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경자유전(耕者有田)
광무 5년(1901), 황제 이선과 개혁 관료들, 농민운동가들이 오랫동안 구상해 왔던 토지 개혁의 시행이 준비되었다.
광무 4년(1900), 북벌 성공을 선언한 후 이선은 정부에 북방 사민 정책을 본격적으로 실시하라고 명했다.
"북방 신영토의 국유지에 대해, 이주를 원하는 가정에게는 토지를 분배하고, 황무지를 개척하면 3년 간 지세 납부 후 토지 소유권을 인정한다."
북방 영토는 대부분 미개척지에 머물러 있었고, 정부는 소유권의 미비를 들어 토지 대부분을 국유화했다. 기존의 개척지라 할지라도, 만주인 부재지주는 대부분 소유권을 부정되어 국유화 후 소작인들에게 분배되었다.
동학교도의 집단 이주로 토지 분배의 실제화가 분명해졌다. 가정을 넘어 마을 단위로 토지 분배가 이루어졌다.
만인대에 이어 대한제국군이 북벌에 성공하니, 민족주의적 열풍을 타고 이주는 더욱 늘어났다.
"북방에 가면 땅을 준다더라!"
"굳이 그런 먼 곳까지……."
"아, 내가 살면 곧 고향이지. 아니, 애초에 고구려 조상님들이 살던 땅 아닌가?"
"갑시다, 북으로!"
북방으로 이주하려는 행렬이 급격히 늘어났다.
북방 영토의 국유지 분배는 이주민 증가에 혁혁히 기여했고, 본토에서 전개할 토지 개혁의 선례라 할 수 있었다.
조선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토지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대개혁을 선언한 1884년 갑신경장 시기부터 비롯되었다.
권력을 잡게 된 이선과 개화당 관료들이 해결해야 할 토지 문제는 크게 다음과 같았다.
"첫째, 세도정치 이후 오랫동안 문란해진 전정(田政)을 바로 잡고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는 것.
둘째, 지조(地租)개정하여 조세 수취를 늘려 국가재정을 정상화하는 것.
셋째, 전국의 미개척지를 개척하고, 최신 농법을 받아들여 토지 생산량을 증대하는 것.
넷째, 최신 측량법을 이용하여 전국적 양전을 실시해 토지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
다섯째, 토지소유권이 확립되지 않은 조선에서, 사적 소유권 제도를 확립시키는 것.
여섯째,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라 농민이 토지를 소유하고, 이들을 중농으로 육성해 국가의 기반으로 삼는 것."
말은 쉽지만, 국가적 역량이 필요한 대사업이라는 걸 모두가 직감했다.
1,2년 만에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10년 이상의 기간과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했다.
조선 최고의 재정 전문가, 토지 개혁을 지지하는 어윤중이 실무의 선봉에 섰다. 가장 시급한 순서대로 우선적으로 진행되었다.
"앞으로 모든 궁방전과 역둔토는 호조 관할로 이관한다."
대개혁의 시작에 불과했지만, 이는 매우 혁신적인 출발이었다.
조선의 건국이념인 유학적 개념에 따르면, 토지는 ‘모든 땅은 왕의 소유’라는 왕토사상(王土思想)에 입각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소유권이 개인에게 넘어가고 토지 거래가 진행되지만, 관념적으로는 왕토사상이 남아 있었다.
확고한 법이 없는 상황에서 전국의 토지는 마음대로 지배되고 있었다. 그 혼란의 선봉에는 왕실과 관청이 있었다.
전국에 난립해 있는 국유지로는 궁방전(宮房田)과 역둔토(驛屯土)가 있었다.
궁방전은 문자 그대로 궁 소유의 토지로, 내수사가 관리하여 조세를 걷을 수 없는 면세지였다.
궁방전은 토지소유권을 기준으로 유토(有土)와 무토(無土)로 나눌 수 있다.
유토는 토지소유권 자체를 궁방이 소유한 토지이다. 무토는 궁방이 토지소유권을 가진 것이 아니고, 국가를 대신해 그 토지에 대한 수조권만 가진 토지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궁방전이 급증하여, 농민들에게는 민폐가 되고 국가재정에는 해악이 됐다.
