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279화 (278/812)

279화 세계 여론

1900년 여름, 파리.

파리에서는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가 4월 14일부터 진행 중이었다.

파리의 만국박람회는 이번이 네 번째로,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 박람회 이후 11년 만의 개최였다.

만국박람회는 그 자체로 각국의 국력과 산업력을 알리는 자리이지만, 서양 문명이 절정에 도달한 19세기의 ‘세기말(Fin de siecle)’, 유럽의 ‘좋은 시절(Belle Epoque)’을 상징하듯이 1900년 만국박람회는 전례가 없을 만큼 화려하고 성대했다.

19세기와 20세기가 교차하는 해에 열린 이 행사는 ‘백년전(百年展)’과 ‘현대전(現代展)’으로 나누어, ‘백년전’에서는 지난 100년간의 산업, 예술, 과학 기술을 회고하고 이를 통하여 ‘현대전’에서 20세기를 전망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지난 100년간의 진보에 이어 다가올 20세기는 얼마나 발전할지, 파리 만국박람회 전시장을 방문한 4,800만 명의 관람객들은 큰 기대를 품고 전시품을 살펴보았다.

대한제국도 1900년 만국박람회에 참석한 54개국 중 하나였다.

‘조선 왕국’으로 1889년 파리 박람회에 처음 참석해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리고, 1893년 시카고 박람회부터 본격적으로 국가관(Pavilion)을 설치해 조선에 관해 알렸다.

1900년 파리 박람회는 대한제국의 명의로 참석하는 첫 만국박람회이니만큼, 정부는 꽤 많은 공을 들였다.

"법국 파리 만국박람회 박물사무총재에 의친왕 이강, 부총재에 외무협판 민영환을 임명한다. 주법 공사 홍종우와 대한국에서 임명한 법국인들이 사무위원과 총무대원으로 현지에서 이들을 보좌한다."

1900년 1월, 이강과 민영환을 대표로 하는 30여 명의 대한제국 사절단이 파리로 떠났다.

사절단에는 한국에 우호적인 프랑스인들의 협조가 있었다.

주한 프랑스 공사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대한제국 파리 명예 총영사인 사업가 룰리나(C. Roulina), 주한 공사관 서기관을 지낸 동양학자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 황성 관립법어학교 교사이자 대한제국 정부 대리인 샤를 알레베크(Charles Aleveque), 주한 군사고문 비달(P. Vidal) 소령, 부유한 귀족으로 한국관의 후원자 역할을 맡은 미므렐 백작(Comte de Mimerel), 그레옹 남작(Baron de Greon) 등이었다.

프랑스 공화국 정부도 적극적으로 협조했는데, 여기에는 근래 한국과 프랑스의 관계가 가까워진 데 있었다.

러시아-프랑스 동맹 체결과 1차 동아시아 전쟁 이후, 프랑스는 대한제국의 가치를 발견했다. 러시아가 외교와 군사 부분에서 한국의 후원자 역할을 한다면, 프랑스는 경제와 문화 부분에서 후원자 역할을 했다.

해외 투자에 적극적인 프랑스는 한국의 근대화에 필요한 적잖은 자본을 투자했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도 여럿 파견했다.

"프랑스는 러시아의 동맹으로, 외교 정책과 해외 투자에 있어 러시아와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다. 저들에게 있어 대한국은 극동에서 러시아-프랑스 동맹의 대리인 역할을 할 잠재력을 갖고 있는 국가라고 할 수 있지."

이선은 대표단장 역할을 할 이강이 파리로 떠나기 전, 차분히 설명했다.

"그러니 저들이 호의를 베푼다고 할지라도 지나치게 도취하지는 말라. 서양 열강이 호의를 베푸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니."

"명심하겠습니다."

"물론, 무작정 호의를 사양할 건 없네. 의친왕, 그대가 본격적으로 대한국의 황실 외교를 이끌게 되었으니, 성공적인 사행이 되길 바라지."

