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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혁명의 시대-291화 (290/812)

291화 제국의 고뇌

심양 점령 후, 이선은 러시아군과 봉천성-길림성 주둔과 공동 행정에 잠정 합의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국내 통치는 김홍집 내각에 맡기고 왔지만, 황제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었으므로, 이선은 친정을 마치고 압록강을 건너 본토로 돌아갔다.

황제가 탑승한 특별열차가 의주를 출발해 평양역에 잠시 정차했다. 30분간의 짧은 정차였지만, 수많은 군중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북벌을 이룩하신 황제 폐하께서 오셨다!"

"오오!"

주민들은 태극기를 휘두르며 열렬하게 환호했다. 평양이 유독 이선에 대한 지지가 높다고는 하지만, 예전보다 더 열렬한 환영의 인파였다.

이선이 잠시 열차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어 원수의 군모를 들어 올리자, 환영은 더욱 열렬해졌다.

"만주의 정복자, 대황제 폐하 만세!"

"고구려의 계승자, 대한국 만세!"

이선은 새삼 ‘북벌 완수’에 대한 국내의 인기가 폭발한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고조선-고구려-고려’의 적통을 잇는다고 자부하는 평양은 더욱 그러했다.

서북에 대한 차별을 끝내고, 평양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평양을 근대 도시로 육성하고, 콜레라 전염을 막고, 마침내 북벌까지 성공시킨 이선에 대한 평양 주민들의 지지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문명개화 최대의 수혜자인 황성이라고 반응이 다르지 않았다. 특별열차가 서대문역에 도착하는 순간, 대기하고 있던 주민들이 일제히 태극기를 휘두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선은 황제가 된 이후로 경호상의 이유로 가급적 대중 연설을 자제하고 있었으나, 이날 만큼은 기쁘게 대중의 환호에 화답했다.

"고맙소, 대한국민 여러분! 갑신경장 이후 계속된 정부의 노력과,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한 충성스러운 군대의 활약, 정부 시책에 단결하여 잘 따른 국민의 힘으로 마침내 북벌을 완수할 수 있었소이다! 우리 모두 함께 북벌 완수를 축하합시다!"

"와아아아아!"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만세!"

이선은 환호에 화답하느라 경복궁으로 향하는 전차에 올라타는데 한참 시간이 소요됐다. 호위대원들은 몰려드는 인파를 막느라 고생이었다.

이선은 즉시 김홍집과 내각 대신들을 만나 국내 상황을 보고 받고, 급한 결재를 처리했다.

"다행히 국내에 별다른 일이 없었군. 노고가 많았소이다, 경들. 총리 이하 각부 대신들이 있기에 짐은 마음 편히 만주에 다녀올 수 있었소."

"황공하옵니다. 성상의 신무(神武)하심으로 북벌을 완수하심을 경하드리옵니다! 실로 대한의 홍복이옵니다!"

"그렇사옵니다. 대한의 오랜 숙원이 마침내 이루어졌으니, 성상이 아니셨다면 어찌 오늘의 기쁨이 있겠습니까?"

"아, 신등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나이다!"

김홍집 이하 대신들이 일제히 이선을 향해 승전을 축하했다. 이선은 웃으면서 말했다.

"북벌을 완수하고 민의원 선거가 임박했으니, 실로 갑신경장 이후 한 시대가 마무리되고 있소. 하지만 이는 끝이 아니라 시작을 의미하오. 앞으로 더욱 할 일이 많은데, 벌써 죽음을 입에 올려서야 되겠소? 짐은 경들을 믿고 더 많은 일을 시킬 것이니,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것이오."

"성,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농담을 가장한 진담에, 대신들은 애매한 표정으로 함께 웃었다.

이선은 창덕궁으로 입궐하여 태상황을 알현했다. 본래 9월 8일은 태상황의 탄일이자 국경일인 만수성절(萬壽聖節)로, 이선은 이날이 되면 태상황을 위해 꼭 성대한 진연을 열었다. 다만 올해는 만주 친정으로 인해 이선이 불참해 간소하게 이루어졌다.

"태상황 폐하, 옥체 강녕하셨는지요? 탄일 진연에 참석하지 못한 불효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오, 황상,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오? 황상은 인조 대왕의 치욕을 갚고 효종 대왕의 유업을 완수했으니, 실로 대한의 기쁨이자 황실의 홍복이오. 나 또한 더없이 기쁘오."

