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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혁명의 시대-313화 (1부 완결) (312/812)

313화 혁명의 시대

광무 6년(1902) 5월.

이선은 완공 직전인 경운궁 석조전을 살펴보았다.

궁전 건축은 예산 우선순위에서 밀려 가급적 자제하고 있는 대한제국이었지만, 서양식 궁전인 석조전 건축은 계획대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대한제국의 새 정전(正殿)이자 근대화의 상징으로 서양식 궁전은 필요했다.

"올해 건원절은 국민과 함께 기쁨을 나눌 것이니, 경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라."

5월 31일은 황제 이선의 탄일인 국경일, 건원절(乾元節)이었다. 올해 건원절에 맞춰 경운궁 석조전과 국립 박물관이 개장될 예정이었다.

"대한국 권업박람회 개회에 맞춰, 국립박물관을 개장하고, 궁전 일부를 개방한다."

대한제국 선포 5주년을 기념하여, 5월 30일부터 ‘대한국 권업박람회(大韓國勸業博覽會)’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참관한 관리들이 권업박람회를 주관하였다. 대한제국의 산업 발전을 추구하는 국내 박람회였지만, 재한 외국인의 참여도 권했다.

경복궁 광화문과 경운궁 대안문 사이의 옛 육조거리, 현 세종로에 박람회에 활용될 건물들이 건립됐다. 정부 각 부처와 의회가 있는 세종로에 웅장한 서양식 건물들이 들어섰는데, 그중에는 최초의 국립박물관도 있었다. 국립박물관은 황실 수장고 컬렉션을 중심으로 개관할 계획이었다.

박람회 개최 시기에는 태상황이 머무르는 창덕궁을 제외하고, 경복궁과 경운궁, 창경궁 일부를 국민에게 개방하기로 했다.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조선에서는 관리가 아닌 자가 함부로 궁궐에 들어갔다가는 처벌대상이었다. 그동안 엄격히 닫혀있던 궁궐의 문을 열고, 황실과 국민의 거리를 줄이겠다는 뜻이었다.

광무 6년 5월 30일 금요일.

박람회 주개최장으로 쓰일 국립황성박물관에 황제와 황족들, 정부 관료와 의회 의원, 산업계 인사와 재한 외국인 등 귀빈과, 국민 대표로 선발되어 초청된 이들이 집결했다.

"황공하옵게도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이 자리에 친림해주셨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개회를 선언하시고자 하니, 귀빈 여러분은 모두 기립해주시길 바랍니다."

박람회 개회식은 서양식으로 준비된 리본 커팅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선은 몸소 가위를 들어 붉은색 리본을 잘랐다.

"제1회 대한국 건업박람회 개회를 선언합니다."

역사적인 순간에, 일제히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박람회와 박물관은 근대의 꽃이라 할 수 있었다. 제1회 만국박람회가 개최된 런던의 수정궁(Crystal Palace)이 영국의 산업혁명을 상징했듯이, 웅장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세워진 국립황성박물관은 한국의 근대화를 상징했다.

총리대신 박정양을 시작으로, 각부 대신과 의회 의장, 귀빈들의 축사가 이어졌다.

"나 김옥균은 20년 전부터, 조선이 아시아의 프랑스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서양의 제도를 받아들이고, 그 지식을 흡수하고, 총체적인 개혁에 나섰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날의 성과입니다."

외무대신 김옥균이 감격에 벅찬 목소리로 축사를 했다. 그 이야기를 처음 했을 때만 해도 30대 초반의 열혈 청년이었던 김옥균은 어느덧 머리가 희끗한 50대의 장년이었다.

"이는 황제 폐하의 영도를 받아, 우리 2천만 국민이 단결하여 개화에 매진한 덕입니다. 대한의 자주독립과 문명개화를 넘어, 부국강병과 입헌정치까지 이룩합시다! 우리 함께 외칩시다!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만세!"

김옥균은 20년 사이의 변화에 정말로 감개무량한 듯,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만세를 선창했다. 일제히 만세가 쏟아졌다.

황제와 귀빈들의 박람회 시찰을 시작으로, 제1회 대한국 권업박람회가 시작되었다.

박람회에는 산업, 경제, 교통, 건설, 교육, 위생, 기술 등 근대화를 상징하는 시설과 통계를 총망라한다는 원칙이 세워졌다.