"반드시 폐하의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

이선이 격려하며 아우의 어깨를 툭 치자, 이강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황제 이선을 대리해 본격적으로 황실 외교를 이끌게 된 이강은, 4년 전 구미 사절단의 부사 시절과 비교하여 훨씬 진중해지고 세상을 보는 시야도 넓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창창한 스물넷의 젊은 나이, 음주 가무를 좋아하고 여색을 밝힌다는 건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역시 프랑스, 그중에서도 파리는 세계의 문화와 유행을 주도한단 말이야. 단언컨대, 파리지엔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네."

"전하, 그 비슷한 말씀은 뉴욕과 페테르부르크에서도 하셨습니다."

"하하, 그때그때 소회가 달라질 수도 있는 거지요."

민영환의 지적에 이강이 껄껄 웃었다.

한때 미국 여인과 사랑에 빠져 왕위계승권을 포기하네 마네 했던 이강이었지만, 결국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이강은 황족 중에는 드물게도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여인 쪽도 마찬가지였다.

어언 20대에 접어든 이강에게도 이제 정신을 차리고 사대부 여식과 결혼하라는 황실 어른들의 압박이 있었지만, 그는 이런 핑계를 대고 있었다.

"성상께옵서도 국무에 매진하시다 보령 서른이 다 되시어 혼례를 올리셨는데, 아직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제가 무슨 자격으로 혼례를 올리겠습니까?"

의친왕이 되어 외교의 중대사를 맡고도 여전히 자유분방한 이강에게 있어, 벨 에포크의 파리는 환상적인 곳이었다.

이강은 파리의 문화생활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파리에서는 단 하루도 지루할 틈이 없구려. 박람회, 무도회, 오페라, 연극, 음악회, 미술 전시회, 올림픽, 서커스, 카바레의 댄스까지……."

"전하, 저희는 프랑스에 유람으로 온 게 아닙니다. 서양에 대한국을 널리 알리고, 국익을 지키기 위해……."

"압니다, 알아요. 물론 그에 관한 일이 가장 중요하지요. 하지만 민 공께서도 외국 생활을 오래 하셨으니, 서양의 풍류를 이해하지 않습니까?"

민영환의 거듭된 지적에도 이강은 흥겨움을 잃지 않았다. 조선의 근엄한 사대부들이 기겁할 만한 카바레 ‘물랭루즈(Moulin rouge)’의 캉캉(cancan) 쇼도 이강의 방문지 중 하나였다.

물론 이강이 놀고만 있는 건 아니었다. 대표단장으로서 대한제국관의 홍보를 맡아, 미므렐 백작과 룰리나 영사의 소개를 받아 프랑스 정·재계의 고위급 인사들과 친분을 맺는 한편, 은밀히 프랑스 정부와 교섭 중인 사항도 수행했다.

박람회 만국관(Pavilions of the Nations)에 자리 잡은 대한제국관은, 총무를 맡은 미므렐 백작의 후원을 받아 한국에서 파견된 건축가와 인부들이 건설했다.

만국관의 국가관은 각국의 전통 양식을 기반으로 세워졌고, 대한제국관은 경복궁 근정전을 본떠서 만들었다.

주된 전시품은 도자기·서책·가구·의복·곡식·무기·악기 등 조선의 전통문화와 근래 성장하고 있는 대한제국의 산업 생산품이었다.

1895년 승전 이후 확보된 자금으로 본격적으로 식산흥업 정책을 추진해 산업화에 뛰어든 한국은, 아직 유럽과 비교하면 한참 뒤떨어져 있었지만, 신흥 공업국이 되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여길 봐요. 이거 아름답네."

"콜랭시 공사가 궁중 무희와 사랑에 빠질 만도 하군요."

"러시아 황실에서도 이 동양 점성술이 효과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동양인들은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다지요."

"호오, 이게 동양의 신비라는 것인가."