‘함경도 땅 삼분의 일, 황해도 땅 오분의 일, 전라도 땅 십분의 일이 내수사라더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과장이 섞여 있었지만, 그만큼 궁방전이 많다는 의미였다.
‘멀리 갈 것 없이 왕실이 최고 적폐로군. 일단 눈앞의 적폐부터 청산한다.’
제일 먼저 전국의 궁방전이 해체되었다. 무토는 경작자인 농민들의 경작권을 인정해 실질 소유권을 부여하고, 유토는 국유지가 되어 수조권은 호조, 훗날에는 탁지부로 이관되었다.
이에 당시에는 임금 이하 왕실의 반발이 터져 나왔지만, 총대를 멘 이선은 단호했다.
"궁방전은 대대로 궁에 내려온 왕실 재산인데, 어찌하여 이를 모두 반납한단 말인가?"
"왕토는 모두 성상의 것이거늘, 어찌 궁가의 사사로운 재산이 필요하겠습니까?"
‘앞으로 왕실도 궁내부 예산을 받아 쓴다. 넉넉히 지급할 터이니 궁방전은 포기해라.’ 전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세도가의 은결과 서원의 토지 점유를 가차 없이 혁파한 대원군도 못 건드렸던 궁방전 문제였다. 하지만 이선과 개화당 신정부는 단호하게 척결했다. 대원군도 지지 의사를 밝히자 임금도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지조개정과 세제개편이 선언되었다.
"지방에 난립해 있는 역둔토도 모조리 정리하여 단일한 국유지로 창출하라. 징세는 지방관과 향리가 아니라 중앙에서 파견한 호조의 관료들이 시행한다.
지조개정을 통해 잡다한 잡세를 모조리 혁파하고, 오직 지세(地稅)로만 부과한다. 지조개정이 완료되어 지권(地券)이 확립되기 전까지는 생산량에 따라 결세(結稅)를 부과한다. 소작료는 삼 분의 일을 권장하며, 최대 오 할을 넘기는 것은 절대 금지한다."
역둔토는 문자 그대로 하면, 역참의 경비를 충당하는 역토와 군대가 자급자족을 위해 설치한 둔전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면 각 관청과 군영이 자체적으로 역둔토를 설정해 수취했다. 이는 중앙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는 일이었다. 역둔토도 궁방전 못지않게 전국에 난립해 있었다.
역둔토 역시 궁방전의 사례에 따라 무토는 민유지로 삼고, 유토는 국유지로 전환했다.
"허, 왕실과 관청에서 스스로 궁방전과 역둔토를 내놓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군."
면세전인 궁방전과 역둔토를 처리하고 나니, 국가재정이 정상화되었다.
농민 입장에서도 다행이었다.
갑오농민전쟁을 촉발한 계기가 조병갑으로 대표되는 관리의 탐학도 있지만, 명례궁(明禮宮, 경운궁)으로 대표되는 궁방전의 착취도 심각했다. 최대 곡창 지대인 호남은 특히 궁방전과 역둔토의 폐단이 심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만으로도 농민 입장에서는 선정이었다.
다만 궁방전과 역둔토는 대부분 무토였기에, 무토가 민유지로 설정되니 국유지의 수가 크게 감소했다.
줄어든 국유지는 미개간지와 임야의 개척으로 대규모 창출에 나섰다.
1885년, 관립 농상회사(農桑會社)가 설립되었다. 농상회사는 황무지를 개간하고, 둑을 쌓아 간척에 나서고, 양잠(養蠶)과 각종 상업 작물을 재배하고, 임야 개발에 나섰다.
당시 고문관이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주선으로 서양 기술이 도입되고, 국가 주도로 본격적인 농지의 상업화에 나섰다.
"농지를 통해 수익을 얻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농업이라 할 수 있다."
농상공부 산하의 관립 농상회사는 지주와 부농의 상업지주화에 자극을 주었고, 1895년 승전 이후에는 황무지 개간운동의 영역을 확대해 북방 개척의 기수가 되었다. 농상회사에서 분리된 한만척식회사(韓滿拓殖會社)는 주민의 북방 이주와 개간을 이끌었다.
