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유라시아의 천명
1900년 9월 이후, 만주 대부분은 러시아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만주 3성은 청나라 장군들이 행정권을 행사하지만, 실질적으로 러시아의 관리를 받았다.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청나라 사이를 ‘중재’하는 입장이었다. 만주 지배도, 외교 협상도 그랬다.
러시아 극동군을 상대하는 이선은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오고 있었다.
만주에 주둔하는 러시아군은 18만에 달했고, 장군들은 군대의 힘을 믿고 강경책으로 일관했다.
"1860년대 알렉산드르 2세께서 투르키스탄을 확보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만주를 부하라나 히바처럼 속국으로 만들고 군정을 합시다!"
11월 9일, 태평양함대 사령관 겸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세예프 제독은 성경장군 증기와 밀약을 맺었다. 군정이나 병합을 외치는 현장의 소리가 점점 커지자, 극동군 내에서 상대적으로 온건파인 알렉세예프는 서둘러 증기와 협정을 맺어 버렸다.
하지만 이는 재무부와 외무부를 따돌리고, 한국도 배제한 상태에서 육·해군부의 지시로 독단적 밀약 체결을 강행한 것이었다.
1. 만주는 청국의 영토로 남고 청국의 행정 질서에 의하여 통치되지만, 동청철도 건설과 치안 유지를 위하여 일시적으로 러시아군이 점령을 계속한다.
2. 청국 정부는 만주에 군대를 주둔하지 않는다. 러시아군에 의해 접수되지 않은 모든 무기와 비축물자는 러시아 당국의 관리하에 인도한다.
3. 러시아의 주둔군이 없는 지점에서 각종 요새, 포대, 탄약고 등은 러시아군의 입회하에 파괴한다.
4. 장군과 도통(都統)은 행정적 책임만을 진다. 러시아는 코미사르(Komissar, 전권위원)를 파견해 이들을 감독한다. 봉천성은 관동주 장관, 길림성과 흑룡강성은 아무르 총독이 코미사르를 파견한다.
5. 러시아 군정이 실시된 영구(잉커우) 등은 러시아 제국의 판단으로 차후 행정권을 반환한다.
……
밀약 8개조는 사실상 만주 전역을 러시아의 감독하에 두겠다는 것이었다. 증기는 저항했지만, 알렉세예프의 압력에 결국 협정서에 서명했다.
이는 북경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친러파’라고 의심받는 이홍장조차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성경장군 증기에게 조약을 맺을 권한 같은 건 없다. 증기는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나 다름없다! 증기를 해임하고 북경으로 소환한다."
이홍장은 밀약의 내용을 영국 타임스 특파원에게 흘렸고, 당연히 영국은 격렬히 반발했다.
"러시아의 코미사르는 부하라의 러시아 총독이나 인도의 총독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되면 만주는 사실상 러시아의 보호령이 되는 것이다!"
영국의 폭로와 반발은 러시아에 대한 비난과 압박으로 이어졌다.
"쯧, 벌써 이렇게 야욕을 드러내면 어떡하나! 군인들은 도저히 외교라는 걸 모르는군! 눈앞에 보이는 힘만 믿고 강경하게 나오니. 영토 확장이라는 건 힘만으로 될 수 없는 일이거늘! 젠장, 황제와 정부는 저 멀리에 있고, 군대는 가까이에 있으니."
이선도 밀약 내용을 보고 혀를 찼다.
이건 열강이 절대 용인 못 할 일이고, 한국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선은 니콜라이 2세가 머무르고 있는 크림반도 얄타에 이강과 민영환을 보내고, 온건론을 대표하는 재무대신 비테와 연합했다. 이들은 차르에게 계속 설득을 하고 있었다.
불운하게도, 그 무렵 니콜라이 2세는 독감으로 병석에 누었다.
뒤이어 차르가 독감이 아니라 티푸스(typhus)에 걸린 것으로 판명되자 궁정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대신들 대부분이 얄타로 소집되었다.
전제군주국인 러시아는, 차르의 부재란 치명적이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했다.
