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혁명의 대의
전봉준을 찾아온 건, 관보(官報) 제국익문사의 종군 기자 이회영이었다.
이회영이 만인대에 합류한 건 물론 익문사의 명령이었다. 홍콩 및 필리핀 통신원 역할을 마치고 돌아와 황성에서 대기 중이던 이회영을 익문사 독리 김옥균이 불렀다.
"소위 만인대가 군사 작전을 개시했소. 이 참령이 만주로 가 줘야겠소."
"만주 담당 통신원은 따로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참령이 전시 상황에서 가장 유능한 통신원이라는 걸 입증했으니까. 필리핀 전쟁 취재 덕에 종군 기자로서 꽤 명성을 떨쳤으니, 종군 기자로 간다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물론 만인대의 동태를 살피고, 보고하는 거지. 전(前) 중추원 의관 전봉준이 대한국에 충성스럽고, 고결한 인품을 가졌다는 건 정부도 잘 알고 있소. 성상께서도 그를 신뢰하시지. 하지만 군대, 그것도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민병대를 지휘하다 보면 어디로 튈지 모를 일이오."
"전봉준의 동태를 주로 파악하면 되겠습니까?"
"가능하면 만인대 지휘부 모두. 전봉준이나 동학 교주 손병희는 그렇다 쳐도, 김기범이나 손화중, 최경선 같은 자들은 하나같이 극렬한 급진주의자들이오. 정부는 이 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길 원하오. 만인대 내부에 이미 군부 정보국과 익문사에서 보낸 요원들이 있소. 그들이 참령에게 협조할 거요. 이상."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회영은 만인대에 합류해, 표면상 관립통신사인 제국익문사의 종군 기자로 활동했다.
만인대는 이회영을 참전 경험이 있는, 예비역 장교 출신의 종군 기자로만 알고 있었다. 참전 용사인 덕분인지, 아니면 관보의 기자인지는 몰라도 만인대는 다른 기자들보다 이회영에게 우호적으로 대했다.
기자 회견이라는 명목으로 전봉준과 만인대 지휘부와 대화를 나눈 것도 수차례였다.
전봉준은 이회영의 풍모가 범상치 않다는 것은 짐작했으나, 황제 직속의 비밀 정보원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 선생, 어인 일입니까? 오늘은 기자 회견 계획이 없는데."
"황성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제게 소개를 부탁해서요."
"그게 누구시길래 선생께 소개를?"
"하하, 제 친아우입니다."
이회영이 소개한 인물은, 바로 그의 동생이자 총리대신 김홍집의 사위인 이시영이었다.
"외무부 교섭국장 이시영입니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내각을 대리해 이곳에 왔습니다."
"먼 길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성상의 옥체는 강녕하십니까?"
"강녕하십니다. 대황제께서 전 공께 밀서를 내리셨습니다. 전 중추원 의관 전봉준은 황명을 받으라."
황명이라는 말에, 전봉준은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이시영은 전봉준에게 황제의 밀서를 전달했다. 전봉준은 조심스럽게 밀서를 받은 후, 내용을 읽었다.
밀서의 내용은 심상치 않았으나, 전봉준은 내색하지 않았다.
"성상의 깊으신 뜻을 잘 알겠습니다. 신하된 자로서 성상께 누를 끼쳐 드렸으니, 죄스런 마음을 누를 수가 없습니다. 대죄하여 처벌을 기다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대죄라니, 과한 처사입니다. 성상께서는 전 공의 충심을 잘 알고 계십니다. 황명에 응답을 하면 충분합니다."
전봉준은 고개를 숙이며 대죄(待罪)를 청했으나, 바로 가부(可否)를 결정하지 않았다.
"하오나 제가 만인대의 수장으로 추대된 이상, 그들의 여망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니, 만인대와 상의한 후에 답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리하시지요. 당분간 머물며 답을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국장 영감을 편히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밖으로 나온 이시영은 오랜만에 재회한 형과 회포를 풀었다. 이회영은 자신의 정체를 가족들에게도 숨기고 있었으므로, 그들도 ‘통신원’으로만 알고 있었다. 외무부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이시영만이, 넷째 형이 은밀히 나랏일을 한다는 걸 미루어 짐작했다.
