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312화 (311/812)

312화 새로운 세기

광무 6년(1902) 봄.

유난히 무덥고 건조했던 작년과 달리, 광무 6년의 봄은 밝고 싱그러웠다.

창문 밖을 내다보던 이선은 새삼 봄이 왔다는 걸 깨달았다.

‘의화단 전쟁을 끝으로, 당분간 이런 평화가 지속되면 좋으련만. 하지만 평화를 지키려면 전쟁을 대비해야겠지.’

20세기가 시작되었을지라도, 이 시대는 어쩔 수 없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강자가 약자를 병탄하는 약육강식이 정당화되는 사회진화론의 시대였다.

아무리 대한제국에 유리한 국제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해도, 늘 대비를 해야 했다.

이선은 외무대신이자 제국익문사 독리인 김옥균을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요새 일본발 아시아주의에 동의하는 여론이 있네. 배후에 일본 정부가 있는지 알아보게."

"예, 폐하."

근래 일본에서는, 고노에 아쓰마로(近衛篤?) 공작을 중심으로 ‘동아동문회(東亞同文會)’가 형성되었다. 아쓰마로는 일본 황실과 가까운 고셋케(五攝家)를 대표하는 고노에(近衛) 가문의 당주로, 귀족원 의장에 재임 중이었다. 아쓰마로의 장남이 바로 후미마로(文?)였다.

동아동문회는 아시아주의, 흥아론(興亞論, 아시아 부흥론)을 내세워 일·청·한 삼국동맹론을 주장했다.

의화단 전쟁 이후 동아동문회는 청나라의 실력자인 양강총독 유곤일, 호광총독 장지동에게 접근하고, 대한제국에도 동맹을 주장했다.

"서양 열강이 중국을 분할한다면, 그다음은 누구겠는가? 아시아의 유이한 문명국인 일본과 한국이 손을 잡고, 서양 열강에 맞서야 한다!"

"한국은 눈을 떠라! 러시아는 백인 침략자에 불과하다! 러시아를 거부하고 아시아의 수호자, 일본과 손을 잡아야 한다!"

고노에는 주일 한국공사관의 외교관들, 재일 유학생들과 빈번이 접촉하며 아시아주의와 삼국동맹론을 주장했다.

황제의 특명으로 주일 공사 이하영(李夏榮) 이하 외교관들은 고노에와 접촉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답변은 주지 않았다.

고노에와 동아동문회원은 주일 한국 공사관을 찾아, ‘일한동맹청원서’를 전달했다.

"공사, 대일본제국과 귀국이 손을 잡는다면, 중국의 분할을 막고 러시아를 비롯한 서양의 침략을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 두 나라야말로 동양 문명을 지킬 의무가 있는 나라입니다."

"공작의 청원은 아국 정부에 전달하겠습니다."

집권 여당인 입헌개화당 지도부의 공식 입장은 ‘우방인 러시아와의 관계를 우선하되, 근린 일본과의 관계도 중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동아동문회가 주창하는 아시아주의에 한국 지식인층도 상당수 공명하는 기미를 보였다.

"북경의 참사를 보았는가? 백인은 황인을 동등한 인종으로 여기지 않는다!"

"저들은 동양 전체를 집어삼키려고 한다. 동양이 단결하여 서양 패권에 맞서 싸우자!"

일각에서 나오는 아시아주의와 한일동맹론에, 황제 이선은 공식적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대응은 했다.

"폐하, 보고 올립니다. 고노에 공작이 황실의 일원이자 귀족원 의장이긴 합니다만,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아닙니다. 원래 고노에 공작이 나서는 걸 좋아한답니다. 국내 아시아주의자들이 흥아론의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나, 일본 정부와 결탁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럼 일본 정부의 입장은 무엇인가?"

"이노우에 총리와 이토 전 총리는 러시아와의 관계도 중시합니다. 구태여 러시아와 갈등을 빚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군부와 민간 일각에서 대 러시아 강경론을 부르짖는 자들이 있어, 정부도 골치 아프다고 합니다."

