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325화 (324/812)

6화 역사의 역설

일본 총리, 사이온지는 원로 이토의 방문을 받아 조언을 들었다.

그날 밤, 사이온지는 실질적으로 정우회의 당무를 맡고 있는 간사장 하라 다카시(原 敬)에게 본심을 말했다.

"이토 후작이 춘산장 영감(야마가타)의 행보에 대해 전했네. 물론 날뛰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지. 그 영감의 방식은 너무 낡았어."

"그렇습니다. 야마가타 원수의 태도는 기껏 싹을 튼 일본의 의회정치를 무력화할 수 있습니다."

하라는 확고한 문민통제와 헌정의 지지자였으므로, 야마가타와는 상극이라 할 수 있었다.

"이토 후작도 마찬가지. 내각의 위에서 계속 군림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도 않네. 물론 노인네의 지혜는 필요하지. 하지만 원로의 역할은 자문역으로 충분하네. 국정을 맡는 건 내각의 역할이야."

사이온지는 원로에게 좌지우지되지 않는 내각을 원했다.

헤이안 시대로부터 유래하는 명문 청화가(清華家) 출신 세습귀족임에도, 1871년에 프랑스 유학을 가 일찌감치 서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사이온지는 ‘자유주의자(liberal)’를 자처했고, 중의원에서의 다수파 정당이 내각을 조직하는 헌정 체제를 상도로 여겼다.

메이지 헌법을 기초한 이토와 손을 잡아 그 후계자로 지목됐지만, 그를 극복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십니까?"

"하라 군, 자네는 한국 공사를 역임하며 한국 황제를 직접 관찰하지 않았나. 어떤 사람인가?"

하라는 1896년부터 1898년까지 주한 일본 공사였다. 이선이 즉위하고 대한제국이 선포된 전환기였다.

"영명한 군주입니다. 계몽군주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지요. 최소한 육군 호전광들의 주장대로 러시아의 앞잡이는 아닙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만주 진출에 보조를 맞추고 있는 건 사실이지."

"황제에게 있어 제1의 원칙은 한국의 독립이니까요. 러시아가 한국 독립에 도움이 되니까 손을 잡고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황제는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침해할 거라 생각하나? 황국이 청국으로부터의 자주독립에 힘을 보탰는데도?"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황제의 조부이자 후견인이었던 대원군의 입장을 존중해서 그런 입장을 취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원군은 유명한 반일주의자니까요. 실제로 대원군이 죽은 메이지 31년(1898) 이후 반일적인 입장은 안 보이지 않습니까?"

"나도 그 말을 믿고 싶군."

사이온지는 마침내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는 이토 후작이 추진하는 러시아와의 협상은 반대하네. 러시아는 영토가 넓고 군사력이 강하다지만 정치적으론 후진국, 시대착오적인 전제군주정이야. 이토 후작은 러시아를 너무 두려워하고 있어. 무엇보다 러시아와의 협상은 영국의 우려를 살 텐데."

"이토 후작은 러시아와 일본의 연합으로, 북방의 위협 없는 남방진출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만……."

"아니, 그건 도둑이 무섭다고 손을 잡자는 것과 뭐가 다른가. 자네, 한국이 러시아의 괴뢰라고 생각하나?"

"제 생각이라면, 물론 아닙니다."

"이토 후작이나 야마가타 백작이나 마찬가지로 간과하고 있는데, 한국이 러시아의 종속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야. 그러니까 러시아와 한국이 동일한 정책을 펼칠 거라는 전제하에 판을 짜네. 물론 지금까지 한국은 러시아의 영향력하에서 계속 이득만 보고, 일본은 따돌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하지만 앞으로는 어떨까?"

사이온지가 지도의 만주와 한반도를 가리켰다.

"황국이 한반도를 안보에 필수불가결한 요지이자 이익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한국도 남만주를 똑같이 생각하겠지. 그런데 러시아는 만주 전체를 독점하려고 있어. 한국 황제는 이 상황을 어찌 생각할까? 그가 진짜 러시아의 앞잡이가 아니라 한국의 국익을 고려한다면, 러시아를 만주에서 몰아내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까?"

"각하, 그렇다면 메이지 27년(1894)에 청국에 맞서 일본과 조선이 동맹을 맺었듯이, 러시아에 맞서는 동맹을 희망하시는 겁니까?"

"바로 그 걸세. 선례가 있는데, 안될 것도 없지."

사이온지는 북수남진의 틀을 지키는 선에서, 러시아를 고립시키길 원했다.

"고무라와 하야시가 영국과의 동맹을 추진하고 있네. 영국도 반응이 좋아. 서양과 동양에서, 입헌군주정과 해양국을 대표하는 두 섬나라가 힘을 합치는 게 옳다고 생각하네. 차리즘과의 타협이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 주영 공사 하야시 다다스(林 董) 모두 강력한 친영·반러론자였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도 미친 짓이야. 나는 그런 모험은 하고 싶지 않아. 일영동맹은 황국의 안보를 보장하겠지만, 러시아의 불신을 사겠지. 그렇다면 한국이 러시아의 그늘 아래 있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든가, 최소한 우호적 중립은 지키게 만들어야 하네."

