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302화 (301/812)

302화 한 세기의 끝

동양이 의화단 전쟁의 참화에 빠지고, 그 수습으로 정신이 없었던 1900년과 1901년은, 다사다난했던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가 시작되는 해였다.

단순히 연도상의 숫자가 바뀌었을 뿐이지만,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느낌은 남달랐다.

‘세기말’에 대한 쇠퇴 의식과, ‘세기초’에 대한 기대감이 동시에 폭발했다.

19세기는 서양의 세기, 유럽의 세기, 더 나아가 영국의 세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을 이룩한 영국은 서양 문명의 비약적인 진보를 이끌어 냈고, 전 세계에 시장을 확대하고, 식민지를 빼앗으며, 패권을 확립해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했다.

대영제국의 상징은 바로 여왕, 빅토리아였다.

1901년 1월 22일, 19세기의 종말과 20세기의 시작을 상징하듯, 빅토리아 여왕이 서거했다.

향년 81세, 재위 64년. 1837년부터 시작된 기나긴 여왕의 시대가 종결되었다.

여왕의 임종에는 왕태자 에드워드와 외손자, 독일의 빌헬름 2세가 함께 했다.

모두가 함께 여왕의 서거를 슬퍼했다. 이때만 해도 삼촌과 조카 사이의 불화가, 국가 간의 불화로 이어지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브리튼 연합 왕국과 아일랜드의 여왕, 인도의 여제이신 빅토리아, 1901년 1월 22일 서거!"

"위대한 빅토리아 시대의 끝……. 에드워드 시대의 시작!"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는 영국의 변혁, 번영, 패권, 위대함을 상징했다.

많은 이가 빅토리아 시대의 종결을 슬퍼하며, 추억에 잠겼다.

2월 2일에 거행된 여왕의 장례식에는 여왕의 자손들, 빌헬름 2세를 포함한 외국의 군주와 왕족들도 대거 참석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4남 5녀를 두었고, 그 자식들은 유럽 왕가의 왕족들과 혼인하여 자손들을 낳았다. 빅토리아의 자손들은 유럽 곳곳에 있었으니, ‘유럽의 할머니’라고 불릴 만했다.

동양권에서는 거리 문제로 참석할 수가 없었으나, 마침 영국에 유학 중이던 시암 왕세자 와치라웃(라마 6세)과 유럽에 체류 중이던 의친왕 이강이 참석했다.

"대한제국 황제 폐하께서는 대영제국의 대군주이시자 인도 제국의 황제 폐하께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하라 명하시었습니다."

"귀국 황제 폐하의 애도에 감사드리오."

의친왕 이강은 새 국왕 에드워드 7세에게 대한제국의 국서를 전달했다.

장례식은 최전성기의 제국답게, 영국의 국력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여왕의 영구차 뒤로 에드워드 7세 이하 왕족들, 근위대, 기병대, 시종의 행렬이 이어졌고, 같은 시각 바다에서는 군함들이 조포(弔砲)를 쏘며 애도했다.

수많은 사람이 애도하는 성대한 장례식 행렬을 보면서, 의친왕은 한 시대가 끝났음을 직감했다.

‘영국의 세기가 이렇게 끝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세기에도 영국의 패권은 계속될 것인가? 폐하께서 명한 바와 같이, 영국의 변화를 지켜봐야겠구나.’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석한 대표단은 귀국길에 올랐지만, 이강은 황제의 훈령을 받고 유럽에 남았다.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의 즉위식이 있을 1902년까지, 이강은 런던에서 계속 체류하며 사실상의 주영 공사 역할을 수행하기로 했다.

영국과의 관계 개선 및 정보 획득이 이강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2월 3일, 일본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죽었다. 향년 66세.

후쿠자와는 메이지 유신과 근대 일본을 상징하는 사상가로, 철저한 근대화 지상론자이자 문명개화론자였다.