대일 정보망을 가동시킨 김옥균의 보고에, 이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 범위 내였다.

"그러리라고 생각했네. 아마 차기 총리는 사이온지 후작이 되겠지?"

"현재로선 유력합니다. 이토 전 총리가 후계자로 미는 인물이니까요."

"좋아. 사이온지가 총리가 된다면 헛짓거리는 안 하겠지."

"예, 사이온지 후작은 충분히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사람입니다."

1901년, 사임한 이토 히로부미의 뒤를 이어 이노우에 가오루가 후임 총리가 되었다.

이노우에는 이토의 정치적 맹우이자, 사실상 이토의 영향력하에 있었다. 이노우에는 이토가 후계자로 미는 추밀원 의장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로 가는 중간 단계였다. 사이온지가 차기 총리가 될 가능성이 유력했다.

고위 귀족 출신으로 프랑스 유학파인 사이온지는 일본 지배층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입장이었다.

영국식 입헌군주제와 정당 정치를 구상했고, 이토가 창당한 입헌정우회의 부총재가 되어 차기 후계자로 낙점되었다. 사이온지는 김옥균과도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웠다.

이토-사이온지 문민파가 계승한다면, 야마가타-가쓰라 군부파는 정치적으로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의미였다.

‘역사가 바뀌긴 바뀌었군.’

실제 역사와 달리 2차 야마가타 내각이 수립되지 않은 덕에, 1900년에 야마가타가 제정한 ‘육해군대신 현역무관제’가 확립되지 않았다.

현역 육·해군 장성만이 육·해군대신에 입각할 수 있어, 군부는 수틀리면 내각을 무너트릴 수 있었다. 이는 두고두고 군의 문민통제를 저해하는 요인이 되어, 일본 군부의 과격화와 정부의 종속을 피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 요인이 배제된 것이다.

‘당장 영일동맹이 발생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중대한 변화다.’

실제 역사대로라면 1902년 1월 30일에 영일동맹이 체결되어야 했었다. 하지만 이날은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갔다.

북수남진 정책을 국시로 내걸고 하이난을 확보한 일본으로서는 굳이 러시아에 각을 세우며 영국과 동맹을 맺을 이유가 없었다.

일본은 영국의 동아시아 정책 하위 파트너 역할을 했지만, 러시아와 전쟁을 한다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결국 영국의 새로운 정책이 중요하다.’

영국은 3년째 남아프리카에서 발목이 잡혀 있었다. 1899년 10월에 발발, 단기간의 승리로 예측했던 제2차 보어 전쟁(Boer War)이 장기화되면서, 영국은 당황했다. 네덜란드계 보어인 게릴라들은 남아프리카의 지형을 활용하면서 효과적으로 영국을 괴롭혔다.

결국 영국은 40만 대군을 투입하고, 남아프리카를 초토화시키는 전략으로 보어인을 궁지에 몰았다.

1902년 봄이 되면 영국의 승리가 거의 확실시되었지만, 잔혹한 초토화 전쟁을 벌인 영국은 유럽 열강의 비난을 받으며 외교적 고립을 절감했다.

‘유색인 원주민’을 상대로 잔인한 전쟁을 벌이는 건 비일비재했지만, ‘백인’인 보어인을 상대로 잔인한 전쟁을 벌이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게 당대 유럽인의 생각이었다.

특히 독일의 카이저는 영국을 맹렬히 비난하며, 노골적으로 보어인의 편을 들었다. 보어 군대는 독일제 신무기로 무장 중이었다. 영국의 강력한 경고로 독일의 공식적인 무기 수출은 중단되었지만, 민간 무기상을 통해 계속 전달되었다.

러시아-프랑스 동맹을 견제하기 위해 독일과 우호 관계를 유지했던 영국이지만, 슬슬 독일에 대한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거침없이 건함정책을 추진해 영국의 해양 패권을 위협하는 독일이었다.

"런던의 의친왕에게서 새로운 소식이 왔는가?"

"예, 의친왕 전하께서 전문을 보내셨습니다. 의친왕의 전문에 따르면……."