‘자유주의자’ 사이온지는 원로를 따돌리고 독자적인 외교를 하길 원했다. 이토가 추진하는 러시아와의 협상, 야마가타가 추진하는 북진정책도 모두 따를 생각이 없었다.

"각하의 말씀, 잘 알겠습니다. 한국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겠군요."

"음, 황제는 잘 모르겠지만, 외무대신 김옥균은 내가 잘 아는 사람이네. 내가 메이지 21년(1888)에 공사를 지낼 때, 김옥균도 파리에 있었지. 여러모로 배포가 크고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람이네. 주일 공사 시절에도 아주 인기가 많은 사람이었지."

김옥균은 일본 정계에서 평판이 좋았다. 특히 사이온지와는 프랑스 공사 시절의 특별한 친분이 있었다.

"확실히 김옥균은 일본에 대해서도 우호적입니다. 황제와는 오래전부터 동료였고, 한국 정부 내에서도 영향력이 크고, 사실상 한국의 2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라 군, 자네는 황제와도 안면이 있고, 한국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김옥균은 황제의 최측근, 그를 설득해 보면 길이 열리지 않겠나? 나는 자네를 다시 주한 공사로 보내고 싶네만."

정우회를 정치인의 연합체가 아닌 진정한 정당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노력하던 하라였지만, 총리의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각하, 불초 다카시에게 이런 중책을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으로 가겠습니다."

"일만 잘 해결된다면, 차기 내무대신으로 자네를 지명하겠네. 야마가타 앞잡이는 각의에서 별로 보고 싶지 않아. 한국과의 동맹이 성사된다면, 가쓰라도 북진해야 한다고 더 이상 시끄럽게 못 하겠지."

내각의 2인자인 내무대신 가쓰라는 야마가타와 조슈, 육군을 대변하고 있었고, 사이온지에게 있어 반대파의 온상이나 다름없었다. 정치적 필요성을 위해서라도, 북진론은 꺾어야 했다.

"진정한 헌정과 문민통제를 위해서라면, 궁극적으로 사쓰마와 해군도 제압해야겠지만, 먼저 조슈와 육군의 기세를 꺾을 필요가 있습니다."

"좋아. 대한(對韓) 공작에 필요한 건 뭐든지 다 해 보게."

"예, 각하!"

* * *

이선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역사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외무대신 겸 제국익문사 독리 김옥균은 정기보고를 위해 석조전을 찾았다.

"폐하, 주일공사관으로부터의 전문을 아룁니다."

"음. 하라가 주한 공사로 다시 부임한다고? 나쁘지 않은 소식이군."

"그렇습니다. 하라는 한국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인물이니까요."

"흠, 정세 보고서에 따르면 중의원에서 임시 증세가 부결되니 내무대신 가쓰라가 중의원 해산을 요구했으나, 총리 사이온지는 거부. 좋아, 사이온지가 생각보다 군부를 잘 다루는군."

"아무래도 이토의 후계자가 아니겠습니까."

"익문사에 온 보고는 없소?"

"일본통신원으로부터의 보고가 있습니다."

이선은 김옥균으로부터 익문사 보고문을 건네받아 화학비사법으로 해독했다.

"이토는 러일협상을 추진. 그에 맞서서 야마가타는 육군에 파벌을 형성해 북진론 여론을 조성."

"그렇습니까, 폐하?"

김옥균도 외무부 보고문은 먼저 읽어도, 제국익문사 보고문은 황제보다 먼저 읽을 수가 없었다.

"말이 좋아 북진론이지, 정한론이랑 다를 바가 뭔가?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군."

‘흥, 실제 역사의 대한제국이라면 모를까, 일본이 침략해 온다면 최소 동귀어진은 할 준비가 되어있다. 물론 가장 좋은 건 외교로 전쟁을 피하는 거지만…….’ 이선은 전쟁을 반대했지만, 침략에 대한 대비는 늘 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정세는 현재 이토가 훨씬 유리한 상황이지. 일본 정계의 대부분은 북수남진 해주육종을 외치고 있지 않나. 야마가타가 이제 와서 뒤집을 수야 없을걸. 사이온지도 사실상 이토의 영향권 하에 있는데."

"폐하의 분석은 지당하십니다만, 신은 사이온지 총리에 대해선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호오, 하긴 경은 사이온지와 친분이 있었지. 그래, 어찌 생각하오?"

"하문(下問)에 감히 답하자 오면……."

김옥균은 순간 긴장하여 침을 삼켰다.

과연 이걸 황제에게 보고해야 할지, 한다면 의심을 받지는 않을지, 고민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결심한 바를 말했다.

"사이온지 총리가 신에게 사신(私信)을 보내왔습니다. 폐하께 삼가 바칩니다."

