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대한, 제국의 시대
그는 꿈을 꾼다.
소년은 작은 돛단배에 몸을 싣고 고향을 떠났다. 쫓기듯이 떠나는 소년의 처지는 궁색하기 짝이 없었으나, 가슴 속에는 커다란 야망이 있었다.
반드시 돌아오겠노라고, 절대 죽지 않겠다고, 반드시 살아남으리라고. 그 자신도, 자신의 나라도.
세월이 지나, 마침내 소년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배는 고국에는 없는 증기선으로, 군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고국으로 가는 항로는 잔잔했다. 금의환향이었다. 혁명으로 가는 길이 활짝 펼쳐져 있었다.
그로부터, 역사가 바뀌었다.
소년은 청년이 되었고, 그는 역사를 바꾸고 살아남았다. 그의 나라도, 임박한 멸망을 피하고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청년은 지도자가, 그의 나라에서 누구보다 존귀한 황제가 되었다.
강자가 약자를 병탄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약육강식과,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존재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여겼던 적자생존의 시대.
그와 그의 나라는 생존이라는 1차적 목표는 달성한 것이다.
돛단배에 단 두 명의 가신만을 거느리고 밀항해야 했던 소년은, 이제 2천만이라는 승객이 타고 있는 거대한 선박의 키를 잡고 있는 선장이었다.
그가 어떻게 조타(操舵)를 하느냐에 따라, 선박의 항로가 결정될 것이다.
항로 곳곳에는 암초가 산재했다. 선장의 머릿속에는 세밀한 해도(海圖)가 그려져 있어, 배를 안전한 항로로 운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다를 표류하는 유빙(流氷)의 존재는 예측이 어려웠다.
하늘은 더 없이 맑지만,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저 멀리 수평선 너머에는 태풍의 기미가 보였다.
항로는 평안해 보였지만, 선장은 그 여느 때 못지않은 강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예측불허의 시대, 대한제국호(號)는 과연 어떤 항로를 택할 것인가?
때는 진보와 쇠락,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던 20세기 초, 제국의 시대였다.
* * *
"폐하, 폐하."
"으음?"
이선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비로소 꿈에서 깼다.
이선의 맞은편에는 황후 아영이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다.
"오침(午寢)을 깨워 송구하옵니다."
서재의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문서 사이로, 이선은 의자에 기대 깜빡 잠이 들었었다.
이선은 서재에 걸려 있는 시계와 달력을 보았다.
광무 7년, 1903년 5월의 화창한 봄날이었다.
"아, 깜빡 잠들었었나보오. 함께 차를 마시자고 부른 건 나인데."
"황공하옵니다. 좀 더 주무시게 두었을 걸……."
"아니오, 일어나야지. 시간이 꽤나 지났군. 오래 기다렸소?"
"아니옵니다. 조금 전에 왔사옵니다."
이선은 서양식 궁전인 석조전을 좋아했다.
작년에 완공된 경운궁 석조전은, 황제의 정궁으로 활용되었다.
전통적 궁궐에는 정전·편전·침전의 공간은 분리되어 있었지만, 석조전은 하나로 통합되어 편리했다.
경복궁이라면 황제가 머무는 강녕전과 황후가 머무는 교태전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만, 석조전 2층에는 황제의 침실과 서재, 황후의 침실과 거실이 바로 옆에 붙어 있어 접근성이 좋았다.
덕분에 이선은 종종 서재에 아영을 불러들여 다과를 함께 하곤 했다.
"폐하, 외무대신께옵서 급히 알현을 청하옵니다."
"그래? 서재로 들라 이르게."
"외무대신 입시(入侍)오!"
보통 각료와의 접견은 1층 접견실에서 이뤄졌지만, 측근은 서재로 불러들였다.
외무대신 김옥균이 황제와 황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신 옥균, 삼가 문안을 여쭙습니다."
"어서 오시오. 경도 같이 커피 마시겠소?"
"황공하오나……."
김옥균이 사양의 뜻을 밝히자, 눈치를 챈 아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첩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고맙소. 만찬 때 봅시다."
"송구하옵니다, 황후 폐하."
김옥균이 사죄를 하자, 아영이 웃으면서 정중히 인사를 하고 물러섰다.
"곤전(坤殿)께서 현덕(賢德)하시니 국가의 복입니다. 일전에 폐비 민씨는 신료들이 긴급한 정무를 아뢸 때도 주상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김옥균이 황후에게 찬사를 보냈으나, 이선은 폐비 민씨와의 비교가 별로 마뜩치 않았다.