"형님, 전봉준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빙장(聘丈)께서는 크게 우려하고 계십니다."
"총리 대감께선 그렇게 여길 만도 하시지. 전봉준은 국내에 있을 때부터 정부 시책에 계속 반기를 들고 있는 셈이니."
"정부의 우려와 달리, 민간에서는 녹두장군이 영웅이라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형님은 그간 봐 오셨으니 잘 아실 터지요. 어떤 위인입니까?"
"굉장히 유능하고 민심을 휘어잡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 급진주의자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군주와 나라에 반역할 위인은 아닐세. 그건 확신하고 있어. 성상께서 전봉준에게 무슨 명을 내리시든, 그는 결국 따를 걸세."
이회영은 전봉준에 대한 신뢰감을 표명했다.
그리고 그건 황성의 이선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 러시아 공사 마튜닌은 이선에게 알현을 요청하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폐하, 정녕 만인대와 대한제국 정부는 무관한 일입니까?"
"이미 각국에 설명한 바와 같이, 그렇소."
"돌이켜 보면, 폐하께서는 20년 전 연해주에서 만인대와 비슷한 고려인 의용군을 이끄셨지요. 그때도 마적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청국 국경을 넘었는데……."
마튜닌이 옛일을 상기시켰다. 이선이 고려대대를 편성할 당시, 마튜닌이 바로 우수리 국경위원으로 이에 협조했었다. 마튜닌의 말에는 만인대가 고려대대의 방법을 따라 하고 있으니, 이선의 조언을 듣고 움직이는 게 아니냐는 의혹 제기였다.
"공사, 그때 공사가 주었던 도움을 잊지 않고 있소.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르지요. 짐은 일국의 황제고, 귀국 황제 폐하와는 국가를 넘어선 우정을 맺고 있다고 생각하오. 짐은 대한과 러시아가 함께, 의화단으로 촉발된 동양의 위기를 해결하길 바라고 있소. 짐이 귀국을 속일 이유가 있겠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흑룡강과 길림에는 동청철도가 지나가고, 봉천에는 남만주 지선(支線)이 지나갑니다. 러시아가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과 비용을 들였는지 잘 아실 겁니다. 이 지역에는 러시아의 특수한 이해관계가 있으니, 만인대가 과열되는 걸 막아야 합니다. 당장 의화단 무리가 만인대를 본받겠다고 설치고 있습니다."
이선이 강한 어조로 말하니, 마튜닌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설명했다.
러시아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동청철도 본선, 만주리-블라디보스토크로 이어지는 북만주 횡단 노선과 지선, 하얼빈-여순으로 이어지는 남만주 종단 노선을 부설했다.
철도 부설 지역에 정치적 혼란이 발생한다는 걸,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게 러시아의 입장이었다.
"짐이 어찌 모르겠소? 저들이 정부의 명령에 복종하게 만들기 위해 짐도 노력하고 있소."
"예, 알겠습니다."
"주러 공사를 통해 귀국 황제 폐하께 특별 서신을 보내 드렸으니, 짐의 진의를 잘 알아 주시리라 생각하오."
"폐하의 호의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이선은 주러 공사관을 통해 니콜라이 2세에게 만주 상황에 관해 설명하는 장문의 서한을 보낸 바 있었다. 차르도 이해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5월부터 의화단이 만주에서 준동을 시작했다. 의화단 사태가 확산된다면, 러시아와 한국은 삼국 조약 제6조에 의거해 만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의화단의 준동이 본격화되었으니, 이제 만인대는 활동을 접어야 했다.
이선은 전봉준이 자신의 뜻을 알아 주길 바랐다.
전봉준은 거듭 고민에 빠졌다.
4월과 5월의 지난 6주 동안, 만인대는 적잖은 성과를 거뒀다.
마적을 무찌르고, 심지어 청의 정규군도 격파했다.