태상황은 기뻐하며 이선을 치하했다. 제위에서 밀려난 후 한동안 무기력증에 빠져있던 태상황은, 대원왕의 서거를 계기로 황실의 큰 어른으로 역할을 했다.

태상황은 아직 나이 50이 되지 않았지만, 달관한 것 같았다. 대원왕이 서거하기 전 그에게 남겼던 유언이 뭐였는지는 몰라도, 태상황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 건 분명했다.

"황태후 폐하께서도 강녕하셨는지요?"

"황상께서 염려하신 덕에 무탈합니다. 근래는 손자 보는 낙으로 살지요."

"하하, 그러하시옵니까."

황태후는 아직 서른넷으로 젊었지만, 할머니 같은 말을 했다. 어찌 되었건 손자, 즉 황자는 법적으로 그녀의 손자였다.

"황후와 황자가 황상의 복귀를 간절히 기다려 왔습니다. 어서 만나러 가시지요."

"예, 그리하겠사옵니다."

황태후는 이선을 떠밀었다. 황태후와 황후 간에는 사소한 고부 갈등조차 없었다. 같은 광산 김문인 황태후나 황후나 현숙하기로는 비할 바가 없었다.

이선은 경복궁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만났다.

황후 김씨, 김아영은 황자 탄생 이듬해, 광무 2년에 정식으로 황후에 책봉되었다.

대원왕이 아명을 지어 준 장남 황길(凰吉)은 세는 나이로 4살이 되었고, 이제는 곧장 말도 잘했다.

"아바마마, 잘 다녀오셨사옵니까!"

"그래, 잘 다녀왔다. 너도 어머님께 효성을 다했겠지?"

"넵!"

이선은 아비의 복귀를 환영하는 장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황후가 지아비의 귀환에 절을 하며 반겼다.

"폐하, 친정하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겠습니까. 폐하께옵서 북벌을 완수하셨으니, 신첩 또한 기쁨을 참기가 힘들었습니다."

"고맙소, 황후. 황후가 내명부에 있으니 마음이 든든했소. 별일은 없었지요?"

"예, 성은으로 평안하였사옵니다."

"우리 아기씨는 어떻습니까?"

"지금 자고 있사옵니다."

"그럼 자는 모습이라도 보지."

이선은 아영과 함께 갓 돌을 넘긴 둘째, 황녀의 잠든 모습을 보았다.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음, 아버지는 결국 딸 바보가 될 수밖에 없는 건가.’

태어날 때부터 제국의 후계자라는 무거운 책무를 지닌 황자에게는 그럴 수 없겠지만, 황녀에게는 자유로운 삶을 줄 생각이었다.

보통 10대 초중반에 혼인하여 출궁하는 것이 조선의 관례였으나, 대한제국에선 이선의 자유였다. 장차 딸이 원한다면 학교도 다니게 하고, 유학도 보내 주고, 연애도 허락할 용의가 있었다.

곧 태자가 될 황길의 처지는 달랐다. 황길의 나이 4살, 이선은 아명 대신 정식 이름을 지어 주었다.

8살 무렵에 정식 이름을 지어 주는 관례가 있긴 했지만, 장남은 빠른 경우가 많았다. 후계자는 예외적인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외자 이름을 쓰는 왕가는 항렬을 쓰지 않는 대신, 같은 항렬에 부수를 공유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컨대 선(?), 순친왕 척(?), 의친왕 강(堈), 영친왕 영(?)은 모두 흙 토(土) 변을 공유했다.

다음 대에는 쇠 금(金) 변 부수를 씀에 따라, 이름 후보군이 좁혀졌다.

궁내부에서 관례에 따라 피휘(避諱)하기 좋은 복잡한 한자를 망단자로 올렸다. 그렇다 보니 한자도 복잡하고 뜻도 별로였다. 이선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앞으로 피휘와 같은 관습은 폐할까 하오. 서양에서는 군주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데, 동양의 전통은 너무나 엄격하오. 설령 내 휘인 선이 사용된다 한들, 뭐가 무례한 것이겠소?"

이선의 요구에 궁내부는 다시 망단자를 올렸다.

이선은 이 중에서 진(?)을 선택했다. 보물, 진귀하다, 소중하다는 의미를 지닌 이름은 딱 이선의 마음에 들었다.

"원자의 이름은 진으로 한다."

"황공하옵니다. 그럼 제칙(制勅)을 공포하겠나이다."

