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304화 (303/812)

304화 역사의 발전 경로

토지 개혁의 집행을 맡게 될 농림부가 출범한 이후, 대신 전봉준과 협판(차관)으로 임명된 김성규(金星圭)가 실무를 총괄했다.

38세의 김성규는 프랑스 유학파로, 수학과 농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후 유럽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귀국 후에는 양무감리로 발탁되어 전라남도의 양전을 집행한 개혁적 실무관료였다.

가장 농토가 많은 만큼 갈등 구조도 가장 많은 전남의 양안을 수월하게 진행한 김성규는, 이선의 눈에 들어 토지 개혁의 실무를 맡게 되었다.

"짐이 경을 협판으로 발탁한 이유를 잘 아리라 생각하네. 농림대신은 중추원 의관 활동으로 농민의 대변자가 되었고, 만인대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지.

농민의 삶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지만, 실무 영역은 또 다른 문제일세. 경은 직접 프랑스에서 농학을 공부했고, 유럽의 농지 개혁 사례를 연구했지. 그리고 양무감리로 활동하며 이론과 실무의 조화를 이뤄 냈지. 경이라면 대신과 함께 짐을 보좌해, 국가대사를 잘 수행하리라 생각하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신은 성상의 높은 뜻을 받들어, 국가와 국민에게 모두 도움이 되는 길을 수행하겠나이다."

이선은 전봉준과 김성규에게 토지 개혁의 실무를 맡겼지만, 전권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기존 토지조사위원회에도 토지 개혁 심의에 참여하게 해, 급진과 점진의 조화를 이루고자 했다.

전 총리대신 김홍집, 탁지대신 어윤중, 내무대신 박영효, 중추원 부의장 유길준, 민의원 의장 김가진은 5인 총재관으로서 토지 개혁을 함께 심의했다.

토지 개혁은 중대한 사안이었으므로, 새로 출범한 박정양 내각의 국무 회의에서도 중요한 안건이었다.

"자영농 중심으로 농지를 재편한 프랑스 토지 개혁 사례는 대한국에서 크게 참고할 만합니다만……."

"개의치 말고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시오."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탁지대신 어윤중은 비로소 의견을 개진했다.

"프랑스는 혁명으로 이뤄진 사례이기에, 대한에서는 그대로 따라 할 수가 없습니다. 프랑스의 토지 개혁을 주도한 건 부르주아지입니다. 봉건 귀족에 대항하기 위해 농민을 동맹으로 끌어들이고자 토지 분배를 단행한 것이지요."

"탁지대신의 말이 옳습니다. 대한은 신성한 군주의 나라인데, 혁명파의 방법을 따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일본이 프랑스 사례를 취하지 않은 건,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정부가 개화파 일색이라고는 하나, 공화 혁명은 감히 입에 언급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이는 지엄한 왕권과 대치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군주는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니라 결과요. 분명 토지 개혁을 실시한 건 혁명을 주도한 자코뱅파였지만, 이를 계승해서 과실을 누린 건 나폴레옹과 제정이지.

‘농민은 강력한 군대의 기반이요, 국가의 중추다.’ 나폴레옹 1세가 한 말이오. 농민들은 그 조카인 나폴레옹 3세에게도 충성을 다했지. 국민개병을 실시한 이상, 우리 군은 군복 입은 농민들이오. 나폴레옹의 말은 대한에도 적용될 것이오."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농민들은, 처음에는 혁명에 적대적이고 부르봉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했다.

하지만 대혁명의 수혜를 누린 이후에는, 왕조가 아닌 공화정이든 제정이든 ‘프랑스 국가’를 충실히 지지하는 견실한 농민층이 형성되었다.

도시, 특히 파리는 늘 혁명으로 들끓었지만, 농촌은 안정과 번영을 약속하는 ‘질서파’에 투표했다. 그렇다고 해서 반동에 넘어가는 건 아니었다. 이들도 혁명의 수혜자이기 때문이었다.

