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지배하라, 브리타니아여
극동 신항로 정책.
이 신노선 정책은,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 전환을 의미했다.
첫째, 7월로 예정된 만주 2차 철군은, 오직 청나라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단행한다.
둘째, 만주의 이권은 독점적으로 러시아에 귀속되어야 한다. 여타 열강의 자본을 허용하지 않는다.
셋째, 만주에서 러시아 기업들의 광범위한 활동을 허용한다. 정치·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우선적으로 활동을 개시한다.
넷째, 극동 군관구에 육군 병력을, 태평양 함대에 전함을 증강시킨다.
다섯째, 이는 청국령 만주뿐만 아니라, 한국령 남만주와 소위 ‘자치령’에도 해당된다.
"폐하! 이렇게 되면 영국과 일본을 자극하게 될 겁니다. 청국과 한국도 반발할 게 틀림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만주에서 철수하기로 했었는데, 추가 조건을 내건다면 청국이 받아들이겠습니까? 협약을 준수해야 합니다!"
재무대신 비테와 외무대신 람스도르프의 반발에, 베조브라조프가 반박했다.
"우리의 적, 영국은 청국의 시장을 지배하고 온갖 이권을 침탈하면서도, 러시아가 점령한 만주에 대해서는 조건 없는 철수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왜 러시아는 양보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니콜라이 1세께서 말씀하셨듯이, 러시아의 쌍두독수리 깃발이 한 번 올라간 곳은 결코 다시 내려올 수 없습니다!"
‘그럼 니콜라이 1세처럼 크림전쟁의 실패를 반복하잔 말이오?’ 비테는 차마 그 말은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대신 차분한 어조로 차르를 설득했다.
"폐하, 이런 조치는 영국과 일본, 어쩌면 미국까지 결합시키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청국과 한국에 베푼 러시아의 호의까지 의미가 없게 됩니다."
"재무대신, 경은 언제나 부정적인 경우만 말하는군. 우리가 왜 그렇게 영국과 일본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모르겠소. 그리고 한국은 우리의 우방이자, 한국 황제는 짐의 친우요. 걱정할 것 없소."
"폐하, 저는 작년 가을 극동을 순방해, 한국 황제와 우호적인 회담을 가졌습니다. 그와 함께 만주를 평화적으로 관리할 것을 약속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청국과 한국을 이용해 만주를 간접적으로 지배……."
비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르가 끊었다.
"러시아의 지배자는 경이 아니라 짐이오! 극동 정책을 관리해야 할 사람도 경이 아니라 짐이오! 한국 황제와 논의해야 할 사람도 경이 아니라 짐이란 말이오!"
"폐, 폐하……."
갑작스러운 차르의 역성에 비테는 당혹스러워했다. 늘 점잖고 수동적이던 차르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비테가 이선과 회담을 갖고 합의를 한 게 오히려 니콜라이의 감정을 건드렸다는 걸, 그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짐은 극동 정책의 신노선, 전환을 명하는 바이오."
"폐하!"
"재무대신, 더 이상 재론하지 마시오. 베조브라조프, 경에게 극동 시찰을 명하노라. 관동주 총독 알렉세예프와 함께 신노선 정책을 추진하도록."
"영명하십니다, 폐하! 폐하의 성단이 러시아의 밝은 미래를 보장할 것입니다!"
베조브라조프는 차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비테는 패배감을 느꼈다.
* * *
러시아의 ‘신항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라는, 역시 전통의 숙적 영국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러시아를 주적으로 상정한 영국은, 러시아의 팽창 정책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방해했다.
유라시아의 패권을 놓고 벌인 이 경쟁을, 영국은 거대한 게임(Great game)이라고 불렀다.
1853~56년의 크림전쟁처럼 영국이 러시아와 직접적 충돌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 간접적인 충돌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영국은 러시아의 팽창을 허용할 생각이 없었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대영제국, 수도 런던.
총리 아서 밸푸어는 ‘제국 방위 위원회(Committee of Imperial Defence, CID)’를 소집했다.
1902년 2차 보어전쟁 종전 이후 설립된 제국 방위 위원회는,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소규모 기구였다.
"신사 여러분. 주 러시아 공사관이 확보한 정보에 따르면, 러시아가 극동 정책을 전환하려고 한다는군요. 차르의 결단이라고 합니다."
밸푸어가 러시아의 신노선 정책에 대해 설명하자, 담배 연기 자욱하던 사무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럼 그렇지. 러시아가 점령지에서 순순히 철수할 리가 없지."
"청나라에 압력을 넣어야겠군요. 절대로 러시아의 요구에 응하지 말라고."
"독일의 건함정책도 골치 아픈데, 러시아가 또 귀찮게 하는군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좋은 기회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총리."
CID 사무국장 조지 클라크(George Clarke) 남작이 발언권을 얻었다. 육군 장교이자 식민지 행정가로서 ‘식민지 방위 위원회(Colonial Defence Committee, CDC)’의 위원을 역임한 클라크는 CID 창설 멤버였고, 강경한 제국주의자였다.
