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정치, 혁명의 시대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18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를 ‘장기(長期) 19세기’로 규정하고, 장기 19세기의 시작을 ‘이중 혁명(Dual revolution)’으로 명명했다.
이중 혁명이란, 프랑스 대혁명으로 대표되는 정치 혁명과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을 의미한다.
정치 혁명과 산업 혁명은 밀접한 관계를 지녔고, 근대의 정치와 경제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이중 혁명은 근대 세계를 창출하고, 전파하고, 지배했다. 이는 곧 경제적 산업화와 정치적 자유주의가 패권을 잡은 부르주아적 근대였다. 세상은 이중 혁명이 만들어 놓은 세계관 안에 있었다.
후발국가인 대한제국의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의 근대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정치 혁명이든, 산업 혁명이든 태동기에 있었다.
프랑스처럼 정치 혁명이 성공한 후에 산업화가 시작된 나라가 있고, 독일처럼 정치 혁명이 실패한 상황에서 산업화를 이룩한 나라도 있었다.
아시아의 첫 근대화라고 자부하는 일본은, 분명 메이지유신으로 인한 지배층의 교체는 있었지만, 프로이센식 근대화를 모범으로 한 전형적인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피지배층은 막부의 신민에서 대일본제국의 신민이 되었고, 근대화의 수혜를 입으면서도 정치적 주체성이 배제된 ‘신민’으로 규정되었다.
‘그에 비하면 한국은 어떤가? 역시 혁명적 상황은 없었고, 지배층 내부의 교체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나와 개화당이 정권을 잡은 건, 혁명이라기보단 고전적 의미의 궁정 쿠데타에 더 가깝다.’
20세기 초엽, 이선은 생각에 잠겼다.
이선이 귀국한 20년 전, 1882년의 조선에 시급한 건 생존의 문제였다.
전광석화와 같은 최고 지배층의 교체를 통해, 신속히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했다. 이는 프로이센과 메이지 일본이 추구했던 방향을, 검증된 정책만으로 더 신속히 근대화를 진행한 것이었다.
그 결과 20년이 지난 지금, 대한제국은 자주독립을 넘어 영토 확장에도 성공했다. 강대국의 반열에는 들어서지는 못했으나, 멸망의 위기에 놓여있던 약소국의 지위는 벗어났다.
국민교육과 국민개병, 식산흥업과 토지개혁으로 분명히 사회에도 변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결과 황제 절대주의 체제가 구축되다니, 참으로 거대한 역설이군.’
헌법이 선포되고, 총선거를 실시해 의회를 개설하여, 입헌 정치가 시작되었지만, 실질적으로 권력은 황제와 개화당 정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헌법과 민권을 외치는 입헌 국가가 되었지만, 전제군주를 내세웠던 조선 왕조에서도 이렇게 강력한 왕권과 중앙집권이 된 정부는 없었다. 군사력도 왕조 초기를 제외하면 이렇게 강력한 적도 없었다.
대외적으로 북벌 성공과 대내적으로 의회 개설과 농지법 제정 후 황제에 대한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조선에는 부르주아, 시민 계급이라고 부를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었다. 유일하게 혁명적 동력을 갖고 있던 급진적 농민들은, 근대 시민사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 또한 일련의 개혁으로 모두 체제 내로 포섭되었다.
이쯤 되면 절대주의 권력에 도취될 법한데, 이선은 오히려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대로 이 체제가 계속되면, 외형적 근대화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처럼 소수의 지배층과 절대다수의 피지배층으로 구성되는 제국주의 국가?’
이선은 그런 미래를 원치 않았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폭주하기 마련이었다. 결국 언젠가 자신도 죽을 것이었고, 후계자가 현명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초기 산업화로 부의 창출도 이뤄지고 있지만, 이제 막 자본주의 경제가 태동하는 상황에서 경제의 평등은 어려웠다. 토지 개혁으로 자영농 육성과 소농 보호에 나섰지만, 자본주의 경제가 성장할수록 빈부격차는 피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정치적, 사회적 평등은 이뤄 내야 했다.