정식 황태자로 책봉되기 전 원자(元子)인 황자의 이름은 이진이 되었다.

10월 1일, 이 날은 북경에서 피살된 홍영식의 유해가 한국으로 송환되는 날이었다.

고든과 함께 살해되었을 당시에는 끔찍하게 훼손된 시신이었지만, 서태후가 수습하여 공사관 구역에 보내 주라고 명하여 보존할 수는 있었다.

주청 한국 공사관에 가매장된 홍영식의 유해는, 공사관 구역 포위가 풀린 후 한국군에 의해 장례가 치러졌다.

유족의 요청으로 유해 송환이 이뤄지고, 포함 양무호와 함께 귀국한 홍영식의 유해는 본국에서 성대한 장례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선은 대신들과 함께 친히 인천으로 가서 홍영식의 유해를 맞이했다.

‘증총리대신홍공영식(贈總理大臣洪公英植)’이라 써 있는 깃발이 인천항에 휘날렸다.

이선은 홍영식에게 칙임관 1등 총리대신을 추증하고 최고 훈장인 대훈위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章)을 수여하며, ‘순국자’로 예우했다.

홍영식의 영구(靈柩)가 인천항에 상륙하자, 조포(弔砲)가 울렸다.

이선은 거수경례로 홍영식의 영구를 맞이했고, 관료와 유족들은 고개를 숙여 조의를 표했다.

"아! 고(故) 총리대신 주청대한국특명전권공사 칙임관 1등 홍영식은 실로 만고의 충신이요, 열국 외교관의 귀감이다. 국가의 영광과 동료의 안전을 위해 초개와도 같이 목숨을 바쳤으니, 이 어찌 애달프지 않겠는가……."

홍영식의 동지이자 절친한 벗이기도 한 김옥균이 직접 제문을 낭독했다.

"아, 금석! 대한국은 결코 그대의 희생을 잊지 않을 것이며, 그대의 유업을 계승하여 자주독립과 문명개화의 일심대오로 나아가리……."

20년 전, 홍영식과 더불어 자주독립과 문명 대화를 맹세했던 김옥균과 개화당 동지들은 제문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순국자 홍영식 공은 장충단에 배향(配享)될 것이며, 그 충정과 절의는 길이 칭송될 것이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후 독립전쟁 전사자들을 모시는 장충단(?忠壇)이 설립되었다. 장충단에는 전사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렸다.

"지난날 장충단을 특별히 만들어 제사를 지낸 뒤로 군사들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이 감격하고 고무되었습니다. 하오나 창선(彰善)과 표충(表忠)의 일이 어찌 군인에게만 한할 것이겠습니까?"

"상주한 내용은 일리가 있다. 충성을 표창하고 절개를 장려하는데 어찌 문관과 무관을 구별하겠는가? 장례원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육군법원장 백성기 참장의 건의로, 1900년에 이르러 군인 전사자 외에도 나라를 위해 순사(殉死)한 이들도 배향되었다.

홍영식은 장충단제향신위(奬忠壇祭享神位)의 가장 높은 곳에 이름을 올린 순국자가 되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저처럼 신하와 죽은 이들에게도 정성을 다하시니, 참으로 성군이 아니신가."

"그러니 신하들이 충군애국하여 순국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군주에 어울리는 그 신하인 것이네."

사람들은 황제의 덕을 높이 칭송했으나, 정작 이선은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선은 홍영식의 죽음을 이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홍영식의 피살은 독일 공사 케텔러 남작, 일본 서기관 스기야마, 영국 고문관 고든 장군의 피살과 더불어 연합군이 청나라를 향해 가장 문책하는 사항이었다.

그 덕택에 한국은 연합군의 일원이 되고, 열강들 사이에서 상당한 발언권을 가지게 되었으니, 홍영식의 희생은 참으로 대한제국에서 길이 기릴 순국이라 할 만했다.

‘근데, 내가 이리될 줄 몰랐나?’

이선이 홍영식의 죽음까지 예측했다면, 그건 거짓이었다. 아무리 많은 일을 예측하는 이선이라지만, 인간의 자유 의지까지 모두 계산에 넣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홍영식의 죽음을 재빠르게 활용해서 국익을 위해 사용한 건 사실이었다.

‘아니, 어디 홍영식의 죽음만 그런가? 그 무수히 많은 죽음은?’