여러 현과 수십만의 주민을 해방하고, 인내천 만민평등과 경자유전 토지 개혁의 세상이 온다고 선포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단하고 원점으로 돌아가자고 하면, 받아들이겠는가?’
만인대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터였다.
이들은 승리와 해방에 도취 되어 있었고, 마침내 그들의 세상이 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전봉준은 현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만인대의 지배 영역이 커질수록,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의 수가 늘어날수록, 통치는 더욱 힘들어졌다.
군사적 상황도 녹록지 않았다. 길림군의 연패를 방관하고 있던 봉천군도, 만인대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무순(抚顺) 방향으로 진격하자 강경하게 토벌 의사를 드러냈다. 무순의 지척은 심양이었다.
만인대는 심양을 정복해 북벌을 완수하겠다는 의사를 천명했지만, 봉천군은 길림군과 같은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병사의 수, 질적인 훈련도, 무기의 수준 모두 만인대를 압도했다.
어느덧 5월,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문제였다. 만인대는 절대다수가 농민이었다. 그리고 요동에서는 경자유전의 토지 분배가 실시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모두 자작농이었다.
가족들에게 경작을 맡기고 돌아왔다지만, 난생처음 자신 몫의 토지를 소유한 이들에게 수확을 기대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었다.
농번기가 다가오자, 농민군의 마음은 점점 자신 소유의 토지를 향해 마음이 돌아갔다. 이제 돌아가서 가족들과 농사를 짓고 싶었다. 농민들에게 아무리 만민평등 인내천의 가치가 소중해도, 자신의 토지보다 더 소중한 건 없었다.
‘이 원정은 길게 지속 못 해. 이대로 원정을 이어 나간다면 결국 패배한다. 하지만 완전히 이 성과를 물거품으로 돌릴 수도 없다.’
전봉준은 내심 결단을 내렸다. 그는 각지에 퍼져 있는 만인대 지휘부를 소집했다.
1주일 후, ‘해방지’ 각지에 주둔하던 만인대 지휘관들이 사령부가 있는 유하로 모였다. 요동에 머물고 있던 손병희와 동학 지도부도 모여들었다.
전봉준은 이 자리에서 황제의 밀서를 공개하고, 자신의 뜻을 밝혔다.
"성상께서는 우리의 업적을 치하하시고, 만인대가 외친 만민평등과 경자유전의 뜻을 국내 정책에 반영한다고 하시었소. 하지만 이 이상 원정을 이어 나가단, 청국은 물론이고 일본, 아라사 등 여러 국가와 마찰을 빚을 수가 있소. 이는 만인대 뿐만 아니라 대한국에도 누가 되는 일이오. 이에 나는 황명을 받들어, 만인대를 해산시키고 우리가 해방시킨 지역은 모두 성상께 바치고자 하오."
"그 무슨 소리요! 승리가 거듭되고 있고, 한국과 만주를 막론하고 농민들은 우리의 계속된 승리를 기대하고 있소. 그런데 만인대를 해산시키자니? 농사는 우리가 해 놓고, 그 과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정부가 누리게 하잔 말이오?"
당장 김기범이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급진적 농민운동가인 김기범은 해방지에서 가장 강경하게 토지 개혁을 실시하고 있었다.
"전 대장의 말씀이 옳소. 이미 만인대의 능력은 한계에 부딪혔소. 더욱이 나라의 뜻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건 곤란하오. 성상께서 해산을 명한 이상, 우리는 명을 따르는 게 맞소."
사전에 이시영과 회동한 손병희도 해산에 찬성 의사를 드러냈다. 사태가 통제 밖으로 벗어나는 건, 손병희와 동학 교단도 원치 않는 일이었다. 이들이 우선시하는 건 동학의 교세 증대였지, 급진적인 농민 혁명이 아니었다.
만인대 총수인 전봉준과 동학 교조인 손병희가 모두 해산 찬성 의사를 보이니, 지휘부 대부분이 대세를 따라 찬성에 손을 들었다.