‘역사대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고 가정하고, 1919년에는 새로운 정치 체제가 구축되어야 해.’
헌법 반포 이후 20여 년은 외형적 입헌 체제를 유지하고, 그동안 국민 정치의식의 성장을 통해, 진정한 민주 정치로 나아가야 했다.
‘능동적 시민 계급’을 의도적으로 육성해야 했다.
그렇기에 헌법 반포와 의회 개설, 정당 정치를 통해 정치의 혁신을 꾀했다.
이선은 언젠가 국민주권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근대 국민국가의 완성이었다.
‘씨앗을 뿌렸으니, 앞으로 싹이 나오길 기다려야지.’
광무 6년, 1902년 현재, 황성에서는 정치적 변화가 한창이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10년 전과 비교해도 이는 혁명적 변화였다.
"생각을 해 보게. 헌법 반포로 기본권이 생겼네.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생겨 정당이 설립되고 정치 집회가 열리지. 언론의 자유가 생겨 국내외의 소식을 접하고 비판할 수 있지. 의회가 설립되어 국민을 대표하지. 의회 다수당으로 구성한 정부는 국민에게 친화적이지. 이런 나라가 아시아에, 아니 지구상에 몇이나 될 것 같나?"
분명 표면적으로,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정치 체제가 구축되었다. 정치에 관심 있는 이들이 자랑스러워할 만한 체제였다.
물론 이건 소수의 ‘능동적 시민’에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대부분은 정치에 무관심했고, ‘나랏일’에 감히 끼어들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분명히 정치 참여에 열정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정당을 구성하고, 의회 회기에 참관하고, 정치 토론회에 참가하고, 신문을 구독하고, 비판을 가했다.
"의원 동지 여러분! 본 의원은, 광무 6년 예산안을 심의한 후,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까 합니다. 의화단 전쟁과 북벌 전쟁이 승리로 끝난 현시점에서, 예산안의 3할을 군비에 배정한 건 지나치게 과중한 조처가 아닌가 합니다. 군비에 쓰일 예산을 감축하고, 상공업 발전을 위해 더 많은 투자를……."
"의장! 제게 발언권을 주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대체 그 무슨 말입니까? 국가의 방위 없이 상공업 발전이 가당키나 합니까? 전쟁이 끝났다고는 하지만, 국가안보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작금은 제국의 시대입니다! 육·해군은 더욱 증대되어야 합니다. 제국당은 군비 증액을 지지하는 바입니다! 군비 삭감을 주장하는 독립당은 비애국자입니까?"
"뭐요, 비애국자? 그 말 취소하시오! 그러는 제국당은 제국주의자, 군국주의자인가?"
"그렇소! 우리는 제국주의자라는 걸 부정하지 않소! 그러니 당신들도 비애국자라는 걸 부정하지 마시오!"
"아, 정숙! 정숙! 오늘 회기에 참석한 군무대신께서 예산안에 대한 설명을 하신다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의원 여러분. 군무대신 윤웅렬입니다. 본관은 광무 6년 군비 예산에 대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의회에서는 열렬한 토론의 장이 벌어졌다. 실질적인 권한이라고는 거의 없는 정부 정책의 심의기관이라지만, ‘국민의 대표’를 자처하는 의원들은 의회 정치에 열심이었다. 내각 각료들은 의회에 출석하여 정부 정책을 설명했다. 의회 정치가 기틀을 잡고 있었다.
"말이 좋아 입헌 정치지, 실질적으로 개화당 독재 아닌가? 이래서야 일본의 삿초 번벌과 다를 바가 뭔가?"
"무슨 소리? 개화당은 물러터졌어. 국력 증대와 북진 정책에 힘을 써야 할 시기에, 야당이 발목을 잡아서야 되겠나?"
