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교육, 혁명의 시대
1884년 갑신경장에서 시작된 일련의 대개혁은, 1901년 농지법으로 일단락되었다.
1876년 개항부터 계산해도 사반세기, 결코 길지 않은 이 기간 동안 조선 사회는 대변혁을 겪었다.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군사 등 전 영역에서 변화가 몰아쳤다.
굵직굵직하게만 살펴봐도, 신분제 폐지, 국민교육, 국민개병, 식산흥업, 독립전쟁, 헌법 제정, 의회 개설, 토지 개혁은 조선의 기존 사회를 무너트리고, 완전히 새로운 사회를 구축한 것이었다.
개화당 정부가 추구하던 ‘위로부터의 근대화’가 사회 저변에 확대되어, 점차 근대 사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당장 고개를 들어 옛 한양, 서울 황성부를 보면 변화가 체감되었다. 도시 계획에 따른 근대적 도시가 건설되고, 신문물이 곳곳에 들어섰다.
가장 큰 변화는 사람 그 자체였다. 단순히 외관상으로 봐도, 백의에 갓을 쓴 선비는 단발하고 양복을 입은 신사로 바뀌었다. 단령을 입은 관리는 서구식 제복을 입었다. 장옷을 뒤집어쓰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 하던 여인은 양장을 입고 당당히 집 밖으로 나섰다. 댕기 머리를 하고 어린 시절부터 노동을 하던 아이들은 단정한 차림으로 학교에 다녔다.
보다 중요한 것은, 외관을 넘어선 내면의 변화였다.
사람들 머릿속에 있던 오랜 전통적 의식, 신분 사회에 대한 의식은 법령의 포고만으로 바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1885년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법 앞의 평등이 약속되었지만, 조선왕조 오백 년을 넘어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신분제 사회가 단숨에 머리에서 지워질 수는 없었다. 여전히 ‘양반은 양반이고, 상놈은 상놈이다’라는 인식이 강했다.
사람들이 비로소 변화한 의식을 갖게 된 것은, 1900년을 전후한 시기였다.
국민교육과 국민개병이라는 두 가지 국민적 의무가 시행된 지 10여 년, 근대적 교육을 받아 전통적 신분 의식이 소멸된 세대가 새로운 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이다.
"교육은 대한국민의 의무이자 권리! 아이들을 학교로!"
변화의 근원은 교육열이었다.
학문과 ‘배운 사람’을 존중하는 유교적 관념이 지배하던 조선 사회는, 원래도 교육열이 강했다. 근대화가 시작되기 전의 조선 사회를 방문한 외국인들도, 조선의 높은 교육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부모의 의지만 있다면, 가난한 집 아이들조차도 서당에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경제적 형편으로 인해 대개 금세 그만뒀지만, 부가 축적되면 교육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이어졌다.
이런 유교적 특성이 국민교육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국민교육이라는 제도적 뒷받침이 뒤따르고, 신분제 폐지와 근대적 교육에 따른 ‘입신출세’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가면서 더욱 그랬다.
도시는 국민교육의 거점이 되었고, 지방으로 갈수록 교육에 대한 저항감이 있었지만, 국민교육이 정착되면서 아동 취학률은 급속도로 높아져 갔다.
국민교육은 농촌 계몽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 선봉에는 사범학교 출신 젊은 교사들이 있었다.
"열심히 공부하여 황제 폐하의 은혜에 보답하고, 조국 근대화에 기여하자!"
"얘들아, 공부만이 너희가 새로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란다."
프랑스식 국민교육을 채택한 대한제국은, 전국에 초등 교육을 실시했다. 최소 1개의 면에는 1개의 소학교가 있어야 했다.
프랑스식 사범학교 제도가 도입되어,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시작으로 전국 13도에 최소 1개의 관립사범학교가 생겼다. 불어나는 학교와 학생 수만큼, 교사(敎師) 수급도 중요했다. 초기에는 부족한 교사 수로 인해 중학교만 졸업해도 교원 자격 시험을 보고 교사가 될 자격이 주어졌다.
최초로 전국적 국민교육을 실시한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 사범학교 출신 교사들은 열렬한 공화주의자, 민족주의자였다. 검은 양복 차림의 교사들은 ‘공화국의 검은 기병대’라고 불리며 가톨릭교회가 지배하던 프랑스 향촌 사회의 주도권을 공화국으로 가져왔다. 이들의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열렬한 공화주의자, 민족주의자로 다시 태어났다.
대혁명 이후에도 보수반동의 보루 역할을 했던 향촌이, 국민교육으로 공화국의 보루가 된 것이다.
"갑돌 아버님, 갑돌이가 요새 통 학교에 안 나옵니다. 아픈 건 아닌 걸로 압니다만."
