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271화 (270/812)

271화 대변혁의 해

1900년, 광무 4년, 경자년.

이 해는 19세기의 마지막 해이자, 20세기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세기말의 분위기를 음울하게 상징하듯, 1900년이 되자 중국의 혼란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산동에서 시작된 의화단 운동은, 황하를 넘어 하북을 지나 북경 인근의 직례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재해와 폭동을 피해 산동에서 만주로 이주한 난민들은 중국의 혼란상을 그대로 전했고,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점차 청조의 행정과 치안은 통제 불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부청멸양(扶淸滅洋)! 청조를 도와 양이(洋夷)를 멸하자!"

"살양멸교(殺洋滅敎)! 중국에 있는 모든 양이를 죽이고, 기독교를 멸하자!"

"의화단이 중국을 구원할 것이다!"

이 무렵 대한제국령 요동에도, 기묘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다만 소문의 내용이 달랐다.

"올해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지 1900년이 되는 해이다. 바야흐로 거대한 심판의 날이 올 것이니, 우리 인간들은 주님의 뜻을 참으로 알 길이 없도다. 형제자매들이여, 심판의 날을 대비해 주님의 품으로 오라!"

의화단의 반기독교 공세에 위기감을 느낀 일부 기독교 선교사들이 서력 1900년을 기해 대대적인 전도를 개시하자, 동학이 맞불을 놓았다.`

"대교조께서 한울님으로부터 깨달음을 얻으신 해가 경신년(1860)으로, 이 해가 한울님의 덕을 세상에 편 포덕(布德) 원년이니 천간(天干)이 네 번 돌았다.

대교조께서 순교하신 해가 갑자년(1864)으로, 한울님의 세상으로 돌아가시니 지지(地支)가 세 번 돌았다. 대교조께서 한울님의 덕을 세상에 편 천간의 경(庚)과 한울님께 돌아가신 자(子)가 일치하니, 포덕 41년은 후천개벽의 인내천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초대 교조 최제우가 깨달음을 얻은 지 40년, 순교한 지 36년 되는 해에 변혁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개화 이후에도 전통적인 간지(干支)를 사용하는 농민들에게 이는 무언가 있어 보였다.

3대 교조 손병희가 동학을 근대적 종교로 일신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신비주의적 경향이 강했던 동학의 환경은 소문에 쉽게 현혹되었다.

"대도주님, 정말입니까? 참으로 경자년에 후천개벽의 인내천 세상이 도래합니까?"

"수십, 수백만의 우리 교도들이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염원하고 있습니다. 대도주님, 가르침을 주십시오!"

대도주 손병희는 당황했다. 이는 교단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신비주의 수비학(數?學, numerology)에 더 가까웠다. 교단 지도부 중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퍼트린 소문이, 동학 신자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를 무시했다가는 종교적 염원이 어디로 튈지 몰랐다. 정치적 감각에 기민한 손병희는, 무시하지 않고 동학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그렇소. 우리가 진실로 함께 노력하면, 마침내 후천개벽의 인내천 세상이 올 것이오. 청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난리는, 어지럽고 낡은 세상이 무너지는 과정이오! 바야흐로 포덕 41년, 경자년에 세상이 크게 바뀌리라!"

손병희의 인정은 동학교도들은 크게 고무시켰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아무튼 올해 후천개벽의 인내천 세상이 온다는 거지?"

"대도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니 틀림없네."

"근래 청국의 혼란과 의화단이라는 무리의 난동은, 낡은 세상이 무너지는 과정이라더군."

"과연 그렇군!"

중국에서 들려오는 온갖 흉흉한 소문은, 낡은 구체제가 붕괴하고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는 믿음을 강화시켰다.

"지금으로부터 꼭 한 갑자 전, 경자년에 바다 건너에서 온 영국군이 청국을 공격하여 무찔렀다. 이 해로부터 청국의 몰락이 시작되었으니, 올해 청국은 멸망할 것이다."

청나라의 몰락이 시작된 1840년 아편전쟁으로부터 꼭 60년이 지나, 올해 멸망하리라는 소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네 갑자 전, 경자년에 효종 대왕께서는 북벌을 실행하려고 하셨다. 하지만 그 전해에 갑작스럽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는 효종 대왕의 뜻을 계승하시었으니, 바야흐로 북벌을 완수하여 심양을 정복해 대업을 이루어야 하지 않겠는가!"

1659년에 죽은 효종이, 1660년에 북벌을 실시하려다 실패하고 죽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조청일 전쟁을 전후하여 효종이 북벌의 선구자로 치장됨에 따라, 민간에서는 머나먼 선대왕처럼 여겨졌던 효종에 대한 소문이 돌아다녔다.

심지어 한을 품고 죽은 효종의 혼이 이선으로 환생하여 북벌의 뜻을 이루고자 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야말로 소문은 소문을 낳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황이었다.

