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292화 (291/812)

292화 패자는 비참하도다(Vae victis)

8월 15일 북경 함락 이후, 의화단 일부가 북경을 벗어나 직례 일대에서 저항을 계속하자, 연합군은 직례성의 성도인 보정부까지 군대를 파병해 점령하고 의화단을 일소했다.

9월에 유럽에서 파견한 원정대가 도착하면서, 북경 일대에 주둔 중인 9국 연합군은 7만을 넘어섰다.

의화단 잔당 진압과 새로운 협정 체결을 명목으로 연합군의 북경 점령이 계속되었다.

새로 도착한 원정대의 군기라고 점령군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미 선발대가 북경을 약탈하고 한몫 잡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후발대도 약탈을 열망했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북경 함락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한 독일군의 만행이 가장 심각했다.

"전우들, 케텔러 남작의 원수를 갚자!"

"카이저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앞으로 천 년 동안 중국인이 감히 독일인을 쳐다보지 못하도록 중국의 아틸라가 되어라!"

독일 공사 케텔러 남작이 살해당한 이후 독일 원정대가 출정할 당시, 청나라를 야만국으로 취급하라는 카이저 빌헬름 2세의 ‘훈 연설’에서 자극받은 영향이 컸다.

연합군 총사령관 발더제 원수는 이화원 서태후의 처소를 사령부로 삼고, 정복자로 군림했다.

독일군은 북경을 약탈하고, 의화단 잔당 소탕을 명분으로 학살을 저질렀다. 진짜 의화단인지 아닌지 모를 사람들이 처형되어 시체가 곳곳에 나뒹굴었다.

"쯧쯧, 저 야만스러운 게르만 놈들."

"진짜 훈족이랑 다를 바가 없군."

하지만 독일을 비웃는 연합국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군은 이미 마음껏 약탈하고 박살 냈다. 독일군과 함께 뒤늦게 온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군도 약탈 행렬에 동참했다.

그 과정에서 꼴사나운 일도 벌어졌다. 흠천감(欽天監)에는 크고 화려한 천문 관측기기가 있었는데, 프랑스군과 독일군이 서로 차지하려고 패싸움까지 벌인 것이었다.

약탈품을 놓고 갈등을 빚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결국 연합군 사령부의 중재로 약탈품은 사이좋게 분배하기로 결정했다지만, 꼴사나운 광경이었다.

약탈은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황궁이라고 약탈을 면할 리가 없었다. 서태후의 거처였던 이화원은 특히 심한 약탈 대상이 되었다.

각 관청과 아문에 보관하고 있던 은과 관리들의 녹미(祿米), 심지어 관청 앞에 있는 석상까지 약탈 대상이었다.

그 약탈의 행렬은 연합군의 국적을 가리지 않았고, 비교적 엄정하게 군기를 유지하던 한국군과 일본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동양 문명을 지켜 내야 한다!"

"동양 문명의 유산을 안전히 보호하도록 하자!"

서양 연합군이 닥치는 대로 약탈을 하니, 한국군과 일본군은 ‘동양 문명 수호’를 명목으로, 특히 고서적 습득에 열을 올렸다. 서양인이 보기에는 그다지 가치가 없어 보이지만 동양인에게는 굉장한 가치가 있는 보물들이었다.

한국군은 자신들이 보호한 한림원에 보관하고 있던 귀중한 고서적 수만 권을 확보했다. 특히 영락대전을 비롯한 명대(明代)의 유산은 한국군의 주된 확보 대상이었다.

‘동양 문명 수호’를 명목으로 한국군과 일본군이 휩쓸어 간 서적과 보물도 상당수였다.

"살려 주십시오!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복서 놈들, 살려줄 테니 빨리빨리 움직여!"

민간의 부자들은 ‘의화단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거액의 보석금을 내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몸값을 낼 수 없는 서민들은 포로로 끌려가서 연합군을 위한 강제 노역을 해야 했다. 일을 제대로 못 하거나 열심히 하지 않으면 폭행은 부지기수였다.