김기범과 강경파는 화를 벌컥 내며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이미 대세를 정해 놓고 일을 꾸며 놓았군. 녹두, 자네에게 실망일세! 농민들을 끌어들여 인내천의 해방 세상을 열자고 해 놓고서, 인제 와서 배신을 해?"
"이보게 개남, 내 말 좀 들어 보게!"
전봉준과 김기범은 따로 자리를 마련해 앉았다.
전봉준은 분열을 원치 않았기에, 강경파의 우두머리인 김기범을 설득하길 원했다. 반대로 김기범은 전봉준이 마음을 달리 먹길 원했다.
전봉준과 김기범은 논쟁을 거듭했다.
"우리는 만주를 만민평등 경자유전의 세상을 실천할 장소로 정했네. 이는 대한국의 변화를 이끌기 위하기도 때문이지. 성상께서 우리의 뜻을 참고하겠다고 하신 이상, 해산하는 게 맞겠네. 현실적으로 원정을 계속 이끌 수 없다는 건 자네도 알지 않는가?"
"도대체 개화당 정부를 어떻게 믿고 우리의 성과를 모두 갖다 바친단 말인가. 자네도 참 답답하군. 결국 개화당 정부는 양반, 지주, 상인의 정권이란 말일세!"
"개화당은 그럴지 몰라도, 성상께선 다르시네!"
황제에 대한 변함없는 전봉준의 충심에, 김기범은 냉소를 지었다.
"흥! 황제는 자신이 선한 역할을 맡고, 악한 역할은 그저 개화당에게 맡길 뿐이야."
"개남, 말을 삼가게!"
"내가 왜 개남(開南)이란 아호를 정했는지 알잖나?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서였네. 만주에서 활동할 줄 알았다면 개북(開北)이라고 했겠지만. 이제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보이는데, 여기서 그만두자고?"
"우리의 혁명은 단숨에 이뤄지는 게 아니야. 만인대의 활동은 제1단계인 거지. 2단계는 국내에 만민평등과 토지 개혁을 완수하는 것일세."
"허, 도대체 황제가 자네에게 뭐라고 했길래 이러는 건가? 대신 자리라도 약속했나?"
"나를 뭘로 보는 겐가? 내가 그깟 지위를 탐내 이럴 것 같은가! 내겐 오직 대의, 혁명의 대의뿐이야! 그런데 그 대의는 황제와 대한국의 기치를 거부하고 살아남을 수가 없어!"
전봉준은 정색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기범도 지지 않았다.
"그래! 녹두장군에게는 혁명의 대의, 만인대의 충성과 수십만 인민의 지지가 있네. 그 수는 이제 수백, 수천만이 될 수 있어. 황제 눈치 보지 말고, 만주에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세. 중국과 일본의 혁명가들도 우리를 지지하지 않나. 만주에서 우리의 세상을 만들 수 있네!"
만인대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중국과 일본에서도 만인대에 동참하겠다는 자들이 찾아왔다.
중국의 반청(反淸) 혁명가들, 아시아주의를 내세우는 일본의 ‘대륙낭인’들도 만주로 향해 전봉준과 접촉했다. 대표적인 이가 현양사(玄洋社)의 우치다 료헤이(?田良平)였다.
전봉준은 만인대에 동참하겠다는 이들을 굳이 말리진 않았으나, 신뢰하는 건 아니었다.
"불가능한 이야기야. 설령 우리가 나라를 세우더라도, 대한, 청국, 일본, 아라사를 모두 적대하고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나. 우리의 대의를 세상에 크게 알렸으니, 다음 때를 기약해 보세. 개남이, 우리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지 않나? 만인대의 다수결로 결정된 사항에 반대하지 않았으면 하네."
전봉준의 뜻은 확고했다. 결국 김기범도 혼자 강경론을 내세우는 걸 포기하고, 전봉준의 뜻을 받아들였다.
1900년, 광무 4년 5월 23일.
만인대는 대한제국 정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할 뜻을 선언했다.
이선은 만인대의 복종 선언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로써 두 달간 한국과 만주를 뒤흔들었던 만인대의 모험은 끝이 났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더 거대한 폭풍이, 중국을 뒤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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