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중국 분할 논의
사실상 9개 연합국의 군정하에 들어간 북경에서, 광서제와 재건된 청 조정은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광서제는 칙령을 내려 정권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히 했다.
"서안으로 도주한 단군왕 및 장친왕 일파는 반역 도당에 불과하다. 안타깝게도 태후 폐하의 종적은 알 수 없으며, 태후의 명의는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니, 결코 응하지 말라."
총애하던 진비의 죽음을 알게 된 광서제는 복수심으로 이를 갈았다. 하지만 유교를 국시로 내건 중국에서, 법적으로 어머니인 서태후를 반역자로 규정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다.
대신 의화단을 끌어들여 전쟁을 부추긴 이혁단군왕 재의와 장친왕 재훈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서안으로 도주한 일당을 체포하라고 명했다. ‘전범 처벌’은 연합국도 환영하는 바였으므로, 이는 유용한 선택이었다.
여전히 섬서 내륙 일대에는 서태후와 배외주의 세력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에, 연합군의 포로가 된 황제의 명은 닿지 못했다.
황명이 닿지 못하는 건 강남도 마찬가지였다. 광서제는 이홍장을 다시 북양대신으로 임명해 협상에 나서게 했다.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사람은 이홍장밖에 없다. 양광총독 이홍장을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으로 다시 임명하니, 총리대신 경친왕, 양강총독 유곤일, 호광총독 장지동과 힘을 합쳐 열국과 협상에 나서도록 하라."
광서제의 솔직한 심정은 일본에 망명 중인 강유위와 양계초를 귀국시켜 변법파 정권을 복구하는 것이었지만, 북경 함락 이후 동남호보를 주도한 양무파가 대세를 이루자 그럴 수가 없었다.
경친왕 혁광, 이홍장, 유곤일, 장지동 모두 변법파의 복귀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냈던 것이다.
황제로부터 입경 요구를 받은 이홍장은 당장 북경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는 이미 6월부터 태후의 조정에서 북경으로 와서 연합군과의 협상에 나서 달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임지인 광동에 머무르며 정세의 추이를 살피고 있었다.
‘대청은 존망(存亡)의 위기에 처해 있다. 기존에 해 왔던 어떤 협상과도 차원이 다르다. 중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줄 건 내줘야 한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이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는가?’
78세의 이홍장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이었다. 40년 전, 태평천국 전쟁부터 중책을 맡아, 오랫동안 서양과의 협상을 주도해 온 그로선 이번 협상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다.
이홍장은 이번이 자신의 마지막 협상이 되리라 예측했다. 노신(老臣)의 마지막 목표는 중국의 멸망을 막는 것이었다.
실로 이홍장은 닳고 닳은 노인이었다. 그 증거로, 그는 은밀하게 중국 혁명파와도 선이 닿고 있었다.
전쟁 발발 당시, 이홍장은 총독들과 함께 동남호보를 선언하는 한편, 중국 혁명파를 이끄는 손문(孫文)이 은밀히 만나자는 제안도 받아들였다. 당시 손문은 청조가 수배하는 1급 정치범이었다.
"청조는 의화단을 내세워 멸망의 광기에 처해 있습니다. 북경 조정은 연합군에 의해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북경의 만주 조정이 저지른 죄과를 강남이 뒤집어쓸 이유가 없습니다. 양광을 중심으로 자치와 독립을 선언하고, 양광을 기반으로 중국을 지켜 내야 합니다. 만인의 여망을 받고 있는 중당께서 나선다면 다른 총독들도 뒤따를 것입니다."
이상주의적 혁명가인 손문은 무력으로 인한 혁명을 계획했지만,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양광총독 이홍장이 마치 메이지 유신의 사쓰마, 조슈와 같은 역할을 해 준다면, 광동과 광서를 기반으로 혁명 정부를 세우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대의 제안은 일리가 있소. 하지만 양광 독립은 북경이 함락된 다음에야 논의될 수 있을 것이오. 좀 더 때를 기다려 봅시다."
이홍장의 말에 손문은 실망했다. 그가 보기에 이홍장은 기회를 관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교활한 기회주의자 늙은이. 역시 청조의 관리하고는 타협이 안 된다. 오직 혁명뿐이다.’
‘어리석기는. 그걸 열강이 용인하겠나? 완전히 몽상가로군.’
78세의 노인 이홍장에게 혁명은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양광과 강남의 독립은 연합국이 청 조정을 부정하고, 철저하게 박살 내기로 작정해야 가능한 일로, 최악의 상황으로 상정한 경우였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이홍장은 자신을 수반으로 하는 광동 임시정부를 구상했다. 혁명파는 그저 이용 대상이었다.
연합국이 북경 점령 후 광서제의 조정을 인정하고, 이윽고 북양대신 겸 직례총독으로 임명되자, 이홍장은 양광 독립이라는 모험 대신에 권좌로의 복귀를 택했다.
북경의 붕괴를 틈타, 지방에서는 혁명 기도가 계속되었다.
강유위의 지도를 받은 변법파 당재상(唐才常)은 광동의 손문과도 연락이 닿고 있었다.