"아유, 선생님. 상놈이 읽고 쓰는 법 배웠으면 됐지, 더 배울 필요가 있습니까요? 이제 농사 짓는 법을 알려 줘야죠."
"아닙니다, 아버님. 이제 양반 상놈 같은 건 없습니다. 배운 자와 못 배운 자가 있을 뿐입니다. 갑돌이 공부 잘합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에 통과하면, 도시로 나가서 관직에도 오를 수 있습니다. 가업을 이어 농사를 짓더라도, 농업학교에서 공부를 하면 신농법을 배워 더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정말로요? 정말 상놈의 자식도 관리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요?"
"그럼요. 요새 양반 출신이 아닌 관리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신분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교육이 중요합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늘 하명하십니다."
한국에서도, 젊은 교사들이 향촌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이들 사범학교 출신 젊은 교사들은, 대개 가난한 하층 양반이나 상층 상민들이었다. 국가로부터 학비 면제를 받고 교육받아 교사가 된 이들은, 새로운 제도에 대한 충성심과 사회 변혁 의지로 가득했다.
"서당은 다 없애 버리고, 학교란 곳에선 공맹의 도리는 하나도 안 가르치지 않나. 양반 상놈 구별 없이 같은 공간에 집어넣고. 이게 말이 되나?"
"정부 시책이 그러니 별 수 있나. 사립학교 설립은 자유로우니, 서당들이 사립학교로 전환하고 있네."
"흥! 그 사립학교란 곳도 교육 과정 전체를 정부가 지정해 주는 곳이 아닌가?"
"그래도 상놈 자식들 득실거리는 공립학교보단 낫지. 심지어 선생들도 상놈 출신들이 허다한데."
"상놈들뿐인가? 이젠 계집들도 선생이라고 돌아다니고 있으니. 결혼도 안 한 여자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돌아다녀. 말세다, 말세야."
"어쩌겠나? 세상이 바뀐 걸."
일부 양반들은 모두가 평등한 국민교육에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국민 교육이 실시되면서 전국의 서당은 폐지되었고, 일부 서당만이 심사를 통과해 학교로 전환되었다. 신분의 귀천 없이 다니는 공립학교에 거부감을 느낀 일부 양반들은 사립학교를 세웠으나, 정부 예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립학교는 점차 경쟁에서 밀리고 말았다.
1900년경이 되면 취학률은 남자아이의 경우에 90%에 달했다. 학교라는 동질적 공간에서, 동질적 교육을 받는 동년배의 아이들은 점차 ‘한국인’이라는 동질적 집단을 창출해 냈다.
다만 여자아이의 경우에는, ‘여자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전통적인 인습적 사고방식으로 인해 취학률이 확연히 떨어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지에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교사를 충당하기 위해 사범학교에 여학생들이 선발되고, 교육을 이수한 여교사가 발령받았다. 이들 여교사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직업을 갖는 전문직 여성이었다.
"얘들아, 너희도 공부해야 한다. 계집이라고 결혼해서 애 낳고 집안일만 하는 시대는 이제 끝났어. 너희도 열심히 공부하면, 이렇게 선생님처럼 될 수 있는 거야."
"황후 폐하께서도 신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단다. 황후 폐하께서 신식 학제로 교육을 받은 건 너희도 알고 있지? 국민에게 모범을 보이신 거란다."
황후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몸소 내탕금을 풀어 여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황후가 다녔던 이화학교, 황후가 용동궁이 있던 자리에 세운 명신학교(明新學校)는 여성 엘리트 교육의 상징이었다.
비록 이런 교육의 수혜를 받을 수 있는 ‘신여성’은 극히 드물었지만, 이들의 상징성은 컸다.
"김 선생님 너무 멋져. 나도 열심히 공부해서 꼭 선생님처럼 될 거야."
"그럼, 선생님만큼 좋은 직업이 없지."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교사를 열망했다. 가난하고 낙후한 향촌 사회에, 좋은 교육을 받고 멋진 양복을 입으며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는 젊은 교사들은 자연히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 사회는 전통적으로 ‘선생님’에 대한 존경이 큰 사회였기에, 이들 교사들은 향촌에서 높은 대우를 받았다.
"선생님, 우리 손자 녀석 잘 좀 부탁드립니다."
"아이고 어르신, 일어나세요. 걱정 말고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나이든 노인이 새파랗게 젊은 교사에게 절을 하며 손자를 맡기곤 했다. 양복 차림의 ‘선생님’은 신분고하에 상관없이 정중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다.
교사에 대한 열망이 1차적 선망이었다면, 보다 근원적인 열망은 높은 교육과 입신출세에 대한 것이었다.
고등 교육을 이수하는 엘리트는 소수에 불과했지만, 이들에게는 새로운 사회에 필요한 자리가 배정되었고, 이는 입신출세의 상징이었다.
