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285화 (284/812)

285화 북경 진격

9국 연합군이 점령하고 있는 천진에서는, 연합군이 지명한 대표들이 임시 행정부를 구성, 조계지를 나눠 가졌다.

하지만 북경 진격 여부를 놓고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다.

7월 말까지, 천진에 도착한 연합군 병력은 3만 5천에 달했다. 북경을 공격하기에 충분한 병력이었다.

그런데도 진격은 계속 지연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연합군의 통수권 문제였다.

"가장 계급이 높은 사령관의 지휘를 받도록 합시다."

"가장 많은 군대를 파병한 나라에서 해야죠."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가 맡아야 합니다!"

영국은 시모어 제독을 밀었지만 이미 1차 원정대가 실패했기 때문에 고집할 수 없었고, 러시아는 리네비치(Nikolai Linevich) 장군을 밀었지만 영국이 결사반대했다. 가장 많은 병력을 보낸 일본의 야마구치 모토미(山口素臣) 장군은 동양인의 지휘를 받을 수 없다는 편견으로 배제되었다.

결국 지루한 논쟁 끝에 결국 ‘계급이 가장 높고, 공사 살해의 피해를 입은’ 독일의 발더제 원수가 지휘권을 맡기로 했다.

문제는, 유럽에서 출발한 발더제가 도착하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다는 것이었다.

"당장 북경으로 진격해야 합니다. 동포들과 기독교인들이 우리가 공포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직 사령관도 도착 안 했는데, 무작정 진격을 서두를 수는……."

"사령관이 도착하려면 9월은 되어야 할 텐데, 언제까지 기다립니까? 당장 진격합시다!"

"아직 청 조정과의 협상이 안 끝났소. 휴전 기간이니 일단 답을 기다려 봅시다."

결국 전략적인 문제보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진격에 대한 갈등이 계속됐다.

영국, 미국, 일본은 러시아의 대군이 휩쓸기 전에 진격을 서두르길 원했다.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한 일본은 즉각 진격을 외쳤다.

러시아는 만주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10만 대군을 파병할 계획이었으므로, 북경으로는 최대한 천천히 진격하기를 원했다. 만주를 장악하려면 전쟁이 길어지는 게 좋다는 계산이었다.

독일은 유럽에서 보낸 7천 명의 정예가 배를 타고 항진 중이니 이들이 오길 기다렸고, 프랑스도 유럽에서 보낸 병력이 도착하기를 기다릴 겸 동맹국인 러시아를 지지했다.

병력이 없다시피 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는 발언권이 없었으니, 영국·미국·일본 대 프랑스·독일·러시아 3 대 3으로 의견이 갈린 상황이었다. 공교롭게도 5년 전 삼국 간섭과 유사한 구도였다.

이 상황에서 연합군 중에서 세 번째로 병력이 많은 한국의 발언권을 무시할 수 없었다. 졸지에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 대한제국 사령관 박유굉 참장은 고민에 빠졌다.

"한국은 러시아 편 아닌가? 그럼 진격은 미뤄지겠군."

"젠장, 원하는 나라끼리라도 먼저 진격합시다."

"아니, 그래도 연합군인데 그럴 수야 있소?"

‘한국은 러시아 2중대’라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박유굉은 뜻밖의 결론을 내렸다.

"각국의 외교관이 살해당했고, 북경의 공사관 구역에는 수많은 민간인이 고립되어 연합군의 진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따질 때가 아닙니다. 인도적 필요성을 최우선으로 여겨야 합니다. 전략적으로 고려해도, 중국 영토는 광활하기 때문에 장기전으로 들어갈수록 불리합니다. 시간을 끌수록 청 조정은 오판할 겁니다. 속히 북경을 함락시켜 저들의 항복을 받아 내야 합니다."

박유굉의 말은 정론이었다. 영·미·일은 만족했고, 프·독·러에도 속전속결파가 있었으므로 진격에 합의했다.

