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311화 (310/812)

311화 구본신참(舊本新參)

이선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제국의 기본 방침으로 ‘구본신참(舊本新參)’을 내세웠다. 구본신참은 옛 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한다는 의미였다.

사실 구본신참은 개화당 정부의 급진적 정책하고는 거리가 있었고, 명목상 구본신참을 내세운 이선 본인의 속내도 달랐다.

‘내 정책은 급진적 근대화지만, 국민 대다수의 보수적 여론을 고려하면 슬로건은 그렇게 걸어 줘야지.’

이선은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지만, 동시에 조선왕조의 27대 군주이기도 했다. 그 자신이 별로 내키지 않는다고 해도, 군주인 이상 조선의 전통을 깡그리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짐은 선대왕의 업적을 계승하여, 성군이신 세종 대왕과 정조 선황제를 모범으로 삼아, 대한을 부강한 나라로 이끌 것이오."

이선은 공식적으로 세종과 정조를 모범으로 삼고 있음을 천명했다. 이는 전통적인 선대왕 존숭의 의미보다는, 국가의 정통성과 국민적 단결을 위한 조치였다.

대한제국의 황제는 조선왕조의 유학적 군주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과 같은, 18세기 유럽의 절대주의 계몽군주에 더 가까웠다.

분명히 국가와 사회는 ‘신참’으로 혁명적 변화를 겪었지만, 최상층인 황실과 조정에서는 여전히 ‘구본’의 논리가 작동했다.

"우리 대황제 폐하의 큰 덕과 높은 공훈은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대단한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열성조의 아름다운 규례를 따라, 소신의 지극히 절절한 청을 굽어 따라 주시어, 위로는 하늘에 고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선포하여 존호를 올리고……."

그 직접적인 증거는,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하는 일이었다.

존호는, 왕이 훌륭한 업적을 이룩한 경우, 신료들이 왕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올리는 호칭이다.

이는 분명 극찬의 의미가 있었지만, 조선 전기에만 해도 드물었던 존호 추숭이 후기로 들어오면 남발되면서 의례적인 찬양에 가까웠다.

태상황의 법적인 부모인 문조(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조씨는, 태상황 재위기에 잇달아 존호를 바쳤다.

효명세자의 경우 살아생전에는 왕위에도 못 올랐지만, 태상황 재위기에 9차례에 걸쳐 72자의 존호를 추숭함에 따라 동양권에서 가장 긴 존호를 받는 진기록을 세웠다.

태상황만 해도 재위기에 4차례에 걸쳐 존호를 받으면서,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 32자의 존호를 자랑했다.

정작 가장 많은 업적을 세운 세종의 존호가 ‘영문예무인성명효(英文睿武仁聖明孝)’ 8자로 선대왕 중에 가장 짧다는 게 역설이었다.

존호는 결국 정통성에 대한 집착이었다.

이선은 이런 의례적 찬양을 구시대적인 것으로 치부했으나, 존호 가상에 대한 청원은 반복되었다.

"그 높고도 큰 공적은 하늘처럼 커서 백 대를 내려오면서 비길 만한 이가 없었고, 천년 후에도 자랑할 만합니다. 부디 존호를 가상토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광무 원년 대한제국 선포, 3년 헌법 제정, 4년 북벌 성공 3차례에 걸쳐 존호 가상에 대한 청원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이선은 정중히 사양하고, 대신 그때마다 선대왕에게 존호를 올렸다.

"짐이 헌법을 흠정한 건, 오백 년 왕조의 기틀을 닦은 세종 대왕의 업적에 만분지일도 미치지 못한다. 존호는 마땅히 세종께 올려야 할 것이다."

칭제건원 할 때는 태조와 정조 이하 이선의 4대조에게, 헌법을 반포할 때는 세종에게, 봉천 정복 뒤에는 효종에게 존호를 추숭하면서 비켜 갔다.