차르에게는 딸만 셋이었고, 황후가 넷째를 임신했다지만 결과를 알 수가 없었다.
작년에 황위 계승자였던 동생 유리 대공이 결핵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막내 동생 미하일 대공이 황위 계승자로 지명된 상황이었다.
- 극비. 차르 티푸스로 위독함. 후계자 계승 논의되고 있음. 미하일 대공이 계승 유력. 훈령 바람.
이강의 전문을 받은 이선은 놀라지 않았다.
- 차르는 반드시 회복될 것임. 동요하지 말고 기존에 받은 훈령을 충실히 이행할 것.
이선의 전문을 받은 이강과 민영환은 의아했다.
"성상께선 어찌 이리도 차르의 회복을 확신하시지요?"
"차르와 성상께선 절친한 벗이기도 합니다. 친구가 반드시 회복되리라는 믿음이 있으시겠지요."
"그렇군요. 그럼 성상께서 내린 훈령을 이행하도록 합시다."
이강은 근래 티베트 불교 승려 아그반 도르지에프(Agvan Dorzhiev)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는 물론 이선의 명을 따른 것이었다.
"스님, 평안하십니까?"
"부처님의 가피로 평안합니다. 대공께서는 평안하십니까?"
"근래 스님을 자주 뵙고 대화를 하니, 마음이 매우 평안합니다.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차르께서 편찮으시다고 들었는데, 병세는 어떠신지요."
"곧 회복하실 겁니다. 제 생각에는 스님께서……."
도르지에프는 특이한 승려였다. 부랴트계 몽골인으로 러시아 국민이지만, 동시에 달라이 라마의 ‘철학 토론 파트너이자 영적 고문’이었다.
불교 교리에 능통한 동시에 근대 세계에 대한 이해도 높아, 티베트의 독립과 근대화를 꿈꾸는 달라이 라마 13세의 정치 고문 역할을 수행했다.
1896년 니콜라이 2세 즉위식 무렵에 페테르부르크에 온 도르지에프는, 그 무렵 동양에 대한 관심이 높은 일부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러-청은행 회장이자, 1891년 니콜라이 황태자의 세계여행에 동참한 에스퍼 우흐톰스키(Esper Ukhtomsky) 공작이 도르지에프의 후원자가 되었다. 우흐톰스키의 주선으로 도르지에프는 차르도 알현할 수 있었다.
우흐톰스키 공작은 재무대신 비테의 파벌이었고, 러시아의 ‘평화적인’ 동방 정책을 지지했다.
이선과 우흐톰스키는 1891년 오쓰 사건을 막은 인연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 덕택에 이강은 비테-우흐톰스키-도르지에프로 이어지는 인맥을 구축할 수 있었다.
"티베트는 전설 속 샴발라의 땅입니다. 하얀 칸, 차르야말로 차크라바르티 라자(cakravarti-r?ja, 전륜성왕)의 환생으로 티베트와 불교를 구원하실 분입니다. 티베트와 몽골의 독립은 오직 신성한 차르의 러시아에 의해 구현될 수 있습니다."
‘하얀 칸(Tsagaan khan)’은 러시아 차르가 주치 울루스(킵차크 칸국)의 정당한 후계자로서, 칭기즈칸을 계승해 장차 모든 유목민의 칸으로서 유라시아를 지배하리라는 이론이었다. 여기에 도르지에프는 불교 신비주의와 러시아의 팽창 이론을 결합했다.
몽골의 지배를 ‘타타르의 멍에’로 멸시하는 러시아인 대부분은 코웃음을 칠 이론이었지만, 우흐톰스키처럼 진지하게 믿는 사람도 있었다.
"불교의 나라에서 오신 대공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뭔가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 같지만 대충 맞다고 해야겠다.’ 프린스 이강, ‘이강 대공’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동양사와 불교에 대해 아는 척을 해야 했다.