밸푸어와 클라크는 내각과 별개로 CID를 영국의 국가 안보를 논의하는 중요한 기구로 격상시키길 원했고, 러시아의 시도는 CID에게 좋은 명분이 되었다.
"보어전쟁 종결 이후, 정부는 군비 축소를 강요받고 있습니다. 야당인 자유당은 물론이고, 연립여당인 자유통일당 일각에서조차 군축에 동의합니다. 러시아의 위협은 군축을 저지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될 것입니다."
"동의합니다. 일단 여론을 조성해야겠군요. 마침 자유당이 좋아할 만한 인권 문제도 발생했으니, 러시아의 신노선에 대해 언론에 흘리도록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영국 언론은, 정부를 이끄는 엘리트보다 언제나 호전적이었다.
총리의 예상대로, 미끼를 문 황색 언론은 강경한 언사를 쏟아 냈다.
"러시아, 만주 점령 영구화! 만주를 투르키스탄처럼 식민화하려는 음모!"
"러시아를 저지하지 않으면, 만주를 넘어 몽골과 북중국까지 지배하려 들 것이고, 청나라를 멸망시킬지도 모른다!"
"남진을 향한 러시아의 야욕은 끝이 없다! 만주 다음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될 것이다!"
"러시아가 태평양을 지배하면 만족하겠는가? 아니다! 대영제국의 보석, 인도가 위태롭다!"
때마침 ‘야만적인 제국 러시아’의 이미지를 악화시킬 수 있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1903년 4월 하순, 러시아령 베사라비아(Basarabia, 몰도바) 키시네프(Kishinev)에서 반유대주의 폭동(Pogrom)이 발생했다.
유럽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러시아는, 민간의 반유대주의 감정이 심했다.
반정부 운동이 강해지면, 차르 정부는 은근히 유대인 음모론을 부추겼다. 특히 현 내무대신 플레베(Vyacheslav von Plehve)는 강경한 극우파이자 반유대주의자였다.
키시네프에서 우크라이나 소년 둘이 유괴되어 잔인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다.
「사악한 유대인이 그들의 유월절에 필요한 피를 얻기 위해, 정교회의 어린 양들을 야만스럽게 살해했다. 정교인들이여, 복수하라!」
「유대인은 기독교의 적, 악질 고리대금업자, 사회의 혼란을 부추기는 공산주의자다. 유대인에 맞서는 십자군을! 유대인에게 죽음을!」
범인이 유대인이라는 어떤 증거도 없었지만, 반유대주의 극우 언론은 음모론을 퍼뜨렸다.
대중은 격앙했고, 온갖 음모론이 퍼져 나갔다. 심지어 차르가 유대인 학살의 칙령을 내렸다는 소문도 돌았다.
정교회 부활절인 4월 19일부터, 야만적인 학살극이 벌어졌다. 3일 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경찰에 의해 폭동은 진압되었지만, 피해는 막심했다.
유대인 47명이 죽고, 600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700채의 가옥이 불타고 600개의 상점이 약탈당했다. 반유대주의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모든 러시아인이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다. 진보적인 러시아 지식인들은 폭동을 격렬히 비판했다.
세계의 유대인들은 크나큰 충격에 빠졌다.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과 함께, 이 사건은 유대인 독립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시오니즘(Zionism)을 확신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서방 언론은 재빠르게 취재에 나섰다.
특히 영국의 「타임스」는 가장 강경한 비판자였다. 타임스는 폭동의 배후에 러시아 내무대신 플레베가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어휴, 미개하다, 미개해. 20세기에 헛소문으로 유대인을 학살하다니, 나라 수준하고는."
"러시아 같은 야만적인 미개국이나 그렇지, 문명화된 유럽에선 있을 수가 없는 일이오."
"옳소! 야만국 러시아를 규탄한다!"
러시아 정부는 폭동 주모자들을 체포하여 처벌했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서방 여론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영국에는 일시적으로 반러시아 여론이 확산되었다.
"총리,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해야 한다는 방향은 공감합니다만, 러시아의 신노선이 반드시 만주를 점령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만주는 러시아의 세력권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중국 시장이 우리에게 중요하긴 하지만, 러시아가 우리의 권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만주에서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지 않습니까?"
"극동에서 러시아가 뭘 하든, 보다 중요한 건 인도의 방위지요."
"점증하는 독일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극동 문제는 관심을 접어 두어야 합니다."
밸푸어 내각은 보수당과 아일랜드 자치권 문제로 자유당에서 분열한 자유통일당(Liberal Unionist)의 연립내각이었다. 통일자유당 각료들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자, 밸푸어가 답했다.
"물론입니다. 제국에겐 인도의 방위가 최우선입니다. 만주와 극동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바로 그렇기에 러시아의 극동 정책을 저지해야 합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는 러시아와 지난 세기부터 거대한 게임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발칸, 터키, 인도,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오늘날 만주에 이르기까지."