후쿠자와가 일본, 더 나아가 동아시아에 끼친 영향은 상당했으니, 서양의 개념을 번역하여 소개했다. 대표적으로 ‘Liberty’를 ‘자유(自由)’, ‘Civilization’을 ‘문명(文明)’이라고 번역한 게 그였다.

후쿠자와의 자유주의적 관점은 《학문의 권장 (學問のすすめ)》에서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아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는 말로 유명하다.

후쿠자와는 동시에 철저한 사회진화론자, 제국주의자였다. ‘압제도 내가 당하면 싫지만, 내가 남을 압제하는 것은 몹시 유쾌하다’는 말로 인간의 이중성을 꼬집었다.

이는 실로 메이지 일본의 시대정신이었다. 메이지 일본은 서양 열강의 압제는 당하기 싫지만, 주변국을 압제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했다.

서양을 문명개화의 기준으로 삼은 후쿠자와는, ‘반개(半開)’한 일본 대중을 경멸했고, ‘미개’한 주변국을 혐오했다.

하지만 후쿠자와는 실제 역사와 달리 결정적인 ‘탈아론(脱亜論)’의 단계로 접어들지는 않았으니, 조선에서 ‘문명개화’가 성공한 덕분이었다.

1881년 조사시찰단 파견 이래, 조선 개화당은 후카자와 및 문명개화론자와 연대했고, 김옥균·박영효·홍영식·유길준·서광범·서재필 등은 후쿠자와를 사상적 선구자로 여겨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개화당이 집권하여 강력한 근대화 정책을 밀어붙이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 내자 후쿠자와는 찬사를 거듭했다.

"조선국의 완화군은 계몽 군주이니, 가히 동양의 표트르 대제와 같다. 개화당은 일본의 유신삼걸과 같으니,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은 가히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와 같다."

"조선국은 당당한 문명개화의 길로 접어들었으니, 일본은 개화의 선배로서, 이들이 바른길로 나아가도록 도와야 한다."

후쿠자와는 자신이 발행하는 ≪지지신보(時事新報)≫에 조선 개화당을 찬양하는 언설을 싣고, 조일우호를 주장했다.

1894년 동아시아 삼국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열렬한 제국주의자로서 전쟁을 찬양했다.

"이 전쟁은 진보와 수구, 문명과 야만의 대결이다. 청국은 수구와 야만의 상징이니, 이들을 궤멸시키는 것이 문명으로의 길이다."

"한국은 일본과 함께 청국을 격파하였으니, 당당한 자주독립국이자 일본의 벗이다. 아시아에서 벗이라 할 만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일본은 한국과 함께 아시아에 계몽을 전파해야 한다."

후쿠자와의 ‘본심’을 알지 못하게 된 개화당 지도부는 그를 ‘한국의 벗’으로 여기고 있었고, 후쿠자와 사망에 애도를 표했다.

실제 역사에서 보였던 후쿠자와의 본심을 알고 있는 이선으로선, 바뀐 역사에서 그의 ‘개심’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자기들 기준에 맞춰서 평가하니 가소롭지 않을 수가 있나. 찬양해 봐야 별로 고맙지도 않아.’

후쿠자와나 일본의 문명개화론자들은 개화당과 대한제국을 찬양했지만, 결국 한국이 일본의 ‘선도(先導)’를 받아 함께 아시아 침략에 나서자는 말이었다.

이선은 굳이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가 보다 중시하는 건, 영국과 미국의 정책 변화였다.

"미합중국 대통령 암살!"

"매킨리 대통령 암살, 루스벨트 부통령이 대통령을 계승!"

9월 14일,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맥킨리가 2기 임기 6개월 만에 암살당했다. 범인은 아나키스트였다.

맥킨리는 ‘명백한 운명’을 내세워 미국의 팽창을 주장하던 제국주의자였다. 그의 재임기에 미국은 하와이를 넘어 필리핀까지 팽창했다.

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직을 계승했다. 그는 국내 정치적으론 진보적이었으나, 대외 정책은 전임자를 능가하는 팽창론자이자 제국주의자였다.