때마침 연합국과 청 조정이 일시적으로 합의했던 휴전도 종결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침략자 양이가 이미 천진을 함락시켰는데, 휴전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천조가 위기에 처했는데도 중립을 선언한 이홍장, 유곤일, 장지동 등은 간악한 역적입니다!"

"협상도 싸워서 이겨야 가능한 것입니다. 공사관 구역을 토벌하고 양이들을 볼모로 잡아야 협상도 가능할 것입니다!"

강경한 주전파들은 휴전 종결과 전쟁 재개를 부르짖었다. 천진 함락과 동남호보선언으로 의기소침해있던 서태후도 주전파의 호언장담에 기뻐했다.

"안 됩니다! 공사관 구역이 함락된다면, 피에 눈이 먼 권민의 무리가 외국인들을 살려 두겠습니까? 그리되면 더 끔찍한 보복만 초래할 것입니다!"

"대청이 모두 일치단결해도 연합군과 싸울 전력이 있을지 의문인데, 북경과 직례만으로 어찌 저들에 맞서겠습니까?"

"애초에 의화단과 같은 허무맹랑한 무리를 믿고 전쟁을 선포한 게 잘못입니다! 이홍장에게 명해 계속 협상해야 합니다!"

"닥쳐라, 이 역적들아! 감히 태후 폐하의 성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냐?"

"매국노들! 네놈들은 서양에 나라를 팔아먹을 궁리밖에 없느냐!"

"태후 폐하, 양이들과 부화뇌동하는 저 매국노들의 목부터 베시옵소서!"

서태후는 화의를 주장하는 주화파 관료들이 광서제의 복귀를 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장 위기에 놓인 건 생각지 않고, 서태후는 그게 밉살스러웠다.

"대청은 침략자 양이에 맞서 싸울 것이다! 열성조가 대청을 보호하신다! 휴전을 폐기하라! 양이에 부화뇌동하는 간적들의 목을 베라!"

과감히 서태후를 비판하고 평화를 외친 주화파 관료들은 체포되고, 5명의 대신이 본보기로 처형되었다. 이들은 모두 외국과 교섭 경험이 있는 관록 있는 양무파 관료들이었다. 완전히 퇴로를 끊는 조치에 주화파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7월 28일, 12일의 휴전이 끝나고 공사관 구역에 대한 공격이 재개되었다. 천진에서 북경으로 오는 길에는 병력이 배치되었다.

"북경은 가망이 없습니다. 여긴 말을 삼가는 게 좋습니다."

북경에서 온 비보에, 상해에서 열강과 협상을 이어 나가던 총독들의 대리인 성선회는 절망에 빠졌다. 어떻게든 북경 함락이라는 치욕적인 상황만은 면해 보려고 했으나, 이제 이를 피할 길은 없어 보였다.

성선회의 보고를 받은 이홍장은 땅을 치며 부르짖었다.

"아, 대청이 결국 망하고야 말겠구나! 내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강남의 대군을 몰아 북경으로 진격해 간적들을 토벌했을 것이거늘!"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천명을 잃고 혼미에 빠진 북경은, 난국을 극복하려는 중국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중국을 뜯어먹을 생각을 하는 외국군에 의해 정복될 상황이었다.

8월 4일, 오랜 논쟁 끝에 마침내 내부 정리를 끝낸 연합군의 북경 진격이 개시되었다.

9월까지 7만 명이 집결할 예정이었지만, 현재 병력 3만 5천 중 천진 방위 병력을 남겨 두고 2만 4천으로 북경 원정대를 구성했다.

일본군 8,000명, 러시아군 4,800명, 한국군 4,500명, 영국군 3,000명, 미군 2,100명, 프랑스군 800명, 독일군 200명, 오스트리아-헝가리군 58명, 이탈리아군 53명으로 구성되었다.