아무래도 동양에 대한 관념이 오리엔탈리즘 단계에 머물러있는 서양인들의 관점에서는, 동양적인 것이 어필되었다. 특히 중국풍의 시누아즈리(Chinoiserie)와 일본풍의 자포네스크(Japonesque)가 인기를 끈 프랑스는 더욱 그랬다.

‘은자(隱者)의 나라’로 여겨졌던 과거와 달리, 1차 동아시아 전쟁의 승전 이후 한국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고는 하나, 유럽인에게는 아직 극동의 소국일 뿐이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청나라, 일본, 시암(태국)을 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대표단도 이를 인지하고 있기에, 국가관을 조선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꾸며 놓고, 남녀가 한복 차림으로 돌아다녔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끄는 건, 한복을 아름답게 입은 무희들이 추는 전통 무용과 이선의 옛 집사이자 사무위원을 맡은 안영흠의 토정비결이었다.

주한 공사 콜랭시가 조선의 궁중 무희와 결혼하고, 안영흠이 일전에 러시아 황실에서 ‘점성술’을 봐 주었다는 건 프랑스에서도 꽤 화젯거리였기에 이를 체험해 보려는 관람객들이 많았다.

경복궁을 충실하고 정교하게 재현한 대한제국관은, 한국이 그동안 서양에 널리 알려진 중국과 일본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가졌음을 알렸다.

4월부터 6월까지, 한국관을 방문한 관람객들은 줄을 이었고, 반응도 대개 호의적이었다. 이들은 ‘동양의 신비함’을 체험하는 데 만족하고 즐거워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가 6월 말부터 급변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발발한 전쟁과 학살 소식이, 유럽에도 전해진 것이다.

"충격! 중국에서의 학살극! 프랑스 선교사, 신부와 수녀들, 중국 기독교인들이 폭도들에게 잔혹하게 학살당하다!"

"청 황실과 조정, 복서 폭도들을 감싸고 오히려 항의하는 서양 외교관을 공격!"

"독일 공사가 폭도에게 살해당하다! 카이저, 가장 가혹한 복수를 다짐!"

"청 황실의 실권자 서태후, 수교국에 선전 포고! 포위당한 북경 공사관 구역, 위기에 처하다!"

"유럽 기독교 문명이 단결하여, 저 야만적인 황인들을 향해 응분의 복수를 해야 한다!"

신문에는 자극적인 글과 그림들로 도배된 <중국에서의 학살극>이 잇달아 실렸다.

추악한 용모의 황인들이 백인 남성을 살해하고, 여성을 능욕하고, 성직자들을 특히 잔혹하게 죽이는 삽화가 실렸다.

신문을 읽은 유럽인들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중국에 가혹한 복수를!"

"황인들을 몰아내자!"

유럽에 황화론이 퍼져 나갔다. 의화단의 난이 촉발시킨 반(反)중국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들에게 동양이란 중국이나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Chinois! barbare!"

"Je ne suis pas Chinois! Je suis Coreen!"

일부 과격한 자들은 동양인만 보면 중국인이다, 야만인, 살인자라는 비난을 쏟아 냈다.

갑자기 화살을 뒤집어쓰게 된 한국인과 일본인들은 어설픈 프랑스어로 중국인이 아니라는 걸 강조했다.

"근래 여론이 좋지 않소. 서양인들은 한복과 호복을 구분 못 하니 입지 말고, 모두 양복을 입으시오."

이강은 대한제국관 홍보를 위해 한복을 입었던 이들에게 모두 양복을 착용하라 권했다. 유럽인들은 한복이나 호복이나 구분을 하지 못했다.

중국인들은 모두 변발에 호복을 입고 있으니 시각적으로 확연히 구분됐다. 단발하고 양복을 입으면 최소한 중국인이라는 오해는 덜 받을 수 있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정복과 학살을 저지른 건 저들 서양인인데, 청국의 잘못을 도매금 해서 모든 동양인을 비난하니 참으로 불쾌하기 짝이 없군요."