연합군은 자금성의 정전, 태화전(太和殿) 앞 태화문(太和門) 광장에서 열병식을 개최했다.

9국의 기수가 차례대로 태화문에 국기를 게양했다. 이윽고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미국, 일본, 대한제국 9개국의 국기가 자금성의 전각과 북경 성루에 휘날렸다.

연합군은 태화문 앞에서 보무당당하게 열병식을 마치고, 연합군 총사령관 발더제 원수의 명의로 승전이 선언되었다.

"복서의 반란은 진압되었고, 복서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종결되었음을 선언한다!"

"와아아아!"

콰앙!

예포 소리가 울렸다. 다양한 군복을 입고 있는 9국 연합군은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황제가 신성한 정사를 다스리던 자금성의 정전 태화전. 황제의 즉위식, 결혼식, 책봉식과 같은 신성한 의례가 열리던 태화전 앞에서 정복자의 열병식이 개최되었다.

자금성의 내조, 건청궁(乾淸宮)에서 대한제국 근위여단의 ‘호위’를 받고 있는 광서제는 참을 수 없는 비참함을 느꼈다.

그는 연합군에게 북경에 대한 지나친 약탈과 굴욕을 면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발더제와 연합군 사령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광서제를 ‘보호’하고 있는 한국은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한국도 ‘우리도 연합군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고 할 뿐이었다.

실로 원나라 이후 북경이 중국의 수도가 된 이래, 아니 중국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었다.

"Vae victis(패자는 비참하도다)!"

기원전 390년, 켈트족이 로마를 점령했다.

켈트족은 로마인들에게 철수의 대가로 금을 바치라고 했다. 로마인들이 금을 가져와서 양팔 저울에 다는데, 저울의 무게추가 잘못된 거 같다고 불평했다.

그러자 켈트족의 수령, 브레누스가 가지고 있던 칼을 무게 추에다 올리면서 더욱 켈트 쪽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패자에게 불평할 권리는 없다고 ‘Vae victis’를 외쳤다고 한다.

북경 주민은 황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패자의 비참함을 공유했다.

호기롭게 시작한 의화단 전쟁의 비참한 결말이었다.

화북과 내몽골과 남만주를 석권하고, 232명의 외국인을 살해하고 수천수만의 중국 기독교인들을 잔혹하게 살육한 의화단 전쟁은 마침내 평정되었다.

그 대가는, 오로지 청 조정과 중국인이 갚아야 했다.

연합군의 단결은 북경 점령과 열병식으로 끝이 났다. 무너진 대청국의 잔해 위에서, 전리품을 얻기 위한 각국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러시아의 만주 점령이었다. 러시아의 라이벌, 영국은 목청 높여 러시아의 만주 점령을 비난했다.

"만주의 의화단이 소멸하였으니, 치안 안정을 목표로 파병된 러시아군도 철수함이 옳소."

"무슨 소리요? 러시아의 만주 파병은 러시아와 청국 간에 체결된 동맹 조약과 철도 보호 협정에 따른 것이오. 제삼국인 영국이 개입할 여지가 없소."

러시아 내에서는 육군대신 쿠로파트킨과 태평양 함대 사령관 알렉세예프로 대표되는 강경파와, 재무대신 비테와 외무대신 람스도르프로 대표되는 온건파 간에 의견 대립이 계속되고 있었다. 니콜라이 2세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감히 약소국인 한국이 황제 폐하의 호의만을 믿고 위대한 러시아군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18만 대군을 동원하고도 얻은 게 부족합니다. 한국군을 밀어 내고 봉천과 길림을 단독 점령해야 합니다."

"분명 한국의 행태가 기회주의적인 측면은 있으나, 그들은 우리에게 있어 유용한 파트너입니다. 만주를 러시아가 단독 점령하면 분명 영국과 일본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일단 한국을 내세우도록 하시지요."