1889년, 마침내 전국적으로 양전이 실시되었다. 마지막 전국 양안이 1720년 숙종 시대의 경자양안(庚子量案)일 정도로, 양전이 시행된 지 오래였다.
기존의 양전과 가장 큰 차이점은,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근대적 측량법을 통해 실시하며, 농지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토지가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전통적인 ‘1결’은 도량형의 통일에 따른 미터법의 확립에 따라, 1헥타르(10,000㎡)로 규정되었다.
"양전을 통해 조선 전역의 토지 현황을 확인하고, 조정 문서 밖으로 누락되어 있던 토지를 샅샅이 파악하고, 국유지를 창출하고, 지세를 늘리고, 지권을 발급해 궁극적으로 소유권 제도를 확립시키는 데 있소."
양전은 탁지부 양지국(量地局)과 대군주 직속 토지조사위원회가 전권을 맡았다. 국가적 대사업이니만큼 내무부, 농상공부, 법무부도 면밀히 협력했다.
김홍집, 어윤중, 박영효, 김가진, 유길준 5인이 토지조사위원회의 총재관으로 양전과 토지 조사의 실무를 총괄했다. 김홍집, 어윤중, 김가진이 실무관료를 대표한다면, 박영효와 유길준은 근대적 개념에 따른 토지의 활용과 사적 소유권 제도의 확립을 추구했다.
조정에서 파견한 양무감리(量務監理)가 전국 13도로 파견되었고, 서양인 측량기술사, 그리고 이들로부터 측량을 익힌 조선인 측량기술사가 양무감리를 보좌했다.
농민들은 처음 보는 서양인과 복제 개혁으로 바뀐 서양식 제복 차림의 관리, 역시 양복을 입은 측량기술사가 이리저리 땅을 살펴보는데 신기함과 당혹감을 느꼈다.
"저게 다 뭐 하는 거요?"
"측량이라던데, 나도 잘 모르겠소."
"아, 조정에서 명한 양전이오. 측량 끝나면 확인 후에 지계인가 뭔가를 나눠 준답니다. 아무튼 관에서 하는 일이라니까 그러는 줄 아쇼."
1892년부터는 지계(地契)제도가 실시되었다. 측량이 끝나면 토지 신고를 실시하고, 소유자의 실소유가 확인되면 지계가 발급되었다.
지계는 근대적 토지대장의 전 단계에 해당되어, 사적 소유권을 확립했다기보다는 국유지와 민유지를 구분하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계 발급은 당시 기준에서 놀라운 일이었다. 실질적으로는 소유권이 있어도 법적 소유권이 미비했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지계 문제를 놓고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지주 중에서는 재빨리 기회를 활용해 토지를 늘리는 자도 있었지만, 중층적 투지 구조에 존재하던 중답주(中畓主)의 소유권은 배제되었다. 중답주는 지주의 땅을 빌려서 소작농에게 빌려주고 원래의 도조 외에 더 받아먹는 사람들을 일컫는데, 마름과 유사한 존재였다. 지주도 소작인도 아닌 이들은 지계 발급에서 배제되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아무튼 내 땅이 생겼다는 거지? 만세!"
"아니, 여긴 우리가 조상 대대로 관리하던 땅인데, 왜 인정을 안 해 줍니까?"
"거, 문서가 미비하잖소. 문서부터 만들어 오든가."
"조정에 밉보이면 지계 발급을 안 해 준답디다. 조정의 위세에 납작 엎드려야 해요."
"뭐? 조정을 서양 오랑캐의 앞잡이라고 비판하는 만인소에 내 이름을 올렸는데, 어쩌지?"
"아이고, 이 양반아! 그럼 관아에 가서 사정이라도 해 봐야지!"
지방마다 상황이 다르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양전과 지계 발급에 순응이 이뤄졌다.
양무감리들과 측량사는 반드시 진위대나 순검을 동반했다. 기존의 포군 조직에서 진위대, 순검으로 군복을 갈아입고 지배층에 합류하게 된 하층 양반들은 조정의 모든 시책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무력이 독점되어 있는 이상, 반대자가 목소리를 내는 건 어려웠다.
