 요동 이주는 승전 이후인 1896년부터 시작되었다.

상대적으로 더뎠던 요동 이주는 1899년 동학교도의 집단 이주, 이른바 ‘기해(己亥) 사민’으로 가속화됐다.

기존에는 가까운 서북 지방의 주민들이 이주했지만, 경부선과 경의선의 존재는 먼 지방의 농민들도 이주하는 데 용이했다.

하지만 농민의 북방 이주와 정착, 개척을 관리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삼남에서 이주한 동학교도는 5만 호가 넘었고, 남녀노소 포함해서 30만 명에 육박했다.

이들은 기존 동학 조직을 활용한 덕에 비교적 수월하게 정착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대도주(大道主) 손병희를 최고 지도자로, 지역별로 도주(道主)와 접주(接主)가 교도를 이끌며 정착지를 이끌었다.

이주와 황무지 분배, 개척과 정착이 얼추 완료되니, 요동에 삼남 지방에 작은 형태로 그대로 이식된 것 같았다.

특히 농민 인구가 많고, 동학이 강세를 보였던 호남 지방의 농민들이 대거 요동에 정착했다.

"우덜 살던 전라도만은 못해도, 땅이 생각보다 영 솔찬허시."

"토질이 괜찮지요. 개간하면 호남 못지않게 곡창 지대로 성장할 수 있소. 약속대로 개간 후 3년간은 면세요. 이후 일정 기간 지대(地代)를 나라에 성실히 납부하면, 관에서 불하하여 개인 소유의 토지를 가질 수 있소."

"그럼 시방 우덜이 땅 주인이 될 수 있다, 그 말이여?"

"그렇소."

"와아아!"

"아따, 다덜 선상님 말씀 들었제? 싸게싸게덜 일하더라고."

원칙적으로 신영토의 토지는 국유지였지만, 향후 이주 농민들에게 분배할 뜻을 밝혔다.

양반과 지주의 압박을 받지 않고, 자신 소유의 토지를 가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농민들에게 굉장한 노동 의욕을 불어 넣었다.

여기에 인내천의 후천개벽 세상을 만들겠다는 종교적 이상이 더해지니, 북방에 이상향을 건설하겠다는 동학의 열의는 더욱 강해졌다.

"우리가 북방에 정착하게 된 이상, 화인과 만인은 우리와 터전을 공유하는 중요한 이웃이다. 그들에게도 동학의 믿음을 함께하도록 하자."

손병희와 동학 교단은 이민족에게도 동학을 전파하고자 했다.

손병희는 동학의 교리를 한 단어, 세 글자로 요약했다. 즉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한울(하늘)’이라는 교리였다.

만인평등사상을 내세운 인내천은 계급과 민족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주장이었다.

"인내천, 사람은 곧 하늘이오. 모든 사람은 한울님 앞에서 평등하오. 한울님 앞에서는 모든 귀천, 빈부, 남녀, 노소, 종족의 차별 같은 건 없소."

전통적인 유교의 지배력이 현저히 약해지고,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와 서양 문명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옛 청국인들에게 ‘동(東)’을 내세운 동학의 인내천은 설득력을 주었다.

"우리 동양인들은 모두 형제요. 서양 제국주의자들은 인도와 안남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분할하고, 이 만주까지 넘보고 있소. 서양인들은 동양을 제멋대로 짓밟고 있소. 우리 동양인이 단결하여 저들 서양을 몰아내야 합니다!"

북방에는 동학만이 아니라 아시아주의도 팽배했다.

동학의 인내천과 평등사상에, 아시아가 단결해야 한다는 아시아주의가 기묘한 형태로 결합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저 산동의 무지몽매한 의화단의 무리처럼 무작정 서양을 공격했다가는,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일으키고야 말 것이오. 서양의 방식을 익혀 힘을 키워야 하오. 문명개화의 선두에 선 대한국과 일본국이 만청을 무찌른 것처럼, 언젠가 서양으로부터 아시아의 독립을 지켜 낼 것이오. 그러니 대한국을 중심으로 형제들이 단결해야 합니다!"

무술변법의 실패와 의화단의 확산은 청나라의 극심한 혼란을 불러일으켰고, 그 여파는 만주에게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광서신정이 진행되는 동안 변법파의 청 조정은 대한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동삼성(東三省), 즉 만주의 행정적 재편을 꾀했다.

그동안 방치나 다름없었던 만주의 한청 국경 지대에 군현을 설치하고, 군대를 배치하고, 주민의 이주를 촉진시켰다.

하지만 미비하기 짝이 없는 변법파 조정의 지방 장악력은 포고령만 계속 떨어질 뿐, 실질적인 집행은 제대로 이뤄지는 게 없었다.

딱 하나 이뤄지는 게 있다면, 주민의 이주였다. 다만 이는 계획된 이주가 아니라 무분별한 이주였다.

1898년 황하 대수해의 여파로, 산동에는 재해민이 넘쳐흘렸다. 이들 중 적잖은 수가 의화단이나 도적으로 빠져들었고, 훨씬 많은 수가 이주를 결심했다.

산동에서 바다만 건너면 되는 요동은 가장 손쉬운 이주지였다.

무술변법이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면서, 의화단은 갈수록 기승을 부렸다.

혼란을 피해 청국령 요동과 봉천으로 이주민이 줄을 이었다. 갑자기 이주민이 폭증하자 봉천 당국은 제대로 손을 쓰지도 못했다.