"언제까지 영국 눈치만 볼 것입니까? 정녕 한국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만주는 러시아 제국의 안보를 위해서 꼭 필요한 지역입니다. 한국에게는 한청 국경 일부만 양보하고, 만주 삼성 당국과 합의해 단독으로 군대를 주둔하고 행정권을 행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동맹, 프랑스도 한국을 활용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한국군이 청 황제의 신병을 확보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일단 그들을 내세워 명분을 얻고, 만주 통치는 실질적으로 러시아가 하면 됩니다."

강온파의 대립 속에 이선의 친서를 받고 고민하던 차르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만주 전역을 점령하면 영미일이 결합하여 러시아에 항의하리라는 예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흑룡강은 러시아가 단독으로, 봉천과 길림은 한국과 협의하여 만주 당국을 통해 간접 통치한다. 구체적인 사항은 청국과 별도의 협약을 맺어 확정한다."

차르는 일단 온건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동시에 이선과 한국의 손을 들어주기도 한 것이었다.

‘한국은 러시아의 힘을 이용해서 이득을 얻으려는 게 아닌가?’

하지만, 니콜라이의 가슴 한편에 이선에 대한 의심이 처음으로 싹 텄다. 여전히 니콜라이는 개인적으로 이선을 생명의 은인이자 친밀한 벗으로 여겼지만, 군주 대 군주로서는 개인의 감정이 우선될 수 없었다.

이번은 온건파의 손을 들어줬지만, 극동의 안정과 러시아의 영광을 위해 만주를 장악해야 한다는 강경파의 주장에 차르도 동의했다.

이선과 한국이 계속 러시아의 충실한 하위 파트너 역할을 한다면, 비테의 조언대로 한국에 극동의 첨병 역할을 맡길 수 있지만, 다른 생각을 품는다면 안 될 일이었다.

한편, 러시아와 한국이 만주로 진격하고 있을 무렵, 일본군은 8월 24일 복건의 개항장인 아모이(샤먼)를 점령했다.

명분은 일본 불교 혼간지(本願寺)의 포교소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흉악한 무리’에게 습격했다는 것이었다. 대만 총독 고다마 겐타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군함과 해군육전대를 보냈다. 이는 북수남진의 선봉에 있는 대만총독부가 기획한 사건이었다.

일본이 아모이를 넘어 복건을 세력권으로 삼으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는 ‘동남호보’를 위반한 것이었기에 민절총독 허응규는 즉각 반발했고, 열강의 중재를 요청했다. 1842년에 개항한 최초의 5대 개항장 중 하나인 아모이에는 영국 자본이 많이 진출해 있었고, 영국은 일본의 아모이 점령에 우려를 표했다.

"일본군의 아모이 점령은 동남호보 위반이오. 철군을 권유하는 바이오."

"일본은 연합군에 가장 많은 2만의 원정군을 보냈고, 북경 점령 과정에서도 가장 많은 전사자를 냈소. 강남 대부분이 영국의 세력권인데, 복건만은 일본의 세력권으로 인정해 줄 수 있는 거 아니오?"

일단 일본은 의화단 전쟁에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한 것을 내세워 아모이에서 버티기 작전에 들어갔으나, 영국의 압력은 계속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중국 시장에서 가장 우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영국과 그 위치에 도전하는 러시아와 일본 간의 갈등이 불거졌다.

각국 모두 더 큰 이익을 얻으려고 했고, 열강 간의 반목은 멈추지 않았다.

오직 이익을 노려 볼썽사납게 싸우는 각국의 이전투구(泥田鬪狗)가 계속되었다.

"하아, 참으로 기가 막히는군. 이게 무슨 문명이고, 이게 무슨 정의란 말이냐. 총칼만 앞세우면 만국공법이란 게 의미가 있단 말인가?"

대한제국 종군 기자 이회영이 북경의 참상을 보고 한숨을 흘렸다.

‘잉카를 약탈한 피사로 이후 최악의 약탈 원정대’라는 미국 종군기자의 평은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895년, 여순 학살을 경험하고 끝내 군복을 벗어 던진 이회영은 ‘문명’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했다.

