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319화 (외전 완) (318/812)

외전. 황제 폐하의 사생활 (5)

제중원 부인과에 있던 마르가리타는, 갑작스러운 황궁의 부름을 받고 장비를 챙겨 급히 입궐했다. 시종이 보안을 철저히 하는 바람에, 그녀는 황후나 황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닥터, 오셨군요."

"황후 폐하,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내가 아니라 황상께서……."

"아……."

마르가리타는 가슴이 철렁했다. 순간 아득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의사답게 곧 냉철함을 되찾았다.

‘난 의사로서 할 일을 해야 해.’

마르가리타는 급히 강녕전으로 들어가 환후를 살폈다. 체온계로 열을 살피니, 열이 높았다. 그녀는 이어 청진기를 꺼냈다.

"폐하의 상의를 올려 주십시오."

"그, 그 무슨 망측한……. 어찌 여인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런 말을!"

늙은 태의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마르가리타는 유창한 한국어로 쏘아붙였다.

"진찰을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환자를 두고 쓸데없는 말은 삼가십시오."

"뭐, 뭐요!"

"태의, 나 역시 이미 청진기 진찰을 수차례 받은 바 있습니다."

황후의 개입에 태의는 입을 다물었지만,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이선의 제복 상의 단추가 풀어지고, 맨몸이 드러났다. 순간 황후는 민망함으로 고개를 숙였지만, 마르가리타는 의사로서 냉철하게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이선은 한동안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격렬한 폭풍우 속에서 이선이 탄 작은 배는 휘청휘청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거친 풍랑을 헤치고 겨우 육지에 도달할 무렵, 이선의 눈이 번뜩 떠졌다.

"아, 여기가 어디……."

"폐하, 폐하! 정신이 드셨사옵니까?"

아영이 반가운 표정으로 이선을 반겼다. 이선은 두통을 느끼다가, 문득 자신이 쓰러졌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황후, 내가 어찌 되었습니까?"

"과로로 쓰러지셨습니다. 아, 어서 선생을 안으로 뫼셔라! 폐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르가리타가 침전으로 들어왔다. 이선은 그녀의 나타난 게 뜻밖처럼 느껴졌다.

마르가리타는 흰 손을 뻗어 이선의 이마를 짚었다. 이선은 손의 감촉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열은 떨어졌군요."

"닥터, 내 병명이 뭡니까? 설마……."

순간 이선은 불안을 느꼈다.

‘만약 중병이면 앞으로 제국은 어찌한단 말인가?’

"제 소견으로는, 폐하께서는 수면 부족과 불규칙적인 식습관, 과로가 누적되어 쓰러지신 것입니다. 주사 한 대 놔드렸으니, 푹 쉬시면 건강은 되찾으실 겁니다."

"어휴……. 그나마 다행이군요."

이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절대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금방 회복하겠지요? 해야 할 일이 태산이라."

"젊으니까 괜찮으시겠지만, 계속 과로가 누적되면 안 됩니다. 앞으로 균형 잡힌 식단, 충분한 수면, 적절한 운동, 음주와 흡연은 줄이고, 무엇보다 쉬셔야 합니다. 일과 휴식의 균형을 맞추는 게 폐하께 가장 중요합니다."

냉철하고 사무적인 어조였지만, 이선은 마르가리타의 눈빛에서 그녀의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꼭 그리하지요. 고마워요, 닥터."

사흘 뒤. 이선은 내각의 대신들을 불러들였다. 단순한 과로였기에, 황제가 쓰러졌다는 소식은 내각을 제외하면 알려지지 않았고, 대외적으로도 공표되지 않았다.

"폐하, 옥체 강녕하신지요? 신등은 소식을 듣고 밤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경들이 걱정해 준 덕에 별 탈은 없소. 단순한 과로라고 합니다."

"실로 열성조가 보우하셨습니다."

"물론 그렇지만, 산 사람의 공도 컸지. 닥터 얀코프스카와 태의를 치하해 주고 싶소."

"지당하십니다. 또한 감히 황상을 내버려 두고 왕진을 갔던 보조의들은 치죄하겠습니다."

"대체 무슨 왕진을 갔다든가?"