사람들은 신문을 통해 정치를 접하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정치가 일상으로 확산되었다.
정치 변화에 가장 민감한 이들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이끈 경험이 있는 독립당의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영미식 자유주의를 신봉했지만, 이를 맹종하진 않았다. 독립당은 황제의 정책을 볼 때, 향후 투표권 확대가 농민에게 이뤄지리라 예상했다.
"그동안 우리가 농민과 기층민들에게 너무 무관심했소. 서구식 부르주아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공리주의에도 관심을 가집시다."
"옳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하여!"
유길준,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 독립당 지도부는 노선 전환을 천명했다.
영미식 사상에 익숙한 이들은 공리주의를 새로운 이념으로 선택했다. 19세기 영국 공리주의와 자유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벤담(Jeremy Bentham)에 이어, 공리주의와 자유주의에 수정을 가해 다수 민중을 위한 사회 개혁을 주장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저서가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1900년대 현재 공리주의의 본고장인 영국에서는, 사회 개혁을 넘어 복지와 분배의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가 세를 넓히고 있었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머나먼 이야기였다.
한국에서는 ‘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를 번역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이는 많은 지식인의 표어가 되었고, 정부에도 지지자가 있었다.
"묻노니, 동포 여러분! 오늘 대한사회에 주인 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 자신의 지성으로 민족사회의 처지를 생각하여, 그 민족이 나아갈 구체적 방법과 계획을 세우고 그 방침과 계획대로 자신의 몸이 죽는 데까지 노력하는 자가, 그 민족사회의 책임을 중히 알고 일하는 주인이외다. 여러분이 바로 그 주인, 민족사회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외다!"
"와아아아아!"
근래 청년층의 열렬한 지지를 얻고 있는 안창호가 경제적으로는 협동조합주의를, 정치적으로는 소극적이나마 국민주권론을 주장했다.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독립당 지도부도 깜짝 놀랄 정도였으나, 안창호는 연설의 강도를 낮추지 않았다.
안창호에게 열광하는 건 청년층만이 아니었다. 유기상인으로 시작해 전국 굴지의 자본가로 성공한 평북 정주의 이승훈(李昇薰)도 안창호의 연설에 감격해,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우고 협동조합운동을 지원했다.
"젊은 친구가 패기 있어서 좋지 않나? 민족 계몽에 나선 훌륭한 젊은이로군. 검열할 이유도 없고, 연설을 금지할 이유도 없네. 짐은 오히려, 입만 열면 북진과 고토 수복을 외치는 몽상적 제국주의자들이 더 신경 쓰이는군."
내무대신 박영효가 안창호의 연설을 보도한 언론을 검열하고, 집회 금지령을 내리자고 건의했지만 정작 황제는 안창호의 연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국비 유학생이 미국물 먹고 나더니, 설마 공화주의자는 아니겠지?"
"에이, 설마요. 안창호 그 친구가 젊어서 언행이 좀 과격해서 그렇지, 진짜 애국자입니다. 충성심은 믿으셔도 됩니다."
"계몽하는 건 좋은데, 말 좀 가려서 하라고 하게. 이 나라의 주인은 엄연히 황제 폐하시네. 미국 유학생들은 자네 말 잘 듣지 않나?"
"그것도 옛날이야기죠. 요샌 세대가 바뀌어서. 아무튼 주의시키겠습니다."
김옥균이 서재필을 불러 경고했다. 공적으로는 입헌개화당과 독립당으로 갈라졌지만, 사적으로는 여전히 옛 동지이자 친구였다.
‘폐하의 성심은, 정녕 대한이 아시아의 프랑스가 되길 원하시는 건가?’
김옥균은 외무대신이자 입헌개화당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자신이 황제의 충신이자, 그 의중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김옥균 자신도 프랑스 공사를 지낸 대표적인 친불 인사이니만큼, 프랑스의 정치에 대해서도 조예가 있었다.