공사 홍종우가 양복으로 갈아입으면서 분노했다.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면서도 조선인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홍종우는, 공식 석상에서만 양복을 입고 사적으로는 한복을 입었다. 파리에서 한복을 입고 돌아다니며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홍종우는 명물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그조차도 한복 착용을 조심하는 상황이 오고 말았다.

"성상께서 유럽에 여론전을 펼치라는 훈령을 보내셨소. 홍영식 공의 죽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비보(悲報)이나, 대한국이 의화단의 피해자이자 징벌의 선봉에 설 명분을 주게 되었소. 우리는 이를 강조해야 합니다."

홍영식의 비극적인 죽음은 곧 유럽에도 널리 알려졌다.

전봉준과 인터뷰를 한 일뤼스트라시옹 지의 동아시아 특파원이 폭도들 앞에서 당당한 자세로 맞서다 최후를 맞는 고든과 홍영식의 삽화를 그렸고, 이는 많은 독자의 심금을 울렸다.

근래 화성 연구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미국인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17년 전 보빙사 일행으로 여정을 함께 했었다. 로웰은 홍영식의 인품과 능력을 추모하는 글을 뉴욕타임스에 기고했고, 이 또한 널리 읽혀졌다.

파리에 있는 이강이 여론전을 주도하는 역할을 했다. 유럽 각국에 주재하는 한국 외교관들은 이를 토대로 여론전에 나섰다.

"대한제국 황제 폐하께서는, 대영제국 정부에 고든 중장의 순국에 깊은 애도를 표하시고, 귀국의 슬픔을 함께하고자 하십니다. 현대적 군대의 창설을 위해 노력한 고든 장군에게 대한제국 최고 훈장을 추서해 그 공로를 기리고자 하십니다."

"귀국 황제 폐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 대영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전권공사가 살해당한 일을 엄중히 규탄하고, 귀국에 깊은 애도를 보냅니다."

주영 한국 공사 서광범은, 홍영식과는 개화당 동지이자 개인적으로도 절친한 사이였기에 그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다.

슬픔을 감추고 황제의 명을 영국 외무부에 전달하자, 영국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영국은 한국이 숙적인 러시아와 프랑스의 극동 대리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고, 그동안 한국 외교관을 대하는 태도도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고든과 홍영식이 함께 죽게 된 사건으로 인해, 영국 여론은 죽은 이에 관한 동정론과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차이니즈 고든은 중국을 위해 존중과 애정을 다 바쳤지만, 저들은 사랑을 원수로 갚았다!"

"지난 수십 년간, 영국은 중국 무역의 일인자였다. 그만큼 중국에 대한 영향력이 강하다는 의미다!"

"하지만 상황이 이토록 악화되어 고든이 피살당할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도대체 총리와 보수당 정부는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영국인은 고든 장군의 복수를 원한다!"

"레드 코트(영국군)여, 40년 전처럼 북경으로 진격하라!"

9월 총선을 앞에 둔 솔즈베리 후작의 보수당 정부는 여론의 격화에 몸을 낮춰야 했다.

‘차이니즈 고든’은 대영제국을 상징하는 군인으로 대중적 인기가 높았고, 고든의 비참한 최후는 영국 여론을 격동시켰다.

영국 언론의 삽화에는 고든이 고결한 성인(聖人)처럼 그려지고, 그 곁에서 함께 쓰러진 홍영식은 마치 성인과 함께 순교하는 신도처럼 그려졌지만, 영국인의 동정을 사기에는 좋았다.

여론의 반응을 보고 있는 보수당 정부는, 홍영식의 친구이기도 한 서광범을 극진히 대함으로써 영국 정부의 호의를 보여 주었다.

‘금석 형님, 형님의 순국이 대한국의 위상을 바꾸어 버렸군요.’

영국의 태도 전환에 서광범은 매우 씁쓸했지만, 위기가 곧 기회라는 점을 깨달았다.

격화되는 여론의 파도를 탄 열강들이, 그간의 반복을 잠시 청산하고, 연합군을 결성해 북경을 향해 원정할 준비에 착수한 것이다.

- 280화에 계속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