"이런 소문이 돈다는 건, 결국 민심의 반영 아니겠소? 올해가 범상치 않은 해가 된다는 의미 같은데, 다들 어찌 생각하십니까?"

요동 관리사 권동진 참장은 전봉준, 손병희, 공성학을 관사로 초청해 의견을 물었다.

"소문에 일희일비할 수야 없겠으나, 근래 들어 소문에 주민의 동요가 일어나고 있는 건 맞습니다."

"민심은 천심이라 할 수 있으니, 관(官)에서도 외면할 수야 없겠군요."

"아무래도 소문과 관이 관계가 있나 봅니다."

"그럴 리가요. 국가의 녹을 먹는 자로서, 민심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의미로 한 말이외다. 성상께서도 늘 민심을 어루만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농민의 대변인이라는 전 위원을 이 요동으로 보낸 것 아닙니까."

전봉준의 의문에 권동진이 웃음을 흘렸다. 권동진은 시선을 손병희에게 돌렸다.

"애초에 소문이 처음 시작된 것도 동학이었지요."

"선후를 따지자면, 중국에서 의화단의 소문을 만주로 몰고 왔고, 이에 대응해서 기독교가 소문을 냈으며, 이에 대응해서 동학교도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났다고 봐야지요."

"선후가 중요한 게 아니외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현시점에서 무얼 믿고 있느냐지요."

"소문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권동진은 다시 전봉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 위원, 만인대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장군과 손 선생의 도움으로 충실히 조직했습니다. 장군께서 무기와 각종 편의를 지원해줬고, 동학의 조직을 기반으로 부대를 편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하, 단숨에 1만 가까운 인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건 과연 손 선생의 공이오, 이를 조직하여 부대로 만들 수 있었던 건 전 위원의 공이지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권동진, 전봉준, 손병희는 서로에게 공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다만 만인대도 수많은 사람이 모여든 일인 이상, 비용 문제가 만만치 않습니다."

"만인대는 민병대이니만큼, 안 쓰는 무기야 지원해 줄 수야 있지만, 자금까지 군부에서 조달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장군,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생이 돕겠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인데, 가진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겠습니까? 우리 회사에서 나서겠습니다."

한만산업척식회사(韓滿産業拓殖會社)를 이끄는 공성학이 재빨리 받았다.

"고맙소! 과연 애국 자본가들의 회사답소."

"과찬이십니다.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반드시 충성으로 보답하라는 게, 제 부친의 가르침이십니다."

"역시. 대한의 갑부들이 모두 공 사장 같으면, 이 나라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소."

후발 국가에서 흔히 보이는 정상유착(政商癒着), 관치경제의 일종이었지만, 공성학은 진심으로 ‘만주 개척’에 국가와 민족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 믿었다.

나이는 20대 초반에 불과하지만, 부친을 대리해 북방 개척운동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고 있는 공성학은 요동에서 발언권이 상당했다.

"저 마적의 무리가 쳐들어오면, 우리 진위대는 격퇴할 수야 있지만 국경을 넘기는 어렵소. 내 부하들은 당장이라도 요절을 내자고 성화지만,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정부의 훈령을 상기시키는 수밖에. 우리 입장에선 손발을 묶어 놓고 싸우는 기분이나 어쩔 수 없소."

"청국에선 협상에 응하지 않습니까?"

"청 중앙 조정은 말할 것도 없고, 봉천이든 길림 당국이든 자국의 치안은 알아서 하겠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습니다. 청국은 틀렸어요. 그나마 황제가 통치할 때는 말이라도 통했는데, 태후가 재집권한 이후로는 아예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고 하니 원."

"진정 청조는 천명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신민의 안위를 지키기는커녕, 난민(亂民)조차 제압하지 못해 타국에까지 폐를 끼치다니요."

"진위대도 저들을 혼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하지만 정규군이 나서면 본격적인 전쟁이니 참을 수밖에요. 물론 민병대인 만인대의 입장은 다르겠지만. 생명과 재산을 침해하는 도적들을 내버려 둘 수야 없는 노릇 아닙니까?"

전봉준은 현재 만주에 돌고 있는 소문, 중국의 위기, 대한제국 본토의 움직임,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권동진의 암시에서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국경을 넘어 만주의 도적을 토벌하라는 말씀이시군요."

"아유, 아닙니다, 아니에요. 상황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전봉준의 말에 권동진은 씩 웃음을 흘리며 말을 돌렸다.

"만인대 내에서도 희망하는 자가 많습니다. 지휘관들과 논의해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시지요."

전봉준과 손병희는, 동학 지도부이자 만인대의 지휘관에 속하는 김덕명(金德明), 김기범(金箕範), 손화중(孫華仲), 성두환(成斗煥), 오시영(吳時泳), 최경선(崔景善) 등을 불러들여 회견했다.

