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포위
전쟁이 선포된 6월 25일 이전부터, 북경 공사관 구역은 포위된 상태였다.
길이 3.2km, 폭은 1.6km의 공사관 구역에는 12명의 공사와 외교 사절, 450여 명의 호위병, 500여 명의 19개국 민간인, 학살을 피해 대피한 2,800여 명의 중국 기독교도 등이 몰려 있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스페인, 벨기에, 네덜란드, 미국, 일본, 한국 등 12개국 외교관 대표 회의는 공사관 구역의 사수를 결의했다.
"원군이 올 때까지, 우리는 반드시 공사관 구역을 지킬 것입니다."
주청 영국 공사 클로드 맥도널드를 사령관으로, 미국 공사 스퀴어스(Herbert G. Squiers)를 참모장으로 하는 지휘 체계가 수립되었다.
9개국 호위병 450명에, 자원병으로 선발된 150명의 남성들이 방위군을 결성했다.
다수의 중국 기독교도들도 노동, 특히 바리게이트 건설을 위해 동원되었다.
방위군은 가장 크고 방어하기 편한 영국 공사관에 사령부를 두고, 여섯 구역으로 나누었다.
영국군, 독일군, 러시아군,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일본군과 이탈리아군, 미군과 한국군이 각자 한 구역을 맡았다.
"600명으로 이 넓은 구역을 방어해야 한다니."
"무기와 탄약 모두가 부족한데 걱정입니다."
방위군은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공사관 호위병들은 긴급히 입경하는 바람에 소총과 탄약만을 들고 왔다. 방어전에 가장 효과적인 기관총은 3문뿐이었다. 그나마 미군과 이탈리아군이 소구경의 야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은 식량 사정은 좀 낫다는 것이었다. 공사관 구역의 식량은 모두 징발되어 배급되었다. 넉넉하진 않아도, 아끼면 최대 2개월은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의약품은 부족했지만 대개 의료 선교사인 의사와 간호사는 충분했다.
"모든 상황이 불리하지만, 우리는 원군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하오. 만약 지켜 내지 못한다면 모든 사람이 전멸이오."
"원군은 한 달 내로 올 겁니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됩니다."
외국인과 기독교도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하는 권비의 악명을 생각해 보면, 방어선이 뚫리는 순간 공사관 구역의 4천여 명은 모조리 학살을 면치 못할 터였다.
각국 외교관과 호위병, 민간인들은 한마음이 되어 각오를 다졌다.
주청 한국 공사관은 전권공사 홍영식의 살해로 한동안 비통함에 빠졌으나, 점증되는 위협에 대비했다.
참서관 박태영(朴台榮)이 대리공사로 외교관 대표 회의에 참석하고, 공사관 무관 이동휘(李東輝) 정위가 9개국 방위군에 한국군을 대표했다.
"안 참위, 아군은 미군과 협력해 동남쪽 구역을 맡기로 했네. 우리가 맡은 지역을 반드시 사수해야 하네."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공사관 구역의 한국군은, 주재무관 이동휘와 사태 초기에 입경한 해군육전대 1개 소대가 전부였다.
소대장 안중근 참위는 지휘권을 이동휘 정위에게 넘겼다. 비록 육해군의 소속은 다르지만, 이동휘는 계급도 높고 경험도 훨씬 많았다.
1894년 삼국전쟁에 참전하고 1896년 대사절단의 일원으로 독일에 유학해 군사학을 익힌 이동휘는, 나이는 젊지만 연합군의 일익(一翼)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외부와 소식이 끊기긴 했지만, 연합군이 우리를 구원하러 올 거야. 귀관이 천진을 떠나기 전에, 각국 함대가 대고 포대에 포격을 준비 중이라고 했지?"
"네. 포대는 이미 함락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영국 공사가 천진의 연합군으로 하여금 북경으로 진격하게 했으니, 곧 도착할 게야."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너무 늦는 거 아닙니까? 6월 10일에 진격을 시작한 부대가 아직도 소식조차 없으니……."
"그러게 말일세. 그만큼 청군의 방어를 뚫고 온다는 게 녹록치 않다는 의미겠지."
외부와 연락이 끊긴 공사관 구역은 시모어 원정대의 실패와 회군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천진 말고도 연합군은 반드시 결성될 것이네. 홍영식 공의 참극이 전해졌으니, 성상께서도 내버려 둘 리가 없겠지."
"황제 폐하시라면 반드시 그러시겠지요. 반드시 공사의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그래, 그러려면 일단 우리가 살아남아야겠지. 우리가 전멸되면 원수를 갚을 수도 없지 않겠나?"
"네, 물론입니다."
안중근은 비장한 각오였다. 이동휘는 웃으면서 안중근의 긴장을 풀기 위해 어깨를 툭 쳤다.
‘6년 전, 아버님께서도 청군에 맞서 포위된 평양성 보루를 지키셨다. 마침내 나도 조국을 위해 싸울 수 있게 되었구나.’
성벽을 지키던 안중근은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안중근의 아버지, 육군 정령 안태훈은 전쟁 영웅이었다. 승전의 분수령이 되었던 평양 전투에서, 안태훈이 소속된 12연대는 평양 외곽 보루를 지켜 승리의 발판이 되었다.