"고양군에서 환자가 있었는데,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 양의 중에는 뛰어나다고 알려진 그들을 초빙했다고 합니다. 일의 경중을 구분하지 못한 건 처벌 받아 마땅합니다."

시종원경의 처벌 요청에 이선은 고개를 저었다.

"의사가 환자의 부름을 받아 떠난 게 처벌받을 일은 아닌 듯싶군. 애초에 황궁에만 있지 말고, 왕진이 필요하면 가라고 명한 건 짐이오. 유능한 양의가 부족한 판에, 처벌할 수야 있나. 견책 한 번만 하고 넘어갑시다."

"하오나……."

"보다 중요한 건, 의사를 보다 많이 배출하는 것이오. 궁중 시의가 됐건, 의학교 교수가 됐건, 병원 의사가 됐건, 앞으로 우리 한국인 의사로 배출해야 하지 않겠소?"

"실로 그러하옵니다."

이윽고 이선은 대신들에게 당면한 업무에 대해 지시했다.

"외무대신."

"예, 폐하."

"10월 청국 황제와의 회담은 예정대로 추진하시오."

"하오나 폐하, 옥체를 살피심이……."

김옥균의 우려에 이선이 웃었다.

"단순한 과로에 지나지 않으니, 짐이 그때까지 건강을 회복할 터.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부처별로 간단히 큰 틀만 지시한 이선은, 대신들을 돌아보았다.

"이번 일을 통해, 짐이 느낀 바가 많소. 짐 또한 사람일진대, 만기친람은 한계가 있소. 짐이 어찌 나라의 모든 사안을 심의하고 결정할 수 있겠소?"

"옥체의 보중(保重)하심은 대한의 국운과 관련된 일입니다. 신등이 불민하여 성총의 보좌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큽니다."

"그러하옵니다. 대죄(待罪)를 청하옵니다!"

대신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죄를 청하자, 이선이 손을 내저었다.

"일어나시오. 경들을 탓하려는 게 아니오. 경들은 대한에서 가장 유능한 이들이오. 각자 맡은 바 업무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는데, 짐이 욕심이 너무 많았던 것 같소."

"황공하옵니다."

"이래서야 내각의 의미가 없지. 앞으로 경들이 책임감을 갖고, 짐의 통치를 잘 보좌해 주길 바라오. 짐은 경들의 충정과 능력을 믿고 있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충심으로 성총을 보좌하겠나이다!"

이선의 요청에 총리대신 박정양 이하 대신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1901년 8월, 공교롭게도 의회 개원에 맞춰, 예기치 않게 내각의 책무가 막중해졌다.

황제가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던 국무의 일부를 내각에 이관함에 따라, 황권에 종속되어 있던 내각의 정치적 독립성이 강화되었다.

진정한 입헌군주제로의 길이 한 걸음 더 진행된 것이다.

이선은 한동안 업무를 최소화하고 휴식을 취하면서, 아영과 마르가리타의 간호를 받았다.

소식을 들은 분쉬가 급히 귀국하겠다고 했으나, 이선은 전보를 보내 괜찮음을 알리고 그가 휴가를 마치도록 했다.

이선의 곁을 늘 지키던 아영은, 마르가리타가 진찰을 위해 오면 자리를 비켜 주었다.

단둘이 만나지 않겠다고 내심 결정했던 이선이었지만, 이제 그런 결심은 내던진 뒤였다.

"많이 좋아지셨네요. 보세요, 의사 말만 잘 들어도 건강을 되찾잖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진작 닥터 말 좀 들을걸. 잘 먹고, 잘 자고, 담배만 줄여도 이렇게 몸이 가뿐해지는데. 기력을 되찾으면 운동도 열심히 해야지."

"술도 줄이면 좋겠습니다."

"아, 그건 안 돼요. 인생의 몇 안 되는 낙인데."

아이처럼 구는 이선을 보며 마르가리타는 쿡 웃었다.

"새로운 즐거움을 좀 찾아보시면 어떨까요?"

"그러기엔 황제로서의 삶이 너무 팍팍해서. 흠, 10월에 천진과 북경에 가는 건 즐거울까."

"여행으로 가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 물론 일하러 가는 거죠. 외교는 중요한 일이니까."