"조선이 점령하고 있는 요동으로 가면 누구나 다 평등한 대접을 받는다더라."

"맞아, 땅도 나눠 준다던데."

"그럼 갑시다!"

소문을 들은 난민의 행렬이 한국령 요동으로 이어졌다. 특히 국경이 북쪽으로 돌출되어 있고, 평야 지대인 안산 일대에 난민이 몰렸다. 안산의 전략적 중요성을 중시하는 대한제국군은 단호하게 막았다.

"대한의 허가를 받지 않은 자의 입국은 허용할 수 없다! 떠나지 않으면 무력으로 해산시키고 추방하겠다!"

"애초에 여긴 중국 땅 아니었나? 우리가 들어가는 게 뭐가 잘못되었단 말이냐!"

"못 간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다!"

난민들이 계속 국경으로 몰려들자, 요동 관리사 권동진은 단호한 결단을 내렸다.

"말로 해서 안 된다면, 무력으로 추방하는 수밖에. 진위 4여단, 불법 입국자를 모조리 추방하라!"

"옛!"

4여단 병사들이 국경일선을 돌아다니며 난민들을 국경 너머로 몰아냈다. 난민들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무장한 정예병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난민들은 군대에 쫓겨 요양과 봉천, 영구 일대로 흩어졌다.

1900년이 되자, 한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서태후의 수구파 조정은 변법파가 추진한 서구화를 넘어 서양 그 자체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고, 5년 전에 전쟁을 치른 한국과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만주에 국경을 접하고 있는 대한제국은 청나라 입장에서 더욱 거슬리는 존재였다.

무엇보다 기분이 나쁜 건, ‘대한제국’이 수백 년간 청나라의 제후국이었다는 점이었다.

"대한제국은 무슨, 건방진 조선놈들. 대청의 속국이었던 놈들이, 양이와 일본을 등에 업고 대청을 모욕하고 있다."

"제일 먼저 손봐 줘야 할 놈들이다."

청나라의 반서양감정은 반한감정으로 이어졌다. 국경에서 분쟁이 지속되면서 불만은 극에 달했다.

하지만 제 코가 석자인 청나라가 한국을 상대로 뭘 어쩔 수는 없었다.

오히려 한국 입장에서 문제가 되는 건, 청나라의 지방 장악력이 갈수록 떨어지면서 만주의 혼란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봉천 일대에 인구가 계속 몰리면서, 온갖 인파들, 배외주의자와 의화단 추종자도 섞여 들었다.

봉천의 혼란은 청국 지방관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가속화되었다.

"도처에 마적이고, 산적이오. 이놈들에게 국경 같은 건 안중에도 없지."

"정규군의 동원과 진압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원래 만주에는 마적이 들끓었지만, 그동안 치안 안정을 위한 대한제국군의 노력으로 한국 영내에서는 거의 사라졌다.

마적들 입장에서도 인구가 더 많으면서도 치안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청국 주민들을 약탈하는 게 더 손쉬웠다.

하지만 만주의 혼란이 지속되면서, 말을 가진 자들은 마적이, 말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산적이 되었다.

이들에게 한청 국경에 관한 존중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국경을 넘어 치고 빠지는 마적들을 상대로, 정규군이 청국 영내로 진입하는 건 매번 당국과 협의해야 하는데, 이는 주둔군 입장에서 보통 열이 받는 일이 아니었다.

"진위대가 청국 영내로 진입하는 건 외교적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부의 우려가 있소."

"하지만 성상께서 명하신 바와 같이, 민병대라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렇소. 계획대로 민병대의 규모를 증대하고, 무기를 나눠 줍시다."

대반격을 위해 명분을 차분히 축적하고 있는 이선은, 한국군의 청국 영토 진입을 불허했다.

대신 민병대의 모집과 무장을 허용했다.

"진위대는 결코 청국령을 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전쟁에 준하는 상황이다. 더 결정적인 기회가 올 때까지, 짐이 명령할 때까지 진위대는 인내하라."

"북방에는 국민개병의 원칙을 광범위하게 적용한다. 북방 거주민을 대상으로, 민병대의 증대를 명한다."

마적들의 습격을 막기 위해, 북방에는 마을별로 자발적으로 무장한 민병대가 있었다.

이들을 기반으로, 민병대를 대규모로 확충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동포들이여! 우리의 새로운 터전이 도적들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무장하자!"

"우리 땅을 우리 손으로 지켜 내자!"

북방 개척위원 전봉준은 동학 조직을 중심으로, 민병대의 규모를 대규모 확충했다.

삼국전쟁 당시 부사관 교육을 받은 바 있는 전봉준은, 특별한 군 경력이 없음에도 의외로 군대 조직에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입증했다.

전봉준처럼 군사 교육을 받은 바 있거나, 군대 경험이 있는 예비군들이 민병대의 지휘관 역할을 맡았다.

모신나강 소총으로 무장한 정규군만큼은 아니어도, 2선급 부대에 나눠 주는 베르단 소총이 민병대에게 공여되었다.

북방 영토에서 확충된 민병대의 수는 대략 1만에 육박했다.

"이들의 이름을 만인대라 명명하고, 조국 수호의 첨병으로 삼는다."

1900년 초, 북방 민병대, 이른바 만인대(萬人隊)가 정식으로 발족했다.

- 27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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