"성상께서 이미 알고 계시다시피, 정말(丁抹), 즉 덴마크 사례도 참고해 볼 만합니다. 덴마크는 이미 100년 전에 계몽 군주와 개혁 세력에 의한 토지 개혁이 실시되어, 전국의 토지를 자영농 중심으로 재편했습니다. 근래에도 미간지 개척과 국유지 분배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실례(實例)로서 좋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대개 유럽의 토지 개혁은,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농민층의 반란을 두려워한 기득권 세력의 양보로 이뤄졌지만, 덴마크는 자발적으로 개혁을 이행한 특수한 사례였다.

1788년 덴마크 섭정 왕세자 크리스티안 6세에 의해 시작된 농지 개혁은, 다른 나라처럼 지주가 아니라 소작농 및 자작농이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봉건 제도를 철폐하고 대토지를 분할, 매각하여 소작인들에게 분배했다. 농지 개혁은 1814년까지 확고하게 진행되었다.

"좋은 의견이오. 그래서 프랑스에 이어 덴마크에서도 고문관을 초빙한 거지."

김성규의 의견에 이선이 동의를 표했다.

니콜라이 2세의 모후가 덴마크 왕가였기에, 조선과 덴마크는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비교적 일찌감치 수교를 할 수 있었다. 1896년 조선 대사절단은 덴마크에도 방문했고, 덴마크의 발전된 농업을 참고했다.

농지 개혁의 결과로 1865년경에 이르면 덴마크는 완전한 독립자영농민의 나라로 변해 있었다.

농업 생산성은 급격히 증가했고, 이는 인구의 급증으로 이어졌다.

비록 1864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빼앗기면서 덴마크는 위기를 겪지만, 위기는 농촌 운동의 활성화로 이어졌다.

유틀란트의 미개척지에 대한 개척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소농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농업협동조합이 전국 각지에 생겨났다.

덴마크 정부도 이를 후원했으며, 1899년 국유지를 수많은 소농에게 분배하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농촌운동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근래 프랑스 민법과 토지법 전문가에 이어, 덴마크 농업 전문가들이 한국에 고문관으로 대거 채용된 것은, 덴마크의 사례를 한국에 접목하기 위함이었다.

"국유지는 프랑스와 덴마크의 선례를 따라 분배를 단행해야 합니다. 국유지의 경작권을 행사하는 소작인들의 소유권을 인정하여, 자영농으로 육성해야 합니다. 민유지는 대토지 소유를 제한하고, 자영농 중심으로 재편해야 합니다. 전국의 소농은 덴마크의 사례를 따라 장차 협동조합으로 편성해야 합니다."

프랑스와 덴마크 고문관들의 조언은 전봉준의 이상에 부합되었다. 전봉준과 김성규가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자, 이선은 재가하고 추진을 명령했다.

하지만 이는 한쪽에는 희망과 번영을 약속했지만, 한쪽에는 불안과 공포를 야기했다.

불만은 정부 여당, 즉 입헌개화당에서 나왔다.

"토지 분배라니, 이는 국가에서 도입하려고 하는 자본주의 자유 시장 질서를 역행하는 게 아닌가?"

"개화당의 지지기반이 도시에는 상공인이라고 해도, 농촌에서는 지주들이 우리를 압도적으로 지지해 줬는데, 그들을 두렵게 만드는 조치가 아닌가?"

전국적으로 대지주라고 부를 계급은 드물었지만, 있다면 개화의 시대를 잘 탄 경화사족과 명문가들이 있었다.

이들은 농업의 상업화를 타서 농산물, 특히 미곡을 일본에 수출하며 큰 이익을 얻었고, 그 이익을 다시 토지 구매로 활용해 대지주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지계 발급의 토지 제한은 차명 거래와 같은 우회를 통해서라도 토지를 늘려 나갔다. 대표적으로 경화사족 반남 박씨나 전북의 고창 김씨와 같은 가문이 있었다.

이들이 개화당을 확고히 지지하는 텃밭임은 말하나 마나였다.