농업부, 임업부, 어업부, 광업부, 공업부, 토목부, 건축부, 경제부, 교육부, 위생부, 구민(救民)부, 군사부, 사법부, 예술부, 고고학(考古學)부 등 세분화된 분야에 따라 전시가 이루어졌다.

"줄 서요, 줄! 줄을 똑바로 서는 것도 문명개화의 한 상징이오!"

"먼저 들어갑시다! 내 이걸 보려고 얼마나 먼 거리를 온 줄 아슈?"

"여기 안 그런 사람이 없소! 순서대로 봐도 다 볼 수 있어요! 우리 모두 문명인이 됩시다!"

최초의 박람회이니만큼,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황성 시민들뿐만 아니라, 박람회를 구경하기 위해 전국에서 기차를 타고 몰려들었다.

이미 활발히 운행되고 있는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 평남선(평양-진남포) 외에도, 박람회 개최에 맞춰 호남선의 경광선(서울-광주) 구간, 관북선의 경원선(서울-원산) 구간이 개통하였다.

황성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X자 모양으로 관통하는 철도 덕에, 지방민들도 기차를 이용해 수월히 이동할 수 있었다.

"이야, 이거 신기하구만."

"대체 이 기계는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 겁니까?"

"예, 설명드리자면……."

그 명칭이 ‘권업(勸業)’이니만큼, 산업을 권장함이라는 이름에 맞게 중시되는 건 산업, 특히 공업이었다. 막 태동하고 있는 한국의 산업화, 공업화에 대한 전시와 설명이 한 가득이었다.

박람회 관람객들은 산업에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구조였다. 특히 이런 경험을 처음 해 보는 지방 출신 청년들은 깊은 감명을 받는 이가 많았다.

"듣던 대로 황성에 와 보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야. 저 웅장한 건물, 신기한 기술을 보라고. 역시 사람은 태어나면 한양으로 보내야 한다더니. 앞으로 나도 황성에 살아야겠네."

"다 떠나면, 고향은 누가 지키나? 문명개화가 황성을 넘어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게, 황제 폐하께서 권업박람회를 개최한 깊은 뜻이라는 걸 모르겠나?"

"그래, 안창호 선생의 연설 들었지? 우리 청년들의 손에 미래가 달려 있네. 각자 맡은 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 세상은 더욱더 좋은 방향으로 바뀔 걸세."

박람회를 통해 근대를 체험한 청년들은 열띤 토론을 했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갖게 되었다.

광무 6년 5월 31일 토요일.

이 날은 황제 이선의 탄일, 건원절이었다.

곳곳에 태극기가 내걸리고, 신문에는 ‘大皇帝陛下 聖壽三十五年御極六年慶祝乾元節(대황제 폐하 성수 삼십오년, 어극 육년, 경축 건원절)’이라고 큼직하게 인쇄되어 시민들에게 배포되었다.

전국에 국경일을 맞아 사람들은 휴식하고, 삼삼오오 모여 황제의 건원절을 축하했다.

공휴일이라 휴교였지만, 학생들은 교사들의 인솔을 받아 경운궁 대안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교복을 입고 태극기를 손에 든 학생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황제 폐하께서 오신다!"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만세!"

"건원절 경축!"

학생들의 열렬한 환호에, 기마호위대와 함께 말을 타고 경운궁을 나오던 이선이 화답했다.

"그대들은 어디에서 온 누구인가?"

"예, 저희는 관립 황성 제일중학교 교사와 학생 일동입니다!"

황성 제일중학교는 가장 먼저 세워진 중등교육기관으로, 중학교 중 최고 명문으로 꼽혔다.

"휴일에도 모여 짐의 생일을 축하해 줘서 고맙네. 내일부터 주말마다 궁궐 일부가 개방되니, 오늘은 이만 귀가하고 내일 다시 오도록 하게. 시종원경은 이 충성스러운 교사와 학생들에게 금일봉과 다과를 제공하도록."

6월 1일부터는 당분간 주말마다 경운궁, 경복궁, 창경궁 일부가 시민들에게도 개방될 예정이었다.

황실의 권위와 경호 문제로 인해 정부에는 반대 의견이 다수였으나, 이선은 궁내부에 명해 신청과 사전심사를 통해 인원을 통제하기로 했다. 이렇게 황제가 직접 ‘초대’를 하는 경우에는 예외였다.

"와아아아!"

"대황제 폐하 만세!"