"그래도 폐하께선 해외에 나가셨을 때 행복해 보였어요."

"아, 그런 시절도 있었지. 당신과 함께 바르샤바에서 페테르부르크에 가고, 시베리아 횡단했던 게 생각이 나네요."

"제게도 좋은 추억으로 남았어요."

"좋은 추억이죠. 하지만 앞으로 그러진 못할 것 같아 아쉽군요."

"어째서요?"

"황제가 어떻게 장기간 국외여행을 갑니까? 왕관을 내려놓는다면 모를까. 옥좌에 앉아 있는 이상, 나는 옥좌를 벗어날 수 없어요."

이선이 왕좌를 가리키며 쓴웃음을 짓자, 마르가리타는 서글픔을 느꼈다.

‘왕좌가 이 사람의 생명력을 갉아먹는구나. 차라리 황제가 되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 순간, 이선은 마치 마르가리타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너무 그렇게 슬프게 쳐다보지 마요. 나는 지금 충분히 즐겁고 행복하니까."

"네?"

"나의 선택으로, 한 나라의 역사와 미래를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한국의 역사를, 한 민족의 삶을, 더 나아가 세계의 미래를 바꾸고 있지요. 정치가에게 이보다 더 짜릿하고 쾌감을 주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이를 위해서, 내 개인의 사소한 행복을 줄이면 좀 어떻습니까?"

이선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마르가리타는 정치가가 아니기에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망국의 백성으로 태어나 역사를 바꾸길 원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의식 과잉같이 들려도 할 수 없지만, 나는 역사를 바꾸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예정된 운명이었던 망국을 피하고, 내 민족이 가능성을 짓밟히지 않고 근대 세계에서 잠재력을 꽃피울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만족합니다. 그게 내가 이 시대에 오게 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르가리타는 이제야 비로소 이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한국어가 완벽하지 못해, 그가 말한 ‘이 시대에 오게 된 이유’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는 일반인과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그의 몸은 궁궐에 있을지라도, 훨씬 넓은 세상을 보고 먼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비밀로 합시다."

"네, 물론이죠. 우리만의 비밀이에요."

"우리만의 비밀이라, 왠지 은밀한 느낌인데. 앗, 그러고 보니 당신이 감히 내 옷을 벗겼다고 태의가 노발대발하던데…….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이선의 표정이 엄격해졌다. 마르가리타는 순간 당황해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그건 의사로서 당연히 할 일을……."

"이런, 황제의 옥체는 아무나 볼 수 없는 거란 말입니다. 사대부들이 알면 난리가 날 텐데,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지금까지 내 몸을 볼 수 있었던 여인은 어머니와 황후밖에 없어요. 어떻게 책임을 질 겁니까?"

마르가리타는 이선의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유교 예법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로선, 정말 자신이 큰 죄를 저지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전 의사로서 최선을 다한 거예요. 다시 그 순간이 와도, 똑같이 할 겁니다. 처벌받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푸하하핫!"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직업윤리를 강조하는 마르가리타를 보며 이선은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이에요, 장난."

"뭐예요! 전 진짜 죄를 저지른 줄 알았다고요!"

"아니 뭐, 사대부들이 알면 난리가 나기야 하겠지만. 황제가 괜찮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거야? 그러니까 걱정 마요."

마르가리타는 눈을 흘기며 토라진 듯 입을 다물었다. 이선은 성숙해 보이던 그녀가 은근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의료행위에 의미를 두는 게 더 이상한 거지. 그래서 이 나라에 여성 의사가 더 많이 필요한 겁니다. 여성 환자들은 남성 의사 앞에서 몸을 드러내길 극도로 꺼려하니까. 아플지언정 병원은 안 가려고 하죠."

"…… 맞아요. 그래서 시기를 놓치는 여인들이 많죠."

"그래서 당신 같은 사람의 존재가 소중한 겁니다, 이 나라에선."

이선은 순간 마르가리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크고 파란 눈이 더욱 커졌지만, 잡은 손을 빼진 않았다.

"당신은 내게 있어도 소중한 사람이지요. 이 나라에서 내가 동등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요. 당신이 없었으면, 난 정말로 고독했을 겁니다."