이들은 손병희의 지시를 받는 동학 지도부이자, 동시에 전봉준과 함께 농민협회 활동을 했던 이들이었다.

"아무래도 때가 온 것 같소이다."

"마침내 만주에 후천개벽 인내천의 세상을 만들 때로군요."

"군부에서도 은근히 우리가 나서줬으면 하는 바람이더군."

"권동진의 독단입니까, 상부의 명령이겠습니까?"

"권동진이 요동 관리사라고는 하지만, 정부 입장에선 일개 참장에 불과하오. 혼자 멋대로 나댈 리가 있겠소?"

"근데 만약 문제가 생기면, 군부에서는 우리를 이용만 하고 버리려는 거 아닙니까?"

"정부 입장에선 동학을 잠재적 위험 분자로 여기고 있을 테니, 청군과 충돌해서 공멸하면 바라던 바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정부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소. 그들이 우리를 이용하려 한다면, 우리도 그들을 이용하면 되니까."

만인대와 동학에서는 이미 독자적인 만주 진격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다.

소문의 주체가 누가 되었든 간에, 이들은 소문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었고, 단지 대한제국 정부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군부를 대표하는 권동진이 암묵적인 승인을 표했으니, 이제 행동에 나서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개화당 정부는 신뢰하기 어렵지만, 황제 폐하의 성심은 받들어야 하오. 성상께서는 양안에 이어 토지 개혁을 희망하고 계시지만, 성상의 손발이 되어야 할 개화당 관료들조차 반대하고 있으니 단지 때를 가늠하고 계실 뿐이오."

"그때라 하면 역시……."

"모두 짐작하듯, 독립전쟁과 같은 승전을 다시 한번 이루는 거요. 우리가 이 만주에서, 성상께 힘이 되어드려야 하오!"

전봉준은 황제에 대한 굳건한 신뢰와 충성심을 드러냈다.

그는 개척위원으로 임명되어 만주로 떠나기 전에, 이선이 암시했던 말을 뇌리에서 잊지 않고 있었다.

- 모든 국민이 만족할 만한 대외 원정의 승리를 거둔다면, 토지 개혁을 진행할 원동력을 얻게 될 거요.

청국의 대혼란은, 곧 황제가 말한 ‘대외 원정’이 가능하리라는 예측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대한제국군이 별다른 명분 없이 당장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상께서 고민하시는 바도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폭탄의 심지에 불을 붙여 버리겠다!’

"우리가 승리하면, 성상과 정부는 영광을 얻을 것이요, 농민은 토지를 얻게 될 것이오. 잃을 것은 오직 낡은 세상뿐! 만주를 13도의 토지 개혁을 위한 전진 기지로 삼읍시다."

"바라던 바이외다!"

"각 부대에 명령을 기다리게 하시오. 음력 삼월 초하루, 양력 3월 22일에 진격을 개시하겠소."

"오오오!"

"후천개벽 인내천의 세상을 위해!"

"토지개혁 경자유전의 세상을 위해!"

전봉준과 손병희, 만인대 지휘부와 동학 지도부는 굳건히 뜻을 따지며 악수를 나누었다.

참으로 기묘한 동행이었다.

권동진으로 대표되는 군부, 공성학으로 대표되는 자본가, 손병희로 대표되는 동학교단, 전봉준으로 대표되는 농민운동이 동상이몽을 갖고 손을 잡았다.

군부는 영토의 확보를 위해, 자본은 만주의 자원을 얻기 위해, 동학은 종교적 이상을 위해, 농민운동은 토지 개혁을 위해 단결한 셈이었다.

전봉준은 만인대를 향해 동원령을 내렸다. 약 1만에 달하는 만인대가 집결지인 봉황성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만인대장에 전봉준, 좌우영장에 손화중과 김기범, 총참모장에 김덕명, 부참모장에 오시영, 선봉장에 최경선."

만인대장으로 추대된 전봉준은 5대 강령을 발표했다.

하나!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약탈하지 말라.

하나!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

하나! 출신을 차별하지 아니하고, 청국인도 한울님의 자식이자 우리의 형제로 대우하라.

하나! 만청(滿淸)을 축출하고 만주에 농민이 주인이 되는 후천개벽 인내천의 세상을 만든다.

하나! 심양으로 진격하여 백성의 고혈을 짜는 만주 권귀(權貴)를 멸한다."

강령을 발표한 전봉준은 소총 한 자루를 높이 들고, 하늘을 향해 쏘았다.

타앙!

만인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먼저 길림을 제압할 것이다! 만인대, 진격!"

"와아아아!"

"제세안민!"

"진멸권귀!"

"토지분배!"

"경자유전!"

"후천개벽!"

"인내천! 사람이 곧 하늘이다!"

만인대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농민전쟁의 첫 방아쇠가 당겨졌다.

- 27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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