"쉿, 이건 짐과 그대들만이 아는 비밀이다. 어디 가서 소문내지 말도록."

"예, 폐하! 명을 받들겠습니다!"

황제의 격려와 하사에 환호성이 끊이지 않았다. 감히 황제와 문답을 하고, 금일봉까지 하사받은 교사는 감격에 겨워 눈물까지 흘릴 정도였다.

이렇게 되면 매해 자신의 생일마다 경운궁에 인파가 몰려드리라는 예감이 들었지만, 이선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건원절 오전에는, 경운궁과 홍교(虹橋,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경희궁에서 근위사단의 관병식이 있었다.

관병식은 황제의 권위를 빛내기 위한 용도라기보다는, 국내외에 대한제국의 군사력을 홍보할 목적이 더 컸다.

올해 관병식에는 특히 보병·포병·기병의 합동 제병훈련이 열려, 북경 전투에서 활약한 근위사단의 정예함을 각국 외교관 앞에서 보여 주었다.

최소한의 전쟁 억지력을 각인시키기 위함이었다.

"근위사단은 과연 정예입니다."

"근위사단과 진위사단 간의 격차가 크기는 하지만, 적어도 외세가 한국을 침략하면 동귀어진 정도는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지."

대한제국의 군사력은 아직 열강에 비하면 미약한 수준이었으나, 최소한 침략자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같이 죽겠다는 각오였다.

이는 특히 군비확충에 열심인 일본에 보내는 메시지였다. 이선은 섣부른 침략은 공멸행위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건원절 오후에는 석조전 개장식이 있었다.

다수의 참석자를 모아 놓고 개회식을 연 어제와 달리, 오늘은 황족과 정부 각료, 외국 외교관 등 귀빈들만 초청하여 진연과 만찬을 준비했다.

1896년에 공사가 시작된 석조전은, 1900년 외부 공사를 마치고, 1901년 12월에 내부공사까지 마쳐 완공됐다. 가구 배치와 석조전 전면에 정원 공사까지 마친 후, 1902년 건원절에 낙성식을 열었다.

석조전은 영국인 하딩(J. R. Harding)이 설계를 맡고, 한국인 심의석(沈宜錫)을 감독으로 삼아 러시아인 세레딘-사바틴(Seredin-Sabatin), 영국인 데이비슨(Davison)과 로벨(Lovell), 일본인 오가와 요키치(小川陽吉)가 분야별로 건축을 맡았다.

내무부 기사 심의석은 당시 대한제국 최고의 건축가로, 독립문, 환구단, 최초의 극장인 협률사, 황성 최고의 호텔인 손탁호텔, 황성박물관, 황성대학 등 중요한 건축에는 모두 참여했다.

"훌륭하군. 심 기사의 공이 컸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석조전은 그리스 신전의 이오니아 양식(Ionic order)으로 기둥을 세우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풍을 가미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세워졌다.

영국식 신고전주의 양식을 모범으로 삼은만큼, 정원도 영국식 정원과 분수대가 세워졌다.

전체 3층 건물인 석조전은, 1층은 공적 공간으로 접견실과 귀빈대기실, 연회장과 식당이 있고, 2층은 사적 공간으로 황제의 침실과 서재, 집무실, 황후의 침실과 거실이 있었다. 지층에는 궁내부 직원과 시종원 시종들, 호위대가 대기했다.

각 층에는 넓은 테라스가 마련되어 있어서, 언제든 정원을 내다볼 수 있었다.

"오늘부터 이곳이 짐과 황후, 우리 아이들이 살 곳이오. 어떻소?"

"신첩은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참으로 아름답사옵니다."

화려한 샹들리에를 보던 황후가 감탄했다. 사절단의 일원으로 유럽을 경험해 본 그녀로선 서양식 생활에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석조전에는 전기와 수세식 화장실, 서양식 욕조가 완비되어 있었다.

그동안 황제가 신료를 만나고 집무를 보던 정전과 편전, 생활을 하는 침전에도 서양 기물들이 설치되었지만, 이렇게 완전히 서양식으로 갖춰진 건 처음이었다.

전통적 궁궐에는 정전·편전·침전의 공간은 분리되어 있었지만, 석조전은 하나로 통합되어 모든 업무와 사생활까지 가능했다.

‘사실 나도 이게 더 익숙하고 편해.’