"폐하……."

마르가리타는 생각했다. 왜 자신이 이 머나먼 나라에까지 오게 되었는지. 물론 사촌오빠, 미하우 얀코프스키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나라이긴 했다.

하지만 그녀가 이 나라에 오게 된 건, 조선에 오게 된 이후에야 처음 본 사촌 때문이 아니었다.

결국 이 남자 때문이었다. 태어난 해는 같지만 태어난 곳은 지구 반대편이고, 신분은 자신과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하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아끼고 친밀히 여겨 준 사람.

처음에는 그가 왜 자신을 그토록 잘해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알게 되었다.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멸망한 나라에서 태어나 독립을 열망하는 사람과, 조국의 멸망을 막고 독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 사이의 특별한 정신적 유대로 시작하여, 그의 진면목을 알아 갈수록 더욱 깊은 감정을 느꼈다.

그가 그녀를 소중히 여기는 것만큼 그녀도 그를 소중히 여겼다. 단지 내색을 하지 않을 뿐이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군주였고, 유부남이었다.

가톨릭 신앙을 저버린 그녀였지만, 아내가 있는 남자를 사랑할 순 없었다. 착한 그의 아내를 배신할 수 없었다. 만약 감정에 굴복한다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앞으로도,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제게도, 폐하는 소중한 분이십니다. 앞으로도 저는 영원히 폐하의 친구로 남겠습니다."

"…… 고마워요, 마르가리타, 아니, Małgorzata."

마르기라타는 여전히 자신의 폴란드식 이름을 어려워하면서도, 발음을 흉내 내는 이선을 보며 빙긋 웃었다.

두 사람은 맞잡은 손을 한동안 놓지 않았다. 손을 놓았다 싶더니, 곧 포옹을 했다.

부드럽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날 밤.

이선과 아영은 모두 깨어 있었지만,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이선이 먼저 침묵을 깼다.

"고맙소, 황후."

"제가 감사합니다, 폐하."

이선과 아영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하고 싶은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황제의 건강은 곧 회복되었고, 이선은 예전과 달리 균형을 지키는 생활을 하며 건강관리를 했다. 이선의 기력은 과로로 쓰러지기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북경에서의 정상회담은 성공적이었다. 연말에는 계획한 대로 1차 토지개혁안도 반포되었다. 의회 정치도 정착하고 있었다. 국민은 환호하며 황제의 덕을 칭송했다.

20세기의 초엽, 대한제국의 미래는 더없이 창창하고 밝아보였다.

이듬해, 광무 6년(1902). 황실에 경사가 있었다.

황제의 셋째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아이였다.

- 외전 완결 -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태사령입니다.

1부 완결 후 두 달, 그동안 기다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당초 제가 9월 25일에 2부 연재가 시작될 것이라 공지한 바 있었는데, 외전을 먼저 연재하고 9월 30일에 2부 연재 시작을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공지한 사항을 변경하게 되어 죄송스러우나, 여러 사정이 있음을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부와 달리 2부는 11개의 플랫폼에 동시에 연재를 시작해야하니 일정 조율이 필요했습니다. 추석 연휴로 인한 일정 변화, 표지 최종 수정, 프롤로그 지도 제작, 프로모션 시작을 맞추다보니 9월 30일로 2부 연재가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늦어지는 대신 25일에 외전 5화를 연재하고, 30일 자정에 3연참을 시작으로 추석 연휴 기간 동안 연재를 이어나가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이 있어 2부까지 진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다려주신 독자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30일 자정에 2부 연재 시작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조선, 혁명의 시대 : 2부 대한, 제국의 시대≫ 도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 태사령 드림 -

2부 프롤로그. 제국의 시대 : 1903년의 세계

20세기 초.

세계는 압도적인 힘을 지닌 열강들에 의해 분할되어 있었다.

부의 증대, 산업 발전, 기술의 혁신, 문화예술이 꽃을 피는 ‘좋은 시절(Belle Epoque)’과 절망과 고통이 넘치는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이 공존하던 모순의 시대.

인간의 노력은 육지와 바다를 넘어 하늘까지 정복하기에 이르렀지만, 동시에 인간의 마음은 탐욕과 증오로 병들어 가고 있었다.