19세기에는 아메리카 대륙에 머물러 있던 미국의 입김은,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태평양을 넘어 아시아에까지 퍼져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선두에는 42세의 최연소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있었다.

1901년 11월, 한 시대의 끝을 상징하듯, 또 한 사람의 거인이 생을 마감하려 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청나라 최후의 명신, 이홍장이었다. 6척이 넘는 거구만큼이나 중국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친 거인이었다.

79세의 이홍장은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사명을 다하고 있었다. 10월 25일, 러시아 및 한국과 만주 협약을 맺어, 일부 이권을 내주는 대신 러시아군의 만주 철병을 약속받았다.

주산군도를 점령한 영국, 연대(옌타이)를 점령한 독일, 북해(베이하이)를 점령한 프랑스, 해남도(하이난)를 점령한 일본과의 조차 협상은 경친왕이 진행했다.

변방을 희생시키는 대신 중국의 통일을 지키려 했던 이홍장은, 북경 의정서 체결 후 서안 망명 조정을 압박해 항복을 받아 냈다. 더 이상 버틸 도리가 없었던 서태후는 생명 보존을 약속받고 항복했다.

"내가 어리석어 역적과 폭도에게 놀아났으니, 대청을 위기에 빠트렸다. 이에 모든 책임을 지고 다시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 나뿐만 아니라, 다시는 황실 여인이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라."

서태후는 대국민 사죄 성명서를 반포하고 망명 조정을 해산했다.

전쟁을 주장한 단군왕 재의와 황태자로 추대된 그 아들 보국공 부준은 신강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고 추방되었다.

서안 조정을 지탱했던 동복상과 배외주의자들은 모두 파직되어 유배 길에 올랐다.

서태후의 수족이 되어 더러운 일을 하고, 광서제의 후궁 진비를 핍박해 자결을 강요한 환관들은 모조리 처형되어 효수되었다.

유일하게 처벌받지 않은 이는 서태후였다. 동치제의 모후, 광서제의 법적 모친이라는 위치를 고려해서였다. 하지만 서태후는 다시는 정치에 개입할 수 없었으며, 북경으로 돌아와 이화원 처소에 영구히 유폐되었다. 40년 넘게 정치에 개입하며, 청나라 몰락에 혁혁한 기여를 한 여인의 최후였다.

"독판정무처는 군기처를 대신하여 군국의 사무와 정령을 집행하라."

표면적으로나마, 중국은 재통일되었고 광서신정은 재개되었다.

경친왕 혁광과 2명의 만주 귀족, 이홍장·유곤일·장지동 3인, 총 6인은 독판정무처를 구성해 최고 권력을 집행했다. 만한 동수를 유지하기 위해 6인으로 구성되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양무파 3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광서제는 여전히 전권을 행사하지 않았지만, 별말 없이 독판정무처의 권력 행사를 추인했다.

이홍장은 79세, 유곤일은 72세, 장지동은 65세이니, 31세의 광서제는 조급할 필요 없이 때를 기다릴 수 있었다.

11월 초, 만주 협약을 체결하고 귀국길에 오를 예정인 이선이 이홍장을 찾아왔다.

"중당께서 많이 편찮으시다는 말을 듣고, 귀국하기 전에 찾아뵈었습니다."

"한국 황제께서 친히 외신(外臣)을 찾아와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이홍장은 자리에 앉아 예를 표했지만, 병색이 완연했다.

"어서 쾌차하셔야지요. 청국은 아직 중당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늙은이가 오히려 나라를 망친 것 같아 한스러울 따름입니다."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중당이 아니었더라면 청국은 진작 분할의 위기에 놓였을 것입니다."

이홍장은 쓴웃음을 흘렸다. 20년 전만 해도, 완화군 이선은 어린 망명자에 불과했고, 그의 호의를 구하려 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이선은 떠오르는 신흥국의 젊은 황제였고, 이홍장은 몰락하는 국가의 죽어 가는 신하였다.