"그러니 끝이 좋지 못했지. 아무튼, 급보라도 있소?"
"예, 미국통신원에게서 온 보고입니다."
‘통신원’은 황제의 정보기관, 제국익문사의 요원을 이르는 말이었다. 김옥균은 제국익문사의 2인자인 독리(督理)를 겸하고 있었다.
이선은 김옥균으로부터 보고서를 전해 받았다.
봉투에는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과 성총보좌(聖聰補佐)란 글귀를 넣은 전용 인장이 찍혀 있었다.
화학 비사법에 의해 작성된 보고문은, 특수 제작한 화학약품을 써야 글씨가 비쳤다.
이처럼 철저하게 보안을 지키는 보고문은 오직 황제 이선과 독리 김옥균만이 볼 수 있었다.
"흠……."
보고문을 읽는 이선이 쓴웃음을 지었다. 열람을 마친 이선은 김옥균에게 넘겼다. 보고문을 읽은 김옥균도 얼굴이 굳어졌다.
"이런."
"경도 느낌이 오나?"
"예, 당분간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나빠지겠군요."
"영국과 일본에, 이제 미국까지 러시아 비난 대열에 합류하겠군. 쯧, 러시아는 도대체 왜 이런 어리석은 짓을……."
이선은 혀를 찼다. 그의 예상대로, 1903년 들어 미국이 반(反) 러시아 대열에 합류하려는 기미가 보였다.
역사와 달리 실제 1902년 1월에 체결된 영일동맹은 아직까지 발생하지 않았지만, 동맹까지는 아니더라도 러시아에 대항하는 영-미-일 연대의 가능성이 탐지되었다.
"정책에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짐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당장 키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일단 좀 더 정보를 취득하도록 합시다."
"예, 폐하. 주미공사관의 보고도 첨부하겠습니다."
이선은 주미공사 서재필이 작성한 전문도 읽었다. 전문을 읽던 이선이, 이번에는 빙긋 웃었다.
"좋은 소식도 있군. 우리 황실이 투자한 자동차 회사가 6월에 설립될 예정이야."
대한제국이 투자했다는 자동차 회사는, 다름 아닌 포드 모터 컴퍼니(Ford Motor Company)였다.
"아, 그렇군요. 어차(御車)를 수입하시기 위함입니까?"
"뭐, 그럴 목적도 있지만……."
김옥균은 자동차라는 걸 보긴 했지만, 빠른 운송수단 정도로만 생각했기에 큰 감흥이 없었다.
1903년 6월, 40세의 기업가 헨리 포드(Henry Ford)는 자신의 이름을 딴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다. 포드의 첫 공장은 13인의 투자자로부터 3만 달러를 투자받아, 디트로이트 외곽의 마차공장을 개조해 설립되었다.
그 13인의 투자자 중 한 명이, 대한제국 황실의 미국 대리인이었다.
이선은 1883년 보빙사 방문 이후, 미국 자본과의 관계를 꾸준히 이어 왔다.
특히 J.P 모건, 에디슨의 전기회사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과는 진작부터 특별한 관계를 이어왔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미국 자본과 전기 도입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였다.
1903년, 이선이 새로운 투자 대상으로 삼은 곳은 바로 이 포드사(社)였다.
"앞으로 대량 생산의 시대가 올 거요. 포드는 그 시대의 상징이 될 거고."
"호오……."
이 시점에서 포드사는 특별할 게 없는 회사였으나, 1913년 최초의 컨베이어 벨트 생산 방식을 개발하여 대량 생산 시대를 연다. 이른바 포디즘(Fordism)의 시대였다.
"19세기가 기차와 해양의 세기였다면, 20세기는 바로 이 자동차와 창공의 세기가 될 거요."
"하하, 하늘까지 정복하신다는 그 말씀이십니까."
김옥균은 작년 석조전 개장식에서 했던 이선의 말을 떠올리며 웃었다.
한국에서 서양 문물에 대해 가장 밝은 김옥균이라지만, 아직까지 그에게 하늘을 정복한다는 건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다.
이선이 대리인을 통해 비밀리에 투자하고 있는, 미국의 아마추어 기술자들이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그들은 올해가 가기 전에 최초의 동력 비행에 성공할 터였다.
‘역시 20세기는 미국의 시대가 될 거야. 현대 자본주의와 기술 혁신은 이끄는 나라는 미국이지. 어떻게든 미국과의 관계를…….’
20세기 들어 이선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여러모로 1903년은 기대가 되는 해군."
1903년은 20세기의 진보를 상징하는 포디즘과 항공기의 역사적인 첫 출발을 알리는 해였다.