강자가 약자를 병탄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약육강식과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존재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여겼던 적자생존의 시대, 제국주의 시대.

살아남아 패권을 쥘 것인가,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몰락할 것인가?

<1903년(광무 7년, 메이지 36년, 광서 29년) 각국 정세>

▶ 대영제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koi)

국가원수 : 에드워드 7세(Edward VII) 국왕

정부수반 : 아서 밸푸어(Arthur Balfour) 총리, 보수당-자유통일당 연립정부

정치체제 : 입헌군주정 (의회 다수당에 의한 정부)

인구 : 약 384,000,000명 (본토 39,875,900)

산업혁명의 선두주자, 대영제국은 영광의 빅토리아 시대(1837-1901)에 세계의 패권자로 군림했다.

영국의 지배(Rule Britannia)는 5대양 6대주로 뻗어 나갔으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란 별칭을 얻었다. 19세기는 ‘영국의 세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02년, 빅토리아 여왕의 사후 즉위한 에드워드 7세의 시대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영국의 패권에 균열이 가고 있었다. 남아프리카 보어 전쟁(1899-1902)은 영국의 위신을 떨어트렸으며, ‘영광스러운 고립’을 추구하던 영국이 실제로 열강 사이에 고립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였다.

19세기 초반 이래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을 놓고 대립 중인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 전통적 라이벌인 프랑스와의 식민지 경쟁,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독일의 건함 정책은 영국의 패권을 위협하고 있었다.

1903년 현재, 영국은 더 이상 고립이 영광스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압도적인 해군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 프랑스 공화국(Republique francaise)

국가원수 : 에밀 루베 (Emile Loubet) 대통령

정부수반 : 에밀 콩브(Emile Combes) 총리, 급진당-사회당-민주공화연합 좌파 연립정부

정치체제 : 민주공화정 (의회내각제)

인구 : 약 78,790,700명 (본토 38,900,000)

프랑스는 중세 이래 유럽의 독보적인 강자였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은, 프랑스 단독으로 전 유럽에 맞설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실제 사례다.

하지만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결과, 프랑스는 치욕적인 참패를 겪었고, 독일이 유럽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1875년 성립한 프랑스 제3공화국의 국시는 독일에 대한 복수였다. 열광적인 애국주의 열풍 속에서, 프랑스는 식민지를 확대해 나갔다.

비스마르크 체제하에서 고립되었던 프랑스였지만, 카이저 빌헬름 2세의 즉위는 독일의 지배에 균열을 가했다. 프랑스 공화국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러시아 제국과 동맹을 맺었고, 파리의 금융자본은 러시아를 위해 막대한 투자를 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프랑스 자금으로 추진되었고, 러시아의 우방들 역시 프랑스의 우방이었다.

1903년 현재, 프랑스는 독일 중심의 삼국동맹에 대적하고 있고, 동맹 러시아가 극동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기를 원한다.

▶ 독일 제국(Deutsches Kaiserreich)

국가원수 : 빌헬름 2세(Wilhelm II) 황제

정부수반 : 베른하르트 폰 뷜로우(Bernhard von Bulow) 재상, 무소속

정치체제 : 외견적 입헌군주정 (군주에게 책임지는 정부)

인구 : 56,367,178명

1871년, 영광스러운 제국 선포 이후, 독일은 유럽 대륙의 지배자로 등극했다.

통일 독일 제국은 비약적인 산업 발전을 이룩했고, 비스마르크 체제하에서 유럽의 외교를 좌지우지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고립시켰다.

1888년, 야심만만한 젊은 카이저 빌헬름 2세가 즉위했고, 비스마르크는 은퇴하였다. 삼국동맹을 적으로 하는 러시아-프랑스 동맹이 체결되었지만, 카이저는 자신만만했다.

카이저는 독일 제국에 의한 패권을 원했고, ‘해가 비치는 자리’를 원했다.

독일은 1897년 본격적인 식민지 쟁탈과 건함경쟁에 나섰다. 독일은 더 이상 유럽 제국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카이저는 ‘세계 제국’을 원했다.