1890년대 이후 관료의 체계적 공급을 위한 선발 제도가 정착되었고, 고등교육 이수자들은 관료 선발의 기회가 주어졌다.
1896년, 학무부는 학교령을 제정해 전체 교육 기관을 학무부 관리 하에 두었다. 학무부의 주관 하에 고등 교육 기관이 개편되었다.
관립한성사범학교, 관립외국어학교, 관립정치학교, 관립법률학교, 관립의학교 관립농업학교, 관립상업학교, 관립광공업학교, 관립우정(郵政)학교 등 여러 목적에 따라 설립되었던 관립학교들이 통합해, 최초의 종합대학인 국립 황성대학(皇城大學)으로 재편되었다.
황성대학은 최고 엘리트 양성 기관으로서, 졸업자는 관료 특채의 기회와 더불어 전문가로서 사회 각지에 진출할 수 있었다.
대학의 위상이 확립되면서, 전통적 지배층이든, 신흥 상류층이든, 혹은 가난한 지식 계층이든 자제들을 앞다투어 고등 교육을 시키려 했다.
황성에 이어 평양에도 두 번째 국립대학이 세워져, 지방에서도 높은 교육열을 자랑했다. 각지에서 고등 교육에 대한 요청이 이어졌다.
"교육만이 입신출세의 길이다!"
"어서 공부해라. 김 주임관 아들은 이번에 황성대학 법률과에 들어갔다더라. 그럼 출세는 따 놓은 당상이겠지. 우리가 그 집만 못할 이유가 뭐냐?"
전통적으로 조선은 ‘문(文)’에 대한 열망이 강했기에, 입시는 과거제의 새로운 방식으로 인식되었다.
고등 교육 기관이 입신출세의 상징이 되면서, 입학을 위한 치열한 경쟁이 이뤄졌다. 입시열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입시는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넉넉한, 도시 중상류층이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가난하지만 똑똑하고 야심찬 청년들은, 학비가 없는 각 도의 사범학교나 사범학교를 노렸다.
"거듭된 승전을 보았는가? 신대한의 주역은 군인이다."
"큰 칼 차고, 멋진 제복 입고 금의환향하리라!"
"황제 폐하와 대한국을 위하여!"
특히 독립전쟁과 북벌전쟁 이후 군인의 위상이 크게 올라가면서, 육군무관학교에는 조국수호와 입신출세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지방 출신의 가난하지만 유능한 청년들이 대거 입교했다.
고등 교육이 꼭 입신출세에 대한 열망으로만 돌아가는 건 아니었다. 후발 국가의 특성상 당장 근대화에 필요한 실용 학문 위주로 교육 체제가 돌아갔지만, 기초 학문에 대한 열망도 분명히 있었다.
학무부가 사립대학을 허가함에 따라, 서구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중심이 되어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일어났다.
첫 사립대학은, 서구화에 가장 우호적이고 재정적으로도 비교적 넉넉한 기독교계에 의해 추진되었다.
경신학당을 설립한 언더우드 목사, 최초의 의학 고등 교육 기관인 제중원의학교의 원장 애비슨 박사가 연명으로 민립 대학 설립 허가를 받았다.
"우리는 기독교 정신과, 자유로운 인문 정신에 근거하여, 진리와 자유를 추구할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합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1900년, 옛 연희궁 자리에 설립된 기독교 계통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는, 실용학문과 입신출세를 내세우는 국립대학과는 다른, 기초 학문 연구와 학문의 자유를 내세웠다.
한국에도 서구적 의미의 ‘인문 과학(humanities)’과 ‘자연 과학(natural science)’ 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국민 교육은 초등 교육, 엘리트 교육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전국적인 공민교육(公民敎育)도 이뤄졌다.
농촌계몽운동과 문맹퇴치운동이 전개되면서, 의무감 강한 청년들이 ‘브나로드(V narod)’, 즉 ‘민중 속으로’ 들어갔다.
1870년대 러시아에서 전개된 브나로드 운동이 반정부적 인민주의자들의 농촌 혁명 운동이었다면, 1900년대 한국에서 전개되는 브나로드 운동은 오히려 체제 친화적인 계몽 운동이었다.
"배워야 산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삶인가?"
"국문은 한문과 달리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자입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문자,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세종 대왕과, 한글을 국문으로 제정하신 황제 폐하의 높은 뜻이기도 합니다."
농촌계몽운동은 1901년 농지법과 함께 실시된 국유지 분배, 농업협동조합 설립 운동과 맞물리면서 농촌에서 굉장한 시너지 효과를 냈다.
농촌 변혁의 사회 경제적 토대가 쌓인 상황에서, 인구의 절대다수인 농민들도 교육을 향해 눈을 돌렸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접어드는 초엽, 대한제국은 진정한 의미의 ‘세기적 전환’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 근본적인 변화의 중심에는, 국민교육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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