병력 구성에서 알 수 있듯이, 주력은 지리를 이용해 신속히 병력을 파병할 수 있었던 일본군, 러시아군, 한국군이었다. 영국군은 인도와 호주에서, 미군은 필리핀에서, 프랑스군은 인도차이나에서 온 식민지 주둔군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군은 유럽에서 원군이 도착하기 전이라 소수의 해병대와 특수부대를 동원하는 게 전부였다.

"임시 사령관으로 알프레드 가슬리 경을 추대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다짐합니다. 10일 내로 북경을 함락시키고, 동포와 기독교인을 구원할 것입니다."

연합군의 임시 사령관으로 인도 주둔군 사령관 알프레드 가슬리(Alfred Gaselee) 소장이 임명됐다.

이보다 병력을 더 많이 파병하고, 계급도 더 높은 러시아의 리네비치 중장이나 일본의 야마구치 중장은 불만족스러웠지만, 영국의 발언권이 가장 강하게 먹혔다.

결국 9국 연합군이 명목상 단일한 지휘권하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손발이 맞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March!"

"Marchons!"

"Vorwarts!"

"Avanti!"

"Ma?рш!"

"進擊!"

"진격하라!"

북경을 향해 진격을 개시한 연합군의 가장 큰 적은, 의외로 청군이 아니었다.

지휘권 문제, 여러 언어를 쓰는 연합군 간 의사소통의 문제가 더 컸다.

8월 5일, 해하(海河)를 건너 북창(北?)에서 연합군은 약 1만 규모의 청군과 격돌했다.

"공격! 교두보를 확보하라!"

"적군을 돌파하라!"

"영국군에 지원 요청해!"

연합군의 포격 후에 도하가 개시됐지만, 서안 방향 선봉에 돌출된 일본군을 향해 청군의 포탄 세례가 쏟아졌다.

일본군은 급히 영국 기병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영국군은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

해하 동안을 향해 도하하던 연합군은, 홍수로 수위가 높아지는 바람에 도하가 지연됐다.

결국 일본군은 혼자 힘으로 청군을 밀어 내야 했고,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해하 서안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청군은 10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황급히 후퇴했다.

홀로 전사자 60명, 부상자 240명을 낸 일본군의 불만은 컸다.

"이거 우리 병력이 제일 많다고 총알받이로 내세우는 거 아냐?"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건 아니고? 어디 두고 보자."

이튿날, 해하 동안 양촌(?村)에서 연합군과 청군은 다시 격돌했다.

80세의 노장 송경(宋慶)과 총병 마옥곤(馬玉崑)이 지휘하는 1만의 군대가 양촌을 지켰다. 삼국전쟁 당시 만주 전선에서 조일 동맹군에게 참패했던 바로 그 송경이었다.

양촌 전투에서 일본군은 참여하지 않았다. 러시아군, 영국군, 미군, 한국군이 주력이었다.

공세는 오전에 개시되었다. 하지만 전투보다는 인내심 대결에 가까웠다.

혹서기인 8월 초, 섭씨 40도에 달하는 뜨거운 열기는 제대로 된 전투를 벌이기 힘들게 만들었다.

"젠장, 용광로가 따로 없네."

"덥다, 빨리 끝내고 쉬자!"

"이 더위에 이게 무슨 고생이냐?"

"일단 제방을 확보한다. 공격해!"

"돌격!"

쾅! 쾅!

타다다다당!

포병의 포격에 뒤이어, 기병대가 뿌연 흙먼지를 내밀며 돌격했다. 보병들은 뜨거운 열기 속에서 일사병과 싸우며 힘겹게 진격했다.

빨리 전투를 끝내겠다는 일념으로 연합군의 공세가 집중되었다. 청군은 초기에는 저항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반나절 만에 방어를 포기하고 퇴각했다.

청군의 손실은 별로 없었지만, 연합군에 다시 도전할 의사도 보이지 않고 퇴각했다. 결사 항전을 외친 북경 조정과 달리, 청군 대부분은 전의가 없었다.