1903년 현재, 영국의 패권에 균열을 가하고, 프랑스의 복수전을 회피하기 위해, 카이저는 차르의 러시아가 극동으로 뻗어 나가길 원한다.

▶ 러시아 제국 (Россійская Имперія)

국가원수 : 니콜라이 2세(Nikolai II) 황제

정치체제 : 전제군주정

인구 : 약 136,305,900명

유럽의 변방이었던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 이후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러시아는 나폴레옹을 격퇴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면서, 세계의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크림 전쟁(1853~1856)의 패배는 러시아를 허상에서 깨어나게 했다.

1861년,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일련의 ‘대개혁’을 통해 농노제를 폐지하고, 근대화를 추진했다.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은 기득권의 반발을 우려해 불완전한 것이었으나, 수차례 암살 위기를 넘기고 1887년까지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887년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과 알렉산드르 3세의 즉위는 반동 정책으로의 회귀였다. 차르는 국내 정치는 반동으로 일관했지만, 대외 정치는 정세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독일의 삼국동맹에 대항했다.

1894년 즉위한 니콜라이 2세는, ‘극동으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동아시아 전쟁에 개입해 일본의 요동반도 점령을 저지시키고, 조선과 연합하여 만주 진출을 노렸다. 1898년 청나라를 압박해 관동주를 확보한 이후, 1900년 의화단 전쟁의 발발은 러시아의 만주 점령을 정당화했다.

1903년 현재, 러시아는 만주를 넘어 몽골과 신강을 세력권으로 편입, 유라시아 제국을 꿈꾸고 있다. 하지만, ‘민족들의 감옥’인 러시아 제국의 낡은 전제정은 역사의 발전 속도를 못 따라가고 있었으며, 사회 기층에서는 혁명 운동이 싹 트고 있었다.

▶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

국가원수/정부수반 :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

정치체제 : 민주공화정 (대통령 중심제)

인구: 75,994,575명

아메리카 대륙의 강자, 미국은 19세기에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을 외치며 서부로 진출,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의 확정 정책을 취해왔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산업력은 이미 영국을 앞지르기에 이르렀다. 오랫동안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의 원칙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고립주의를 채택해 왔던 미국의 대외정책에 변화가 왔다.

1898년,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하와이, 괌을 편입하고 필리핀 공화국을 괴뢰국으로 삼아 태평양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극했다. 이른바 ‘섬 제국주의(Island imperialism)’의 개막이었다.

1901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미국의 새로운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루스벨트는 태평양의 독점적 지배를 원했고, 중국의 분할에 참여해 미국의 시장을 확대하길 원했다.

미국은 1900년 이후 본격화된 군비경쟁에서 유일하게 참여하지 않은 열강으로, 군대의 전력은 주요 열강에 비해 뒤떨어지지만, 세계 제1의 산업국가로 압도적인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1903년 현재, 이 젊은 제국은 아시아-태평양을 향해 눈을 돌리고 있었다.

▶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

국가원수 : 메이지(明治)천황 무쓰히토(睦仁)

정부수반 :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총리, 입헌정우회-조슈-사쓰마 번벌 정부

정치체제 : 외견적 입헌군주정 (군주에게 책임지는 정부)

인구 : 약 46,605,000명 (대만 포함, 하이난 제외)

1868년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은 신속한 서구화 정책으로 빠르게 성장해나갔다.

1873년 징병제 실시 후 일본군은 빠르게 팽창했고, 1874년의 대만 침입, 1876년 강화도 조약, 1885년 천진 조약으로 조선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청나라와의 패권 경쟁에 나섰다.

1880년대의 ‘내치우선’ 정책에 따라, 일본은 차분하게 국력을 신장해 나갔다. 하지만 조선의 빠른 근대화는 일본 지배층을 놀라게 했고, 일본의 대 조선 방침은 보호국화에서 중립으로 선회했다.

1894년, 동아시아 삼국전쟁에서 조일동맹은 청나라를 격파했고, 일본은 청나라를 대신해 동양의 새로운 강자로 등극했다. 비록 염원하던 대륙 진출은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실패로 끝났지만, 일본은 새로운 식민지 대만을 중심으로 ‘북수남진’ 정책에 나섰다.