이선 개인의 취향을 따져도, 서양식 궁전이 훨씬 편리하고 익숙했다. 20년 전 페테르부르크에서 한양으로 돌아온 이후, 가장 그리웠던 건 근대식 생활이었다.

늘 새로운 궁궐을 짓고 싶었지만, 예산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정해져 있기에, 자신의 집무실과 침실만 개조해서 쓰고 때를 기다렸다.

청나라로부터 배상금을 받은 후에야 일부를 돌려 석조전을 건설했다. 6년간 공사비용은 총 130만원으로, 적잖은 돈이 투입되어 완공되었다.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사……."

개장식은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가 지휘하는 황실군악대가 정원에서 애국가를 연주하고, 클래식 공연을 하며 절정에 달했다.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가 잇달아 연주되었다. 다분히 황제를 염두에 둔 선곡으로, 이선은 매우 만족스럽게 관람했다. 축음기로만 클래식 음악을 듣다가, 처음으로 한국인으로 구성된 관현악 공연을 들으니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연회와 만찬은 황족들과 정부 각료, 외국 공사들과 함께 이뤄졌다.

태상황과 일부러 창덕궁에서 왕림했고, 순친왕 이척 이하 황족들도 참석했다.

황족들과 대신들, 외교관들로부터 잇달아 축하를 받은 이선은, 건배사를 선창했다.

"대한국의 무궁한 발전과 세계의 우호친선과 평화를 위하여, 건배!"

"건배!"

이선이 우호와 평화를 강조한 건 이유가 있었다.

바로 1902년 5월 31일 이날, 남아프리카에서는 보어 전쟁의 종식을 알리는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영국은 보어인들의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을 모두 멸망시키고 식민지로 만들었지만, 전쟁으로 인해 입은 상처도 적잖았다. 영국의 가혹한 탄압과 초토화로 무수히 많은 보어인이 죽었고, 영국은 국제적 비난을 받고 고립을 절감했다.

‘보어 전쟁이 끝났다는 것은, 영국이 곧 다시 동아시아로 관심을 돌린다는 걸 의미한다.’

세계 패권국인 영국의 행보에 따라, 대한제국의 짧은 평화는 언제든지 정세의 변화에 따라 흔들릴 수 있다는 말이었다.

"폐하, 성수 삼십오 년을 감축드립니다."

"고맙소."

이선은 새삼 자신의 나이가 35세, 3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는 걸 인지했다. 실제로는 그보다 더 나이를 먹은 기분이었지만, 아무튼 청년기의 젊음은 끝났다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신생 대한제국의 유년기도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균, 어제 연설 말인데. 아부가 너무 과했던 거 아니오?"

"아부라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을. 2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하면 천지 차이입니다. 강산이 몇 번은 바뀌었지요. 그게 폐하의 공덕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이선의 농담에 김옥균이 정색하며 화답했다.

따지고 보면 그의 말이 틀린 건 없었다. 이선이 연해주에서 귀국한 1882년과 지금을 비교하면, 20년 사이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지난 20년 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제도, 기술, 군사, 교육 전 분야에서, 실로 혁명이라고 해도 좋을 변화였다.

‘그로부터 겨우 20년이 지났을 뿐. 개화당이 권좌에 오른 갑신경장으로부터 따져도 17년이다. 앞으로 17년 뒤, 1919년을 생각하면…….’

적어도 1919년까지, 이선은 대한제국이라는 배의 키를 잡고 거친 바다를 헤쳐 나갈 것이었다.

"물론 소소한 업적이 좀 있기는 했지.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하오."

"물론입니다. 폐하께서는 육지를 정복하셨고, 이제 대한제국이라는 배를 이끌고 바다로도 나가셔야지요."

"아니, 이왕이면 저 하늘까지."

김옥균의 비유에, 이선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김옥균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바다를 넘어 하늘까지? 폐하께서는 저보다 더 높은 야망을 갖고 계십니다."

"아니, 정말로 이제 인간은 하늘까지 정복하게 될 것이오. 20세기는 새로운 혁명의 시대가 되겠지."

이선은 인류가 하늘을 지배할 미래를 알고 있었다.

내년, 1903년이면, 라이트 형제가 최초의 비행기를 개발한다. 이선은 미국 내 투자사를 통해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개발에 자금을 보내고 있었다.

그로부터 인류는 끊임없이 진보할 것이다.

20세기의 비약적인 발전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대망의 20세기 초, 혁명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조선, 혁명의 시대 1부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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