5년 전에는 일본군이, 지금은 연합군이 ‘문명’의 이름으로 ‘야만’을 징벌하고 학살했다.

하지만 정작 문명을 내세운 군대도 다르지 않았다.

북경은 인외마경이었다. 이회영은 무수히 많은 참상을 보았다. 살인, 약탈, 강간, 폭행이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연합군은 의화단이 저지른 온갖 잔혹 행위의 복수요,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 항변하였으나, 이는 비겁한 변명에 불과했다.

‘소위 문명국에서 왔다는 자들이 이래서야 의화단 같은 야만인과 다를 바가 무엇이란 말인가?’

표면적으로는 대한제국 관보 제국익문사의 종군 기자이나, 실상은 비밀 정보 요원인 이회영은 북경의 참상을 낱낱이 기록했다. 본래 그의 임무는 연합군의 동향을 탐지하는 것이지만, 기록자로서의 사명감도 불타올랐다.

특히 그가 명예로운 군대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조국 대한제국의 근위여단도 약탈 행렬에 동참하고 있었다. ‘동양 문명의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우긴 했으나, 결국엔 약탈자의 일원이었다.

군을 감찰하는 것도 이회영의 임무 중 하나였다. 자신이 할 일은 기록하여 보고하는 것이고, 판단은 황제의 몫이었다.

"지금 상황 돌아가는 걸 보면, 군복 입은 자로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대한제국 해군육전대 안중근 부위는 자신을 인터뷰하는 이회영에게 답하며 한숨을 쉬었다.

안중근은 공사관 구역 방어의 영웅, 중국 기독교도의 보호자라고 높이 칭송받았다.

공사관 무관 이동휘 정위와 안중근 참위는 공을 인정받아 1계급 특진하고, 북경 주둔군의 일원으로 합류했다.

공사관 구역 사람들과 50일간 동고동락하며 악전고투한 안중근은, 처음에는 연합군의 진격을 열렬히 환호했다. 그토록 고대하던 연합군이고, 포위된 이들을 구한 해방군이었다.

하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점차 커졌다.

‘이게 해방군이라고? 살인자, 약탈자, 강간범, 방화범으로 구성된 해방군?’

나이 스물둘, 아직 순진했던 안중근은 연합군의 비행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문명개화와 국민교육 1세대인 그에게 있어 서양은 곧 문명이었고, 청국은 야만이었다. 실제로 의화단이 얼마나 야만적인지, 공사관 구역의 사람들은 얼마나 문명적인지 입증했다.

하지만 연합군의 실체를 보면서, 서양에 대한 실망을 금치 못했다.

공사관 구역 해방 후, 안중근은 모처럼 사복 차림으로 북경 시내에 나섰다. 그가 구한 중국인 천주교도 소녀, 이마리아와 함께 북경 대성당을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공사관 구역에서 떨어진 북경 대성당도 50일간의 포위를 견뎌 내고 구출되었다.

"Hey! boxer! Ching Chang Chong!"

"Boxer girl, come here!"

동양인은 무조건 복서라고 부르며 ‘칭챙총’ 같은 멸시적 표현을 쓰고, 특히 여자들을 괴롭히고 희롱하려 드는 연합군에게 안중근은 분기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대한제국 해군육전대 장교 안중근이다!"

안중근이 신분증을 보여 준 후에야, 연합군 사병들은 태도를 바꿔 경례를 했다. 동양인을 차별하는 서양 군인들도 연합군의 일원인 한국군과 일본군은 존중했다.

그 이후로 안중근은 두 번 다시 사복을 입지 않았다. 반드시 군복 차림으로 다녔다. 중국인 기독교도들에게는 신분증을 반드시 갖고 다니게 했다.

군복을 입지 않는 이상, 서양인들에게 그는 동양인 복서에 지나지 않았다. 안중근은 처음으로 ‘동양인’으로서 정체성을 자각했다.

- 293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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