개화당의 압박에 김성규가 해명했다.

"국유지는 분배하지만, 민유지는 오히려 소유권을 확실히 해 지주와 자영농 모두를 만족시키는 조치입니다. 소유권이 확립되면 토지 매매도 자유로워지니, 오히려 환영할 일이지요."

"하지만 대토지 소유를 제한한다고 하지 않소! 자유로운 거래를 막으려는 게 아닌가?"

"농촌에서 상업적 이익을 거두라고 권장한 건 정부면서, 인제 와서 무슨 소리요?"

"만약 농림부 안대로 법안이 상정된다면, 민의원은 부결할 거요!"

민의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개화당의 반발에, 결국 교통정리에 나선 건 이선이었다.

이선은 김옥균과 박영효 등 개화당 지도부를 경운궁으로 불러들였다.

"오늘은 황제와 대신이 아니라, 20년 전 조선의 개화를 함께 맹세했던 개화당 동지로서 그대들을 부른 것이오."

"황공하옵니다, 폐하!"

"20년간 우리는 참으로 쉴 새 없이 달려왔소. 마침내 우리는 자주독립과 문명개화의 문턱에 들어섰지. 경들의 노고가 많았소."

이선이 20년간의 추억을 상기시키자, 개화당 지도부가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이는 성상께서 계셨기에 가능했던 위업이었습니다. 성상이 아니셨다면 어찌 자주와 개화, 북벌이 가능했겠습니까?"

"문득 20년 전이 생각나는군. 고균이 종종 말했지. 일본이 아시아의 영국이 되길 원하니, 조선은 아시아의 프랑스가 되어야 한다고."

"하하하, 그랬었지요. 고균의 입버릇이었지요."

"아직 갈 길은 머나, 대한의 위상은 장차 아시아의 프랑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화당 지도부가 모두 웃음을 터뜨리자, 이선도 빙긋 웃었다.

"대한이 아시아의 프랑스가 되기를 원한다면, 이는 지리적이고 관념적인 이유에서만 비롯되어서는 안 될 것이오. 프랑스와 같이 개혁을 해야만 의미가 있다 할 수 있소. 프랑스식 토지 개혁과 민법의 도입은 짐이 추구하는 바요. 그런데 개화당 일각에서 이견이 있나 보던데?"

"그, 그건……."

"이견이 있다면 자유롭게 말하는 게 좋겠소."

개화당 지도부는 서로 눈치를 보다가, 결국 김옥균이 총대를 멨다.

"성상께서 경자유전의 토지 개혁을 단행하고, 이를 위해 프랑스와 덴마크의 사례를 도입하겠다고 하심은, 참으로 지극한 애민의 성심이자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오나 국가의 토지를 모두 쪼개어 분배한다면, 소농 중심의 사회가 형성돼 대한에 막 도입된 자본주의가 역행될까 두렵습니다."

"그렇습니다. 영국과 프로이센, 일본의 사례를 보면 산업 발전을 위해 농민을 희생시키는 건 불가피한 측면이 있습니다. 농민이 토지를 떠나지 않으려 한다면, 도시에서 공업화에 필요한 인력을 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더욱이 북방 개척의 문제도 있습니다. 북방 신영토에서 토지 분배를 하는 건 타당하나, 이를 본토에까지 확대한다면 누가 굳이 먼 땅으로 가겠습니까?"

이선은 반대 의견을 모두 경청한 뒤, 입을 열었다.

"경들의 의견은 모두 일리가 있소. 짐 또한 그걸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 하지만 영국, 프로이센, 일본의 사례를 봅시다."

자영농을 소멸시킨 영국은, 1898년에 이르면 4천 명의 대토지 소유자가 전체 토지의 7분의 4를 점유하기에 이르렀다. 농민들은 몰락하여 도시의 하층 임노동자가 되거나, 대농장에 고용된 농업 노동자와 머슴 신세가 되었다. 대영제국의 부르주아지는 번영하지만, 노동자는 비참했다.