송경이나 마옥곤이나 연합군과의 전쟁을 미친 짓이라 생각했고, 조정의 질책을 피하기 위해 싸우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연합군은 40명의 전사자를 내고, 12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미군 15명, 한국군 12명, 러시아군 7명, 영국군 6명이 전사했다. 큰 희생을 치르진 않고 북경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북창과 양촌 이후에, 청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한 번도 없었다.

즉, 연합군의 최대 적은 청군이 아니었다. 더위와 열악한 환경 그 자체였다.

"뜨겁다."

"더워."

"습해."

"물 줘, 물."

"땅은 더럽게 질척거리네."

"벌레는 대체 왜 이렇게 많아!"

"젠장, 보급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도대체 이놈의 나라에는 제대로 된 게 아무것도 없냐?"

북경-천진 철도가 끊어지는 바람에 연합군은 도보로 진격해야 했고, 섭씨 42도에 달하는 폭염이 연합군을 덮쳤다. 해안에서 멀어질수록 보급은 한계가 있었고, 군인들은 일사병과 탈수로 쓰러졌다. 사람과 짐을 싣고 움직이던 말도 죽어 나갔다.

이 계절의 중국 내륙에는 폭염이 올 것이라는 걸 예측하고 대비한 한국군과 일본군의 상황은 좀 나았지만, 고생하기는 매한가지였다.

2만이 넘는 규모의 연합군에 청군은 물론이요 의화단도 감히 덤비지 못했지만, 오히려 농민들이 침략자에 적대적으로 나섰다.

우물을 찾기 위해 접근한 연합군 척후대를 끔찍하게 살해하고, 시체를 훼손했다.

물론 가만히 당하고 있을 연합군이 아니었다.

"야만인 놈들! 전부 사살해! 마을에 불을 질러!"

연합군은 잔혹하게 보복했다. 중국인에 대한 적대감과 폭염은 병사들의 분노를 극에 달하게 했고, 일부 병사들은 끔찍한 복수전을 벌였다.

적대적으로 의심된 민간인은 의화단으로 몰려 총살당하거나 참수당하고, 약탈과 강간이 뒤따랐다.

특히 러시아군과 일본군의 잔학성은 연합군도 기가 질리게 할 정도였다.

"전우들의 복수를 하자! 우리 병사 하나가 죽으면, 몇 배로 보복해!"

눈과 혀가 뽑힌 병사의 시체를 발견한 일본군은 광폭하게 돌변했다. ‘야만인’ 중국인에 대한 멸시라는 측면에 있어, 일본인은 서양인 못지않았다. 일본군은 총알도 아깝다며 참수했다.

"빨리 끝내자. 북경만 점령하면 끝이다."

"제군, 북경이 눈앞이다! 포위된 동포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북경에 쌓여 있는, 중국의 막대한 금은보화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북경을 향하는 연합군은 복수와 약탈에 대한 열망으로 눈이 돌아가고 있었다.

8월 10일, 연합군은 마두(馬頭)를 점령하고 12일에 북경으로부터 겨우 20km 떨어진 통주(通州)에 도달했다. 양촌 이후 청군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2만 4천에 달하던 연합군의 인적 피해는 거의 없었으나, 진격 중에 계속 낙오하여 통주에 도달한 병력은 채 1만 5천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북경을 공격하기에는 충분했다.

"북경이 눈앞이오. 당장 공격합시다!"

"아니, 최소 하루는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하오. 일단 하루는 쉽시다."

미국, 영국, 일본은 즉각 공격을 주장했지만, 러시아군의 리네비치 장군은 휴식을 제안했다. 프랑스군과 한국군도 휴식에 동의하면서 하루는 정찰과 휴식에 전념하기로 했다.

연합군의 진격 앞에, 북경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다. 북경 함락이 눈앞이었다.

- 286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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