작년 2월 빅토리아 여왕 장례식 이후, 올해 8월로 예정된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까지 의친왕은 영국 런던에 체류 중이었다.

표면적으로 의친왕은 런던에서 놀고먹으며 한량 생활을 했지만, 은밀히 황제를 대신해 왕실 외교를 수행하고 있었다. 의친왕은 특유의 사교력으로 영국 상류층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고, 그렇게 얻게 되는 정보를 황제에게 보고했다.

"수상의 병세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는군요. 보어 전쟁이 승리로 끝나는 대로 솔즈베리 후작이 총리직에서 사임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보수당의 후임 총리로 유력한 건 재무장관 밸푸어겠지?"

"그렇습니다, 폐하. 밸푸어 장관이 가장 유력하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총리에 재임한 솔즈베리 후작이 사의를 표명함에 따라, 내각의 이인자 아서 밸푸어(Arthur Balfour)가 후임 총리로 취임할 가능성이 유력했다.

밸푸어는 대러·대독 강경론자였고, 실제 역사에서 비동맹 정책을 청산하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동맹을,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협상을 체결했다.

에드워드 7세의 즉위와 밸푸어의 수상 취임은, ‘영광의 고립(Splendid isolation)’을 자처하며 비동맹 정책으로 일관하던 영국 외교 정책의 전환을 의미했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그동안 열심히 깔아 놓은 판이 다 흔들린다.’

이선은 1902년이 중대한 전환점이 되리라 예상했다.

지난 20년간의 노력으로, 대한제국은 실제 역사처럼 약소국은 아니었다. 오히려 떠오르는 신흥국이었다. 하지만 한 끗 차이의 실수로 몰락의 위기에 빠질 가능성은 엄연히 상존했다.

‘러시아를 잘 다뤄야 해. 영국, 미국, 프랑스는 민주국가이니 여론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전제군주국인 러시아는 차르만 잘 단속하면 되겠지만…….’

바로 그렇기에 이선이 러시아 황실에 그토록 공을 들여온 것이었다. 니콜라이 2세는 이선을 생명의 은인이자 형제처럼 대했고, 이를 입증하듯 러시아의 대한 정책은 지극히 우호적이었다. 군주의 감정과 결단으로 좌지우지되는 전제군주국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멀리 떨어져 있는 외국의 군주지.’

차르는 결국 국내의 정치적 입장, 측근의 파벌에 의존했다. 이 무렵 차르 주변에는 대외강경파가 득세하고 있었다.

여전히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을 총괄하는 건 재무대신 비테였지만, 그는 점차 궁정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극동의 평화적 침투를 외치는 비테는, 군사적 영광을 부르짖는 강경파와의 충성 경쟁에서 밀리고 있었다. 영국이 보어 전쟁으로 쩔쩔매는 틈을 타, 아시아에서 진출을 확대하자는 주장이 득세했다.

비테는 1902년 가을 극동 시찰을 나설 예정이었다. 비테를 지지하는 이선은 그와 회담을 가지기로 결정했다. 동아시아 정책에 있어, 이선과 비테의 이해관계는 일치했다.

‘적어도 당분간은, 러시아가 영국이나 일본을 도발하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유탄은 우리가 맞을 텐데…….’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1904년까지 상비군 10만, 예비군 20만을 확보하려는 군사 계획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이를 위해서 국가 예산의 3할 이상을 군비에 쏟아붓고 있었다.

‘전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지만, 가장 좋은 건 전쟁을 피하고 외교적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폐하께서 저희 신문과 직접 인터뷰를 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하, 이는 귀국에 대한 짐의 우호적 표시이자,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귀사에 대한 애호의 뜻이기도 합니다. 짐 역시 귀사의 신문을 애독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영광입니다, 폐하."

이선은 몸소 외국 언론과 인터뷰에 나서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정치적 여론을 중시하는 영국, 미국, 프랑스와 같은 나라에 영향을 미치는데 국가원수의 언론 활동만큼 좋은 게 없었다.