"반동 세력을 타도해 황제 폐하를 보위하고, 국회를 개설해 입헌 정치를 실시하자!"
당재상이 무한에서 자립군(自立軍)을 결성해 ‘보황(保皇)’과 ‘입헌 정치’를 부르짖으며 봉기하자, 호광총독 장지동은 원세개에게 명해 혁명군을 진압했다.
혁명파 손문의 시도도, 변법파 당재상의 시도도 무위로 끝났다. 껍데기만 남은 청 조정의 주도권은 완전히 양무파 노신들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이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틀어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홍장은 황제가 북양대신으로 임명한 후에도 상해까지만 북상했을 뿐이었다. 상해에서 와병을 핑계로 주저앉았다.
상해에서 한동안 머무르며 때를 기다리던 이홍장은, 9월 15일에야 천진으로 북상을 개시했다.
이홍장은 이때 러시아 군함의 호위를 받아 움직였다. 그가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이유는 분명했다.
천진에 도착한 이홍장은 러시아 태평양 함대 사령관 알렉세예프와 회동했다.
이윽고 이선이 파견한 전권대사 김옥균과도 회동했다. 회담은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이 자리에서 중대한 밀담이 오고 갔다.
‘몽골과 신강의 이권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중국은 지켜야 한다. 아니, 최악의 경우 만주의 이권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중국 본토는 지켜야 한다. 매국노라고 비난할 테면 비난하라지. 언제나 대책 없는 강경파 놈들이 나라를 이 꼴로 만들지 않았는가!’
본래 해방(海防)파인 이홍장은 내륙의 방위에 대해 1870년대부터 회의적이었다. 그는 좌종당의 서역 원정에 반대했고, 야쿠브 벡의 이슬람 정권도 인정할 수 있다고 여겼다. 몽골과 신강의 방어는 해방파에 있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좌종당이 논쟁에서 승리하여 서역 원정을 성공시켰지만, 이홍장은 여전히 몽골과 신강 지배에 회의적이었다.
이홍장이 손문과 같은 한족 민족주의자일 리는 없지만, 만주를 성지로 여기는 청 황실과 달리 중국 본토의 방위가 ‘변방’보다 중요했다.
러시아에 협력해서 변방의 이권을 내주는 대신, 청나라의 종묘사직과 중국 18성은 지켜내려 했다.
이홍장의 전권대신 임명은 러시아와 한국의 지지를 받았으나, 역시나 영국과 일본의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뜻밖인 건, 독일이 이홍장의 임명을 격렬하게 반발한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이홍장을 인정할 수 없다! 다른 전권대신을 임명하기 전에는 협상에 응하지 않겠다."
발더제 원수는 협상 불가를 선언했다.
독일의 몽니는 이홍장이 부적격자거나, 영국의 의심대로 그가 친러파라고 판단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유럽에서 파병한 독일군 2만이 완전히 도착하기를 기다리기 위해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이화원에 사령부를 설치한 발더제와 독일군은, 케텔러의 원수를 명분으로 청나라를 위협했다.
독일군은 의화단 정벌을 내세워, 1만의 군대를 이끌고 이홍장의 임지인 직례성의 성도 보정부를 점령하고 약탈했다. 이홍장의 무저항 명령에 보정부는 항복했지만, 독일은 임의로 ‘전범재판’을 실시해 의화단과 협력한 관료들을 처형했다.
이윽고 독일은 만리장성 산해관과 장가구(張家口)까지 점령하는 강수를 뒀다. 독일령 교주만이 있는 산동반도에도 군대가 파병됐다. 만리장성 이남 화북을 홀로 지배할 기세였다.
독일의 예상치 못한 폭주에 연합국도 어안이 벙벙한 상황이었다.
"원수, 알겠소? 청으로부터 최대한 많은 배상금을 받아 내, 대양함대 건설의 기초로 삼아야 하오. 그리고 키아우초우(Kiautschou, 교주만)를 넘어 산동반도 전역을 지배권에 넣어야 하오. 원수에게 무제한의 전권을 부여하겠으니, 마음껏 중국에서 휘젓도록 하시오."
빌헬름 2세는 발더제에게 초강수를 지시했다.
카이저가 야심 차게 추진하고 있는 세계 정책, 대양함대 건설은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다. 청나라로부터 최대한 많은 배상금을 뜯어내 건함 비용에 보탤 생각이었다.
더욱이 러시아가 만주 전역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자, 카이저는 호승심이 들었다. 겨우 산동의 교주만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최대 산동반도 전역, 최소한 연대(煙臺, 옌타이) 지부(芝?, 츠푸)항은 독일 동양함대를 위한 기지로 확보해야 한다는 전략이었다.
카이저의 미치광이 전략에 경계하는 건 역시나 중국 시장의 지배자, 영국이었다. 카이저가 야심을 드러내고 있는 연대는 영국이 조차한 위해위의 지근거리였다.
"만주 전체를 먹어 치우려는 러시아 불곰을 상대하는 것도 피곤한 일인데, 이제 독일까지 극동에서 날뛴단 말인가!"