황해도 사람들로 구성된 12연대 평양 전투 참전자는 영웅으로 숭배받았고, 소년 안중근은 부친과 같은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부친과 차이가 있다면, 안중근은 부친이 소속된 육군 대신에 해군에 들어갔다는 점이었다.
‘아버지의 그늘 아래에서, 아버지 덕으로 성공했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나는 대한국 해군의 영웅으로 기억될 거야.’
이왕이면 육군을 지원하라는 부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은 뜻대로 해군무관학교에 지원했다.
개화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전통 사회의 영향이 남아 있는 한국에서 ‘수군’은 선호되지 않는 군역이었다. 바다에서 빠져 죽으면 시신조차 건지지 못하니, 이는 불효라는 유교적 관념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현실적으로도 신생 해군은 육군에 비하면 우선순위가 한참 밀려 있었다. 군부는 육군에 지원을 몰아주었고, 당장 전력 확충이 급하지 않은 해군은 서자 취급을 받았다.
그래도 신생 해군은 대한제국 선포 이후 국민적 영웅으로 널리 숭모(崇慕)되는 충무공 이순신의 후예이자 개화의 상징임을 내세웠고,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야심찬 젊은이들이 해군에 지원했다. 청년 안중근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안중근 학도는 동기 중에 사격술이 가장 뛰어나군. 해군에서도 상륙전과 같은 상황을 고려, 육지에서 싸울 병사들이 필요하네. 병과 선택은 새로이 결성한 육전대로 하는 게 어떤가?"
해군무관학교 교관들은 안중근의 사격술에 감탄했다. 어릴 적부터 부친으로부터 사격술을 연마한 안중근이었다. 구식 화승총으로도 수백 보 앞에서 명중시킬 정도로 뛰어났으니, 신식 소총으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교관들은 안중근에게 해군육전대를 권유했고, 그도 이를 받아들였다.
안중근은 1899년 해군무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참위로 임관했다.
1900년 을지문덕 함 소속 해군육전대 소대장으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첫 전쟁에 참전하게 된 것이었다.
"장교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하세요?"
"음? 아아, 자매님이군요. 돌아가요. 여긴 전방이라 위험한데."
안중근을 부른 사람은, 바로 얼마 전 그가 구한 천주교도 소녀 이마리아였다.
마리아는 안중근에게 거듭 감사를 표하고, 나이가 어려 동원 대상이 아닌데도 자발적으로 한국군 구역의 바리게이트 건설을 도왔다.
"여러 번 불러도 답이 없으셔서요."
"프랑스어로 부르니까 나를 부르는 거라고 생각 못했죠, 하하."
"그럼 앞으로 한국어를 배워 보도록 할게요."
"뭐, 그럴 것까지 있나 싶은데."
"아뇨, 전 진지해요. 일본과 한국은 개혁에 성공해서 문명국의 일원이 되었는데, 어쩌다 중국은 이 지경이 됐는지 알고 싶어요."
"음……."
부친인 안태훈이 열렬한 개화당의 지지자요, 천주교를 받아들인 문명개화론자이니 안중근도 마찬가지였다.
안중근이 성당의 주임신부 니콜라 빌렘(Nicolas Willhelm)을 통해서 일찌감치 프랑스어를 익힌 것도, 문명개화론의 영향이었다.
의화단의 만행을 보면서 문명개화론의 영향은 더욱 강해졌지만, 청년 안중근에게 안타까운 것은 중국의 끝도 없는 몰락이었다. 자국군의 학살을 피해 공사관 구역으로 도망쳐 외국군의 보호를 받는 중국 기독교도들을 보면 비애의 감정이 들었다.
‘나라가 약하고 분열되어 있으며, 지배층이 어리석고 백성이 무지하면 이렇게 되는 거다.’
"20년 전만 해도, 한국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죠. 중국인도 개혁과 계몽의 필요성을 깨달으면 달라질 겁니다."
"이 끔찍한 전쟁을 통해서, 중국인이 교훈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러니 일단 여기는 지켜 내야죠. 여긴 위험하니까 이만 돌아가요, 자매님."
"네, 형제님. 힘내세요!"
자신을 향해 선망과 기대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소녀를 보면, 안중근은 결코 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국 대한국을 위해서, 3천 명의 외국인과 신앙의 형제들을 위해서도 싸워야지.’
여름의 무더운 날씨 속에서, 공사관 구역에서 일진일퇴의 전투가 반복되었다. 광신에 차서 공격하는 의화단만큼이나, 방위군도 절박하게 지켜 냈다.
"불이다! 불!"
"제기랄, 빨리 꺼!"
한림원(翰林院)에 불이 붙었다. 공사관 구역의 경계선에 위치한 한림원에는 중국의 수많은 고서(古書)와 역사책들이 있었다.
중화 문명의 유산이 가득한 한림원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은 양측의 불문율이었다. 한림원에는 방어 측의 바리게이트도 설치되지 않았고, 공격 측도 무리하여 이쪽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 광신적인 의화단이 방어가 취약한 한림원 방향으로 공격을 개시했고, 그 결과 불이 붙고 말았다.