이선은 무수히 많은 죽음을 이용했다. 중국에서 벌어진 의화단의 수많은 학살, 만주에서 벌어진 끔찍한 기독교도 학살.

‘결국 나는, 대한제국의 국익이라는 명분으로 타인의 희생을 통해 이익을 챙기고 있지 않은가. 죽음의 상인이 따로 없군.’

이선은 그 누구보다 의화단의 발흥과 전쟁 발발을 정확히 예측하고, 또 그때를 기다렸다.

역사의 기억을 통해 이를 예측하고 있었고, 그 시기까지 가늠했다. 그리고 이를 대한제국의 파병과 영향력 강화를 위한 명분으로 활용했다.

모든 게 그의 뜻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만족감을 느끼면서도, 희생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해도, 가끔 우울감과 혐오감이 드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우울한 마음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으랴? 참 옥좌와 제관의 무게란 무겁기 짝이 없구나.’

이선은 고독했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바이긴 했지만, 만인지상의 황제에 오르고 나니 더욱 고독했다.

제위에 오르기 전에는, 김옥균 같이 마음 맞는 이와 허물없이 털어놓고 이야기를 하곤 했다. 하지만 황제가 된 후에는, 김옥균은 그를 철저히 군주의 예로 대했고 이선도 속내를 감춰야 했다. 황제는 신하에게 속마음을 내비쳐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황제는 공적인 생활과 사적인 생활이 분리되지도 않아, 예전처럼 자유롭게 취미 생활을 즐길 만한 여유도 없었다.

‘그렇다고 가장 가까운 가족과 대화를 할 수 있냐면…….’

황후 아영은 현명하고 착한 이였으나, 근대적 교육을 받고도 여전히 유교적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미덕으로 여기는 여인이었다.

본래 생각은 다를지 몰라도, 국혼을 치르고 황후가 된 후에는 오직 내조만을 하고, 나라의 일에는 일절 참견하지 않았다.

외척의 등장은 대원왕이 늘 경계했던 바였으므로 국가적으로 바람직한 일이긴 했다.

이선은 아영을 동등한 아내이자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벗으로 대하고 싶었으나, 아영은 ‘신첩(臣妾)’으로 자처하고, 아랫사람으로 처신했다. ‘황제의 성심’만을 높이 받들어 그 고뇌를 감히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선도 굳이 그런 아영을 탓하지 않았다. 일국의 국모로서 그녀는 비할 바 없는 처신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제위에 올라서 그런 생각이나 하는 자신이 감상적인 것일지도 몰랐다.

"서양 언론에서 황제 폐하에 대한 칭송이 자자해요. 문명의 충실한 계승자, 기독교도의 보호자라고. 모든 동양 군주가 황제 폐하와 같다면 문명화가 수월해질 거라고."

"칭찬인 것 같은데 묘하게 기분 나쁜 칭찬이군요. 내가 그들의 충실한 구호견 노릇을 해서 좋다 이거 아닌가."

"후후, 역시 폐하께선 신랄하시군요. 맞아요, 그들의 칭찬은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겠죠."

"뭐, 동양의 콘스탄티누스라고 불러 준다면 굳이 사양하지 않겠지만, 하하."

그나마 이선이 속내를 드러내는 건 황실 여성 주치의 겸 제중원 의사 마르가리타 얀코프스카였다.

이선이 그나마 마음을 터놓고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은, 1주일에 한 번 궁궐에 들어와 황실 여인들을 진찰하고 돌아가는 마르가리타와 다과를 함께 할 때였다.

마르가리타는 이선이 유일하게 ‘동등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다.

모든 한국인은 황제의 신하였고, 대개 외교관과 군인, 상인인 재한 외국인들은 이선을 외국 군주, 협상 대상자로 여겼다. 외국인들의 웃는 낯에는 요구 사항과 속내가 숨겨져 있었다.

유일하게 그녀만이 그에게 아무런 대가를 원하지도 않았고,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벗으로 대했다.

이선은 와인에서 빌린 술기운과 벗과의 대화의 힘으로 잠시 고독감과 우울감을 던져 버렸다.

하지만, 친밀한 벗에게조차도 모든 걸 털어놓을 순 없었다.

‘미래의 기억을 갖고, 역사를 움직인다. 이건 아마 죽을 때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이겠지.’

이선은 쓴웃음을 흘렸다.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자신이 절반 정도는 이 시대의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 29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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