"폐하, 조금만 시선을 이쪽으로 바라봐 주십시오."
이선은 석조전 집무실에서, 화가의 화폭 앞에 서 있었다.
제국의 상징이 될 새 어진을 그리는 어진화사(御眞?師)는 특이하게도 서양인이었다.
화가는 네덜란드계 미국인 휴버트 보스(Hubert Vos)로, 이미 광무 2년(1898)에 한국을 방문하여 황제와 태상황의 어진을 그린 바 있었다.
보스는 1891년 네덜란드 빌헬미나 공주의 초상화를 그린 경험이 있고, 한국에서 황제의 어진을 그린 후에는 청나라에서 서태후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러면 되겠소?"
"예, 좋습니다."
대한제국 황실은, 서양의 사례를 참고하여 황제의 어진을 정기적으로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메이지 일본이 천황의 어진영을 전국에 배포해 국가 통합의 상징으로 삼은 것처럼, 대한제국에서도 황제의 어진은 전국적으로 봉안되었다.
사진 찍기를 극도로 싫어해 초상화만 몇 점 남긴 메이지와 달리, 이선은 사진 찍는 걸 선호했다.
황실에서 새로운 초상화를 제작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광무 7년 보스를 다시 초빙했다.
광무 2년의 초상화가 황색 곤룡포와 익선관을 쓴 전통적 어진이었다면, 이번 어진은 완전히 서양식이었다.
"폐하, 원수봉을 좀 더 높이 들어 주십시오."
"알겠소."
표트르 대제, 프리드리히 대왕, 나폴레옹과 같은 지난 세기의 군주에서부터, 프란츠 요제프 1세, 빌헬름 2세, 니콜라이 2세, 에드워드 7세와 같은 동시대의 군주들 초상화도 참고했다. 여기에 대한제국만의 특수성도 있었다.
"예, 이쯤 하면 되었습니다.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폐하."
"아, 수고했소. 이거 그림 모델이 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군. 몇 시간을 가만히 서 있어야 하니."
이선은 역시 사진이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대에는 사진 촬영도 시간이 걸린다지만, 그림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간편했다.
"하하, 그래도 잘 참아 주셨습니다."
"그만큼 좋은 그림을 기대하겠소."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얼마 후, 보스로부터 초상화를 받아든 이선은 기대에 보답을 받았다.
만 35세, 서른여섯을 맞이한 이선은 장년에 접어든 모습이었다. 새로 기르기 시작한 콧수염은 자연스럽게 나이를 표현했다.
서양의 군주 초상화를 참고했음을 알 수 있듯, 어진에는 서양식 알레고리가 가득했다.
대한제국 대원수의 예복을 입은 이선은 최고훈장인 대훈위금척대수장을 패용했다. 왼손에 원수 지휘봉을 들었고, 오른손으로는 세계지도를 짚었다.
배경으로는 태극기와 국장(國章)인 팔괘기가 새겨진 독수리가 그려졌다. 바로 그 아래에는 대한제국 헌법전이 표현되었다.
대한제국 황제이자, 육·해군 대원수이자, 헌법의 제정자인 이선을 상징화한 것이었다.
"훌륭한 그림인데, 실물보다 너무 미화한 게 아닐까 싶군요."
"폐하, 원래 군주의 초상화에는 미화가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제가 4년 전에 청나라 태후 초상화를 그릴 때는 30대 젊은 여성처럼 그리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주름 하나 없이 말이지요."
그 결과, 65세의 나이에도, 서태후의 초상화는 주름 하나 없이 매끈했다. 이 초상화는 서태후에게 바쳤지만, 보스는 미국으로 돌아간 후 나이를 반영한 사실적인 그림도 그려 출품했다. 의화단 전쟁 이후 서태후가 실각해 유폐되면서, 이 초상화는 서태후의 모습을 담은 마지막 그림이 되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원체 미남이신지라 이 정도는 미화도 아닙니다. 저는 일본, 중국, 자바, 시암, 인도, 티베트도 방문한 바 있습니다만, 동양에서 폐하보다 더 훌륭한 초상화 모델은 본 적이 없습니다."
"하하, 말씀도 잘하는군요. 짐은 이 그림이 매우 마음에 듭니다. 이대로 완성해 줬으면 합니다."
"예, 폐하."
이선은 문득 석조전 테라스 너머로 비치는 햇빛을 바라보았다.
광무 7년, 1903년 봄.
대한제국을 비추는 햇빛은 밝고 따사로웠다.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 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