9월 총선 승리로 재집권한 영국 보수당의 총리, 솔즈베리는 ‘중국의 주권 존중과 영토 보전’을 선언한 바 있었다.
중국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영국으로선, 중국이 여러 세력으로 조각나는 건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패전으로 다루기 쉬워진 청 조정을 내세워 반식민지 단일 국가로 유지하는 게 더 유용했다.
하지만 러시아에 이어 독일까지 영국의 극동 지배에 도전하려 하고 있었다. 그레이트 게임의 적인 러시아는 그렇다 쳐도, 최소한 독일은 폭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솔즈베리는 급히 독일로 가서 카이저를 만났다.
결국 카이저로부터 ‘독일은 중국의 영토 보전을 지지하며, 단독 군사 행동은 하지 않는다.’라는 답변을 받기는 했으나, 솔즈베리는 카이저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카이저가 추구하는 세계 정책이든, 함대 건설이든 모두 영국의 국익과 충돌하는 일이었다.
"고든! 우리는 차이니즈 고든의 복수를 원한다!"
솔즈베리 내각은 고든의 복수를 열망하는 영국 여론도 무시할 수 없었다. 호전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재선한 솔즈베리는 유권자에게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 줘야 했다. 내각은 북경 함락으로 충분히 성과를 보여 줬다고 생각했지만, 호전적인 영국 여론은 달랐다.
"러시아가 만주를 집어삼키고, 독일이 산동을 집어삼키고, 심지어 일본조차도 아모이를 삼키려 한다. 그런데 대체 대영제국은 뭘 한단 말인가?"
솔즈베리 내각은 호전적인 여론을 만족시켜 주기로 했다. 영국이 중시하는 장강 유역의 안정을 위해, 독일이 은근히 노리고 있던 절강의 주산(舟山)군도에 군함을 파견했다.
아편전쟁 당시 점령했던 곳이었던 만큼, 다시 유니언 잭을 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영국은 손쉽게 주산군도를 점령했다.
"미합중국은 중국의 주권 보호, 영토 보전, 문호 개방을 선언한다. 중국 영토를 분할하려는 모든 시도는 중단되어야 할 것이다."
열강 중 유일하게 중국의 보호를 외친 건 미국이었다.
미국은 국무장관 헤이의 명의로 제2차 문호 개방 선언을 통해 중국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미국은 열강의 분할 시도를 강력히 비판하고, 각국에 점령지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카이저와 차르는 중국의 분할을 꾀하고 있다. 하지만 분할은 불가능하다. 저 광대한 대륙, 수많은 인민을 어떻게 열강이 다스릴 건가? 중국은 중국인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 중국의 질서를 되찾는 대로 연합군은 철수해야 한다."
미국이 중국의 보호자를 자처해 분할에 반대한 건, 현실적으로 광대한 영토와 4억의 인구에 달하는 중국을 서구 열강이 분할 통치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미국의 공업은 광대한 중국 시장을 원했고, 중국 시장을 노리는 후발 주자로서 분할보다는 우호적인 단일 시장으로 남아 있는 게 좋았다.
그렇기에 미국은 영토 분할에 반대하고 있었지만, 의견을 함께하고 있던 영국마저 주산군도 점령에 나서자 미국의 팽창주의자들도 목소리를 냈다.
"우리만 도덕성을 내세워 뒤처질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아시아 함대를 위한 전진 기지를 마련해야 한다."
미국은 비공식적으로 복건성 삼사만(三沙灣)의 조차를 요구했다. 하지만 이는 이탈리아와 일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탈리아는 자신들이 삼사만을 노리고 있었기에 반대했고, 일본은 복건 전역을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여기기 때문에 반대했다.
"대일본제국은 결코 아모이에서 철수하지 않는다!"
영국과 미국이 일본에 아모이 철수를 요구했지만, 일본군은 계속 버티고 있었다.
일본 최초의 정당 주도 내각, 오쿠마 시게노부의 헌정당(憲政?) 내각은 열강에 지나치게 양보적이라는 군부의 비판을 받고 있었다.
열강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이토 히로부미는 철병을 권했지만, 군부는 모처럼 육·해군이 한마음이 되어 아모이 점령을 외쳤다.
"러시아, 독일, 영국은 청국으로부터 영토를 빼앗으려고 하고 있다. 심지어 한국조차 영토를 확대하려고 한다. 그런데 왜 일본만 안 된다는 건가? 일본은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하고, 북경 점령에도 가장 큰 공을 세웠다! 복건은 결코 양보할 수 없다!"
군부의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오쿠마 내각은 강경한 태도로 나섰다. 아모이에서 철수했다가는 내각이 무너질 판이었다.
열강은 청제국의 잔해 위에서, 이익을 챙기기 위해 이전투구를 벌였다.
1900년 현재, 중국에 임박한 현실은 분할의 위기였다. 이 시점에서, 중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건 중국인에게 달려 있지 않았다. 오로지 열강의 손에 달려 있었다. 열강의 각축에 따라 중국의 운명이 결정될 터였다.
- 294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