한국이 오랜 불교의 전통을 자랑한다지만, 조선 왕조는 오랫동안 숭유억불의 나라였고, 근래에야 불교에 대한 해금이 사라졌다. 애초에 티베트 불교와 한국 불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에 이강은 불교에 대해 그다지 아는 바가 없었지만, 이선의 지시를 받은 이상 속성으로 유라시아 세계와 불교 이론에 대해 공부해야 했다.
이선은 이강에게 온갖 지식을 상세하게 알려 주어 써먹게 했다. 이강은 새삼 형이자 황제의 박학다식함에 감탄했다.
"흠흠, 그렇습니다. 만주의 칸은, 몽골의 칸 위를 얻음으로써 유목 세계를 통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명을 얻어 중국까지 차지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리고 달라이 라마를 스승으로 섬기고, 티베트 불교를 믿는 몽골과 유목 세계의 안정을 꾀했지요. 이해하기 쉽게 비교하자면, 러시아 차르께서 폴란드의 왕과 리투아니아와 핀란드의 대공, 카프카스의 대군주이시자 투르키스탄 제후들의 군주인 것과 마찬가지로, 대청 황제는 만주와 몽골의 칸이자, 중국인의 천자요, 티베트의 전륜성왕인 것입니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는 유라시아 초원의 교황과 같은 존재지요."
러시아 국민이자 몽골 혈통이자 티베트 불교 승려인 도르지에프는, 러시아-몽골-티베트를 잇는 ‘범 달라이 라마 주의’를 주창했다.
그동안 대청 황제가 몽골의 칸이자 티베트의 보호자를 자처한 것처럼, 천명이 무너진 그 자리를 러시아의 차르가 계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신비주의로 표방했지만, 나름대로 현실적인 정세 판단의 결과였다.
"대공의 말씀이 옳습니다. 한국이 러시아의 후원을 받아 근대화에 돌입하여 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마침내 당당한 제국이 되어 열국의 일원이 된 걸 보고, 티베트인과 몽골인의 마음에서 본받고 싶은 마음이 싹텄습니다. 달라이 라마께서도 티베트의 근대화와 독립, 몽골의 독립을 원하십니다."
망해 가는 청나라의 압제에서 벗어나고, 티베트의 강역을 위협하는 영국령 인도제국의 압박에서 벗어나려면, 현실적으로 손을 잡을 수 있는 대상은 러시아뿐이었다.
도르지에프의 설득을 받은 달라이 라마 13세는 친서를 차르에게 보냈다. 도르지에프는 달라이 라마의 밀사였고, 티베트의 특사였다.
그런데 막상 차르를 알현하기 위해 먼 길을 와서 크림에 도착하니, 차르가 병석에 눕는 바람에 친서 전달조차 못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어서 회복하셔서, 달라이 라마의 친서를 받으셔야 할 텐데……."
"하얀 칸께서는 천명을 받으신 몸이기에, 결코 병 따위에 쓰러지지 않으십니다. 다라보살(Tara)께서 차르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머지않아 반드시 깨어나실 겁니다."
도르지에프의 ‘예언’ 덕분인지, 니콜라이 2세는 12월 11일 마침내 쾌유해 병석에서 일어섰다.
우흐톰스키는 병석에서 일어난 차르에게 도르지에프의 영험함을, 달라이 라마의 신성함을 전했다.
가뜩이나 신비주의적이고 예언 같은 걸 좋아하는 차르는 궁금해했고, 도르지에프를 만나 달라이 라마의 친서를 받았다.
친서의 내용은 티베트와 러시아가 정식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티베트에 러시아 외교관을 파견해 러시아 대사관을 세운며, 티베트는 러시아의 군사 원조를 받아 군대를 양성하길 희망한다는 것이었다.
"달라이 라마께서 러시아에 이렇게 우호적이라니 기쁘게 생각하오. 군사 원조는 복잡한 문제이니 즉시 결정할 수 없으나, 외교관은 곧 파견하도록 하겠소. 짐은 티베트의 안녕을 기원하니, 다음에는 밀사가 아니라 정식 사절로 오길 바라오."