근래 한국과 프랑스 관계는 두터워졌다. 한국이 프랑스 차관을 얻고, 프랑스 민법을 도입하고, 프랑스식 농지 개혁을 추진한 것에 프랑스는 크게 만족해하고 있었다.
김옥균은 정치사상에 있어서도 프랑스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자코뱅주의나 보나파르티즘 같은 지나간 체제의 사상이 아니라, 가장 최근의 정치제도를 연구했다.
"프랑스 전 총리, 레옹 부르주아가 주장하는 연대주의가 프랑스에서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레옹 부르주아? 잘 알지. 총리를 지냈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프랑스 대표 아니었나."
레옹 부르주아(Leon Bourgeois)는 급진당 의원으로, 내무장관, 교육장관, 법무장관을 역임하며 개혁을 이끌었다. 1898년에는 프랑스 49대 총리를 지냈다. 1899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프랑스 대표로 파견됐고, 의장국 러시아의 초대로 참석한 대한제국 대표 김옥균과도 친분이 있었다.
1896년, 부르주아는 저서 집필을 통해 연대주의(連帶主義, Solidarisme)를 주창했다.
부르주아는 ‘자유, 평등, 우애’를 내세운 프랑스의 사회적 불평등을 직시하고, 최저임금제도, 사회보험, 소득세, 무상교육 등을 연대주의로 주장했다.
이는 사회주의와는 다른 방법으로, 자본주의를 개혁하자는 ‘제3의 길’ 노선이었다.
자본주의가 막 태동하는 한국의 상황은 프랑스와는 명백히 달랐지만, 유교적 애민주의와 공동체주의토대 위에서 온정주의적 국가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대한제국과 맞아떨어지는 지점이 있었다.
김옥균은 레옹 부르주아의 연대주의를 번역해서 이선에게 바쳤다.
"인간이 혼자서는 스스로의 안녕을 보살필 수 없고, 모든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의 결합에 기대고 있다. …… 나의 고유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지킬 의무를 지는 것이다.
…… 사회는 집합적 질서의 유지를 목적으로 하며, 개인은 사회 내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직업적 능력을 충족시키고, 교육과 공중위생 등을 통해 스스로를 사회화하며, 손실을 최소화하고, 사회 진보에 공헌할 의무를 진다."
"구구절절 명언이군. 번역 고맙소."
"황공하옵니다, 폐하."
"연대주의에 관한 연구를 시작해 보시오. 대한이 장차 산업화로 나아간다면 필요한 조치들이니."
"예, 폐하!"
이선은 김옥균을 치하했으나, 사실 그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이 주창한 유기적 사회론, 사회연대론을 정치적으로 내세운 이가 레옹 부르주아였다.
19세기 자유방임주의의 실패, 20세기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실패를 알고 있는 이선으로선 ‘제3의 길’을 모색할 이유가 충분했다.
대한제국의 산업화는 미약한 수준이었기에 벌써 ‘제3의 길’을 모색하는 건 서두른 감이 있었지만, 이선은 20세기에 밀려올 사회주의의 바람을 예상했다. 이미 유럽에서는 시작되었고, 앞으로 20년 안에 아시아에도 태풍처럼 밀어닥칠 터였다.
토지 개혁을 실시하고, 협동조합운동을 밀어주는 것도 선제적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해서였다.
군주정의 특성상 사회주의는 용인할 수 없었지만, 연대주의는 용인 가능한 이념이었다.
대망의 20세기가 시작됐다. 20세기는 온갖 정치사상이 등장하고, 충돌하고 폭발하는 혁명적 시대이기도 했다.
대한제국은 몰려 들어오는 새로운 이념들을 연구하고, 토론하고, 계승하고, 개량하고, 주창했다.
바야흐로 백가쟁명의 시대였다.
그 과정에서, 근대 시민 계급의 맹아(萌芽)가 싹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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