이선은 김옥균에게 보낸 사이온지의 서한을 읽었다. 그는 일본어 회화는 유창하지 않지만, 독해는 가능했다.

도암(陶庵, 사이온지의 아호)이 오랜 친우 고균에게 안부를 묻습니다.

파리와 도쿄에서 만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우리 두 사람 모두 각자의 군주께 충성을 바치고 국정에 매진하다 보니 머리가 희게 변했습니다. 흘러가는 세월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 근간의 동양 정세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의화단 전쟁을 보면 청국의 몰락이 이보다 더 극적일 수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 일본도 연합군의 일원으로 함께 북경을 점령했습니다. 일본인으로서 국익을 추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나, 동양인의 한 사람으로서는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서세동점의 미명 아래 서양은 동양을 짓밟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건, 만주를 강점한 러시아입니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고도, 만족을 모릅니다. 그 음험한 속내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의문입니다. 귀국은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니, 더욱 고민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시아는 아시아인의 것이어야 합니다. 오직 일본과 한국만이, 문명화에 성공하여 자주독립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 두 나라는 아시아의 등불입니다.

생각건대, 두 나라는 청국에 맞서 함께 싸웠습니다. 청국이 존망(存亡)의 위기에 몰린 지금, 서양의 침략으로부터 동양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균은 예전부터 흥아론(興亞論)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아시아의 부흥을 위하여, 한국에서 흥아론의 기치를 높이 들어주시리라 믿습니다.

…… 귀국과 동양을 위하여 부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하라 공사의 인편으로 선물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공식적인 서한은 아니었지만, 총리가 타국 외무대신에게 보내는 것이니 무시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짐의 생각보다 사이온지와 친분이 더 깊구려. 종종 이렇게 서한을 주고받소?"

"파리에서 동양인이 드물고, 사이온지 후작은 일본인답지 않게 사상이 자유로워서, 자연스럽게 의기투합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자유와 평등을 각자 고국에 전파하자고 했었지요. 후작이 작년에 총리로 취임하게 되어 축전을 보내고 답장을 받은 바 있습니다. 의례적인 덕담이었지요. 하지만 이런 정치적 서한을 보낸 건 처음입니다."

"그렇소? 그럼 사이온지가 이 서한을 보낸 목적이 뭐라 생각하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김옥균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본 정부가 대한국과 동맹을 맺길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비공식적인 타진이라고 봐야 합니다."

"러시아에 맞서서 말이지."

"그렇습니다. 물론, 러시아는 대한의 우방이고, 성상께서는 러시아 황제 폐하와 오랜 친분을 지닌 친우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오나……"

"고균, 짐이 러시아 황제와의 친분만으로 외교를 하리라 생각하오?"

이선의 물음에 김옥균이 정색했다.

"물론 아닙니다. 대한에 러시아가 가장 큰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소. 러시아가 착한 나라고, 일본이 나쁜 나라여서가 아니오. 둘 다 제국주의 열강이지. 하지만 입장이 다르오. 러시아에 있어 대한은 우호적인 국가로 충분하지만, 일본에 있어 대한은 반드시 영향력에 두어야 할 나라거든. 둘이 가하는 외압(外押)의 강도는 다를 수밖에 없소."

이선은 언제나 일본을 경계했다. 실제 역사의 전개를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역사가 바뀐 후에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건 선악의 문제가 아니오. 러시아가 폴란드와 핀란드를 반드시 영향권 하에 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일본도 한국과 대만은 자신들의 영향권에 둬야 한다고 생각할 거요. 그러니 짐은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할 수밖에 없소."

"폐하의 분석은 지당하십니다. 하오나 신은, 일본을 그렇게 불신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는 분명히 폴란드와 핀란드를 압제하고 있습니다만, 일본은 대한을 압제하고 있사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은 청국과의 전쟁에서 함께 싸운 나라입니다. 그 목적은 물론 일본의 이익을 위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대한의 자주독립을 도왔습니다."

김옥균은 고개를 깊게 숙이더니, 마침내 자신의 흉중(胸中)을 드러냈다.

"이는 비단 신의 생각만이 아닙니다. 각료의 상당수, 의회 의원들, 개화당 동지들, 재야의 지식인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역설이군.’ 역설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선이 임오군란 이후 역사를 바꾸고 주체적 근대화를 추진했기에 발생한 역설이었다.

실제 역사와 달리, 일본은 제물포 조약과 한성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고, 갑신정변을 조종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전쟁을 도발해 군대를 보내지도 않았다.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고, 왕을 포로로 잡지도 않았다. 개혁을 강요하지 않았고, 강제로 머리를 깎지 않았다. 왕비를 시해하지도 않았고, 농민군을 학살하지도 않았다. 조선의 주권을 빼앗지도 않았고, 정복하지도 않았다.

바로 이선이 역사를 바꾸고 주체적인 근대화를 이뤄 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 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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