"역시 황제 폐하께서는 전륜성왕의 환생이십니다! 달라이 라마께 아뢰고 정식 사절단을 파견하도록 하겠습니다."
니콜라이 2세는 전륜성왕이 뭔지도 몰랐지만, 어찌됐건 자신의 덕을 찬양하니 만족감을 표했다.
건강을 회복한 차르는 국정에 복귀해, 만주 문제에 대한 보고서도 받았다.
"섣불리 청국을 압박하여 밀약을 체결해 열강의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알렉세예프는 본국의 승인 없이 멋대로 밀약을 체결했으니, 밀약을 폐기하고 정식 교섭을 해야 합니다."
"러시아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습니다. 열강이 모두 중국에서 덤벼드는데, 18만 대군을 파병하고 얻는 게 없으면 러시아의 위신이 어찌 되겠습니까?"
재무대신 비테와 외무대신 람스도르프는 군부의 독단을 비판했다. 육군대신 쿠로파트킨은 러시아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일이라고 강변했다.
강경론과 온건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차르는, 이강을 통해 이선의 친서를 전달 받았다.
…… 바야흐로 19세기와 20세기가 교차하는 주후(主後, AD) 1900년은 대변혁의 해입니다.
1900년 현재, 청조의 천명은 무너졌습니다. 청은 이제 천명을 잃고 껍데기만 남은 나라입니다. 중국인들은 만주의 칸을 다시 장성 밖으로 돌려보내려 할 것입니다.
중국 문제는 중국인에게 맡기십시오. 하지만 중국인이 장성 밖의 문제에는 결코 개입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유라시아의 천명을 계승하실 분은 오직, 하얀 칸뿐입니다. 만주인이 찬탈한 칭기즈칸의 제위를 되찾고, 티베트와 몽골의 독립을 이끌어 주실 분은 오직 차르이십니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 집착하여 강경론으로 일관해, 열강의 주목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티베트와 몽골 문제는 달라이 라마를 이용하십시오. 마찬가지로 만주와 중국 문제는 청 황제와 이홍장을 이용하십시오. 폐하께서 필요하다면 짐도 언제든지 이용하십시오.
결코 군대의 힘만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눈앞에 보이는 힘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현지인의 전통과 여론을 존중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야 합니다.
보다 더 큰 그림, 청조가 무너진 후의 미래를 봐야 합니다. 시간을 두고 차분히 천명을 기다리십시오. 짐이 동양에서 폐하의 큰 그림을 함께 거들겠습니다.
서방 로마의 후계자와 동방 칸의 후계자가 하나로 결합할 때, 진정한 제3의 로마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짐은 위대한 선제, 알렉산드르 2세 때부터 러시아와 한국 공동의 이익을 위해 일해 왔습니다. 지금은 더욱 더 황제 폐하와 러시아를 위해, 한국을 위해 함께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황제 폐하의 좋은 형제, 이선.
니콜라이 2세는 친서를 받고 기뻤다.
이선의 현란한 정세 분석은 도르지에프의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예언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고, 신기루 같았던 미래를 현실처럼 바라보게 해 주었다.
‘역시 이선은 정말 똑똑한 친구야. 더욱이 위험을 무릅쓰고 할아버님과 내 목숨도 구해 주지 않았는가. 그렇게 유능하고 신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내 곁에 남아 조언자가 되었더라면 정말 좋았을 터인데. 대신이란 자들은 하나같이 신뢰할 수가 없으니…….’
니콜라이는 아쉬움을 느끼다가, 친서를 다시 쳐다보았다.
‘아니야, 이선이 동양에 있는 게 낫지. 동양에서 러시아의 충실한 동맹이 되고, 더 넓은 세계로 인도하지 않고 있는가? 만주와 신강, 몽골과 티베트의 보호자라, 로마의 후계자이자 칸의 후계자라…….’
니콜라이는 정신적 고양을 느꼈다. 대신들은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비난하겠지만, 이선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니콜라이는 이선의 말에 깊은 흥미를 느꼈다.
한편, 북경에서는 이선이 전권대사 김옥균을 이홍장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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