이홍장은 큰 상심에 빠져 있었다. 연합군이 철수했다고는 하나, 북경 함락의 충격은 늙은 이홍장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연합군의 철수를 이끌어 낸 북경 의정서의 내용은 가혹했다. 이제 청나라는 목숨은 붙어있으되 죽음이 임박한 환자 처지였다.

‘어쩌다가 이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40년 가까이 외교를 책임져 온 이홍장은 책임을 통감했지만, 한스러운 생각도 많았다.

능력으로 본다면, ‘동양의 비스마르크’로 칭송받던 이홍장도 부족함이 없었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한국의 이선과 더불어 동양의 3대 정치인으로 평가받는 이홍장이었다.

하지만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상징되듯, 이토와 이선은 승리자가 되었고, 이홍장은 패배자가 되었다.

6년 후에는 더 비참해졌다. 일본과 한국은 더욱 강성해졌는데, 대청은 멸망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내게 이토나 저 완화군처럼 전권이 있었더라면, 황실과 국가의 확고한 지지가 있었더라면,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되고 말았겠는가?’

이홍장은 자신이 무능한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천황과 정부의 확고한 지지를 받는 이토, 전국가적 지지를 받는 이선과 달리, 이홍장은 외부의 적보다 더 위협적인 내부의 적과 싸워야 했다. 그는 언제나 견제와 질시의 대상이었고, 역적 후보라는 의심을, 매국노라는 비난을 끊임없이 받아 와야 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토와 이선으로 대표되는 일본과 한국의 지도부는 혁명적 변화의 물결을 탄 것이지만,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나이가 좀만 젊었더라면, 이런 국가적 치욕을 당하기 전에 내가 북경을 쳐 간적들을 쓸어 버렸건만!’

하지만 후회해 봐야 소용없었다. 역사는 바꿀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 일을 돌이켜 보면, 외신은 폐하와 조선에 적지 않은 호의를 베풀었고, 그게 폐하의 위업에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그런 측면은 있지요."

이홍장이 옛일을 상기시키니, 이선은 솔직히 인정했다. 결국 적으로 돌변하긴 했지만, 집권 과정과 개혁 초기에 이홍장이 도움을 준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외신은 머지않아 곧 죽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김 공을 보내 외신에 약속했던 바를, 외신이 죽은 후에도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이홍장은 황제를 따라온 김옥균을 가리켰다. 이선은 김옥균을 통해 이홍장에게 약속을 한 바가 있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짐은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입니다. 귀국 황상께도 약속드렸습니다."

"그럼 믿겠습니다. 이 늙은이의 마지막 청을 꼭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이홍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더 이상 국가의 일을 의논하는 건 힘겹다는 듯, 눈을 감았다.

"이 늙은이가 몸이 안 좋아, 송구하오나 더 이상 말씀을 나누기가 어렵겠습니다."

"예, 이만 물러나지요. 중당께서는 그간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푹 쉬십시오."

"감사합니다. 폐하께서도 평안하십시오."

이선은 이홍장에게 정중히 작별을 표했다.

지난 20년 동안, 상황에 따라 적과 동지로 반복해서 만났지만, 그 누구보다 ‘친밀한 적’이었던 노인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1901년 11월 7일, 광서 27년 9월 27일.

북양통상대신 직례총독 문화전대학사 숙의백작 이홍장이 서거했다. 향년 79세.

이홍장은 마지막 순간까지 지난날을 후회하고 후일을 염려했다.

"인재를 키우고도 나라를 망쳤으니, 참으로 한스럽도다!"

이홍장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의식은 있었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의사 표현은 하지 못했다. 눈을 뜬 채로 눈물만 흘리자, 병석을 지키던 측근들이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중당께서 다 하지 못하신 대업은 저희가 이루겠습니다!"

이홍장은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눈을 감았다.

태평천국전쟁의 진압자, 양무운동의 주창자, 북양함대의 창시자, 외교의 협상가, 청조 최후의 명신, 이홍장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청조 최후의 버팀목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 303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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