그럴수록 신료와 사대부는 ‘선대왕에 대한 존숭과 효성이 지극하다’며 더욱 황제에 대한 칭송을 마지않았으니, 광무 5년 8월 북경 조약 체결 이후 존호 가상에 대한 전국적 연명상소가 쏟아졌다.

"짐에게 무슨 내세울 만한 덕이 있다고 이런 말을 하는가? 마땅히 사실대로 하기에 힘쓰고 한갓 형식을 숭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경들은 잘 헤아리고 다시는 번거롭게 굴지 말라."

이는 이선의 진심이었지만, 김옥균 등 이선의 의중을 알고 있는 측근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신료는 황제의 의례적인 사양이라고 생각했다.

태상황만 해도 더 사소한 일로 존호를 받았는데, 그에 비하면 황제의 업적은 비할 바가 없었다.

북벌 성공 이후에는, 개화당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영남 유생들까지 존호 청원의 대열에 합류했다는 점이었다. 가히 전국적인 충성 경쟁이라 할 만했다.

"이는 그간 조정에 비판적이었던 사대부들이 폐하께 그들의 방식대로 충성을 바치고자 함이 아니겠습니까? 여론을 못 이기는 척하고 받아들이시지요. 황제의 권위는 더욱 드높아질 것이니, 폐하께서 추구하시는 개혁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대부의 논리를 잘 알고 있는, 원훈 김홍집이 존호를 받을 것을 조언했다.

결국 이선이 존호 가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광무 5년 12월 내각에서 외훈홍업계기선력(巍勳洪業啓基宣曆) 8자를 황제에게 존호로 바쳤다.

‘외훈’은 뛰어나게 큰 공훈을, ‘홍업’은 나라를 세우는 큰 사업을, ‘계기’는 국가의 기반을 열었음을, ‘선력’은 책력을 베풀었다는 의미였다. 요컨대 제국 선포와 북벌의 공을 높이 받든다는 것이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종묘에 존호를 고하고, 국가에 조서를 알려 반포했다. 이선은 엄숙하게 의례를 치르긴 했으나, 존호 가상을 경하하는 진연은 사양하고 열지 않았다.

"그대들 국민이 짐을 이토록 존숭하니, 짐 또한 국민의 존숭에 어찌 보답하지 않겠는가?"

이선은 마치 존호에 화답하듯이, 존호를 받은 날에 농지법을 반포하여 공표했다.

존호 청원에 연명 상소를 보냈던 사대부들은 황제에게 뒤통수를 맞은 듯이 얼얼했으나, 선대왕의 법을 명분으로 내걸고 시행하는 황제에게 반대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황제는 북벌을 성공시킨 군주였다.

‘구본’을 무기로 ‘신참’을 능수능란하게 휘두르고 있는 황제의 권위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아! 우리 세종 대왕께서는 왕조의 기틀을 세우셨으며, 국토를 개척하여 강역을 넓히셨으며,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지키고자 하셨으며, 백성을 사랑하여 어제(御製) 훈민정음을 반포하셨으니, 실로 다시 없을 성군이시다. 마땅히 우리 대한의 표상(表象)으로 모셔야 할 것이다."

이선의 지시 아래, 대한제국 선포 이후 세종에 대한 국민적 숭배가 이뤄지고 있었다.

마침 1897년은 세종 탄신 500주년이었고, 관민(官民)을 막론하고 세종 숭배 열풍이 불었다. 그동안 오랫동안 천시되었던 한글이 ‘국문(國文)’으로 높여짐에 따라, 국문을 창제한 세종은 민족의 상징으로 떠받들어졌다.

황제는 바로 이 세종의 뜻을 계승하여, 국문을 발전시키고 국토를 확대한 것으로 포장되었다.

"문성공(文成公) 이이는 선대왕의 명신이자 위대한 개혁가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은 외적으로부터 국가를 지켜 낸 민족의 영웅이다. 문과 무에서 비할 바 없는 업적을 세운 분들이니, 마땅히 국민의 모범으로 받들어야 할 것이다."