"이런 미친놈들, 이런 보물을!"
"어쩌면 좋아!"
"아직 늦지 않았어! 일부라도 살려 내야 해!"
"동양 문명의 유산인데, 지켜 내야지!"
연합군 중에서도 한림원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건 같은 동양 문명권인 한국과 일본, 특히 ‘정통 중화’의 자부심이 남아 있는 한국이었다. 한림원을 지키기 위해 한국군과 일본군이 투입되었다.
참으로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중국인들이 중화 문명의 유산을 불태우고, 한국인이 이를 지켜 내려 하고 있었다. ‘중화 문명’은 이제 중국의 것이 아니라는 걸 상징하는 듯했다.
한림원의 방어에는 결국 성공했지만, 목제 건물의 특성상 방화에 취약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서적의 상당수는 불이 탔으나, 명대의 유산인 영락대전(永樂大全)은 한국군에 의해 대부분 구조될 수 있었다.
"성과는 있었소. 미친놈들을 상대로는 합리적인 계산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으니."
"이젠 정말 수단 방법을 가려선 안 되오."
한림원 방화를 통해서, 방위군은 의화단이 정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더 치열한 전투가 예고되어 있었다.
7월 1일, 북양대신 영록이 지휘하는 청군의 총공세가 개시되었다.
피난민이 몰려 있는 ‘푸(福, Fu)’ 구역을 지키는 일본군과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첫 공세가 집중되었다.
"물러서지 마라! 방어해!"
"avanti, avanti!"
일본 주재무관 시바 고로(柴五?) 중좌가 능숙하게 방어전을 지휘했다. 5년 전 삼국전쟁 참전자인 시바 중좌는 연합군 장교들 중 청군에 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군인이었다.
이탈리아군도 그간의 졸전을 씻는 듯, 맹렬히 방어하여 청군을 몰아냈다.
가장 절박한 전투는 프랑스군 구역이었다. 프랑스군 78명과 오스트리아군 17명은 복잡한 지형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양군의 전선은 겨우 15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Aux armes, citoyens! Formez vos bataillons!"
"Marchons, marchons!"
프랑스군은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총검 돌격을 감행했고, 전선이 뚫리기 직전에 밀어붙이는 청군을 가까스로 막아 냈다.
여러 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는, 방위군이 ‘타타르 성벽(Tartar Wall)’으로 명명한 성벽에서 벌어졌다.
높이 14m, 두께 12m의 타타르 성벽을 함락시키면 공사관 구역 전체를 감제할 수 있었다.
타타르 성벽의 서쪽은 독일군이, 동쪽은 미군이 지켰다.
7월 3일, 청군의 인해 공세 앞에 독일 전선이 뚫리고야 말았고, 미군은 성벽을 포기하거나 청군을 몰아내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당연히 포기할 수 없지. 내일은 독립기념일이니, 이 날에 반격해서 저들을 몰아냅시다!"
"오오!"
"한국군이 우리의 우익을 맡아 주시오."
"알겠습니다."
7월 4일 새벽, 미 해병 대위 존 마이어스(John T. Myers)의 지휘 하에 한미 연합군이 타타르 성벽 탈환 작전을 개시했다.
"Marines, Attack!"
"해군육전대, 공격!"
승리에 도취되어 잠들어 있던 청군은, 연합군의 기습 공격에 수십 명의 전사자를 내고 부랴부랴 퇴각했다.
이에 비해서 연합군은 미 해병 2명의 전사와 소수의 부상자가 전부였다.
"타타르 성벽을 지켜 낸 건, 우리 운명의 전환점이 될 것이오."
방위사령관 맥도널드 공사가 미군과 한국군 병사들을 치하했다. 타타르 성벽을 빼앗겼더라면 공사관 구역의 안위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만큼 포위전의 중요한 승리였다.
"우리 육전대의 역사적인 첫 승리다. 마음껏 기뻐해라, 여러분!"
"와아아!"
안중근은 다리에 총알이 스치는 부상을 입었지만, 승리의 기쁨으로 아픔을 잊었다. 그에겐 해군육전대의 역사적인 첫 승리를 거뒀다는 게 더 중요했다.
하지만 청군의 포위는 끝나지 않았다. 청군은 병력의 우위를 이용해 계속 공격했고, 수적으로 절대 불리한 방위군은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7월 16일, 청군 공병대는 지하 갱도를 폭발시켜 프랑스 전선을 뚫었고,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은 결국 뒤로 밀려나고야 말았다.
같은 날에 영국군 지휘관도 전사함에 따라, 패색은 더욱 짙어졌다.
"오늘이 가장 어두운 날이군. 최후를 각오해야겠어."
맥도널드는 한숨을 쉬었다.
공사관 구역의 민간인들을 모두 피난처로 대피시키고,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다.
끝이 가까워 보였다.
다음날, 7월 17일.
"각하! 청군이 휴전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뭣이? 정말인가?"
"어째서? 원군이 북경에 도착했나?"
기적이 발생했다.
절망에 빠져 있던 공사관 구역의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밖을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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