밸푸어는 내각 회의실에 걸린 거대한 세계지도를 가리켰다.
"근래 달라이 라마의 사절이 러시아를 방문했고, 그 답례로 러시아는 외교관을 티베트에 파견했습니다. 티베트는 인도의 지척입니다. 러시아가 티베트에 무슨 목적으로 외교관을 보냈는지는 모르겠으나, 절대로 용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1901년 달라이 라마 13세가 보낸 특사에 대한 답례로, 얼마 전 러시아는 티베트에 외교관을 파견했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가 부탁한 정식 외교 관계 수립과 군사고문관 파견은 거절했다.
다분히 영국의 눈치를 본 결정이었지만, 영국은 이조차도 의심하고 있었다.
"달라이 라마가 우리의 우호적인 조언을 거부하고 계속 러시아에 밀착하려 한다면, 인도군은 라싸로 진격하여 티베트를 굴복시킬 것입니다."
순간 자유통일당 각료들이 술렁였다.
"하지만 제국은 불과 작년에 보어전쟁을 끝냈고, 그 피해가 만만치 않습니다. 아시아에서 새로운 전선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노동계급의 빈곤과 실업률이 높습니다. 자유당은 물론이고, 우리 자유통일당도 내년도 예산안은 군축과 복지 증대가 옳다고 봅니다."
"좋은 지적입니다. 그러니 새로운 정책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반대를 예상하고 있던 밸푸어는, CID와 논의한 사항을 제안했다.
"러시아를 극동의 진흙탕에 빠트려야 합니다. 교착상태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좋습니다. 러시아의 위협이 동아시아에 집중된다면, 터키와 페르시아, 티베트와 인도를 향한 위협은 줄어들어겠지요. 영국은 보다 중요한 지역에서 러시아를 더 손쉽게 상대할 수 있습니다."
"과연……."
"하지만 어떻게 말입니까?"
"영국은 적국에 맞서 언제나 이익을 제공할 충성스러운 대리인을 찾았습니다. 마침 적당한 대리인 후보가 있지 않습니까?"
밸푸어는 지도의 동쪽 끝을 가리켰다.
"바로 일본입니다."
"아니, 어떻게 대영제국이 2류 동양 국가 일본 따위와……!"
"신사 여러분, 물론 일본 따위는 대영제국의 대등한 동맹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충실한 헌병이 되어 줄 수는 있습니다. 일본은 건함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데, 모두 대영제국의 조선소에서 건조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기특한 손님입니까? 비용 문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본인의 피와 돈으로, 러시아를 견제하게 합시다."
"일리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샤먼 출병과 하이난 점령에서 알 수 있듯이, 해양 패권을 도모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일본의 복건 진출을 저지시켰는데……."
"그러니 우리가 그들을 바른 방향으로 계도해 줘야지요. 우리의 충실한 극동 헌병이 될 수 있도록."
보수당 소속 각료와 자유통일당 각료의 의견이 갈렸다.
"대영제국의 원칙은 영광스러운 고립이었습니다. 러시아의 위협은 과장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괜히 일본을 내세웠다가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그렇습니다. 당면한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면 분쟁에 끼어들지 말고, 군축을 해야 합니다. 위기가 발생하면 군축도 어렵지요."
"신사 여러분, 오, 신사 여러분!"
밸푸어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극적인 어조로 말했다.
"영국만을 보지 말고, 세계를 보십시오. 왼쪽에는 평등을 내세워 세상을 뒤엎으려는 폭도들이, 오른쪽에는 전제를 내세워 인간의 자유를 짓밟는 독재정이 있습니다. 문명의 세례조차 받지 못한 야만인들은 논할 가치도 없지요. 우리, 대영제국은 자유와 이성을 지키는 문명의 등대입니다. 우리의 위대한 조상들은 프랑스 폭도들과 나폴레옹을 무찔렀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려는 차르를 격퇴시켰습니다. 자유무역을 거부하는 야만적인 중국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감히 영국의 지배에 반기를 든 인도인들과 아프리카인들을 제국의 품으로 되돌렸습니다!"
영국 제국주의의 피해자들이 들으면 황당할 따름이겠지만, 영국 보수주의자는 당당했다.
"군축은 우리의 의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강력한 함대가 필요합니다. 러시아 차리즘은 물론 과거의 유산입니다. 앞으로는 독일의 카이저가 새로운 적이 되겠지요. 하지만 힘으로 차르를 굴복시켜야, 카이저도 함부로 나대지 못할 것입니다."
"옳소!"
"신사 여러분, 신이 영국인에게 부여한 신성한 문명의 의무를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폭도, 전제, 야만으로부터 문명 세계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Rule, Britannia! Britannia rule the waves! ?The Britons never will be slaves! (지배하라, 브라타니아여! 파도를 지배하라! 영국인은 결코 노예로 살지 않으리라!)"
보수당 각료들이 영국의 비공식 국가, ‘Rule Britannia’를 불렀다.
내각은 만장일치로 대외방침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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