애국주의 열풍이 불면서, 율곡 이이와 충무공 이순신이 애국적 ‘문’과 ‘무’의 상징이 되었다.

"문성공 이이의 대경장론과, 십만 양병론을 받들어 경장과 부국강병을 완수하자!"

진위 여부는 차치하고, 이이의 국가경장론과 10만 양병론은 부국강병의 근대화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로 활용되었다.

실제 대한제국은 거듭 경장을 내세웠고, 국민개병을 확대해 10만의 상비군을 확보하고자 했다.

더욱이 이이는 사대부 주류인 서인-노론의 종주로 떠받들어졌으니, 이이의 뜻을 계승하겠다는 데에 반발을 보일 수는 없었다.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수호한 충무공 이순신의 삶과 정신을 본받아, 다시는 침략 받지 않을 강국을 건설하자!"

국민적으로는 이이보다는 이순신이 더욱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독립전쟁 이후 상무(常武)의 열풍이 불고 있었고, 완벽한 불패의 명장인 이순신에 사람들이 더 숭배하기 쉬었다.

역사 속 영웅 숭배는 현재의 이해관계, 민족주의와 깊은 연관을 맺었다.

이는 근대국민국가의 유행인 동상 건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선대왕의 동상은 함부로 세우기가 어려웠으나, 국가 공인 명신인 이이와 이순신의 동상이 전국 곳곳에 세워졌다.

특히 ‘충무공 선양(宣揚)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군비 예산 분배에 있어 육군에 비해서 훨씬 불리한 입장에 있는 해군은, 충무공 숭배를 통해 해군력의 확대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임진왜란의 영웅으로는, 바로 그 충무공을 천거하고 전시재상으로 혁혁한 공로를 세운 서애 류성룡(柳成龍)도 있었으니, 여전히 영남 남인이 여론을 주도하는 경상도에서는 ‘문충공(文忠公, 류성룡) 선양 운동’이 일어났다.

"평양은 고조선, 고구려의 수도이자 그 정신을 계승한 후예이다.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끈 광개토왕, 수나라를 무찌른 을지문덕, 당나라를 무찌른 양만춘을 본받아, 고구려의 얼이 살아 있는 고토 만주로 진출하자!"

조선왕조에서 오랫동안 차별받다가, 제국 선포 이후 새로운 주류로 떠오르고 있는 평양은 고구려를 내세웠다.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안시성주(양만춘)가 새로운 숭배 대상이 되었다.

역사의 ‘구본’을 내세워, 새로운 시대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신참’은 황제만의 무기가 아니었다. 역사는 집단의 무기가 되었다.

구본신참을 내세웠지만, 대한제국의 공식적인 국가 표어는 광명천지(光明天地)였다.

‘온 세상을 밝게 하리라’는 구호는, 동양적 전통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서구 계몽주의의 정신에도 닿는 지점이 있었다.

이성을 환하게 비추어 정신을 밝게 한다는 ‘계몽(啓蒙, enlightenment)’은 근대의 시대정신이었으니, 대한제국이 내세운 광명천지도 이와 같았다.

‘배워야 산다’는 국가 계몽주의의 표어 아래, 곳곳에 학교와 공공 도서관이 설립되었다. 박물관과 도서관 또한 근대의 산물이었으니, 황성에는 누구나 관람할 수 있는 박물관이 추진되고, 도시에는 모든 시민에게 개방된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새로운 지식을 갈구하는 이들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배워야 산다. 배워서 개명하는 자만이 개화에 도달하고, 개화에 도달하면 비로소 문명이 열리도다."

이는 지식인만의 주장이 아니라 국민이 보기에도 단순한 표어가 아니었으니, 서울 황성부의 빛나는 밤이 이를 상징했다.

도심 곳곳에 설치된 전등에서 불빛이 환하게 비추었다.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1차 산업 혁명의 상징이 증기기관이라면, 19세기 후반에 시작된 2차 산업 혁명의 상징은 전기였다.