가장 비혁명적인 프로이센 방식은, 봉건지주 융커가 자본주의적 대지주로, 농노가 농업 노동자로 변신한 경우였다. 엘베강 동쪽의 프로이센은 토지의 6할이 대지주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들 융커는 프로이센 정치를 지배하고, 더 나아가 독일 정치를 지배하는 반동적 집단이었다.

프로이센 방식을 채용한 일본에서는 전국을 지주-소작농 질서로 구축했다. 1873년에 27%였던 소작인 비율이 1892년이 되면 40%에 이르렀고, 그 비율은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국가와 지주의 가혹한 착취 구조에서 농민은 도시로, 해외로 떠났다. 이들 몰락하는 농민 계급을 만족시키기 위한 마약이 국가주의와 팽창주의였고, 일본이 식민지를 열망하는 건 이런 이유도 있었다.

"현재 대한의 인구 중 농민이 9할이 넘소. 절대다수지. 그리고 그들의 다수는 소농이오. 소농 중심의 개혁을 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오. 경들은 소수의 지배층과 다수의 착취 받는 피지배층을 원하는가? 지금 당장이야 문제 될 게 없겠지만, 이 새로운 20세기에는 서쪽에서 사회주의의 바람이 불어올 것이오."

황제가 사회주의를 언급하자 개화당 지도부는 놀랐다. 그들도 유럽에 사회주의 세력, 사회민주당과 제2인터내셔널이 위세를 떨치고 있는 건 알고 있지만, 그건 머나먼 남의 일로 여기고 있었다.

"하오나 사회주의는 서양의 사상이고, 동양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들은 노동자 계급에 의한……."

"사회주의가 유럽만의 문제, 노동자만의 문제가 될 것 같소? 그래서 한국은 무풍지대가 될 것 같소? 서양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도 들어오고 있는데, 사회주의가 못 들어올 리가. 농업 노동자가 절대적인 나라에서는 농민 문제가 곧 사회 문제가 될 것이오."

"그렇기는 하오나……."

"최근 일본에 사회당이 창당되자마자 해산됐다지. 동양에도 그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오. 물론 당장은 경찰로 제압할 수 있겠지. 하지만 본질적인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의 뇌관을 안고 사는 거요."

사회주의가 20세기에 집권 세력이 된다는 미래를 상상도 하지 못한 개화당은, 이선의 지적에 놀랐다.

"하오나 대한은 성상의 애민으로, 만민이 충성을……."

"이는 단순히 전통적인 애민의 문제만이 아니오. 체제 안정의 문제이자 국가 발전의 문제지. 농촌 경제의 안정은 필연적으로 농업 생산의 증대로 이어지고, 생산의 증대는 농촌에서의 인구 폭발을 발생할 수밖에 없소. 인구압이 발생하면, 이들 잉여 인구가 갈 곳이 어디겠소? 일자리가 많은 도시든가, 잉여 토지가 많은 북방이겠지. 농촌을 궁핍화해서 단기간에 이촌향도를 불러일으키는 것과 농촌을 번영시켜서 장기간에 이촌향도를 불러일으키는 것. 경들은 어느 쪽을 택하겠소?"

개화당은 이선의 장대한 구상에 할 말을 잃었다.

이선이 부르주아적 영국 모델, 혹은 대지주적 프로이센 모델을 대신해서 자영농 중심적 프랑스·덴마크 모델을 선택한 건, 단순히 애민정신은 아니었다.

이선은 조선이 타국과는 확연히 다른 소농사회임을 감안하여, 가장 피를 덜 흘리고 가장 많은 사람이 번영할 수 있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인 공리주의적 발전 모델을 택하고자 했다.

‘실제 역사에서 일본이 강제한 식민지 대지주제 대신에, 자영농 중심의 발전 경로를 택한다. 가 보지 않은 길을 이끌어 보자.’

그야말로 조선이 가지 않은 길이었고, 먼저 근대화에 나선 일본과는 대비되는 역사적 발전 경로였다.

- 30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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