이선은 유력 언론의 특파원이 인터뷰를 청하면 마다하지 않았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 영국의 ≪타임스≫, 프랑스의 ≪르 프티 주르날≫과 ≪르 일뤼스트라시옹≫은 화제의 인물, 대한제국 황제와 잇달아 인터뷰를 했다.

"폐하께서 영국의 페이비어니즘(Fabianism), 프랑스의 연대주의,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에도 깊은 관심과 조예를 가지고 계신다는 게 놀랍습니다. 이는 동양의 관점에서 위험한 사상이 아닙니까?"

"꼭 그렇다고 볼 수 없습니다. 한국은 서양의 근대를 받아들였지만, 유교적 애민사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프랑스 연대주의는 대한의 현실과 사상에도 맞닿는 측면이 있습니다."

"혁명의 나라 프랑스 공화국의 사상이 동양의 군주국에 영향을 미치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비록 공화국이라 할지라도, 이미 한국은 프랑스 혁명의 유산인 국민개병, 국민교육, 나폴레옹 법전을 받아들였습니다. 한국은 타국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연대주의가 국민의 통합과 국가적 연대에 도움을 준다면 마땅히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다."

"훌륭한 말씀이십니다. 공화국 하원의장이신 무슈 부르주아도 자신의 사상이 한국에 알려졌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고 기뻐했습니다."

"하하, 기회가 되면 부르주아 의장을 직접 한국으로 초빙하고 싶군요."

"오, 그렇습니까? 꼭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선의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는 언론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유신 이후에도 엄숙한 구름 위의 통치자로 남아 있는 메이지와 달리, 세련된 양복을 입고, 격조 높은 언어를 구사하고, 서양 문화에 밝고, 외국인에 우호적인 이선은 동양의 전제군주보다는 서양의 입헌군주에 더 가까워 보였다.

한국에 대해 특히 더 우호적인 여론을 보이는 건, 프랑스였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대중에게 미지의 나라인 한국을 소개하는 것에 가까웠다면, 프랑스는 동맹인 러시아의 우방이자, 중요한 투자국으로 여기고 있었다.

자국을 모범으로 개혁에 나섰다는 데 싫어할 나라가 없었다. 특히 프랑스처럼 자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나라는 더욱 그랬다.

- 극동의 표트르 대제이자 나폴레옹, 혹은 붉은 황제? 본지, 한국 황제 단독 인터뷰!

나폴레옹이 태어난 지 꼭 99년이 되는 해인 1868년, 극동의 작은 나라에서 국가의 운명을 바꿀 영웅이 태어났다. 그가 바로 한국 황제 이선이다. 영민한 지성과 진보적 사고를 갖고 있는 한국 황제는……

전봉준을 ‘동양의 가리발디’라고 소개한 바 있는 프랑스 언론은, 이선을 ‘동양의 나폴레옹’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의 나폴레옹’은 19세기의 상투적인 찬사였지만, 프랑스인들을 주목시키는 데 가장 좋은 찬사였다.

"한국은 극동의 프랑스다! 공화국의 이상이 극동에까지 전파되었다!"

"프랑스 공화국과 대한제국이 연대하자!"

대한(對韓) 차관과 투자, 무기 수출, 기술 이전, 고문관 파견 등 복합적 지원 결의안이 전 총리이자 하원의장 레옹 부르주아의 주도로 프랑스 하원에서 통과되었다.

프랑스 정치인들이 한국의 태도에 감격을 하였다기보다는, 동맹 러시아의 우방인 한국을 키워 극동에서 프랑스에 이득이 되게 하겠다는 냉혹한 계산이 앞섰지만, 한국 입장엔 상부상조였다.

러시아의 동맹이자, 영국과 협상을 계획하는 프랑스는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실제 대한제국의 힘없는 외교는 무기력했지만, 이선의 대한제국은 최소한의 전쟁 억지력과 논리적 외교를 갖고 있었다.

이선은 이를 토대로, 새로운 세기인 20세기에 동아시아의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 313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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