실제로 양전과 지계 발급은 대개 합리적으로 진행되어, 손해를 보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1889년부터 실시된 양전은 1894년 독립전쟁 발발 때까지 전국의 약 3분의 2가 진행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한동안 중단되었던 양전은, 종전 이후 북방 영토까지 포함하여 재개되어 1899년에 1차 완료되었다.
이제 양전 사업을 토대로 새로운 토지 제도를 확립시키는 게 중대한 일이었다.
조사가 진행되어 전국의 토지 현황이 보고서로 올라오자, 이선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향촌은 완전히 소농 사회로군. 지주가 존재하기는 해도 대지주는 드물어. 향촌 지주라고 불리는 자들도, 현대적 기준에서 볼 때는 소농에 불과하잖나.’
조선 사회는 소농 중심이었고, 대지주가 드물었다. 서양의 ‘젠트리’나 ‘융커’에 해당되는 ‘경영형 부농’이나 대지주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소수의 벌열 가문과 대지주를 제외하면, 전국의 토지는 중소지주, 자작농, 자소작농이 대다수였다.
지주의 토지 소유를 최대 3결로 제한했는데, 이 기준에 도달하는 지주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결국 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식민지 지주제의 확립이 대지주와 소작농을 양산했군. 그럼 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경자유전의 토지 개혁을 하기 훨씬 유리한 상황이 아닌가.’
정부는 선례를 찾았다. 다산 정약용의 토지 개혁론, 프랑스 혁명의 토지 개혁, 프로이센 개혁의 농지 개혁, 러시아의 농노 해방과 농지 분배, 일본의 지조개정이 주된 참고 대상이 되었다.
이선은 개화당 일각에서 주장하던 일본의 지조개정 사례는 거부했다. 일본의 지조개정은 세수 증대와 근대적 소유권 확립에 혁혁한 기여를 했으나, 농촌을 지주와 소작농으로 양극화시켰다.
메이지 6년(1873)에 실시된 지조개정 당시에 소작인 비율은 27.4%였으나, 10년 뒤인 1883년에는 35.9%, 1892년에는 40.2%에 이를 지경이었다. 이 비율은 계속 올라가고 있어, 농촌 경제의 양극화를 낳고 말았다.
‘하긴 일제가 착취한 건 조선 농민뿐만 아니지. 먼저 일본 농민을 착취하고, 그들의 일부를 식민지로 보내고, 식민지 농민은 더욱 가혹하게 착취했지. 이런 방법을 따를 필요는 없다.’
일본은 프랑스 민법을 받아들이면서도, 대혁명의 성과인 농민에 대한 보호권만은 삭제해버렸다. 결국 토지 귀족인 융커가 지배하는 프로이센형 토지제도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선이 선택한 사례는 프랑스의 농지법이었다. 오랜 중앙 집권 국가, 소농 중심의 사회인 조선은 프로이센형보다는 프랑스형 발전 경로를 택하는 게 나은 선택이었다.
전국 양전 결과의 발표는 북벌 성공 때까지 미루다가, 1900년에 비로소 공표되었다.
1900년은 마침 경자년이라, 1720년 경자양안 이후 180년 만의 전국 양안이었다.
전국의 토지가 낱낱이 확인되어, 국유지가 대폭 증대하고, 민유지는 근대적 제도에 맞춰 합리적으로 조정되었다. 물론 불만을 가진 이들도 있었지만, 승전과 북벌 성공의 애국적 분위기 속에서 묻히고야 말았다.
‘하지만 양전과 지계 발급은 시작에 불과하다네.’
황제 즉위 후, 이선은 내심 프랑스식 토지 개혁을 마음에 굳혔다. 프랑스인 민법과 토지법 전문가들을 고문관으로 채용하고, 프랑스 사례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러프동맹 체결 이후 대한제국과 부쩍 관계가 깊어진 프랑스로서는 크게 환영했다.
이선은 토지 개혁의 시행을 위해, 중추원과 토지조사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농민의 대표자’로 명망이 자자하고, 만인대를 이끌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전봉준을 농림부대신으로 임명했다.
마침내 경자유전의 토지 개혁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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