조선은 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전기를 도입한 나라가 되었다. 보빙사 귀국 후 J.P 모건과 에디슨 등 미국의 자본과 기술은 조선을 근대 기술의 실험장으로 투자했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전신이 전국에 가설되고, 전차가 시내를 누비고, 전등이 밤을 밝게 빛나고, 전화가 설치되어 통신의 혁신을 불렀다.

그 결과 1901년경이 되면, 대한제국 황성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근대적 대도시로 변모하고 있었다.

"황성은 참으로 불야성(不夜城)이로군!"

"밤에 이렇게 환할 수 있다니, 참으로 귀신의 조화가 아닌가?"

"이런 촌놈! 귀신의 조화가 아니라 이게 바로 문명개화라, 이 말일세."

"나도 안다, 이놈아! 이게 전등이라는 거 아니냐!"

"허허, 싸우지들 말게. 정부에서 말하는 광명천지가, 바로 이 황성이로세."

전기와 같은 최신 문명의 혜택은 황성이나 평양 같은 대도시나, 인천이나 부산 같은 개항지로 한정되어 있었기에, 지방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기차였다. 지방민들에게 광명천지의 상징은 기차였다.

"기차다! 기차가 들어온다아아!"

"구경 가자!"

기차가 역에 들어올 때마다 동네 사람들이 구경하기 위해 몰려드는 건 흔한 풍경이었다.

"철도야말로 부국강병의 상징이며, 새로운 시대의 총아다."

근대화의 가시적인 상징은 철도와 기차였다.

1888년 경인선 부설을 시작으로, 전국적 철도 부설이 개시되었다.

철도는 전국을 연결하고, 교통과 물류의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전통적으로 도로 사정이 나빠 수로에 의존해야 했던 조선에서, 마침내 전국적 육로 교통이 이뤄진 것이다.

철도의 발전은 군사적 상황과도 관계가 있었다. 철도의 군사적 이용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룩한 나라가 프로이센이니만큼, 독일 군사고문단은 신생 조선군에 철도의 군사적 필요성을 강조했다.

독립전쟁 당시 조선군은 1894년 갓 부설된 경의선과 경부선을 토대로 신속하게 군을 운용하여 승리에 기여했다.

"대한 13도를 철도로 연결하고, 대한을 넘어 만주까지!"

철도의 유용성이 입증되자, 독립전쟁 승전 이후에도 철도 붐이 불었다. 의화단 전쟁이 끝난 1901년이 되면 압록강 철교가 완성되어 한반도와 만주를 연결했고, 안서-봉천을 잇는 안봉선 철도 부설이 시작되어 러시아가 운영하는 동청철도 남만주 지선과의 연결이 추진되었다.

경의선과 경부선에 이어 한반도를 X자로 연결하는 종단 철도 부설도 계속되었다.

경부선의 천안에서 분기하여, 전주와 광주를 지나 목포까지 연결되는 호남선 부설이 진행됐다.

황성에서 철원과 원산을 지나 함흥을 연결하는 관북선 부설도 진행됐다. 관북선은 장기적으로 두만강까지 연결해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철도와의 연결이 추진되었다.

1902년이 되면, 호남선은 완공 직전이었고, 관북선은 원산까지의 구간이 완료되었다.

"요동에서 부산까지 전신을 보내면 당일에 전보를 받을 수 있다. 기차를 타고 아침은 황성에서, 점심은 개성에서, 저녁은 평양에서 먹을 수 있는 세상이 왔다."

전신과 철도가 전국을 연결하고 있으니, 바야흐로 전기와 철도로 상징되는 시대였다.

이는 직접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바꾸었다. 전신을 통해 물리적 거리를 넘어 연락을 주고받고, 철도를 통해 고향을 떠나 타지로 갈 수 있었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벗어나지 않는 전통적 농촌 사회는, 교통과 통신의 변화로 근대적 도시 사회로 변모하고 있었다.

1902년, 광무 6년 현재, 대한제국이 표어로 내건 ‘구본신참’과 ‘광명천지’의 세계는,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갖추어져 있었다.

- 31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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