1898년, 일본은 미국-스페인 전쟁에 합류하여 스페인에 선전포고하고, 최소한의 희생으로 남양군도(마리아나 제도, 팔라우)를 확보했다.

1900년, 의화단 전쟁을 틈타 일본은 복건 샤먼 출병을 단행하나 영국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대신 하이난섬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1903년 현재, 일본은 북으로는 지시마(쿠릴)에서 남으로는 남양군도까지, 서로는 하이난에서 동으로는 마리아나 제도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해역을 소유하고 있다. 정부 주도층과 해군은 현재 상황에 만족하고 있으나, 정책 집행에서 소외된 육군은 불만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건함경쟁을 위한 막대한 세금 증액은 국민의 빈곤을 초래했고, 사회적 불안요소이기도 하다.

▶ 대청국(大淸國)

국가원수 : 광서제(光緖帝) 아이신기오로 자이티안(愛新覺羅 載湉)

정치체제 : 전제군주정

인구 : 약 400,000,000명 (정확한 통계 없음)

대청국은 중국 역사상 특별한 정복왕조였다. 대청 황제는 중화의 천자이자, 만주의 한이자, 몽골의 칸이자, 티베트의 전륜성왕이자, 무슬림 제후의 보호자로서 중화제국과 유목제국의 성격을 다층적으로 갖고 있는 제국이었다.

한때 동양에서 가장 강력했던 나라, 세계의 중심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대청국은 19세기 들어 끊임없는 몰락을 겪고 있었다.

1840년 아편전쟁은 중화의 자부심에 금을 그었고,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은 북경 함락이라는 치욕까지 겪게 하였다.

1860년대 이후 청나라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양무운동을 추진하여, 한때 동양에서 가장 강력한 함대를 구축했으나, 정치 체제의 후진성과 태평천국전쟁 이후 중앙집권의 붕괴는 새로운 시대에 발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게 했다.

1894년, 동양의 소국으로 얕잡아보았던 일본, 한때 제후국으로 종속시켰던 조선에게 패배를 당한 청나라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고, 친정에 나선 광서제의 주도로 변법자강 정책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서태후와 지배 세력의 반동으로 변법은 실패로 끝났고, 이후 발발한 의화단 전쟁은 9개국 연합군에 의한 참혹한 패배로 끝나며 대청국이 더 이상 떨어질 위치조차 없다는 걸 재확인했다.

1903년 현재, 재집권한 광서제와 양무파는 청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열강에 의한 중국 분할과 청조의 몰락은 기정사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 대한제국(大韓帝國)

국가원수 : 광무제(光武帝) 이선(李墡)

정부수반 : 박정양(朴定陽) 총리 (입헌개화당 내각)

정치체제 : 외견적 입헌군주정 (군주에게 책임지는 정부)

인구 : 약 18,000,000명 (본토와 신영토 포함, 자치령 제외)

조선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마지막으로 문화를 개방한 국가였다.

오랫동안 작은 세계에 안주해오던 조선은, 1882년 이후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 중심에는, 왕의 장자 완화군 이선과 개화당이 있었다.

1884년 갑신경장 이후, 조선은 빠르고 일관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서양 관찰자들이 깜짝 놀랄 정도의 선회였다.

1894년, 조선은 근대화 10년 만에 효율적인 행정과 작지만 발전된 군대를 거느리게 되었고,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 위에서 종주국 청나라의 침입을 격퇴하고 자주독립을 달성한다.

1897년, 조선은 칭제건원을 실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당당한 자주국가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다.

1900년 의화단 전쟁은 대한제국이 9개국 연합국의 일원으로 열강과 동등한 대열에 서게 하였고, 승전은 민족주의적 열망과 외교적 수완을 힘입어 만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확보했다.

1899년의 헌법 반포와 1901년 의회 개원은 대한제국이 입헌군주국이 되었음을 대내외에 공포했다.

근대화 20년 만에 대한제국은 초기 산업화, 징병제, 국민교육, 헌정을 실시하여 근대국가의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하지만 외형적 근대화를 빠르게 추진하는 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도 산적해 있었다.

1903년 현재, 황제 이선이 이끄는 대한제국호(號)의 항로는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그 선택에,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다.

- 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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